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 마 27:27-31 / 양심에서 시작하는 영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
할렐루야!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이 땅에서 선하고 행복하며, 한없이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도와주시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 ➡ 행복으로 인도하심)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대단히 권위가 있으시고, 말 안 들으면 다 징계하고 죽여 버리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갚아주시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품어주시는 하나님, 무엇보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4: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인간이 행복하길 바라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이것이 육신의 한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임을 성경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가차가 없으십니다. 영적인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고, 남들보다 더 영적으로 탁월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짐승과는 구분된 영에 속한 생명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은 반드시 잘 되어야 합니다. 이 영이 잘되지 않으면 아무리 육신이 잘 돼도 짐승 수준입니다. 그러나 영이 잘되면 천국백성이요 세상에서도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기(요한삼서 1:2) 때문에 영의 부분에 있어서는 냉정하시다는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에 속한 생명으로 사는 것의 실제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7장에서 주님이 어디를 만지고 계시는 지 자세히 보고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3절, 가룟 유다가 은돈 서른 냥을 도로 갖다줌. ➡ 양심에 스스로 뉘우쳐.
19절, 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아내의 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 양심이 힘들어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24절,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 양심에 가책을 느낀 빌라도 ➡ 물에 손을 씻으면서 자기 양심을 달래는 장면.
주님이 인간의 마음을 만지시는데 마음의 구체적인 부분 중 어디냐면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 회개하고 자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육은 오감의 세계요, 혼은 생각 감정 의지의 지정의 세계요, 영은 양심 교통 영감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당연히 혼은 마음이지요. 생각, 감정, 의지를 빼놓고 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영의 세계 중 양심이 바로 마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우리의 양심이 마음 안에 포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양심은 영 안에 있는 한 기능인 것입니다. 마음에는 생각, 감정, 의지의 세계인 혼과 양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이냐? 양심이 무엇이지요? 옳고 그른 것인지를 인지하는 기능입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은 옳은 삶을 살고 있고, 양심이 없는 사람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 즉 올바른 영,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의 느낌을 던져 버릴 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 즉 영이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가 양심, 교통, 영감인데 그중 양심은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양심이라는 경로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통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요, 영감은 혼을 떠나 직접적인 감각(직감). 즉 이성 밖의 영적인 감각으로 하나님께 속한 감각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직접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영이 신비하다는 것은 교통과 영감을 통해 혼의 세계에서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하나님은 가룟 유다를 비롯한 모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죄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돈을 도로 돌려줍니다. 4절
이 돈을 되돌려 받은 종교인들도 양심에 거리낌이 되니까 이 돈을 받지를 않고는 나그네의 묘지를 위한 땅값으로 씁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이 돈이라도 좋은 일에 쓰겠다는 것입니다. 7절
가룟 유다, 예수님을 죽이려 한 종교인. 그날의 재판관인 본디오 빌라도. 심지어 본디오 빌라도의 부인까지. 주님은 양심을 건드리고 계십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니까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순순히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개인이라면 몰라도 군중으로 함께 있을 때는 군중의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절대로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저들은 자기 손을 머리에 올려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이 담당하리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양심의 가책을 짓누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11-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가? 본디오 빌라도가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그리고 고발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어디를 보고 계실까요? 그들의 양심이지요. “너의 양심이 말하고 있지 않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양심이 바로 서서 교통, 영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양심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손을 씻었지만 양심은 씻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도 예수님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해 죽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2천년 이상 아니 오고 오는 세대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 죽였다고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 중 가장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수억명의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의 죄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유대종교인들과 유대인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난 후 40년쯤(주후 70년) 되었을 때 저들이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 않고 무너지더니 무려 1900여 년 동안 유랑하며 셀 수 없는 박해와 인종차별, 인종학살을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하고 순결한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영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양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 마음은 그 사람의 양심을 말합니다. 양심이 깨끗해지면 마음이 깨끗해질 것이요, 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제 하나님을 보는 영적인 교통과 영감의 세계까지 열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길 즉 영의 길로 계속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첫 문은 양심입니다.
3절 말씀 다시 읽겠습니다. 양심에 걸리니 뉘우칠 수 있습니다.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 제 양심은 썩었습니다. 저는 이 양심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보다 더 악한 양심의 소유자입니다. 솔직히 시인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늘 말씀처럼 가시관을 쓰시고, 온갖 저주의 희롱을 받으시며, 채찍에 맞고 못 박힘을 받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영의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 모두 이 영의 세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예비하신 하늘의 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일 년의 첫째 달 첫째 주로서 임직식이 있는 날입니다.
1. 새로 임직하신 분, 그리고 우리 모두 평강한 사역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직분이 평강한 가운데 쓰임을 받으려면 심지가 견고해야 합니다.
이사야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심지는 새번역으로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바위같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섬기십시오. 반드시 평강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2.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이루어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 주시는 영감, 즉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려는 우리에게 인권, 물권, 영권을 주셔서 반드시 이기고 열매맺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3. 수단도 중요합니다.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수단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수단을 가진 존재입니다. 짐승 중에 가장 약하지만 도구라는 수단이 있어서 짐승을 사냥합니다. 입으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라는 수단을 통해서 풍성한 음악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만 해도 되지만 죽으시는 과정의 뼛속까지 아픈 수단을 다 통과하셨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도들의 행복을 위해 오직 말씀과 기도, 찬양, 섬김의 영적인 방법을 잘 사용하셔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을 살리는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새로 임직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 모두 심지가 견고하고, 모든 일들을 주님 안에서 행하는 양심부터 시작하는 영에 속한 생명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이기는 자, 열매 맺는 자, 교회의 건축자가 다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동문교회 강순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