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와 관련한 비유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13:44-46/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자신이 함께 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여러 가르침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구함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이것이 제자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는 비유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라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해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든 두 비유와 연관하여서 설명 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4-46에서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마치〜와 같다’는 문장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두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또 하나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이 두 번째 비유에서 '좋은'의 뜻은 '값지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앞서의 '감추인 보화 비유(마 13:44)'와 한 짝을 이룹니다. 이 두 비유는 내용상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에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였다는 것에서 그 보화가 볼 수 있는 자만 -하나님의 은혜 -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에서는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아무나 발견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허락 된 자만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여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것을 발견한 자에게서 어떠한 것인가 할 때, 발견한즉 몹시 기뻐하며 자기 재산 모두를 팔아 소유하는 참으로 값진 가치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가치란 것은 자기가 소유한 재산 전부를 처분하여서 이것을 소유하는 가장 우선시 되는 상위에 있는 가치 개념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재산 일부와 맞먹는 가치 인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재산으로 소유하고, 또한 할 수 있는 한에는 많이 소유할지라도 이것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인 참된 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천국이란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에 있어서 이것이 지닌 가치를 알기에 그동안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에 마음이 있어 왔던 것에서 마음이 떠나 하나님의 나라 이 하나에만 마음이 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 나라를 구함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를 구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서 보면 이것이 갖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지만 감추인 보화에서 설명되었듯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에는 하나님 나라의 보배로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찾아다녔습니다(요 6:22-65). 그리고 자신들이 구하는 떡이 오병이어이나 예수님이 주시려는 참된 떡은 그것이 아닌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인 것에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는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떠난 예수님의 곁에 남아 있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서 자신들에게 생명의 주가 되심에 예수님이 가시는 그 뒤를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어온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소유해야 할 새로운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어온 것들보다 더욱 고상하고 존귀한 것을 발견하였기에 이것을 소유함에 주저나 지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그대로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 모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이 마침내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팔기까지 했다’는 것에 핵심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죠. 발견한 하나님의 나라를 따르고 있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에서 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아주 큰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팔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며 값비싼 희생을 치렀는가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발견되는 것을 통해서 그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에 그의 마음이 가 있는 이 새로운 가치 인식으로 말미암아서 그에게 있는 이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에서 갖는 가치란 것이 철저히 부인<부정>되는 것에서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에서 육의 세계인 육에 속한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는, 좋은 진주를 마침내 발견한 장사꾼은 그들이 발견한 보화요 진주에 매료되어 있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 소유했다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그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밭에 감추인 보화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보는 눈에 있게 한 사람만 보고 있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이 가치 있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 소유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에 자신의 백성이 들어와 차지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듭남’의 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육으로 난 자는 육이며 이러한 육의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신 은혜에 따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하셨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단히 구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큰 기쁨을 가지고서 하나님 나라의 천국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한 그는 그 보화요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의 포기<부정>에 있습니다.
해서 말입니다.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고 그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우리가 주일<주의 날>에 있는 교회를 이룸에 있으며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 우리의 믿음이 있음은 이 세상에 속한 육의 사람이 갈망에 있는 그 모두를 부정하는 것에 있는 것에서입니다. 이렇게 육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는 은혜를 날마다 입고 있는 우리입니다. 주일<주의 날>에 교회 모임에 있는 것은 그 날마다에서 참으로 즐거움의 정점에 있는 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이 있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한갓 개에게나 돼지에게 내던져지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와 돼지들이 구하는 먹이가 아니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이 있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개에게나 돼지에게 내던져지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것들에게서 굴러다니고 무시되는,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것들에게 빼앗김에 있는 것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구함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림에 있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