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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7장 1-5절 비판의 악
여러분 남을 비판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이 질문보다는 ‘남을 비판하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남을 흉보고 비판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비판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기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남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 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칭찬과 인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기가 높임을 받으려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씨앗으로 심는 사람이 비판을 열매로 거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너희가 비판한 그대로 너희도 역시 비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저울질한 그 기준에 따라 너희가 저울질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헤아린다는 뜻이 원어상에서는 저울질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저울질하는 그 저울질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까요? 아니면 율법일까요? 아니면 사람의 전통일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 외에도 많은 랍비들이 세워놓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거나, 사람들 간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랍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게 랍비라고 했던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랍비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해주었기 때문에 랍비가 바른 해석을 하여 가르치면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바른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랍비가 잘못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치면 잘못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랍비들이 성경 해석이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부분을 적용할 때는 랍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랍비의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파, 저 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사람마다 자기가 마음에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결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르치는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언제나 성경에 집중해야 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해쓰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써 여러분들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신앙이든지 어른 신앙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배워서 예수님앞에 서기 위한 경건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또 사두개인들은 훌륭하다고 하는 랍비들로부터 들은 성경해석을 자기들의 삶에 적용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얕보고 비판하는데 그 랍비들의 가르침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저울은 바로 랍비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을 장로들의 전통, 떠는 사람의 전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저울의 기준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랍비와 장로들의 전통이 기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첫째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로부터 배웠던 도덕성이 많이 좌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각 교단에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를 좌우하며 성도들의 삶을 좌우할 때 영적인 판단기준이 빗나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마음에 저울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세운 법과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기준이 되어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종교 개혁이후에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이 옳으냐 아니면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가 옳으냐 하면서 옥신각신할 때 그들에게서 배운 성도들이 혼란해 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거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로인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단들이 일어나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자기들만의 새로운 가르침을 내놓고 사람들을 미혹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알 것은 언제나 성경 해석의 최종권위는 성경 자체이며 성경을 예수님 안에서 가르치시고 계시는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들은 성령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 가르침을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스스로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이 말씀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에게 듣고 배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에게서 배운 사람이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배운 사람이 남을 판단할까요?
하나님에게서 배운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처럼 약하고 깨지기 쉬운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존귀하게 여기시는 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자주 넘어지는 일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과 겸손함으로 그에게 자세히 가르침으로써 잘못된 지식과 행동을 바로 잡고 하나님 나라의 선하고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강하고 굳센 독립체로 세워줍니다. 그러면 그 역시 자신의 삶을 바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사랑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부지런히 가르쳐 세워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복음을 가지고 전하는 교회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따르는 교회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가진 교회를 통하여 겨자씨와 같이, 또 누룩과 같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비판하는 이 비판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퍼져나가지 못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내실 강력한 힘과 권능을 증거하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마귀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멸망시키려는 꾀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약해빠진 교회는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정신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가며 마음에 남겠습니까? 눈은 뜨고 있으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멀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겨우 마음에 싹이 난다 하더라도 뜨거운 태양 아래 있는 돌밭처럼, 또 힘 쎈 가시에 억눌려 있는 가시밭처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더 가식적인 것은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교회에 진심으로 예수님의 뜻에 맞추는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가 크게 보이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죄가 더 크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는 언제나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스데반집사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죽는데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은 의롭기 때문에 죄인을 죽이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지를 알았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죄인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한 죄인들을 얼마든지 용납할 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그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한 것 중에 빌립보서 4장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관용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죄를 범했거나 교회 밖에 있는 죄인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도 그들을 볼 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회개의 대상이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차별을 두지 않고 만났고 차별없이 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는 의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의 허물을 보고 계십니까? 바뀌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정죄의 마음을 가지고 보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정죄한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정죄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한 죄값을 치루는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절을 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리고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비판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대로 믿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고 계실 것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 바로 성령충만이고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여러분 비판하는 자의 마음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자기 안에 비판자인 마귀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참소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정죄하는 자며, 송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의 저울이나 사람의 전통의 저울이나 마귀가 주장하는 그 헤아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관용과 진리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 위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들의 마음이 바뀌고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속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사람의 행동만을 가지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면서 어루만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보시며 내면을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 찾는 자들을 찾아가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누구 안에서 그 일을 하십니까?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린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과 빌립과 안드레와 나다나엘과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즐거이 하나님 나라 천국을 위한 산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죽노라”하면서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실로 사랑하십니까? 혹시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그를 비판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고 형제 자매와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진실로 사랑하신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십시오. 사랑으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주십시오. 교회의 형제, 실족한 형제, 교회 밖의 이웃을 향해 예수님이 주신 천국복음을 들고 가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랑과 믿음과 진리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축복이 이 시간부터 계속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