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일기
내 인생의 길라잡이 송담 큰스님
원각성 이정숙 (시인)
송담 큰스님은 내 삶의 길라잡이시다. 누가 뭐라든 내게 있어서 큰 스님은 사막의 밤에서 북쪽의 찬란한 별이고, 깊은 산속에서 나침반이시다. 내 삶에서 큰스님과의 인연을 뺀다면 나는 살아가는 참뜻의 단어풀이 조차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감히 ‘네 인생에다 송담 큰 스님을 운운’하느냐며 정신 나간 여자 취급을 한다 해도 내 삶에서 큰스님은 나의 모든 것이다. 나는 송담 큰스님의 예쁨을 받고 있다는 엄청난 생각을 혼자 규정하고 산다.
무더운 여름 날 지친 몸을 끌고 길을 가다가 큰 나무그늘 쉬어 가듯 나는 삶이 고달프면 큰스님께 간다. 그리고 스님의 법력의 그늘에 내가 있음을 행복해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시작해야 할 때면 언제나 ‘큰 스님께서 어찌 생각하실까‘를 먼저 자문자답 한다. 이미 스님은 내 마음에 자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습관화 된 것이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일도 많다. 일본에 일이 있어 갔을 때다. 오사까의 금강사 주지스님과 후지산에 기도를 목적으로 오른 적이 있다. 너무 힘들어 잠깐 쉰다는 것이 깜빡 졸았던 모양인데, 큰스님께서 어떤 사람과 바둑을 두시면서 우리를 부탁을 하시고 계셨다. 어쩌다 그리 됐는데 잘 좀 해주라는 말씀이셨다. 놀라서 눈을 떴다.
밤중도 아니고 대낮에, 그것도 일본의 후지산 9번째 고개에서, 너무나 선명해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산이 높으니까 고산증 증세로 일어난 환상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 산행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일이 하나씩 걷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스님께서 오랫동안을 우리를 가슴아파 하시며 작관을 자주 하셨다는 말을, 내가 다니고 있는 평창동 원각사 주지스님을 통해서 들었다.
내가 큰스님을 친견하게 된 것은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시어머님의 천도재를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 하면 제법 용기와 욕심이 대단한 여자였다. 당대의 제일가는 법력을 지니신 스님이 아니시면, 어머님의 천도재는 어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집안 모두를 위한 방법은 그 도리 밖에 없기도 했다.
시어머님은 머리맡 작은 옷장 속에 법당을 가지고 계셨었다. 외할아버지가 스님이셨던 탓에 부처님을 모시는 일을 별달리 생각 안했다. 초하루 보름 밥 한 그릇 떠놓는 일 매일 아침 물 한 그릇과 촛불과 향 한개피 사르는 일은 부처님이 좋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시어머님께서 부처님을 모시게 된 이유를 듣고 나서는 오히려 나도 그 상황이라면 그랬으리라는 공감대까지 가졌고 그런 시어머님의 자식사랑이 자랑스러웠다.
어머님은 남편을 여의고 9남매를 기르시다가 어느해 유행되는 홍역으로 아들 아래의 딸 넷을 한 달에 하나씩 잃었다. 뒤이어 아들인 남편이 앓게 되었는데, 말을 묶었던 기둥에 절하면 역신이 물러간다고 해서 마포에서 말죽거리까지 한 나절을 걸어가서 절을 했으나 남편까지 잃을 상황이 됐다.
그때 누가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 보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고 간신히 아들인 남편은 살아났다.
그 후 어머님의 인생에서 부처님은 절대자셨다. 곁에 모시고 감사함을 기도하게 됐는데, 세월이 가면서 무거운 등짐이 됐다. 그냥 무심히 가벼운 마음으로 작은 불상 하나를 머리맡 문갑 위에 놓은 일이, 부처님을 없애면 벌을 받아 재앙이 온다든가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말에 그대로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으셨다. 생전에 그것을 정리 하셔야지 하면서도 방법을 몰라 그대로 두고 떠나셨다. 49재를 끝내자 본격적인 가족회의 안건이 됐다.
모두가 정리해야 된다는 결정을 보았으나 구체적 방법론이 없었다. 꼬리표로 따라다니는 후환에 겁먹었다.
그러나 나는 확신이 있었다. 정식 점안한 부처님도 아니고 오로지 감사의 한 정표였을 뿐, 어머님의 부처님은 미신적이 아닌,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상을 머리맡에 놓듯 기독교 신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상을 책상위에 놓고 기도하는 마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작 빠개듯 뻐개버릴 수도 없고, 더더욱 불자로서 부처님 상을 불에다 태워버릴 수도 없었다, 회의 끝에 법 높으신 스님의 법력에 의지하기로 하고. 그 일의 진행이 내게로 왔다.
소설문학이라는 문예지의 발행인 자격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정휴 스님께 부탁을 했다.
한참 기도에 맛을 붙여서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고 전국구 보살이라는 별명은 붙어 있어도 제대로 법회에 참석도 않던 터여서, 글을 쓰시는 오현 스님과 정휴 스님 외에 아는 스님이 없었다. 그냥 법 높으신 스님 좀 뵙게 해 달라고 했다. 정휴 스님의 주선으로 큰스님을 친 견할 날짜와 시간을 받았다.
막바지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 처음 법문이라는 걸 듣는 날인데, 나는 당황했다.
법당을 꽉 채운 인파도 인파려니와,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들리지도 해석도 안되는 전강 스님의 테이프를 숨죽이고 듣는 불자들의 경건한 분위기와 모시 장삼을 곱게 입으신 큰 스님의 단아하신 모습과, 청아한 음성으로 게송을 하신다음 매 구절 끝마다 모든 신도들과 함께 합송하는 나무아미타불 후렴구에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어서였다.
큰스님을 뵙고 자초지종 말씀을 드렸다. 조용히 건너다보시던 스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보살님은 왜 부처님을 믿지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어서 멈칫했으나, 항상 생각하고 있던 바가 있어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스님처럼 훌륭하신 분들이 속세를 떠나서 공부하실 때는 반드시 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다면 수 천년을 이어 올 리가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약은데요.’
스님은 빙긋이 웃으셨다. 나는 지금도 왜 스님께서 내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의문이 들곤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실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대전에 복전암이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 주지 스님이 그런 걸 잘해요. 내가 그 곳에 곧 갈 것이니 그 곳에서 다시 상의해요.’
나는 적잖이 실망을 했다. 직접 안하시고 다른 스님께 맡기신다고 하니 나에게 결정을 맡긴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근심이 앞섰다. 실망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시자스님이, 승낙하신 것이라며 위로를 했다.
복전암이 있는 언덕을 오르면서 가슴이 섬뜩했다. 1.4후퇴 이후 대전에서 유년기와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 그 곳에서 살아서 고향이나 다름없는데다가 피난시절에 외할아버님께서 작은 절 살림을 하시던 근방이서다. 어쩐지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복전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로 상월 스님이 주지 스님이시다. 스님은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스님처럼 느껴질 만큼 이미지가 강하셨고, 예지력이 대단하셔서 많은 신도들이 상담차 모여든다. 그날도 대중방에는 손님이 많았다. 큰스님은 뒤쪽 별채에 계셨다.
‘내가 말하던 주지스님인데, 그런 일을 잘 마감하시는 스님이니 시키는 대로 하면 되요.’
나는 또 한 번 실망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비구니 스님의 절 살이는 사연 많은 스님들이 인생의 도피처로 여기고 사는 곳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영화나 소설 속에서 얻은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살님, 걱정 말아요. 큰스님께서 작관하셔서 되는 일이지...제 힘으로는 어림없어요. 저는 그냥 형식을 지킬 뿐 모두가 큰스님의 원력입니다.’ 상월 스님이 내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위로를 하셨다.
작관이라는 말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 작관의 의미를 그로부터 10년 후 청화 큰스님께서 천도재를 지내 주셨을 때야 비로소 알아 차렸다.
상월 스님의 법력 또한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비구스님 못지않게 비구니 스님의 수행을 지도하시는 모습과 그 뜻을 이어 공부 하시는 복전암 스님들의 모습에 자극되어, 나도 조금씩 재가불자로서 수행자세를 가다듬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의 부처님은 전국구의 보살에서 용화사 신도로 인도했다. 큰스님 법문이 곧 불자의 도리이며 공부길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스님께 일가 모두가 법명과 화두를 받고, 전국 기도처에서 기복만 바라던 작은 마음에서 드디어 부처님 참 법인 주인공 찾기로 선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순조롭지가 않았다. 세 아이의 교육문제도 그렇고, 남편의 사업에 한 부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참선 공부는 너무 멀고 높은 언덕이었다.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고 참선을 뒷날로 미뤘다. 큰스님께서는 고왕경을 열심히 해 보라 하시며 큰스님이 녹음하신 고왕경 테이프를 주셨다. 칠팔년간을 정말 열심히 고왕경을 외며 살았다, 계속 죽는 날까지 고왕경을 수지독송 했어야 했는데, 마장이 들었다. 욕심의 덫에 걸려서 엄청난 곡절을 겪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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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