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 보지 못했다.
미친 듯 긴 문장과 두터운 책 두께라는 소문에 겁먹어서
애초에 도전해 볼 용기도, 긴 시간을 감당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책에서 나오는 마들렌 과자의 이야기는 잘 안다.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
소위 ‘프루스트 효과’라 일컬어지는 냄새와 기억의 연관성.
특정한 냄새에 자극 받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현상.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고, 너무나도 자주 인용되는 지라
미처 책을 읽지 않고서도 마치 읽고서 알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들렌 역시 그게 뭔지 잘 모른다.
이미 먹어봤을 수도 있고, 또 언젠가 먹을 수도 있고.
프랑스 과자라니 무척 달 것이고, 버터 맛이 넘쳐날 터.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먹는 홍차라니, 쳇! 그 맛이야 뻔하지.
착각과 편견으로 기억을 만들어가는 나로선 솔직히 마들렌엔 별 기대가 없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나도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냄새가 있다면 좋겠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유달리 유년의 기억이 부족하고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루함이 넘치는 나로선
뇌 속에 깊이 잠든 아름다운 기억을 일깨워 줄 나만의 냄새가 절실하다.
내게 있어 냄새가 과거를 회상시키는 촉매가 되지 못한 것은
삼십 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 뛸 과거가 없어서라기보다
내 삶에서 어떤 성장의 결, 즉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뭔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경우 성장이란 자의식의 각성과 함께
나와 남, 나와 세계라는 최소한의 구분과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성장 자체가 가진 에너지가 거칠고 거대하여 잘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보통의 경우 성장이 만드는 구분과 분리는 상처와 상실을 남기기 마련이다.
우린 그걸 ‘성장통’이라 뭉뚱그려 부른다.
만일 성장통이 두려워 여전히 구분과 분리의 경험을 거부한다면 어찌 될까?
생물학적인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유년기의 착각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진 않을까?
안타깝게도 우린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 무엇이 남겨졌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이 든 자의 추억 더듬기는 보통 참혹하다고들 하지만
때로 드물게 회상은 우리 삶의 또 다른 ‘결정적인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 삶이 만들어낸 성장의 면면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라면 말이다.
내게 있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소 엉뚱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와이 슌지가 만든 영화 ‘러브레터’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이전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증명하는 사실의 매개로 등장한다.
동명의 남자애가 남긴 순순한 감정의 기억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서목록카드 이면에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이건 냄새가 아니지만 ‘마들렌’보다 더 짙은 향기를 지니고 있다.
운이 좋은 거다. 단지 성장만이 아닌 귀한 감정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니까.
얼마 전 죽로재를 찾아 ‘올해의 차’들을 시음했다.
맹송과 무량산, 포랑산과 ‘죽로재 비전의 병배차’ 그리고 묵은 노만아.
모두 품질과 가격에서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무게감을 지닌 차들이지만
포랑산과 비전의 병배차 그리고 묵은 노만아에는 내게 또 다른 중량의 기울어짐을 준다.
전날 마신 2015년 포랑산에서 사라져 버린 어떤 냄새.
갑자기 나의 의식을 5년 전 어느 봄날로 돌려버린 괴괴한 냄새.
노반장이니 노만아니, 구분과 분별의 말 가운데서
색과 소리는 사라지고 오직 냄새를 따라 되돌아간 의식의 세계.
오년 전 그 봄, 그 때는 내게 어떤 의미일까?
포랑산 그 차에서 나는 그 향기는 과연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마들렌’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2~30년이 더 지나 매듭이 분명해지면 그 때는 알 수 있겠지.
그 때가 되어서도 봄과 여름의 어중간한 계절의 틈새에서
나의 마들렌이 되어줄 지도 모를 포랑산의 차를 마실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
늦은 밤. 생명을 이을 깊은 잠을 위해 자제해야 하건만
결국 나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달그락거리며 찻잔에 손을 뻗는다.
분명히 아직 그 맛이 남았을 2015년의 포랑산을 과감히 개완에서 털어내고서
올해 새로 나온 포랑산을 풀어헤치며 내가 음미할 기억이 있는지 더듬어본다.
첫댓글 멋진글입니다, 저도 특정한 향기에 떠오르는 추억이 꽤 있습니다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던 것이 눈에 선한데,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란 말인가요? 세월 빠릅니다.
그날의 찻자리가 즐거웠습니다. 언제 또 노만아 한 번 더 드시러 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