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텍사스(Paris, Texas)
최용현(수필가)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년)’는 ‘베를린 천사의 시’(1987년)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빔 벤더스 감독이 독일과 프랑스, 영국, 미국과 합작하여 미국 텍사스주를 배경으로 만든 로드 무비이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에 약 5만 달러로 수입하여 서울 관객 9만 9천 명을 기록하면서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제목 속의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아니라, 미국 텍사스주 동부 삼림지대 근방에 있는 소도시 ‘파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붉은 모자를 쓴 에펠탑의 레플리카가 유명하다.
‘파리, 텍사스’는 붕괴한 가정의 남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아내를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서 가족 간의 소통 부재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영화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에서 여행은 아주 중요한 모티브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현대 물질문명의 소산인 인간 소외와 고향상실에 대한 실존적 가치 탐구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남서부 텍사스주의 황량한 사막에서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빠르게 걸어가고 있다. 뭔가에 홀린 듯해 보이기도 하고 탈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 扮)라는 이름의 이 중년 남자는 드디어 외딴 술집에 도착한다. 그는 무작정 냉장고 문을 열고 얼음을 꺼내 입에 넣다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급히 간이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 끝에 눈을 뜨지만, 실어증인지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 의사는 그의 소지품에서 찾은 이름과 전화번호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월트(딘 스톡웰 扮)에게 연락한다. 그 사람이 찾아오면서 트래비스는 4년 만에 친동생과 재회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트래비스가 드디어 말문을 여는데, 첫 마디가 ‘파리’였다.
4년 동안 월트와 그의 아내 앤이 트래비스의 아들 헌터(헌터 카슨 扮)를 맡아 길렀다. 곧 8살이 되는 헌터는 친부모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숙모와 숙부를 엄마 아빠처럼 따르고 있다. 그러다가 헌터도 트래비스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데, 트래비스가 네 엄마를 찾으러 갈 거라고 하니까 헌터도 따라가겠다고 한다.
헌터의 엄마인 제인(나스타샤 킨스키 扮)이 매달 15일에 아들의 부양비를 앤에게 입금하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은행 이름이 제인에 대한 유일한 단서이다. 트래비스는 동생에게 돈을 빌려서 트럭 한 대를 렌트하여 아들 헌터와 함께 15일에 맞춰 길을 나선다. 두 사람은 그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가 은행에서 나오는 제인의 차를 발견하고 미행한다.
헌터를 차에서 기다리게 한 트래비스는 제인이 주차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제인은 휴스턴 환락가의 피프 쇼(peep show) 부스에서 남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손님은 여자를 볼 수 있고, 여자는 손님을 볼 수 없는 유리 벽 방에서 트래비스는 손님으로 가장하여 4년 만에 제인을 만난다.
제인이 스웨터를 벗으려고 하자 트래비스는 그대로 있으라고 말한다. 손님의 집에 따라갈 수 있는지 묻자, 제인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며 자리를 뜨려고 한다. 트래비스가 제발 가지 말라고 부탁하자, 제인이 다시 자리에 앉는다. 트래비스는 제인을 쳐다보다가 그 방에서 나온다.
두 번째로, 키홀(keyhole) 룸에서 제인을 만난 트래비스가 대화를 요청하자, 제인은 기꺼이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트래비스는 자신과 아내의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트래비스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지만, 의처증과 병적인 질투심 때문에 아내의 발목에 방울을 달아 못 나가게 하고, 급기야 임신한 아내를 숙소인 트레일러로 끌고 와서 벨트로 묶었던 이야기를 한다.
그가 남편임을 알게 된 제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트래비스를 부른다. 그때까지 거울에 등을 돌린 채 말을 하던 트래비스가 제인 쪽으로 돌아선다. 제인이 방의 불을 끄고 트래비스가 전기스탠드 불빛으로 자기 얼굴을 비추자, 이제 거울의 반사를 통해 제인도 트래비스를 볼 수 있게 된다. 아들 헌터가 호텔에서 엄마를 기다린다고 하자, 제인이 만나겠다고 말한다.
아예 짐을 사 들고 온 제인이 호텔에서 헌터를 만나 반갑게 포옹하는 순간, 건물 밖에 있던 트래비스는 타고 온 트럭으로 그곳을 떠나면서 영화가 끝난다.
‘파리, 텍사스’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이상향을 상징한다. 그래서 황량한 텍사스 벌판에서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던 한 부부의 잃어버린 사랑 찾기는 슬프도록 아름답다.
트래비스와 제인이 4년 만에 만난 피프 쇼 부스는 주로 관음증(觀淫症)과 관련된 곳이고, 두 번째로 만난 키홀 룸은 남자들이 유리 벽 너머로 여자를 쳐다보며 전화로 대화하는 곳이다. 대화하는 두 사람을 한 프레임 안에 잡지 않지만, 나중에 거울의 반사를 통해 서로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은 단절되었던 의사소통의 회복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라이 쿠더가 연주하는 슬라이드 기타(slide guitar)의 애수 어린 음률은 텍사스 사막지대의 황량한 풍경과 함께 트래비스의 내면적 고독을 완벽하게 담아낸 명반으로 평가를 받으며 로드 무비 OST의 전설로 남아있다.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 짐 자무시가 칸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관람한 후 빔 벤더스 감독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영화는 오랜만에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입니다. ‘파리, 텍사스’가 저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셔서 정말 축하드립니다. 촬영 기법이 놀라웠습니다. 로비 뮐러는 현존하는 최고의 촬영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