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9일
안동시엔 전통사찰이 열일곱 곳이다. 유교가 가장 지역임에도 사찰과 유물이 많다.
안동시 전통사찰과 불교 유물을 보려면 하루 가지고는 턱없이 보족하다. 2박 3일은 해야 한다.
이번엔 안동 시내 3곳, 서후면 3곳 가운데 2곳, 한 곳은 풍산읍이나 다음에, 북후면 4곳 모두 돌았다.
봉정사는 2018년 8에 들른 곳이며 글도 썼다. 이번은 두번 째이며 매표소부터 걷기로 하였다.
(본 카페 '절을 찾아서' 5번 , <봉정사 - 세계문화유산> 참조)
천등산 봉정사(天燈山鳳停寺) /전통사찰
-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매표소에서 절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예전엔 절 앞까지 갔다. 놓친 것이 있을 수 있어 이번엔 걸었다.
솔숲이다. 걸을 만하다.
안동 명옥대 /경북 문화재자료
예전에 이 누각을 놓쳤다. 누각 뒤엔 암반이 있고 암반 위로 물이 흐른다. 빼어난 경치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일주문
통일나무, 나이가 다른 느티나무 뿌리가 엉켜서 둘이 하나가 되었다.
희망이다. 바람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통일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생명력이란 대단하다.
2018년에 왔을 때도 한 곳을 수리하고 있어 봉정사를 온전히 보지 못하였다.
이번엔 누각,멋진 누각을 수리하고 있다.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면 오른편엔 무량해회, 왼편엔 화엄강단이 있다.
예전엔 이 무량해회 건물을 보수하고 있었다.
무량회해
대웅전 안
화엄강단 뒷모습.
극락전을 바라보고 오른편엔 화엄강단 뒤, 왼편은 고금당이다. 대웅전 영역보다 이곳이먼저 만들어졌다.
극락전 /국보,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극락전이 지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고려중기에 만들었다.
고금당 /보물, 처음엔 우화루와 연결된 건물이었으나 우화루는 지금은 영산암에 가 있다.
화엄강단을 지을 때 같은 목수가 만든 건물이며 조선중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극락전 안
삼성각
대웅전 /국보
툇마루가 있는 대웅전이다. 이런 양식은 잘 볼 수 없다.
화엄강단 /보물
영산암이 보고 싶었다. 영산암도 수리하고 있다. 돌린 발걸음에 아쉬움이 진하게 밟혔다.
성보관 뒤편이며 템플스테이 하는 공간인 모양이다. 백련암이란 안내판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봉정사에 와야 한다.
대웅전 앞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극락전 앞에서 또 다른고요함으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영산암은 매우 아름다운 절이다. 이곳에서 쉬어 가면 좋다.
그리고 걸어서 개목사를 갔다 온다. 걸어서 0.9km이다. 물론 산을 타야 한다. 산 정상 가까운 곳에 개목사가 있다.
차로 간다면 약 9km로 20분 가량 걸린다. 나는 이번엔 차로 간다. 다음 기회엔 꼭 걸을 참이다.
천등산 개목사(天燈山開目寺) /전통사찰
-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동굴에서 수행,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비춰주었다. 99일만에 깨우침을 얻고 99채 절을 짓고 천등사라 했다.
(인터넷 찾아보기, 두 가지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
의상대사 제자인 능인이 천등굴에서 수행, 천녀가 도와 도를 깨달고 큰절을 지었다.
(개목사 원통전 설명문에 적힌 내용)
처음엔 흥국사라 하였다. (또는 천등사라 하였다) 개목사로 절 이름을 바꾼 데에는 전설이 있다.
개목사란 이름이 생긴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나는 <영가지(永嘉誌)>에 실린 내용으로 원래는 절 이름을 흥국사(興國寺)였다.
당시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많았는데 절 건립 뒤에 소경이 없어졌다 하여 이름을 개목사(開目寺).
또 다른 이야기는 조선 초기의 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와서 보니
안동의 지세가 눈병 환자가 많을 형상이어서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발췌하여 아주 조금 고침)
개목사 원통전 설명문엔 첫번 째 설만 적혀져 있다.
고려 정몽주가 이 절에서 공부하였다는 글도 있고, 분명한 것은 맹사성이 절 이름을 개목사로 고친 것이다.
이런 전설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만들어낸 말이다.
개목사 창건과 그 뒤 사적은 전하여지지 않지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절인 것은 분명하다.
큰절이 들어 설 자리는 아닌 것 같고 통일신라초기에 이곳에 99채 절을 지을 까닭이 없어 보인다.
개목, 눈이 열리다. 이 말은 도를 깨우쳤다는 뜻일 게다. 어느 승려가 크게 깨우친 절이 아닐까?
원통전 /보물
1969년 해체, 보수할 때 상량문에 적힌 기록을 보아 조선 세조 3년(1457년) 고쳤다.(수리하였다)
조선전기 건출 양식을 보여주는 원통전이며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신다.
천등산에서 본 일출, 청량산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