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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소유 삼아주셔서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기에 앉아서 도대체 무얼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그 질문을 묻고 있는 중이오.” 그는 나중에 유명한 철학자가 된 쇼펜하워였습니다. 굳이 철학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유행가 가사가 말해주듯 인간은 늘 ‘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 같은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거짓의 아비 곧 사탄의 자식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특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누리는 특권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시던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제사장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됐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도 거룩하지 못하지만 의로우신 예수와의 관계로 인해서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살게 됐습니다. 우리는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문과 직장, 도시와 국가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주의 얼굴을 뵙는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의 삶은.
1.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늘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힘입어 기도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4:14-16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었던 존 워너메이커를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가 가진 백화점 지점만 해도 160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안 바쁘면 하루에 한 시간 기도하고, 바쁘면 두 시간 기도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 세 시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일이 많다는 것이고 일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한다면 죤 워너메이커처럼 더욱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찬송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3.선행과 구제하는 삶입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와 다비다라고도 하고 도르가라고도 하는 주님의 제자가 구제를 심히 많이...
맥도날드 창시자의 부인 '조앤 크로크' 할머니는 돈이 많아서 돈으로 봉사했습니다. 그 할머니가 몇 년 전에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8,000만 달러를 구세군에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구세군 133년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합니다. 그러더니 또 얼마 후에는 15억불(약 1조 5천억 원)을 기부 했습니다. 그리고 또 돌아가시면서 구세군에 15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5조원을 기부했습니다. 이분의 은사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봉사한 것입니다.
4.예배를 드리는 삶입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중세 시대 예배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중적 계급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즉 평신도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라틴어 성경이 사용되었고, 찬양도 사제들이 도맡아 했습니다. 평신도에게 예배는 그 의미도, 내용도 모르는 ‘신비스러운 사건’에 불과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이 예배 집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당시 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모토중의 하나가 “예배를 회중에게 돌려주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불같이 일어나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회중은 비로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 성경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평신도의 진정한 신분인 ‘만인제사장직’이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제사장직에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그 특권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건강한 신앙 생활의 제1 조건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사 43;21) 예배가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인생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신 목적중의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도 예배입니다.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에서 시작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가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롬12장부터는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며 나누며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할 일이 많은데 무엇보다도 예배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12장 들어서면서 그것도 바로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예배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예배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다른 것보다도 먼저입니다. 예배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줄로 믿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예배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으로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바쁘고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입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많아도 예배가 먼저입니다.
"남북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남과 북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치체제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남쪽 주민과 북쪽 주민의 생활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릅니까?
한쪽은 자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고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고 한쪽은 제약이 많고 빈궁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근본적인 것은 한 쪽은 예배가 있고 한 쪽은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는 본래 이방인의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던 할아버지입니다. 소망이 없던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살 때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이 됐는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았는데, 그가 했던 일은 먼저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난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요.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마을을 형성할 때 먼저 그 마을의 중심지를 찾았어요. 그들에게는 아직 자기들이 머물 집이 없었지만, 그 마을의 중심지에 제단, 즉 예배당을 먼저 세웠어요. 그 때문에 지금도 남부의 시골 마을에 가면, '다운타운(downtown)'이라는 중앙에 예배당이 있고 그 옆에 시청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영적 중심, 시청은 육신적 중심입니다. 청교도의 후손들도 '우리는 먼저 예배당을 지어서 그 예배당에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제단을 먼저 쌓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먼저 제단을 쌓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서 청교도들도 먼저 제단을 쌓았어요.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출마해서 운동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를 위해서 얼마나 바쁩니까? 미국 전역을 모두 돌아다니며 한 표를 찍어달라고 유세를 하는데, 웬만하면 표를 얻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일정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평소에 자기가 섬기던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왔기 때문에 언론에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23년 동안을 한 주도 빼놓지 않고 개근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카터가 예배드리는 것을 취재하려고 7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옵니다. 그가 기자들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를 취재하시려고 찾아 주셔서 고마운데, 다음 주일부터는 당신들이 섬기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레전자’의 정문식사장님은 여의도순복음교회집사님입니다. 그 집사님은 대학은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한양공고 전자과 졸업이 최종 학력입니다. 그런데 자본금 50만원으로 시작한 ‘이레전자’가 2004년 한 해 동안 2,000억 원이나 되는 매출을 올려, 산업자원부가 주관하는 ‘신지식인상’과 ‘벤처기업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이 쓴 ‘다섯 평 창고의 기적’이라는 책이 2002년도에 출간됐는데. 그 책에 보면 그 분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중학교 때 시골에서 올라와 옥탑방 하나에서 어렵게 살아갈 때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잠자리에 들기 전 항상 기도를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란히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선택이었다.” 고 말합니다. 그 집사님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신앙훈련을 받은 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결혼 후 공장에 다니면서 주일성수를 할 수 없게 되자,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평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주일이면 만사 제쳐놓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가 봉사를 합니다. 15년째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오고 있다가, 지금은 고등부 학생들을 맡아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지 요즘에도 외국에 출장을 나갔다가 자기 반 학생들을 위해 중도에 귀국할 정도로, 열성적인 교사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예배드리는 일을 최우선시하는 그를 보시고, 그를 아버지도 없이 옥탁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학생에서 이레전자의 CEO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축복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러시아의 3대 기적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나무는 많은데 종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나무가 많은데도 종이가 없습니다. 두 번째, 원유는 많은데 휘발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원유가 많은 나라 중 하나이지만, 기름이 부족해서 기계를 돌리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땅은 넓은데 식량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땅이 광활하고 비옥함에도 식량이 부족합니다.
이처럼 러시아는 국토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족한 나라였지만, 그 나라가 공산화 되었을 때부터 이러한 현상들이 찾아왔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배를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당을 불살랐습니다. 1917년 '레닌'은 혁명을 일으켜 1000년 동안 열렸던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공산당 당사와 노동자 숙소, 심지어 스케이트장으로까지 변용했습니다. 그때 미국은 20만개의 교회를 가지고 세계 선교에 힘썼습니다.
소련은 자기들의 나라가 붕괴된 원인을 각 분야 전문가 100명에게 3년 동안 연구하여 발표하게 했습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내란도 없었는데 왜 망했습니까? 그것은 본인들 뿐 만아니라 모두가 궁금한 일입니다. 연구결과 첫째는 내부문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소련의 공산당 지도자는“교회 문을 닫으니 모든 문이 닫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남북이 분단되어 국토는 좁고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나라입니다. 산이 많아 농사할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산이 많지만 쓸모 있는 나무가 얼마 없습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닙니다. 거의가 쓸모없는 산들입니다. 그런데 50여 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50여 년 만에 세계경제 12위권에 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같은 조건의 북한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세계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회복된 것으로 보고 한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잘 섬기고 예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민족은 비록 소수이지만 유대민족입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을 연구해보니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또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도 유대민족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가장 노벨상을 많이 받은 우수한 민족도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은 안식일을 지켰고, 그 안식일은 유대민족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안식일이 유대민족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민족이 살고 개인도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민족과 국가는 형통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개인도 인생에 축복을 받아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미국의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역사적으로 가장 축복을 받고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록펠러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세 가지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장 부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기부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98세까지 장수하고도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다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록펠러가 존경받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부자가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그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일을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반드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십의 구조까지 드리는 물질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정도 예배생활의 귀중성을 알고 이 예배생활에 정성을 쏟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