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3장 1-6절
설교제목 : 살아있으나 죽은 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는 봄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영하의 날씨가 우리의 옷을 두껍게 했습니다. 반칠환 시인은 그의 시 ‘두근거려 보닌 알겠다’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봄은 어디에서 오는지 일러줍니다.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봄이 꽃나무를 다시 피게 한 것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여는 것임을 노래합니다. 삭정이는 산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붙은 가지를 가리킵니다. 이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내 심장이 삭정이처럼 말라 있다면, 어떤 봄도 맞이할 수 없고, 어떤 희망과 생명도 키울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봄은 두근거리는 내 가슴, 나의 감정에서 일어나야 함을 일러줍니다. 시인은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고 고백합니다. 100년동안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절을 맞이한다 해도 두근거림이 없다면, 설레임이 없다면 어떤 꽃도 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삭정이의 말라비틀어진 감정이 아니라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 새 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진 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일곱교회 중 네 번째 교회인 사데교회에 편지합니다. 이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 약 48km에 위치한 도시로 루디아의 수도였습니다. 현재는 터키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상업이 번성했고, 염직, 양털 염색과 금모래가 유명하여 사치와 부의 도시로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이런 사데교회에 편지하는 발신자인 그리스도를 가리켠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미 1장에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은 각각 성령과 천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천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합니다. 진리의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깨닫게 하여 온전한 길로 지도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천사도 마찬가지로 영혼의 안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중개하여 안내하는 일을 수행합니다. 일종의 무의식과 의식의 중개이자 의식을 보조하면서 새로운 변환의 길로, 보다 깊은 신성한 길에 도달하도록 인도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진리를 분별하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헤아리고 안내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분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보내셔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고 계심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2천여년전의 요한의 고백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내가 나 스스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 생각은 결정적인 순간에 산산조각납니다.
극지방에 살고 있는 래브라도 반도의 나스카피 인디언이 있습니다. 이들이 극한의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200만년 된 내면의 위대한 인간, 미스타페오Mistapeo가 보내는 꿈의 메시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례도 종교도 없이 살았던 그들은 유일한 개개인이 이런 내면의 안내자를 따라서 사냥하고 채집활동을 하여 오랜시간 동안 생존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그들의 삶은 문명에 노출되었고 그들이 이런 내면의 위대한 인격과 단절되면서,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알콜 중독, 가스흡입중독 등과 같은 삶으로 고통을 받았고, 구호품에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현상은 오늘날 전통적 종교적 가치, 내면의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문명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융은 우리의 꿈이 바로 그런 신의 메신저임을 이야기하며 꿈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완고하게 [미래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아는 것만을 알지만, 만약 오직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기를 포기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풍부합니다. 하지만 꿈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경멸하고, 우리는 끝도 없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많은 사소한 꿈들과 그것들의 힌트에 겸손과 복종으로 따르는 많은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미래이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는 무의식과 그 암시보다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의식 세계에서 헛되이 구하는 것을 찾을 공정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밖에 어디에 있을 수 있나요? [C.G. Jung(1984) : Letters 1951–1961 p.586f.]
여러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자는 인생의 위대한 안내자를 따라 든든하게 삶을 살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
요한은 본격적으로 사데교회에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편지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1b)”
주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알고 있는데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데 교회가 누린 부와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이 흠모할 만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 죽은 자였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너무나 무섭게 들립니다. 겉은 생명이 있는 듯 하지만, 속은 죽은 자와 같이 생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납니다.
사형을 며칠 남겨 놓은 한 남자가 독방에 홀로 앉아 있었고,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 손바닥만한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진정한 삶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남아 있는 날들을 매순간 충분히 느끼며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사형을 앞두고 며칠을 지금 여기서 살아있는 것처럼 보냈습니다. 사형집행을 불과 세 시간 앞두고 신부가 들어왔습니다. 고해 성사를 하고 마지막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는 홀로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신부를 자신의 방에서 내보내려 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신부가 밖으로 나가자 사형수는 혼잣말을 합니다.
“저 자는 죽은 것처럼 살아 있어!” “그는 죽은 것처럼 살아 있어!”
그 신부가 죽은 자처럼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러 온 신부는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던 것입니다. 참 무서운 혼잣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의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무한 반복 운동의 사슬에 빠져서 어떤 삶의 가능성과 생동감을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하루가 설레이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깨어나라고 주문합니다. 내 삶이 어떤 지경인지를 각성해야 합니다. 무의식성으로 점철된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 온전히 나의 마음과 생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둑같이 신속하게 비밀스럽게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정신에너지를 강탈당함으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지 않은지 늘 살피고, 나를 깨워서 내게 맡기신 과제를 온전하게 수행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 : 흰옷
사데교회에는 책망할 것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은 흰옷을 입을 것이고,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은 흰 옷입니다. 이 흰옷은 이전의 흰돌과 마찬가지로 하양, 백화의 이미지입니다. 흰 옷은 연합을 위한 첫 번째 국면입니다. 요한계시록 19:7-8절에 어린양의 신부로서 단장한 빛나고 깨끗한 옷과 유사합니다. 흰 옷은 새로운 변환과 연합을 위해 정신화, 영성화를 통하여 자아가 정화된 것을 표상합니다. 마치 신부가 결혼식을 앞두고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순수하고 정화된 태도로 새로운 존재의 변환을 위해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개인에게는 어떤 혼돈과 암흑, 어두운 콤플렉스에 지배되었던 상태에서 새로운 변환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 시대에는 본능과 자연에서 탁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흰 옷은 성취될 수 있는 더 높은 목표였습니다. 흰 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고, 영원한 보증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삭정이같은 말라붙은 가지가 아니라 순수하고 정화된 태도로 단장하여 새로운 연합과 변환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