남한강 옥석입니다. 비취색의 매끈한 돌갗 속에서 파임의 변화가 예쁩니다.
삶은 마치 조용한 호수처럼 잔잔하다가도, 갑작스레 일렁이는 물결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삶은 마치 시험지 같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도 저에게 시험지이자 답안지이고, 때로는 감독관이기도 합니다.
매일 새로운 지문이 펼쳐지고, 문장 사이사이에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빼곡히 박혀 있습니다.
나는 그 기호들을 정렬하며 문제를 풀어갑니다.
환자의 사각거리는 증상의 연필 소리는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희미합니다.
소리가 주변의 소음과 섞일 때,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잠시 멈춥니다.
매일 펼쳐지는 문제들은 단순한 병증의 질문을 넘어섭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오고, 저는 그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내 손은 시험지를 더듬고, 눈은 문제를 훑습니다.
무엇이 답인지 가늠해 봅니다.
환자의 눈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늘 나를 재촉합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머뭇거리며 손을 들어 감독관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마치 그 질문이 시간을 벌어줄 것처럼 착각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답은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바늘과 주사기로 답을 써 내려가지만, 실수가 없는 답안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서각하듯 시간을 쳐내며 답을 적어 내려갑니다.
하지만 잘못된 답을 수정할 여유는 없습니다.
채점 시간은 빛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오답은 벌써 내 앞에 도장을 찍습니다.
고칠 틈조차 없습니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환자의 걸음, 이야기, 그리고 눈빛 속에서 새로운 물음표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날은 그 물음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성취감을 느끼지만, 또 어떤 날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뒤척이는 밤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루의 시험은 끝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란스럽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를 되짚어 봅니다.
정답과 오답, 틀린 곳과 맞춘 곳, 모든 순간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시험지는 이미 채점되었고, 나는 더 이상 그 위에 무엇을 쓸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시험지는 나였고, 감독관도 나였습니다.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는 기준조차 내가 만든 것 아닐까?
그동안 나는 내 삶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감독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들어 병원은 조금 조용해졌습니다.
대기실의 빈자리가 더 눈에 띄고, 한때 활기찼던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환자들이 줄어든 이유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일까, 그냥 일시적인 걸까, 아니면 제 안에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저도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복잡합니다.
경제와 사회의 불안정 속에서 환자들의 발길이 뜸해진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다른 생각도 자리합니다.
내가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나의 지식과 기술이 시대에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환자와의 관계나 소통에서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환자들이 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옵니다.
요즘은 대화 자체가 줄어든 것 같습니다.
환자들이 적어지니, 그들의 이야기도 덜 듣게 됩니다.
마치 시험지 자체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병원 운영 때문일 수도 있고, 저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혹은 단순히 세상의 흐름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시간이 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듭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저는 좌대 작업을 합니다.
나무를 깎고 다듬는 일은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나와 시간을 쪼개 좌대를 만듭니다.
손에 잡히는 나무의 감촉, 칼끝이 나무를 미는 소리, 그리고 작은 결들이 모여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묵묵히 제 하루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좌대를 만드는 일이 단순한 취미로 보일까 두렵기도 합니다.
병원이 한가하니 나무나 만지고 있다는 생각을 직원들이 하지는 않을까, 스스로도 가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제 손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무를 깎는 동안은 잠시라도 다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좌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이 곧 병원의 조용함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좌대 작업은 시간의 흔적을 담아냅니다.
매끄럽게 완성된 좌대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선을 다시 깎아내고, 뒤틀린 결을 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만들어집니다.
가끔은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깎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좌대는 제 손에서 태어나지만, 그 과정에서 저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결이 어긋날 때, 저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삶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삶은 나무와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형화된 형태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이 드러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그 결을 억지로 펴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다듬어진다고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좌대 작업을 하며 생각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결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요.
좌대가 완성될 때, 저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묘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병원에서 마주하는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늘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병원의 고요, 환자와의 관계, 좌대 작업까지, 모든 것이 저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좌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저는 모든 결을 매끄럽게 다듬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완벽한 결이 아니라, 그 나무가 가진 고유한 결을 따라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또한 완전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아직 과정일 뿐입니다.
환자들과의 관계도, 병원의 상황도, 그리고 제 내면의 무게도 모두 하나의 과정일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 질문을 떠안고 가는 것 자체가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병원의 하루가 끝난 뒤, 좌대 작업을 마친 뒤, 저는 제 삶의 시험지를 다시 바라봅니다.
모든 질문에 답을 쓰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험지 위에 쉼표를 남겨두는 일은 답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호흡을 맞추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삶은 여전히 시험지 같지만, 그 시험지가 저를 재촉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저 자신을 잠시 멈추고, 그 질문을 곁에 두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삶은 시험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좌대 작업처럼, 때로는 모양이 흐트러지고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과정이 곧 우리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좌대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병원 한 구석에 쌓여 있는 좌대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이 좌대들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제가 지나온 시간과 고민이 고스란히 새겨진 흔적들입니다.
언젠가 이 좌대 위에 제가 찾던 무언가를 올려놓을 날이 오겠지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내일이 노는 날인데도 마음은 무겁습니다.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있을 시간, 저는 조용히 제 삶의 좌대 위에서 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제 마음의 물음을 묵묵히 품고 하루를 마무리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