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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이 가정교회의 목장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1. 서론
1) 문제 제기 및 목적
요한계시록은 교회론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말한다. 이러한 교회론적 개념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라는 현장에서 구현될 것을 의도한다. 요한계시록을 최초로 읽었던 일곱 교회 공동체에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 과연 구현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역사적 고증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 적이 있는가? 혹은 오늘날 그러한 모습들이 날 수 있을까? 아마도 교회 역사를 통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고민을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필자는 최근 가정교회의 목장의 현장에서 바로 요한계시록의 역동적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요한계시록이 교회론이 가정 교회 목장의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다.
2) 방법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로 가정 교회의 목장의 현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주제를 서로 비교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목장이 현재 요한계시록의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실재화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소개하는데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천상에 존재하여 이미 승리를 체험하는 공동체라는 것이요 두 번째는 지상에서 세상에서 전투하며 변혁시키는 공동체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족 공동체라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4장의 24장로와 7:9-17의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7:1-8의 144,000도 포함)를 중심으로 하고 두 번째는 11장의 두 증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세 번째는 19:7-10과 21:1-5 그리고 21:9-10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들을 중심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가정 교회 사역원에 의하면 목장 자체를 가정 교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가정교회 사역원에서 추구하는 ‘가정교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가정집에서, 6-12 명이 매주 한 번 이상씩 모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을 다하는 공동체”; (1)평신도가 목양을 한다-이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데 매우 중요; (2)가정집에서 모인다; (3)6-12명으로 구성; (4)정기적으로 매주 한 번 이상 모인다; (5)예배, 교육, 교제, 전도, 선교 등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다한다.1)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목장을 가정교회라고 호칭하는 것을 피하고 그냥 목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 연구의 한계
본 연구에서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이 중심이기 때문에 많은 지면을 이 주제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 주제와 연동되는 목장에 대한 학문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2019년 2월에 휴스턴 서울 교회에서 개회한 목회자 연수와 세미나에서 들은 강의와 직접 목자와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목장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목장에 대해 정리한 자료를 기초로 전개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좀 더 충분하게 연구가 진행될 것을 기약한다.
2. 본론(1) :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어떻게 말하는가?
1) 천상적 공동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가 하늘을 경험하다.
이 주제를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천상적 공동체로서 소개하는 본문과 주제는 4:4의 24장로와 7:9-17과 14:1의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있다.
(1) 24장로(4:4)
(ㄱ) 문맥
4:4의 24장로는 4:1-3에서 소개되는 ‘열린 하늘’과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주제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먼저 4:1에서 ‘하늘이 열려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승천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막혀 있던 하늘과 땅이 서로 통일되게 되었다는 신약적 정황을 반영한다(참조 엡2:5-6).2) 여기에 덧붙여서 하늘은 보좌와 그 보좌에 앉아 있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늘은 하나님의 통치가 발현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4 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미 하늘에서 충분히 인식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땅에서 압도적으로 임할 참 실체로서 확됩된다.3)
하나님은 현재 하늘에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서 땅에서는 천사적 중개자들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4)
그러나 이러한 현재적 의미에 반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Walvoord 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24 장로가 지상에서 휴거하여 하늘에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5) Walvoord 는 이러한 과정을 “the church age first, then the rapture, then the church in heaven” 이라는 문구로 표현한다.6) 이것은 2-3 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기록을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포함하는 교회 시대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곧 4 장의 24 장로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의 천상적 존재는 2-3 장에서 말하는 교회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께서 재림의 시점에서 휴거의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이다.7) 이 경우에 4 장에서의 교회 공동체의 천상적 존재는 현재적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상태로 간주하게 된다.
(ㄴ) 24장로의 의미는 무엇인가?
24장로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R.H. Charles: “신실한 자들 전체의 천상적 대표자들”8); H. B. Swete: “전체로서의 교회”9); J. P. M. Sweet:”구약의 유력자들”10); R. H. Mounce: “승귀된 천사의 무리”11); I. T. Beckwith:”천사적 왕들”12); M. E. Boring: “땅에 있는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13); L. Hurtado: “택함 받은 자들을 대표하는 자들”14); H. Hoeksema: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15). 이러한 견해들에서 “신실한 자들 전체의 천상적 대표자들” (R. H. Charles)와 “전체로서의 교회”(H. B. Swete) 그리고 “땅에 있는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M. E. Boring) 그리고 “택함 받은 자들을 대표하는 자들”(L. Hurtado)은 모두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서 다수를 차지한다. 곧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24장로는 지상의 모든 교회에 대한 천상적 대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24장로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24라는 숫자와 함께 24보좌들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먼저 24라는 숫자는 12+12라는 숫자의 조합이다. 12라는 숫자는 구약의 열 두 지파와 신약의 열 두 사도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라는 공감대가 성경 내에 존재한다. 바로 두 개의 12로 구성된 24장로는 약속으로서 열 두 지파 위에 구성된 구약의 백성과 그 성취로서 열 두 사도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16)
(2) 144,000(7:1-8)과 셀 수 없는 큰 무리(7:9-17)
(ㄱ) 문맥
7장은 6:12-17에서 소개하는 여섯 번째 인 심판과 8:1에서 언급되는 일곱 번째 인 심판 사이에 삽입된 내용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에 대한 입장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주제에 벗어나기 때문에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5장에서 책의 인을 떼는 주체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소개 되고 그 어린양이 6장부터 책의 인을 떼기 시작하게 되므로 책의 인을 떼는 결정적 계기는 어린양의 십자가 죽음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인(印) 심판의 시작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을 예수님의 초림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므로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印) 심판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종말적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건 사이를 심판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심판의 시대에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를 규명하려는 것이 바로 7장의 의도이다.
(ㄴ) 144,000(7:1-8)
(a) 완전한 수로서 하나님의 백성
7:1-8의 144,000과 9-17절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모두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 전자는 12*12*1000으로서 두 개의 12의 사용을 통해 24장로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1000이라는 숫자는 영원성과 완전성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의 숫자의 조합으로서 144,000은 바로 영원하고 완전한 숫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를 갖는다. 1000이라는 숫자는 동시에 십부장, 백부장 그리고 천부장이라는 군대조직의 단위에서도 보여 주듯이 군대조직의 단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에 144,000은 지상에서 전투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를 갖는다.
(b) 구약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다(5-8절).
144,000은 5-8절에 의하면 구약 민수기 1장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수를 세는 내용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구성에 있어서 각 지파마다 12000명씩 할당된다. 이러한 할당은 민 1장의 숫자를 144,000을 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다. 특별히 5-8절에서 열 두 지파의 목록의 대표적 특징은 메시야의 뿌리인 ‘유다지파’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144,000이 메시아적 공통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 하늘에서 어린양과 함께 서있는 144,000(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14:1에 다시 한 번 144,000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144,000의 존재는 천상적이다.17) 왜냐하면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하늘의 성전에 죽어 있는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디든지 어린양이 등장하는 곳은 언제나 천상적 상황을 상정하게 된다. 이러한 어린양과 144,000이 함께 서 있다. 여기에서 144,000은 7:1-8의 144,000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다. 첫째로 7:1-8의 144,000 경우에는 지상에서 전투하는 특징을 갖는 반면 14:1의 144,000은 하늘에서 승리한 모습이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았다면 후자의 경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한다. 좀 더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7장과 14장은 서로 시간적 관계로 볼 수 없다. 다만 문맥에 의해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14장의 경우에 13장에서 짐승의 포악함에 의해 핍박받는 성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13:7-10) 14장은 그러한 짐승의 핍박의 현실에 대응하여 성도의 현재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14:1의 144,000은 성도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이다.
(d) 정리: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수로서 지상에서 전투하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ㄴ)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9-17절)
(a) 문맥 관찰
9절은 ‘이 일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후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구는 1-8절과 9-17절을 시간적 관계로 특징짓고 있지 않고 단지 환상의 순서로서 논리적 관계로 규정한다.18) 곧 1-8절과 9-17절은 장면이 바뀌었을 뿐이다.
(b)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는 누구인가?
‘아무도 셀 수 없다’는 문구는 창 13:16과 15:5 그리고 22:17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배경으로 한다.19)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위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특징으로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그리고 ‘땅의 티끌처럼’이라는 표현들이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들의 공통점은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이 문제는 바울의 신학적 사고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이에 대한 바울의 고민은 갈 3장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갈 3:7, 9, 29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4)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위의 본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창 13:16; 15:5; 22:17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배경으로 하여 신약에서 갈 3:7, 9, 29에서 그 아브라함의 자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신약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약속으로서 이스라엘을 성취하는 신약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그러하다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144,000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다만 둘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음 항목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 천상적이며 승리한 공동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구성된 자들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특징은 교회 공동체의 보편적 특징을 부여한다. 여기에서 나라, 족속, 백성 그리고 방언은 모두 동일한 의미로서 네 번 반복하는데 이러한 네 번의 반복은 우주적 의미를 내포한다. 한 민족에 국한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었던 구약과는 달리 이제 종말적 성취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다고 한다(9절). 여기에서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은 4-5장에서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 큰 무리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는 천상적 공동체이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그들의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있다. 당시에 ‘종려 가지’는 승리의 의미를 갖는다.20) 특별히 마카비 1서 10:7과 13:51에서 종려가지는 “전쟁 후에 승리와 기쁨의 상징”으로서 사용된다.21)
(d) 정리
이상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배경으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성취하는 신약의 교회 공동체로서 승리한 천상적 공동체의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특징은 동일하게 교회공동체를 의미하되 땅에서 전투하는 특징을 갖는 144,000과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2) 증거 하는 공동체: 증거를 통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는 공동체(두 증인)(11:3-13)
(1) 문맥
두 증인을 소개하는 11:3-13의 본문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인 심판 사이에 삽입된 7장의 경우처럼 다음과 같이 세 개의 문맥 본문을 가지고 있다. 이 문맥을 잘 살펴 볼 때 이 본문에 대한 의미와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ㄱ) 여섯 번째 나팔 심판(9:20-21)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위 본문은 9:12부터 시작되는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마지막 마무리 부분이다. 여기에서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결론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들을 회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회개가 아니므로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도리에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준다.
(ㄴ) 일곱 번째 나팔 심판(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위의 11:15은 9:20-21의 여섯 번째 나팔 심판에 이은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을 기록한다. 이 심판의 결과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이 세세토록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결과와 극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두 증인 이야기를 읽는 관전 포인트는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다.
(2) 두 증인 이야기(11:3-13)
(ㄱ) 두 증인의 특징
(a) 두 촛대
먼저 두 증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실마리는 이 두 증인을 ‘두 촛대’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20에서 일곱 촛대를 일곱 교회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에 의해 촛대는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촛대로 표현된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22) 다만 1:20의 일곱 촛대가 11:3에서 두 촛대로 변환된다.23) 이러한 변환은 두 증인의 ‘둘’이라는 숫자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여기에서 ‘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증거가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로 사용된다(신 19:15; 참조 민 35:30; 신 17:6; 19:15).24 그러므로 이러한 ‘둘’이라는 숫자는 ‘증인’의 단어와 적절한 조합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뚜 증인은 증거하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굵은 베옷을 입다(3절)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다. 이 굵은 베옷은 “슬픔과 회개”의 목적으로 입는 복장이다(창 37:34; 삼하 3:31; 왕하 21:27; 대상 21:16; 느 9:1; 렘 4:8; 마 11:21).25) 이러한 복장은 두 증인으로서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증인이 감당해야 하는 예언의 사역의 본질은 바로 세상을 향한 회개의 회침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두 증인 이야기가 여섯 번째 나팔 심판과 일곱 번째 심판 사이에 삽입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두 증인의 사역이 심판의 선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26)
⒞ 천이백 육십 일 동안 예언하다(3절)
천이백 육십 일은 11:2의 마흔 두 달과 동일한 기간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예언의 사역은 10:11에서 요한에게 위임된 예언의 사역과 동일하다. 이러한 일치는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이 10:8-11에서 요한의 선지적 사역을 계승하고 11:1-2에서 성전의 이중적 특징을 공유하며 두 증인의 선지적 사역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흔 두 달 동안 성전 밖 마당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필연적으로 세상에 의한 핍박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7) 마흔 두 달과 동일한 기간과 동일한 천이백 육십 일 동안 예언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두 증인에 의해 상징하는 교회 공동체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예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의 과정에서 핍박과 고난은 필연적이다.
(d) 두 감람나무(4절)
두 증인은 또한 기름부음 받은 두 감람나무로서 묘사된다. 이 두 감람나무라는 주제의 구약배경은 슥 4:2-3, 11-14로서 기름 부음 받은 왕인 스룹바벨과 역시 기름부음 받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키고 있다.28) 이러한 두 인물의 특징을 두 증인이 상징하는 교회 공동체에게 적용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왕적이며 제사장적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는 고난 중에 있지만 왕적이며 제사장적 지위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증거와 예언의 사역을 감당한다.
(e)모세와 엘리야(5-6절)
5-6절에 의하면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리다”(왕하 1:10-14)와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왕상 17:1; 왕상 18:1)의 내용들은 엘리야의 사역을 연상케 하고 그리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출 7:14-25)는 모세의 사역을 특징짓고 있다.29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들이다.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의 선지적 사역을 계승하는 교회 공동체를 보여 주고 있다.
(ㄹ) 두 증인의 사역(7-13절)
두 증인의 사역은 7-10절과 11-13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7-9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두 증인에게 가해지는 핍박과 고난의 장면이라면 후자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여준다.
(A) 두 증인 죽음(7-10절)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a)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
이 본문 이야기의 시점은 두 증인이 증거를 다 마칠 때로 설정된다. 앞서 3절에서 적시한 대로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예언한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이 에피소드 안에서 증거를 다 마칠 때는 1260일이 다 지날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1260일이 초립부터 재림 사이의 기간이라면 그것은 재림의 시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재림 때 문자 그대로 일어나는 사건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두 증인 이야기 속에서 비유적으로 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260일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의 설정은 두 증인 이야기 속에서 사건의 전개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두 증인 이야기는 단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다만 두 증인의 죽음을 재림의 시점에 설정하는 것은 재림의 시점이 다가올수록 악의 세력의 저항이 더 강렬해 진다는 정황을 활용하고 있다.
(b)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오다(7a)
두 증인이 증거를 다 마칠 때 짐승은 무저갱에서 올라온다. 여기에서 짐승은 이 시점에서 왜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짐승과 무저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짐승’이나 ‘무저갱’은 11장 본문 이전에 언급된 바 없다. 그러므로 11장까지만 보면 짐승과 무저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 그런데 짐승은 13장에서 등장하고 무저갱은 20:1-3에서 언급된다.30) 저자는 11장에서 짐승과 무저갱에 대한 정보를 13장과 20장에서 얻을 것을 기대한다.
13장에서 짐승은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를 모델로 하여 로마 제국 황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미지이다.31) 로마 제국과 황제는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 세력에 대한 아이콘이다. 그리고 용과 관련하여 20:1-3에서 용이 무저갱에 천년동안 결박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때에 천년의 기간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20장의 천년과 11장의 1260일은 동일한 기간이다. 그리고 20장에서 천년이 다 찬 후에 무저갱에서 용이 나와 성도들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11:7에서 두 증인이 증언을 다 마칠 때 무저갱에서 나오는 것과 평행적 관계를 갖는다. 다만 20장에서는 용이 등장한 반면 11장에서는 짐승이 등장한다. 짐승과 용은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계 12:3).
그렇다면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용과 짐승은 동일하게 무저갱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무저갱은 어떤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지 않으며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 증인 이야기 전체는 상징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증인 자체부터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1장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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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캐릭터 짐승 용
외부적 특징 ------------------ 일곱 머리와 열 뿔 ----------------------
기 간 1260일 천년
등장한 시기 두 증인이 증거를 완성할 때 천년 다 찬 후에
무 저 갱 ------------------ 상징적 공간 ---------------------------
⒞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은 예루살렘(8절)
두 증인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그 죽임을 당한 곳은 ‘큰 성’이며,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주님께서 못 박히신 곳’이다(8절).
‘영적으로’라는 단어는 “알레고리적”으로나 “은유적으로”(metaphorically)가 아니라
“선지적으로”라는 의미를 갖는다.32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인식”을 의미한다.33) ‘주님께서 못박히신 곳’이라는 문구에 의해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예루살렘인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왔다(눅 13:33).34)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으로서 먼저 이러한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러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의 도시가 아니라 성령의 깨달음으로 판단하건데 그 도시는 바로 소돔과 애급과 같은 곳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소돔은 의인 롯이 살기에 극히 괴로웠던 곳이며 그 극심한 악으로 인하여 심판받을 때 피해 도망했어야만 했던 곳이다. 애급은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인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혔던 나라다. 또한 예루살렘은 죄 없으신 의인으로서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였던 곳이다. 예루살렘, 애굽 그리고 소돔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대적인 장소다.
(d) 두 증인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9-10절)
9절에서 두 증인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는데 먼저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가 보여준 반응은 두 증인을 장사 지내지 않은채 그들의 시체를 큰 성 길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0절에서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보며 기뻐하여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증인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백성들과 족속들과 방언과 나라’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동일한 의미로 간주될 수 있다. 전자는 중립적 의미로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성격을 갖는데 이 문맥에서는 ‘땅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본문 외에 13:8에서도 사용)은 짐승 혹은 용의 추종자로서 신자를 의미하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13:6)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증인의 증거의 선지적 사역으로 인하여 매우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베옷을 입은 두 증인은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어둠이 빛으로 나오기를 부끄러워하듯 어둠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빛으로 나오라는 두 증인의 요구에 그들은 심히 괴로워했을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괴로운 심정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두 증인의 죽음 후에 시체를 장사지내지 않은 채 길거리에 두고 보며 조롱하고 자신들끼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지 않고 시체를 그대로 길거리에 방치해 둔 채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해 극도의 수치를 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두 증인의 그러한 수치스런 죽음은 교회와 짐승과의 뿌리 깊은 적대감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11:10 ‘저희 원수들’), 또한 교회가 십자가의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명제에 근거하고 있다(11:8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B)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11-12절)
두 증인은 사흘 반 만에 생명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로 들어가 발로 서서 다닐 수 있게 되었고(11:1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1-12)
(a) 사흘 반
여기에서 왜 요한은 두 증인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데 사흘 반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는가? 그들이 사역과 죽음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다면 사흘이라는 숫자가 적당하지 않는가? 두 증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로를 따라가는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사흘이라는 기간이 적절하지만 요한은 이 기간을 사흘 반으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묵시적 변형”이라고 불리워진다.35) 곧 삼 일 반이라는 숫자는 삼년 반이라는 묵시적인 다니엘서의 배경을 근거로 변형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일 반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의 기간인 삼일과 두 증인의 증거의 기간인 삼년반의 기간이 조합되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형에는 저자의 의도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삼일 반이라는 기간은 두 증인이 복음을 증거한 삼년 반의 기간과 같은 패턴을 갖는다. 이러한 숫자의 유사성은 두 숫자가 지니는 의미들을 비교할 것을 요구한다. 삼년 반이라는 증거 사역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가 지녔던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삼 일 반 동안은 장사도 지내지 않은 채 그 시체가 길거리에 방치되는 수치와 모욕의 기간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증거 사역을 통해 누리는 영광의 기간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기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광의 기간은 길지만(삼년 반) 수치와 모욕의 기간은 한순간(삼 일 반)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그 수치와 모욕의 기간이 지난 후에는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의 자리를 맞이할 것이다. 요한은 구경하는 자들 혹은 원수들의 행동과 감정에 관심을 갖는다.
(b)부활 (11절)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했으나 예수님과 다르게 장사지내지 못했던 두 증인은 예수님처럼 부활한다. 부활의 장면의 핵심적 요소는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다’이다. 이 장면은 겔 37장의 사건, 특별히 겔 37:10을 배경으로 사용한다.36 두 증인이 ‘그들의 발로 일어서다’는 문구는 바로 겔 37:10의 ‘그들의 발로 일어서다’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겔 37장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진정한 성취가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두증인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해방의 성취가 바로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겔 37:9은 창 2:7을 배경으로 사용한다.37 이 두 본문 사이에는 ‘불어넣다’(ἐμφυσάω)라는 동사가 동일하게 사용된다. 창 2:7에서는 흙의 상태였던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기(πνοὴν ζωῆς [70인역]생명의 바람)를 불어 넣고 겔 37:9에서는 ‘(하나님의) 영’(πνεῦμα)(70인역)을 불어 넣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차이는 미미하지만 ‘불어 넣다’는 행위의 공통점은 이 두 본문 사이를 서로 연결 짓는다. 이러한 관계에 의하여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해방 사건을 새로운 인류의 시작으로 조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의 부활 사건에 적용한다면 이 두 증인의 부활의 정황은 바로 교회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인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준다. 물론 이러한 희망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미 그 빛을 보여 준바 있다. 이상에서 두 증인은 부활을 통해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실패한 듯 보였지만 새로운 인류에 대한 희망의 꽃을 피워내는 승리의 환희를 맛보고 있다.
⒞ 승천(12절)
두 증인은 부활 후에 하늘로부터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것을 ‘승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1:7에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로 승천하는 장면과 일치한다.38) 이러한 일치에 의해 두 증인 곧 교회 공동체는 단 7:13의 성취로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왕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지위는 예수님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지위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이다. 부활의 장면을 통해 새로운 인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면 승천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왕적 지위를 확증한다. 이 두 장면 모두 창세기에서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궁극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순간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서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반면 그들은 두 증인이 부활하는 모습과 승천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요한은 왜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요한은 두 증인들의 부활과 승천이 바로 그들의 증거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부활과 승천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나타난 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바로 그분의 사역의 진실성 혹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셨다. 사도들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메시아로 오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들의 증거가 진리였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바라보고 놀랐다는 반응은 바로 두 증인과 그들의 증거에 부여된 이러한 신적인 권위를 인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의 증거가 진실하다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이후 문자 그대로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성도들이 참여할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C) 부활과 승천의 결과(13절)
부활과 승천으로 두 증인의 증거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인식한 결과를 11:13은 이렇게 보여 준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a) 큰 지진이 나고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칠천(13a)
여기에서 사용된 ‘십분의 일’과 ‘칠천’이라는 숫자는 “관습적인 숫자들”(conventional numbers)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큰 지진’이 일어 난 것은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 후에 발생한 것으로서 예수님의 죽음 후에 일어난 지진의 현상(마 27:51)과 시점에 있어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39) 이 문맥에서 지진은 두 증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서 죽인 자들에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40)
(b) 두려움과 영광(13b)
여기에서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는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한 회심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41) 두려움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직결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려움은 공포의 요소가 없지 않으나 경외의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로 귀결되기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문구는 14:7의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문구와도 평행적 관계를 가지며 그리고 15:4에서 하나님께 만국이 예배해야 할 당위성에 대한 질문에서 그 동일한 표현이 사용된다.42)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역으로 이 문구의 반대 표현은 16:9에서 회개하지 않은 자가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표현으로서 사용된다.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계 16:9)
계 9:20-21은 나팔 심판들이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11:13은 두 증인의 순교적 증거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어 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은 9:20과 11:13에서 “의도적인 대조”(deliberate contrast)를 보여 주고 있다.43)
나팔 심판 후에는 ‘남은 사람들’ 이 회개하지 않았다(9:20)
증거의 참됨을 입증하는 지진 후에 ‘그 남은 자들’이 회개하였다(11:13)
위의 두 본문에서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라는 문구가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문구의 공통된 사용에 의해 이 두 문구의 대조적 관계가 의도되고 있다. 전자는 ‘나머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후자는 회개했다는 것이다. 11:13이 일곱 번째 나팔 심판에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11:15)는 정황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회개의 결과로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두 증인 사역의 의미를 잘 보여 준다.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을 기록하고 있는 9:20-21에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던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바로 두 증인의 증거 하는 선지적 예언의 사역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44) “심판은 회개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지만 두 증인의 증거는 효과를 가져왔다.”45) 이러한 결론은 이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일깨워 준다. 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순교적 정신을 가진 증거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3) 정리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결과(9:20-21)와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의 결과(11:15)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위의 본문의 관찰에서 자명하다. 그것은 순교적 정신을 가지고 감당하는 증거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
3) 가족공동체: 어린양의 신부(19:7-10; 21:1-2; 9-10)46)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교회론을 개진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는‘가족’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에서도 가족 모티브가 사용된다. 곧 예수님과 교회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간주함으로써 교회공동체를 삼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초대하신다(19:7-10; 21:1-5; 21:9-10). 그런데 이러한 가족 공동체에로의 초대는 예수님 재림의 시점에서 완성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19:7-8에서 마지막 때에 바벨론 멸망과 함께 교회 공동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초대를 받는다. 이 신부는 잘 준비되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는데 이 세마포 옷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을 의미한다.47)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서 해석된다(19:8). “옳은 행실”이란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삶을 가리킨다. 마침내 하나님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짐승을 이긴 교회 공동체를 어린양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불러 주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표현으로서 ‘아들’, ‘자녀’라는 표현과 함께 ‘신부’ 혹은 ‘아내’의 이미지도 포함된다. 가장 완성된 상태의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21:1-5와 21:9-10에서 하늘과 땅이 통일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어 등장한다. 이 신부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름답게 단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21:2). 이처럼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와 신랑의 관계는 19:7-8과 평행적 관계를 가지며 사 54:5, 11-12에서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한 경우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창 1-2장에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가족 공동체의 최종적 완성을 의미한다. 성경이 가족 공동체의 주제로 시작하고 완성된 가족 공동체의 주제로 마무리 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4) 총정리
앞서서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살펴보았다. 이것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1)천상적 공동체; 2)증거 하는 공동체; 3)가족 공동체. 이 세 가지는 교회가 갖는 중요한 본질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 천상적 특징을 갖는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능력 있게 감당할 것을 요구받는다. 왜냐하면 천상적 존재로서 교회공동체는 이 세상에 삶의 정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교회공동체는 세상을 변혁 시키는 증거의 사역을 통하여 천상적 존재를 실재화 한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의 발현의 과정에 가족으로서의 코이노니아가 존재한다. 이러한 본질적 특징들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공동체는 소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2-3장에서 일곱 교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토해 버리고 싶어 했던 최악의 교회이다. 사데 교회는 명성은 있으나 죽은 교회이다. 그 외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인 버가모 교회, 여선지자 이세벨을 받아들인 두아디라 교회들은 칭찬받을 만한 것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들도 지적되고 있다.
일곱 교회 중에 책망 받지 않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둘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약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절망적일 수 없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교회론적 특징들이 지상의 교회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히 현장에서가 아니라 구속사적 맥락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맥락에서 교회 공동체는 구약 이스라엘의 성취로 등장한다. 이러한 성취는 종말적 사건이다. 이러한 종말적 성취의 맥락에서 보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미’의 관점에서 보면 천상적 공동체이며 세상의 변혁을 가져 오는
증거의 공동체 그리고 가족 공동체의 종말적 성취의 특징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다. 아마도 2-3장의 일곱 교회가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동시에 칭찬의 요소들도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은 지상의 교회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아직’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종말적 성취는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에 완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 중에 가족 공동체를 말하는 19:7-8과 21:2 그리고 21:9-10은 재림 이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 때까지는 언제나 부족함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이해할 때에는 이러한 균형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신약 시대에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을 합리화 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은혜를 더욱 증폭시키므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도록 힘써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적 공동체와 증거하는 공동체 그리고 가족 공동체와 교회의 모습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다음의 내용에서 목장의 현장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 보기로 한다.
3. 본론(2): 요한계시록의 교회론과 가정교회의 목장
여기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제시하는 세 가지 교회의 본질적 특징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정 교회의 목장에서 구현되고 있는가를 추적해 본다. 다음의 내용은 학문적 논의의 방식이 아니라 필자가 2017년 10월 순천 강남 중앙 교회의 평신도 세미나와 2019년 2월 휴스톤 서울 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세미나와 연수를 통해 체험한 내용들에 근거하여 제시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목장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전무하기도 하고 목장은 현장의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장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서 가정 교회의 목장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다.
1) 목장은 교회와 세상이 만나는 현장이다.
가정 교회에서 목장은 어떤 곳인가? 그 목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곳은 바로 불신자들이 와서 복음을 만나고, 교회가 세상을 만나는 역동적인 현장이고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이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서 불신자를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졌고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팽배해 있기도 하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 받는 것을 싫어하는 개인주의 문화가 전사회적으로 보편화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 세상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목장이 바로 이러한 세상을 끌어안는다. 가정 교회의 목장은 이러한 미션을 수행해 나가도록 시스템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고 목자와 목원들은 그러한 시스템을 잘 따르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러한 훈련은 이론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목자와 목녀의 헌신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된다.
오늘날 교회는 자체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과의 접촉면을 넓혀 가야하는데 가정교회의 목장은 이러한 미션을 잘 수행해 가는 전초기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과 만나는 현장으로서 목장은, 일부 교역자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 안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평신도들이 목자와 목녀로서 목원들을, 양을 대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섬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곧 평신도 목자들은 목장 안에서 사역을 그들의 세상에서의 평상시의 삶과 어떠한 단절 없이 연속선상에서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교회 안에서 일반 성도들의 잠재력을 극대화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평신도들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이러한 구조는 마치 전신에 퍼져있는 실핏줄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모든 신체의 구석마다 힘있게 공급해 줌으로 생명이 충만한 모습을 보여준다.48)
이러한 목장의 특징은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을 통해 계시된 교회의 증거 하는 사역의 특징을 구현하는 현장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목장의 현장에서 세상을 만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황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던 세상 나라가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의 증거 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목자와 목녀의 세상을 향한 순교적 정신의 헌신된 모습에서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두 증인의 모습이 겹쳐서 나타난다. 그런데 두 증인은 죽기만 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목장 안에서 헌신된 목자들과 목원들은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성령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단락에서 다루게 될 주제로서 지상에 존재하는 목장은 천상적 존재로의 정체성을 경험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장의 특징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약점이 있게 된다. 목장은 철저하게 VIP들을 품는 장소가 되다 보니 목장이 VIP 중심이 되고 그 VIP가 오랫동안 생기지 않을 때 목장 자체가 타성에 젖고 와해의 위험을 직면하게 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제시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온전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목장 안에서 성도 사이에서의 코이노니아와 세상을 향한 열정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2) 목장은 하늘이 땅에서 만나는 현장이다.
지난 1월에 올랜도의 비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필자를 영접한 장로님은 대화중에 묻지도 않았는데 요즘 목장 사역을 하면서 천국을 경험한다고 고백한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고백은 한 성도의 평범한 체험을 진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고백 속에 목자로서 목장의 현장이 어떤 곳인가를 엿보이게 한다. 목장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목장은 교회공동체가 천상적 존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러해야만 할 것이다. 목장은 예배와 교제가 있고 목장에서 회복이 일어난다. 목장은 인간들만의 모임으로 끼리끼리 모이는 친목단체 정도의 모임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의 기쁨과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다. 땅에 사는 자들이 하늘의 기쁨과 회복을 경험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서 예배를 받는다. 하늘과 땅의 교통이 일어난다. 이러한 목장에서의 경험은 주일 예배에서 더욱 증폭될 수 있다. 주일에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의 예배의 연속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장의 성격은 요한계시록 4장의 24장로와 7:9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통해 제시하는 천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잘 구현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장에서 세상과의 치열한 직면과 함께 천상적 경험을 한 목자와 목원들이 모여 함께 드리는 예배는 이 땅에서 하늘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목장과 주일 예배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땅과 하늘이 통일을 경험한다.49)
이런 점에서 목장 모임은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VIP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상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코이노니아의 현장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증거 하는 공동체로서 특징과 천상적 공동체로서 특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적으로 긴밀하게 작동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장에서 이러한 특징을 유지하며 어떻게 VIP가 거부감 없이 적응할 수 있는 그 지점이 어디인가를 설정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천상적 공동체로서의 코이노니아와 VIP에 대한 관심 사이에 긴장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목장에서 가족 공동체로서의 개념이 매우 효율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곧 가족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때 천상의 코이노니아가 발생하고 VIP는 이러한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들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목장은 이러한 가족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을까?
3) 목장은 가족 공동체를 경험하는 현장이다.
필자는 2018년에 개최된 포럼에서 ‘교회는 가족이다’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을 쓰기 위해 2017년 10월 순천강남중앙 교회의 평신도 세미나에 참석하여 목자 장로님가정에 머물며 목장 모임도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에게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VIP들이 목자 목녀의 헌신적 섬김을 통해 진정한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목장 전체가 가족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전체 교회가 가족 공동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목장은 그것을 구현하고 실재화 할 수 있는 실천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목장은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영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목장은 목장 가족들이 모든 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 된다. 목장은 바로 이러한 삶의 현장을 관찰하고 함께 하는 가족의 정신을 불어넣는 원천이다.
이러한 가족으로서의 목장의 모습은 가족 공동체로서 교회를 말하는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매우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장의 현장에서 가족 공동체로서 잘 훈련된다면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준비된 신부로서 영광스런 교회 공동체의 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 영접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장의 현장이야말로 가족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정리: 목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현장이다.
가정 교회의 목장에서는 치열한 삶의 역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역동은 전도와 섬김이라는 타인과의 필연적 관계로 인하여 발생한다. 전통적 교회에서 구역이나 셀과 같은 소그룹은 이러한 역동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것이 가정 교회의 목장과의 차이점이다. 목장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증거 하는 공동체, 천상적 공동체 그리고 가족 공동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체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현장이다. 가족으로서 성도들과의 섬김의 관계가 훈련되는 삶의 현장이고 VIP의 초청으로 세상의 변혁을 직접 목격하는 사역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목원들 스스로가 지상에 있지만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현장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삶과 사역의 시스템이 부재하여 그러한 성장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이 없어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러나 목장은 바로 그러한 시스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목장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에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4. 결론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이 가정 교회의 목장에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첫 번째 본론에서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을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고찰했다:
1)천상적 공동체;
2)증거 하는 공동체;
3)가족 공동체.
첫 번째의 경우 (천상적 공동체)는 4:4의 24장로와 7:9-17의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7:1-8의 144,000도 함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두 번째 경우(증거 하는 공동체)에는 11장의 두 증인 그리고
세 번째 경우(가족 공동체)는 19:7-8; 21:2 그리고 21:9-10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말론적 성취의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의 구속사적 긴장을 갖는다.
그리고 두 번째 본론에서는 목장에서 이 세 가지의 교회론적 주제들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실제로 이 세 가지의 교회론적 본질이 목장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목장의 현장도 구속 역사의 종말론적 성취의 관점으로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패러다임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곧 가정 교회의 목장은 그 어떠한 경우보다도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적 본질을 완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의 실재화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정교회의 목장은 한국 교회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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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198차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 강의안, 3.
2 엡 2:5-6뿐만 아니라 계 1:7에서 ‘구름타고 오신다’는 재림이 아니라 승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미출간 논문을 필자가 작성한 바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도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통일적 관계를 상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4장에서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1:7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3 R. Bauckham,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ambridge: CPU, 1993a), 31.
4 같은 책, 46.
5 J. F. Walvoord,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Chicago: Moody Press, 1966), 103.
6 같은 책.
7 Hal Lindsey, There’s a New World Coming (Irvine, California: Harvest House Publishers, 1973), 41.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Here in seven typical churches we see the predominant characteristics of seven successive eras of church history” (같은 책). 그는 각 교회의 경우에 ‘Prophetic Application’이라는 제목 하에 연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까지 한다: 1)에베소 교회: A.D. 33-100(the Apostolic church era); 2)서머나 교회: A.D. 100-312(the great era of persecution); 3)버가모 교회: A.D. 312-590(the era that the church merged with the state); 4)두아디라 교회: A.D. 590-1517(the Middle age); 5)사데 교회: 1517-1750(the Reformation Era); 6)빌라델비아 교회: 1750-1925(the great missionary era of the Church); 7)라오디게아 교회: A.D. 1900-환란의 때(Laodicean lukewarmness)(같은 책, 38-73). 우리나라에서 요한계시록 강의로 유명한 이광복 목사도 이견해를 따른다. 그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의록에서 2-3장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서술하지만 그 중 두 번째는 다음과 같다: “본서가 예언서이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언적으로 교회사의 일곱 시대를 예언하는 것으로 본다” (이광복,『그리스도 재림의 성경적 역사성: 성경적 종말론』, 167). 그리고 이광복 목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에베소 교회: 초대 교회 사도시대; 2)서머나 교회: 박해시대a 초대 교회에서 313년의 콘스탄틴 대제 시대까지; 3)버가모 교회: 로마 국교회 시대; 4)두아디라 교회: 암흑시대; 5)사대 교회: 종교 개혁 시대; 6)빌라델비아 교회:선교시대;
7)라오디게아 교회: 종말시대(같은 책, 167-185). 이러한 이광복 목사의 구분은 충실한 세대주의자인 HalLindsey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8 R. H. Charle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St. John (Edinburgh: T&T Clark, 1920),129-133.
9 H.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ed. The Apocalypse of St. John. 2d. ed. Classic Commentaries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06), 68-69.
10 J. P. M. Sweet, Revelation (London: SCM Press, 1979), 118.
11 R. H. Mounce, Revelatio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8), 135-136.
12 I. T. Beckwith, The Apocalypse of John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19), 498-99.
13 M. E. Boring, Revelation,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89), 106.
14 L. Hurtado, “Revelaton 4-5 in the Light of Jewish Apocalyptic Analogies,” JSNT 25 (1985) 105-124. 105-124.
15 H. Hoeksema, Behold He Cometh (Eerdmans: Grand Rapids, 1979), 159.
16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7 오스번(Osborne)은 이 정황이 지상적이라고 주장하는 그룹(Swete, R. Charles, Krodel, Michaels, Aune)과 천상적 정황으로 간주하는 그룹(Kiddle, Lohmeyer, Lohse, Giesen, Sweet, Mounce)을 소개하면 오스번 자신은 천상적 정황임을 주장한다(G. R. Osborne, Revelation, BECNT [Grand Rapids: Baker, 2002], 524-525).
18 G. K. Belae, The Book of Revelation,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9), 426.
19 같은 책, 426. 이 이외에도 호 2:1과 쥬빌리(Jubilee) 13:20; 14:4-5 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같은 책).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이삭(창 26:4)과 야곱(창 28:14; 32:12)에게도 반복된다(D. Aune, Revelation, 466).
20 D. Aune, Revelation, WBC 52A (Dallas: Word, 1997), 468.
21 C. H. Charles, A Critical and Exegtical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St. John, 211.
22 보컴에 의하면 요한은 그의 상징들을 일관성 있게 사용한다. “일곱 촛대가 교회라면, 두 촛대도 그렇다”라고 하여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4).
23 둘과 일곱이라는 숫자는 각각의 문맥에 의해서 달리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일곱 촛대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고, 두 촛대는 증거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24 J. P. M. Sweet, Revelation, 184. 신약의 경우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실 때 증거의 최소 숫자인 두 명씩 보내신 바 있다(눅 10:1; 참조 행 13:2; 15:39 이하) (같은 책). 이 외에도 신약에서도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숫자 둘의 의미를 활용하여 사용한다(참조. 마 18:16; 요 5:31-32; 8:17; 행 5:32; 고후 13:1; 히10:28; 딤전 5:19)(이 신약 본문들은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4의 도움을 받아 확인하여 사용하였음).
25 I. Boxall, The Revelation of Saint-John, BNTC (London: Continuum, 2006), 163.
26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8.
27 이 기간은 다니엘 7:25과 12:7을 배경으로 사용한다(S. S. Smalley,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of the Apocalypse [Doners Grove: IVP, 2005], 274).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핍박을 받는 모든 기간으로서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특별히 계 12:6에서 아들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승천 직후의 시점이 바로 1260일의 시작으로 설정되고 교회 공동체가 광야에서 양육 받는 기간을 1260일 동안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1260일의 마지막은 재림의 때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28 W. J. Harrington, Revelation, Sacra Pagina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3), 121.
29 같은 책. 여기에서 물을 피로 만든 사역은 열 재앙 중에 첫 번째로서 재앙의 대표적인 경우이므로 열
가지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지만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한 가지를 언급하고 있으며 모세의 사역의 특징을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사용된다(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5).
30 무저갱은 9:1에서도 등장하는데 11장과 20장의 문맥과 다소 차이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31 R. H. Charle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St. John, 286
32 D. Aune, Revelation, 620.
33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69.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의 안내를 받아 구약에 대한 카리스마적 주해(charismatic exegesis)”를 통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D. Aune, Revelation, 620).
34 D. Aune, Revelation, 621.
35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71.
36 J. M. Ford, Revelation: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38 (Garden City, N. Y.: Doubleday. 1975), 181.
37 D. I. Block, The Book of Ezekiel, Chapters 25–48,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7), 379.
38 해링톤(Harrington)은 이러한 승천 사건의 일치를 요한계시록 1:7이 아니라 사도행전 1:9에서
찾는다(W. J. Harrington, Revelation, 122).
39 D. Aune, Revelation, 627.
40 같은 책.
41 B. K. Blount, Revelation, NTL (Louisville: WJK, 2009), 218; J. P. M. Sweet, Revelation, 189.
42 J. P. M. Sweet, Revelation, 189.
43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9.
44 I. Boxall, Revelation of St. John, 167.
45 R.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9.
46 가족의 주제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교회는 가족이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람.
47 W. J. Harrington, Revelation, 186.
48) 보통 3-3-3을 말한다. 모범적인 경우가 30프로 중간이 30프로 그리고 지지부진 한 경우가 30프로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49 이러한 점에서 가정교회의 목장은 현재를 천년왕국으로 간주하는 무(현)천년적 입장과 가장 조화로운 관계를 갖는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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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ne, D. E. Revelation 6-16. WBC 52B. Nashville: Nelson, 1998.
Aune, D. E. Revelation 17-22. WBC 52C. Nashville: Nelson, 1998.
Bauckham. R.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ambridge: CPU, 199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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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 D. I. The Book of Ezekiel Chapters 25–48.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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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d, J. M. Revelation: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38. Garden City, N. Y.:Doubleday. 1975.
Hal Lindsey, There’s a New World Coming (Irvine, California: Harvest House Publishers, 1973
Harrington, W. J. Revelation. Sacra Pagina.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3.
Heokema, A. The Bible and the Future. Eerdmans: Grand Rapids, 1979.
Hurtado, L. W. “Revelation 4-5 in the light of Jewish Apocalyptic Analogies,” JSNT 25 (1985) 105-124.
Mounce, R. H. The Book of Revelatio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8.
Osborne, G. R. Revelation. BEC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Smalley, S. S.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of the Apocalypse. Doners Grove: IVP, 2005.
Walvoord, J. 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Chicago: Moody Press, 1966.
이필찬, “교회는 가족이다” (미출간 논문) 198차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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