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언제 후회를 하나요? 아침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기 까지 무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우리는 후회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선택과 후회를 수 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지금, ‘후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중세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변화한 ‘후회’에 대해 김남시 문화예술이론가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Les Remords d’Oreste (The Remorse of Orestes) 1862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의 <오레스테스의 후회>(1862)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렸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가있는 동안 불륜에 빠진 그의 생모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이 비극적 사건의 원인은, 오레스테스의 증조부 펠롭스의 배은망덕한 살해행위가 초래한 저주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레스테스의 후회는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후회와는 다르다. 그 후회의 고통은,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행위가 결국 운명의 힘을 따른 것임을, 개인의 결단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저주의 실현이었음을 깨닫는 충격에서 온 것이었다.
중세 시대, 후회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는 종교적 의미의 속죄와 관련되어 있었다. 속죄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과거의 자신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가능성은 더 커졌다. 근대에 들어와 후회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운명을 믿지 않기에, 근대인들은 자기 손으로 행한 일들의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아야 했다. 인간의 죄를 사해주고 인간을 거듭나게 할 초월적 존재를 믿지 않기에, 후회의 고통은 갱생의 희망과 연결되지 못하게 되었다. 근세 철학자 스피노자는 후회를 “자유로운 정신의 결단에 의해 행했다고 믿는, 한 행동의 이념에 수반하는 불쾌함“이라고 정의한다. 후회가 다른 정념들보다 더 크고 격정적인 불쾌함을 초래하는 이유는 후회에는 ”우리 자신이 그것의 원인“이라는 이념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한 것이라면, 잘못된 선택이 주는 불쾌함의 정도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왜 그때 고백을 하지 못했던가, 왜 그 집을 사지 않았을까, 왜 이 직업을 선택한 걸까, 이 ‘잘못된’ 선택들의 책임이 고스란히 ‚자유롭게’ 그를 선택했던 우리 자신에게만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는 하나의 선택의 결과가 주는 괴로움에다, 그 선택을 한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한 자학이 추가된 이중의 고통이 된다. ”후회, 너는 무서운 복수의 여신, 구멍을 파는 뱀이니까. 먹은 것을 다시 되씹고, 자기의 똥까지 두 번 먹는 너야말로 영원한 파괴자이며 영원한 독약의 제조자다!”라는 실러의 말은 후회의 이러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후회의 가능성은 더 늘어난다.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도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사회야말로 그런 방식의 후회를 양산한다.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의 일상은 늘, 무엇인가를 선택해 소비하는 행위로 채워져 있다. 한 잔의 커피, 햄버거 한 개를 먹으려 해도 선택의 가짓수는 만만치 않다. 어떤 브랜드의 가게에 갈지, 어떤 메뉴를 고를지, 커피에는 시럽을 넣을지, 사이드 메뉴는 뭐가 좋을지, 거기다 돈을 조금 더 내면 감자튀김과 음료수를 곱절로 준다는 유혹까지, 우리는 매일, 적지 않은 선택의 상황과 맞닥뜨린다.
잘못 선택한 점심 메뉴 정도의 후회는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예를 들어 핸드폰을 바꾸거나, 새 TV를 마련하는 일 앞에선 주춤한다. 무이자 할부가 우리의 경제능력을 넘어서까지 선택지를 확장시키고 나서, 경쟁사들이 제공하는 유, 무형의 덤과 복잡한 할인 혜택까지를 ‘꼼꼼하게’ 따져 보아도 후회할 일은 반드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직업이나 결혼, 출산 등의 선택과 비교해 보면 이 자잘한 일상의 선택들은 사실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결정짓는 것도 아닌, 기껏 며칠이나 몇 주의 만족을 주고 끝나버릴 이 사소한 차이들 앞에서 힘겨운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운명이나 속죄의 가능성을 믿던 이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 자유롭다고 으스대는 근대인의 삶이 왠지 더 비루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글 | 김남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과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술과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감성을 통한 세계 인식이라는 미학 Aesthetics 본래의 지향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권력이란무엇인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노동을 거부하라』,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