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부부가 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분들인데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안내장이었습니다.
달려가서 축하를 해 주면 좋겠는데 마침 치통을 앓고 있어 참석을 못했습니다.
그 며칠 후 한권의 시집을 받았습니다. <반려자>란 부부 시집이었습니다.
출판기념회에도 못 갔기 때문에 책을 잘 받았다고 메일을 보냈더니 이런 글이 답으로 왔습니다. 시집 <반려자>는 눈물이고 한이었습니다.
가슴앓이를 글로 쓴다고 다 녹겠습니까.
먼 훗날 아이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한 쌍의 사랑새
민문자
연중 가장 아름다운계절, 진한 라일락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선남선녀들을 매혹시키는 사월의 마지막 일요일, 나는 며느리를 보았다. 나의 며느리가 분명하지만 펴놓고 시어미라고 나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저 잘 자라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훤칠하고 잘 생긴 신랑의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시어머님의 간청에 효도하는 마음으로 둘째 아들을 낳자마자 큰댁 형님께 양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그때 그 일이 평생 나의 마음을 옥죄고 떳떳치 못한 후회스런 마음이 들게 할 줄은 몰랐다.
형님내외가 조금만 우리부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던들 우리는 덜 섭섭했을 것이다.
‘아들 낳아주어 고맙네’ 이소리가 왜 그리 듣고 싶은지 모르겠다. 32년을 기다려도 형님은 그 한마디 말을 왜 그리 아끼고 인색하게 구시는지….
당신 아들이라고 혼사에도 우리에게 한마디 의논조차 않고 그 기쁨을 온전히 자신들만이 누리며 행복해 하였을 뿐이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 철이 안든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처지는 조금도 배려해 주시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묘한 것이어서 나는 가슴속에서 화염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전에는 어디를 가나 형님내외와 우리부부가 함께하는 의좋은 형제였는데 혼인 말이 오가면서부터 형님은 우리를 방외자로 내 몰았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자격으로 부조를 하고 먹을 갈아 밤새워 새 사돈에게 형님이름으로 문안편지를 써 보냈다.
‘제 누나와 형이 사촌이라니….’ 형님은 재주도 좋으시다. 둘째는 형님 아들로 정말 잘 자랐다. 친정어머니와 동생들 부부가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뒷자리에서 사돈이 되어 축복을 빌었다. 고령이신 어머니의 안타까운 외손자 사랑은 여간 눈물겨운 것이 아니다. 손자사랑이 끔찍하시던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친정어머니에게 불효를 한 셈이 되었다.
시선한번 떼지 않고 바라본 결혼식이 끝나고 기념촬영이 있을 때 우리가족이 형님부부 옆에 서있었다. 손님들이 서로 많이 닮은 삼남매를 보고 ‘사촌끼리 참 많이도 닮았다고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폐백실에서 형님내외분이 함박꽃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랑신부의 예를 받는 동안 우리부부는 반대로 어색한 자세로 남의 일 구경하는 방관자 일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긴장한 모습, 가라앉은 목소리로 귀감이 될 말로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옆에서 나는 “한평생 한 쌍의 사랑새로” 라고 정성으로 쓴 봉투하나를 주고 형님내외 버금가는 부부금슬을 기원했다.
전화벨 소리에도 가슴은 덜컹거렸다. 워커힐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신접살림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공항으로 나갈 시간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백년해로를 향해서 내딛는 첫발이 열흘간의 아메리카 여행이라고 했다. 제 누나의 코치를 받고 한 전화인줄 알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좋았다.
한 살 연상인 신부는 사려 깊은 언행이며 음전한 자태로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서로 존중하는 부부가 되어 사랑과 인내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생활로 복된 가정을 이룩하게 될 것을 믿는다. 나는 이들 부부가 험난한 세파를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정성된 마음만을 보탤 뿐이었다.
형님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랑신부에게 사돈댁에서 보낸 이바지 음식을 나누어 들려보냈다. 안부와 덕담을 나누는 대화중에 며느리는 “ 어머니 ” 라고 해서 나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자기신부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고 알리지 않겠다던 아이, 한 번도 엄마라는 소리를 하지 않은 둘째 아이다. 제 누나와 형은 안절부절 못하는 어미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그저 일축해버리고 만다.
“엄마가 오버 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전화통화로 두 번 더 “어머니”라고 했다. 작은어머니는 분명 아니었다.
우리부부는 가슴 아린 사연을 달래는 방편이었는지 어쩌다보니 부부 수필가, 부부시인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동경하기만 했던 시인으로서 첫 부부시집을 내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간에 우리부부는 음으로 양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 왔기에, 한여름 밤을 택하여 한 끼의 저녁식사와 시낭송과 아름다운 가곡이 있는 분위기를 선사하여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자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서울의 한 복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이상향에 당도한 듯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참 아름다웠다. 아주 멋진 문학의 밤이 되었다.
존경하는 스승님들을 모시고 가족과 친지, 여러 문인 동문들이 모두 참석했는데 이 뜻 깊은 행사에도 가장 가까운 형님부부와 작은 아들부부가 함께 하지 못했다. 첫 시집 『반려자』에는 우리의 아픈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으니 알릴수가 없었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살아온 그분들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쪽 일가친척 누구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한다고요?”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렇게도 단단히 조심했는데 하늘의 뜻이었는지 출판기념회 초대 메일이 다른 손님한테 가야 되는데 새로 바뀐 그 애 메일로 들어갔다. 안 알리려 했다고 그저 모른 척 하라고 일렀다. 그래놓고 혹시나 하고 자꾸만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기다려지는 심사, 나 자신이 서글펐다.
십년 전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셨어도 아무런 동요 없이 그대로 잘 자라준 것만도 자랑스럽고 고마워했는데 이렇게 기다려지는 나의 마음이 얄밉다. 생가부모에게 오가면 저를 길러주신 부모를 배반한다는 생각이 드는가, 젖 한번 못물어보고 우유만 먹고 자라서 냉철한 이지력만 발달했단 말인가.
잘 자랐다고, 훌륭하게 잘 키웠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받는 그 아이에게 남편은 그것이 잘 자란 것인지, 잘 키운 것인지 모르겠단다. 시집가서 남매를 둔 제 누나는 울면서 말한다.
“큰아버지, 어머니보다 일 년이라도 더 살아 달라고….” (원고지 15.8매)
첫댓글 예전에는 양자로 보내는 경우가 흔하였지요. 저희 고사촌도 큰집 양자로 가서 고모님이 마음고생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가슴이 찡해옵니다. 결혼한 신랑신부가 친부모 양부모님께 효도했으면 좋겠네요...
남다른 과거를 가슴에 묻고 사는 이들의 한이 눈물겹습니다. 사람 사는 모양이 참 여러가지구나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