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된 문배주는 북한 평안도 지방의 전통술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의전주다. 5대째 전통기법을 전수하고 있는 문배주는
경기도 김포시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 내리기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향이 많아지는
문배주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2000년 남북정상회담. 분단 이래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남북한 두 정상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팽팽한 긴장감을 풀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건배를 한 술로 잘 알려진 문배주는
평안도 지방 향토술이지만 제조법은 남한에서 이어져 내려왔다.
평양 모란관에서 남쪽이 베푼 만찬에 문배주가 등장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 주암산 물로 해야 진짜 문배주지”라며 아쉬움 섞인 너스레를 놓았다.
문배주의 달콤한 돌배 향처럼 정상회담 만찬 분위기는 부드럽게 녹아 내렸다.
소읍기행 <전통주 마을> 첫 탐방으로 중요무형문화재 86호인
문배주가 익는 마을을 찾아가 본다.
문화와 역사가 담가내는 음료, 술
술은 인류가 만든 음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전적 정의로는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이다.
술의 기원은 움푹 팬 곳에 저장해 둔 과실이 우발적으로 발효된 것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전해온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에서는 술을 ‘주(酒)’라 표기하는데,
이는 과실이나 곡물로 술을 빚어두면 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마치 물이 끊는 것과 같다 해서 유래된 것이다.
‘물(氵)이 익는다(酉)‘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다채로운 술빚기가 이뤄져왔다.
중국 문헌 <주서>(627~649년)에서는 백제 후기 양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안정된 틀을 갖추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민족에게 술은 한잔의 약용주로, 흥을 돋우는 촉매제로,
슬픔을 삭이는 위로주로, 현실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경감제로
식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리네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던 전통주는 전국에 걸쳐
360여 가지가 있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했다.
하지만 1907년 일제의 주세령 공포 이후 주종이 탁주ㆍ약주ㆍ소주 등으로
단순화되면서 전통주의 위상은 점점 약해졌다.
집집마다 풍기던 술 빚는 향내가 옅어지면서
민속주의 자취도 조금씩 사라졌다.
중요무형문화재 86호, 문배주를 빚는 손
故이경찬(1915~1986) 선생
1986년 지정된 무형문화재 86호 문배주 기능 초대보유자인
故이경찬 선생은 1938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이 경영하던 평양 평천양조장을 상속받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평촌양조장을 버리고 남하해 ‘거북선’이라는 상표로
영업을 했지만 1955년 곡주 생산금지 조치로 인해 양조업을
잠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배주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제조면허를 다시 받았고
이경찬선생은 아들 이기춘에게 그 기능을 전수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해방 이후에도 전통주는 쉽게 자리를 지켜내지 못했다.
전통주의 주원료로 사용되는 곡물 부족으로 설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전통주의 맥을 잊기 위한 손길은 계속됐다.
1986년 면천두견주, 경주교동법주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된
문배주 또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세월을 이겨냈다.
문배주는 ‘문배의 맛과 향이 난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맛이 깔끔하고 뒤끝이 깨끗해 양반들이 애용했던 술로 원래는
대동강 맑은 물로 만들어진 알콜도수 40도의 평양 지방 술이다.
문배주 주조 기능을 전수한 이경찬(1915~1986)선생은 생전에
“평양에서 피난을 온 후로 서울에서 잠깐 술을 빚었지만
1955년 제정된 ‘양곡관리법’으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됐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경찬선생은 조모인 박씨 할머니 대부터 전승해 온
문배주 전통기법을 이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문배주 제조 방식을 고집했고
그 기술은 아들 이기춘(68), 손자 이승용(35)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이 좋아 술이 익는 김포 서암리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선생이 전통증류방식으로 술을 받고 있다.
(이윤정기자)
김포시 통진읍 서암리에 위치한 문배주양조장을 찾았을 때는
추석을 앞두고 한창 분주한 시기였다.
최근 불고 있는 막걸리열풍 등으로 전통주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기에 양조장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밀로 빚은 누룩에 좁쌀과 수수를 이용해 발효시키는 과정은
이미 지난봄에 다 끝이 나고, 맑게 증유된 문배주가 6개월 이상
숙성을 거쳐 보드라운 향내를 드러내고 있다.
양조장 뒤 직접 가꾼 수수밭을 보여주던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선생은
“원래 문배주는 대동강변 주암산 물로 빚던 것이죠.
한국에 흔한 화강암층 물이 아닌 석회암층 물로 빚어야 술의 향이 좋고
맛이 달짝지근해집니다”라고 말한다.
“수많은 연구와 조사를 거친 끝에 김포의 서암리 지하수가 석회암 층
물을 내기 때문에 문배주 빚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라며
이곳에서 평안도 지방 술을 담게 된 특별한 이유를 설명한다.
실제 중국 마오타이, 프랑스 코냑, 영국 스카치위스크, 러시아 보드카 등
세계 명주가 석회암층 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문배주 제조기능을 5대째 잇고 있는 이승용(35)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곁에서 양조장을 놀이터삼아 자랐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문배주 기능을 전수받게 됐죠”라며 가업을 잇게 된 배경을 밝힌다.
요즘에는 탄내를 줄이고 향을 좋게 하는 비법을 공장화시켜 대량생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전통을 잇기 위해 일년에 2~3차례 옛 기법으로 문배주를 빚는다.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서암5리는 개발이 한창인 인근과는 달리
여전히 벼농사를 짓는 조용한 마을이다.
3년 전 문배주 양조장이 들어설 때 반대했던 주민들은 “여기 물이 좋아서
그렇게 향이 좋은 술이 난다면서요”라며 요즘에는 마을의 자랑거리로 여긴다.
현재 문화재관리국과 농림수산식품부가 전통주로 지정한 술은 40여종에 이른다.
이승용선생은 “다른 지역 전통술은 그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기념관도 만들고 홍보에도 열심이지만, 문배주의 경우 뿌리는 평양이고
기술은 서울, 김포 지역에서 이어지다 보니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적은 게
사실”이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하지만 곧 “서암리 양조장 인근에 문배주 기념관을 만들어서 술 만드는 비법부터
맛과 향까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꿈 입니다”라며
포부를 잊지 않는다.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na.co.kr〉
가는길/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시 통진읍사무소 방향으로 향한다.
푸르미르아파트를 지나 서암리 방향으로 오다 ‘문배주 양조장’ 표지판을 따라
서암5리로 들어오면 된다. 대중교통으로는 김포 시내버스 8번, 88번을 이용해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까지 간다. 농협 하나로마트 앞에서
조강리 마을버스 72번을 타고 서암5리까지 갈 수 있다.
문배주 http://www.moonbaesool.co.kr
국립문화재연구소 http://www.nrich.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