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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묵상글 들(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순교보다는 순애가 낫겠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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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순교보다는 순애가 낫겠다.
오늘 한국 순교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순교자라는 말에 뜬금없이 시비를 걸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순교자라는 말을 과연 써야 되는가?'에 관한 시비입니다.
이런 시비랄까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코로나 방역과 관련하여
생명과도 같은 예배를 포기하느니 순교하겠다고 운운한 사람들 때문에
순교라는 말이 모독을 당하거나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말한 순교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이때 교회는 이기주의적인 집단에 불과하지요.
그렇습니다.
순국이라는 말이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듯 순교라는 말은 교회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인데 전교가 종종 하느님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기보다 교세 확장의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순교도 그럴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의미라면 순교보다는
순애보라는 말이 있듯이 순애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위해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보편적인 사랑이고,
첫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우리의 선조들은 어땠을까요?
너무 바보스러운 질문이겠지만
천주교를 위해 순교한 것일까요? 하느님을 위해 순애한 것일까요?
우리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조상 제사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반상의 차별 문제입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이 신앙 때문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한 것은
겉으로는 조상에 대한 제사 거부지만 속 내용을 보면 아무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는 주님 가르침의 실천 때문이지요.
우리의 근원 문제 곧 육신의 아비가 우리의 근원이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의 근원이라는 것이고,
최고 통치자의 문제 곧 왕이 우리의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의 최고 통치자라는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친 것인데
이것을 당시 조정은 기존 질서를 부수는 것으로 보고 박해를 한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이에게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프란치스코도 육신의 아버지가 복음 말씀대로 사는 것을 못하게 하자
이제부터 하느님만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하며 아버지와 절교했잖습니까?
다음으로 우리 선조들이 박해받게 된 문제는 반상의 차별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뿐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 당시 반상과 서얼의 차이가 분명했던 신분질서를
깨는 것으로 보고 박해를 한 것입니다.
백정이었던 황일광 선조의 얘기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아시다시피 조선 시대 백정은 제일 천한 신분이었지요.
그런데도 당시 신앙 공동체가 그를 형제로 대해 주자
자기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다고 곧 살아서 믿는 천주교가 첫 번째
천당이고, 죽어서 가는 천당이 두 번째 천당이라고 말했으며,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들에게 내가 비록 천당에 가지 못할지라도
반상의 차별이 없는 천국을 이미 여기서 살게 한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다고 하였다지요.
우리 천주교를 가톨릭이라고 하고,
사도신경을 욀 때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데
아시다시피 가톨릭의 뜻이 보편적이라는 뜻이잖습니까?
그런데 우리 가톨릭이 보편적이려면 교리가 언어와 민족과 종교를 불문하고,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신분의 차이를 불문하고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사랑이 보편적이고,
가르칠 뿐 아니라 실천하는 사랑이 보편적이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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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고도미니코 신부님. 순교자 대축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2020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이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9월 순교성월의 막바지에 이르는데 즈음하여 특별히 1801년에 배교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신앙인의 삶을 통해 순교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자랑스러운 순교자는 못되었지만 고독 속에서 힘겹게 일어나 끝까지 하느님을 따른 최해두의 신앙고백은 또다른 차원의 순교를 묵상케 합니다. 최해두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지만 그의 부친이 대신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하고 유배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는 친구도 책도 없이 지옥이 가까이 오는 듯한 유배중에 배교행위에 대한 자책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두루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하여 두어줄 글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본래 주님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나는 이미 교리를 듣고 거의 20년 죽기로써 봉사하노라 하다가, 시절이 불행해서… 나같이 공덕도 없고 죄많은 인생은 썩고 썩어 동국봉교인(東國奉敎人)에게 내리신 그리 흔한 치명의 큰 은혜에 참여치 못하고 원통히 나혼자 빠져나와 이 흥해 옥중에 잔명이 붙어 살았으니, 이 무슨 일인고!”
이런 상황에서 그는 복음의 진복팔단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진복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유배의 외로움과 천주학 죄인이라는 주위의 말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고백성사를 볼 기회도 없는 그에게 힘을 북돋아 준 것은 통회의 눈물과 조만과경이었습니다. 죄를 지어 예수를 두번 못 박은 것을 가슴아파하지만 “예수와 성모와 하느님을 의뢰하여 힘써 선을 행하면 도와주시니 의뢰할 곳이 곧 이에 더 지날 곳이 없으리라”고 고통속에서 믿음과 희망을 깨닫게 됩니다. 유배 중에 그는 매일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으로 참된 순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도끼에 죽는 이는 잠시 치명(致命)이어니와, 은수자와 고통속에 수도하는 자의 공부는 곧 일생의 치명이라 더욱 어렵다 하고 계시니 우리의 치명터를 만났으니 감수여부에 달려있도다”
자신의 배교를 가슴아파하며 괴로움에서 시작한 그의 자책은 통회의 눈물과 귀양살이의 고난을 통해 마침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참된 순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배교하지 않고 끝가지 신앙을 지켜 승리의 월계관을 받은 선조들의 순교신앙을 본받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한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처럼 앞서 설명한 배교자 최해두 처럼 다시 통회하고 뉘우치며 일상에서 만나는 오해, 비난, 박해, 수치 등을 감내하고 낙담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항구한 기도로 주님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순교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교의 삶을 살도록 선조 순교자들은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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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키엣대주교님. 하느님 나라의 진리(연중 제25주일)
사람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에서 나약한 사람들은 점점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모두가 똑 같은 당신의 자녀이며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나약하고 불행한 그들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통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공정이란 무엇입니까?
조금 일한 사람과 많이 일한 사람이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는 다릅니다.
매 시간마다 일꾼을 찾아 나서는 주님의 모습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오후 다섯시에 부름 받은 일꾼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뛰어나고 운이 좋은 사람이지만 오후 늦게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부족한 것이 많고 운이 없는 사람,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포도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주님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지 않는다면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은 일꾼과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일꾼 모두가 똑 같은 상을 받는 것이 하늘나라의 진리입니다. 은총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기에 그 누구도 그것을 더 많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바램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의 도리 역시 세상의 도리와 다릅니다. 주님의 셈은 인간의 셈과 다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으려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익에 대한 이치를 따지지 말고 마음의 이치를 따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의 이치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웃을 돌아보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의 바램처럼 살아간다면 주님의 나라는 한없이 넓어질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길을 배우고 언제나 주님의 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늘나라와 세상의 진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2. 만일 내가 아침 일찍 부름을 받았다면 하늘나라의 진리를 공정하다고 생각하였을까요?
3. 만일 내가 오후 늦게까지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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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 용서> 김혜윤 수녀님.
[말씀묵상]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 용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제2독서 (로마 8,31-39) 복음 (루카 9,23-26)
자신을 버린 채 십자가를 지는 것이 구원이라는 ‘역설’
생명 주인이신 주님을 더 강한 믿음으로 긍정하라는 의미
매일 체험하는 기적은 진정한 삶으로 다가가는 영성 비결
가톨릭신문. 발행일2020-09-20 [제3212호, 15면]
회원들의 수가 많은 수녀회 책임 소임을 하다 보니 스스로 민망함을 자초할 때가 많습니다. 기어이 내 옳음을 주장하고 그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를 상대로 극도의 심리전을 펼칠 때입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확실하고 비장한 용기를 낸 것이라 하더라도, 이기기 위해 냉정해지고 조바심을 내며 집착하는 악순환을 답습할 때 이미 자존심은 무너집니다. 완고함과 강함이 부끄러움이기 때문입니다. 기어이 밀어붙여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어쩌면 사명감이나 영웅적 희생이라는 허울에 휘말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누가 살고 누가 죽은 것인지…. 묻고 또 묻게 되는 일이 지금 제 소임인 듯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상실의 두려움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충만함과 인간 품위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루카 9,51-19,27)을 준비하는 내용(9,22-5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예수님 신원을 고백한 베드로의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점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22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어떤 것들이 요구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지금까지(9장)의 내용이 열두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23절부터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이기에, 더구나 십자가형이 실행되고 있던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럽고 치명적 난제였기에, 부연설명이 필요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23절(본문의 전반부)의 부연으로 24-26절(본문의 후반부)이 동반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왜 구원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 죽어야 산다는 역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 뒤를 바짝 붙어 걷는 지속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어떤 대상 뒤를 쫓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장서 가고 있는 그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께 시선을 두어야만 하고, 그분께 시선을 둔다는 것은 그분과의 밀접하고 인격적이며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를 전제로 본문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조건을 ‘자신을 버릴 것’, 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질 것’으로 알려줍니다.(23절)
① “자신을 버리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때(루카 22,57) 사용된 그리스어 ‘아르네오마이’입니다. ‘... 를 부인하다’, ‘외면하다’, ‘등한시하다’, ‘버리다’, ‘모른다고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결국 이 단어를 통해 제시된 내용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체하고 외면하라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행복을 부정하고 등한시하며 스스로를 슬프게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예수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 23,39)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 다음 내용들을 잘 읽어봐야 합니다.
②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구절의 공관복음서에는 발견되지 않고, 루카복음서에서만 발견되는 표현이 “날마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듯이, 그리고 구약성경의 광야 여정에서 그날 분량의 만나만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루 단위의 결단과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평생을 늘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소심하게 살게 하려는 이율배반적 옹졸함이 아니라 매일을 충만히 살게 하는 하느님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 현존이 매일 우리에게 확인되고 매일이 기적을 체험하는 시간과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필요없는 존재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사실 십자가형은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단번에 종결되는 죽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매일의 십자가야말로 진정한 삶에 의심 없이 다가가게 하는 영성적 비결일 수 있습니다.
■역설의 근거
복음에서 제시한 파격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 중의 하나가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그는 하느님이야말로 항구히 자신의 편에 서 계시는 분임을, 그래서 누구도 그분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39절) 이런 깨달음과 믿음이 있었기에 바오로는 기꺼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지혜서(제1독서)에서는 순교가 가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 3,1) 즉 우리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순교의 고통은 사실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 대신 겪으시는 일이고, 따라서 순교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해주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시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난감하고 기괴한 역설이 아니라 우리가 환호하며 끌어안아야할 진리입니다.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씀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긍정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내세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죽음을 열망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그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과 강요된 희생, 가난과 소외에 짓눌려 멍해진 눈동자로, 그 어떤 자극에나, 그 누구에게나, 그저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혐오스러운 삶이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움직이시고 구원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굳게 믿는 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존엄이며 신앙의 힘입니다. 전염병 창궐이라는 걷잡을 수 없이 가공할 크기의 위협을 하느님 뜻 안에서 겪어내고, 그 불안을 하느님 빛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꼭 부여잡고 걸어가야 할.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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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새벽을 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빠다킹신부님.
“신부님! 저는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요, 살면서 무력감과 초라함도 많이 느낍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의 열등감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약간의 열등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존감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공감이 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는 상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 져야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생긴다고 해서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순교자 덕분에 지금 우리가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순교자의 삶은 끔찍해 보이기도 합니다.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얻게 되는 기쁨에 집중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만 행복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박해 시대임에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순교자들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역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지혜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순교자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긍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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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기적을 누릴 자격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살을 뺄 능력이 있다. 우리는 돈을 벌 능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헤아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찬란한 삶을 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의식적 선택을 해야 한다. 새롭게 보기 위해서 말이다(가브리엘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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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희망의 선택
스포츠 방송 진행자인 메간 버나드(Megan Barnard)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남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소녀 시절이었던 15세에 나타난 증상으로 병원에서는 ‘림프부종’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반 친구들은 그녀를 놀렸고, 한참 민감했던 나이이기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단절의 시간을 9년 동안 보냈을 때, 그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합니다. 다리를 감추는 것에서 드러내는 삶을 선택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다리를 당당히 드러내는 모델이 되어 사진 촬영을 하고, 더 나아가 스포츠 방송 진행의 영역까지 그의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미움의 선택, 절망과 좌절의 선택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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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나를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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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한상우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우리의 목숨과
마주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와
죽는 밀알을 통해
목숨의
가야할 길을
보게된다.
되돌려
드려야할
우리의
목숨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복음의
발자국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생활의 봉헌이다.
생활의 봉헌은
버려야 할 것과
나누어야 할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순교는
신앙과 사랑을
위한 믿음의
간절한
결단이다.
신앙과 순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순교의 피는
여전히 뜨겁다.
순교는
비뚤어진
우리시대의 믿음을
바로잡아준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간 이들의
숭고한 목숨의
승리이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신비로운 일치의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랑의 뜨거운
결정체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생명의 빛을
향해 걸어간
이들의 전적인
삶의 투신을
배워야 할 때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생활은 순교로
깊어지고
순교는 생활을
참으로
가치있게 만든다.
하느님을 위한
순교이며
목숨이다.
목숨을 위한
봉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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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
박해자들은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순교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마르 3,21).>
반면에 순교자들은 허무하게 지나가버릴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배교자들과
박해자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길의 중간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믿음을 헛된 망상으로만 생각했던 박해자들의 생각과
그 생각을 어리석은 무지몽매로 생각했던 순교자들의 생각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의 말은 무섭지 않다.”고 세속 사람들은 말하는데,
무엇이 지혜인지를 지금 깨닫지 못하고, 그 지혜의 길을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순교자들의 믿음이 옳았구나.” 라고 깨닫겠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이 될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해도 자기 삶을 바로잡을 시간도 없고,
자신에게 닥친 심판을 피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입니다.
박해자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 자체를 의심하면서
그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인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해 본 사람도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원’을 유한한 인간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증명되지 않은 일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죽을 때까지 하느님,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힘이고,
증명할 수 없다고 해도 진리를 진리로 바로 아는 힘이고,
살아보지 않았어도 믿는 대로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태양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은하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욕심과 욕망 같은 것들입니다.
버린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신앙인들과 믿음 없는 자들은 완전히 정반대 위치에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신앙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신앙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믿음 없는 자들은 중요한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갈등과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박해자가 되는 셈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신앙생활에 따르는 온갖 고난을 감수하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은 “편하고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는가?” 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을 신앙인 스스로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 바로 이 길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 길로 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 보면 높은 산도 만나고 험한 고개도 만나는데,
돌아가는 길이 없으니 그냥 정면 돌파를 하는 것뿐입니다.
(신앙 여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가시밭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다 보면 분명히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만납니다.
그럴 때에는 누구나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날 때,
목적지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내가 얻기를 바라는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일까?
나는 혹시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된 신앙인은 임종 때에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만,
세속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임종 때에 후회하고 두려워하면서 생을 마칩니다.
(한 번이라도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압니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냥 살다가 또 그렇게 마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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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일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추가되는
까닭입니다. 특정한 순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와 무관한 경우가 많지요.
삶의 처세를 위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엮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위하신 이웃을 향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수없이 듣고 들어 온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낯선 이들과의 연대,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겸한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서, 뜻이 달라도, 부족하고 어눌하더라도 제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점검해 보아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 처음부터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원시 시대든, 인공 지능(AI)이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든 사는 것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순간순간 함께하는 삶의 이질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함께 답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와, 제 삶에만 천착하여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커녕 제 삶의 의미마저 속세의 천박한 유혹에
저당 잡힌 이들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것이겠지요.
십자가의 삶은 타인의 삶 안에서 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큰 선물을 미리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대단하다.
그들의 순교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로만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질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부러워해야겠습니다.
부러워서 나도 얼른 그 선물을 움켜쥐고 싶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설레는 기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이웃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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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뉴욕의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1973년에 시작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정식으로 본당으로 인정된 것은 1974년입니다. 곧 5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본당 사무실로 들어가는 벽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사진이 제일 앞에 걸려있습니다. 퀸즈의 교우들은 지금도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로 성장한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초대 사제와 교우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시작하였고 벽에 걸려있는 후임 사제들과 공동체의 노력으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교회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유럽의 교회는 1,000년이 넘는 교회가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의 초상화가 벽에 한 가득인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인품에 오르신 분도 있고, 주교님이 되신 분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는 입구에 바오로 사도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지금 교황님은 266대 교황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266명의 교황님이 있었으니 평균 8년 정도 교황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 순교한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성인품에 오른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구교’라고 하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세대를 30년 잡으면 150년가량 됩니다. 대략 1810년가량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에 시작되었으니 교회가 시작되고 30년가량 지나서 저의 조상들이 신앙을 시작하였습니다. 구교 집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 다녔기 때문에 재산의 기본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지역과 혈연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교우들이 모여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겨우 자리를 잡아도 박해가 시작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구교 집안은 늘 가난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앙교육이었습니다. 재산도 버리고, 벼슬도 버리고, 이웃과도 헤어져서 선택한 신앙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워야 했고, 매일 기도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주일에는 성당엘 가야 했습니다. 신자가 아닌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는 먼저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기일(忌日)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도 먼저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자녀들 중에 한명은 사제나 수도자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집도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형수도 먼저 세례를 받고 결혼하였습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였고, 교우들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심단체 및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생기는 고립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좋았던 점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교구는 영상을 이용한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사목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가진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신앙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치를 안다면, 신앙의 기쁨을 안다면 코로나19는 결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발자취를 닮기에도 멀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을까요? ‘다음에 하지 머’라는 게으름.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을 우리 삶의 액세서리로 생각한다면, 신앙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조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은 조그마한 신앙의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선택하시어 오묘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신앙 고백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자라게 하셨으니 저희도 죽기까지 복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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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뿌리 내리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미사의 말씀은 피와 땀과 눈물로 비옥한 신앙의 터전을 일군 의인들의 신앙의 기본기를 우리에게 전수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다."(루카 9,2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의 필수 요소로 십자가를 제시하십니다.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치욕스런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 피하고픈 최악의 고통을 비유하는 동시에 예수님께는 몸소 실제로 껴안게 될 죽음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실 우리는 크건 작건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가장 부족하고 약하고 못난 점일 수도 있고, 의도치 않게 닥친 사고나 시련일 수도 있지요. 벗어나고 싶지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자기 십자가를 어느 정도 순응하고 받아안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어떤 지향이냐에 따라 적응이거나 포기, 아니면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여정인 것이지요.
"날마다"
십자가의 특성은 "날마다" 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성장을 위해 허락하신 십자가는 며칠 지다가 며칠 내팽개칠 수 있는 취미나 오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매일 십자가의 고통과 어려움을 견딘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아무리 하찮고 작은 십자가라도 나름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매일 동반되어야 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향한 '결심'은 날마다 새로이 '갱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견뎌보리라"는 다짐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지요. 이 결심의 갱신을, 무겁고 성가시고 불편하고 고통스런 십자가가 은총으로 완전히 '습(습관, 익힘, 물듦)'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날마다, 은총으로 십자가와 완전히 한 몸이 되기까지 날마다 날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십자가(고통, 고난, 단련, 시험)를 통해 영원한 행복을 쟁취한 의인들의 영혼을 칭송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주님께 대한 신의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것은 어느 결에, 어쩌다가, 우연히, 단발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고통 중에 그들이 쌓은 "신뢰"와 "믿음", "거룩함"이 그들 존재에 "습"으로 스며들어 "덕"의 실체로 정착되었기에 가능한 응답이지요.
그런 의인들이 세상의 얄팍하고 얕은 눈에는 "파멸"과 "징벌", 즉 불행이나 불운으로 비치지만, 실제로 그들은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며, 은총과 자비를 받고, 주님의 돌봄을 받는 축복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그보다 더한 축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내세를 믿는 모든 이의 바람이고 희망이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확신에 찬 어조로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그렇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어떤 십자가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만만하지는 않겠지만요. 나 혼자만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 때문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십자가를 지려는 우리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그 본성상 이미 주님과 한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주어지는) 모든 십자가에는 나의 구원을 애닮아 하시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계십니다. 십자가와 함께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받아안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동시에 부둥켜 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지요. 십자가와 주님과 나, 이 셋이 하나가 되면 넘어서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한없이 미련해 보이고 바보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의인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매일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며, 응답하고 실천한 여정을 공경하고 경외합니다. 순교는 주님의 의인들이 "날마다" 쌓아올린 부단한 인내와 헌신의 열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날마다" 지는 십자가는,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벗님을 온통 주님으로 물들이게 해 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진리 안에 거닐며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해 주고, 은총과 자비를 누리며 주님의 돌봄 안에 머물게 합니다. 날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맞이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이 멋진 순교자들의 후손이니까요.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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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창조시기 20일째-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순교성인'을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103위 순교성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103위 순교성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순교 성인은 1839년10월 31일 14세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입니다.
유대철 베드로 성인은 아버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자, 제 발로 의금부에 찾아가 "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니 어서 잡아가세요."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이 어린 대철 베드로에게 배교의 말을 받아내려고 심한 고문을 하면서 붉게 달궈진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하자, "예, 자, 넣어주세요. 아 아!" 라고 입을 벌렸고, 고문하는 포졸에게는 "저를 하늘 나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어서 하느님을 맞아들이세요." 라며 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3,1)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8.39)
장한 순교자들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른 사람들입니다.
장한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굳게 믿고 희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일상에서 겪게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으로 코로나를 이겨내는 장한 순교자들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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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장 23-26절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시대 순교
오늘 한국 순교자들의 대축일에 순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순교의 본질이자 핵심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부족한 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과분하고도 크신 사랑,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입니다.
시편 작가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시편 115, 12)
이 질문에 대해 즉시 이렇게 응답합니다.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5, 13)
보십시오. 순교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행위입니다.
‘구원의 잔’은 다름 아닌 가장 농축되고 전적인 봉헌, 즉 ‘순교’를 의미합니다.
신앙심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젊은 시절, 제가 늘 억울해했던 점이 한 하지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제 마음은 순교 영성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즉시 어떻게 순교할 수 없나,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럴 기회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순교를 하려고 했지만 시대가 저를 받쳐주지 않은 것을 억울해했습니다.
오늘 한국 순교자 대축일에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더 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 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지루함, 매일의 따분함, 끊임없이 다가오는 사소한 고민거리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빛나는 얼굴로 매일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엄동설한 한가운데서는 이 혹독한 겨울이 언제쯤 지나가려나, 힘겨워하지만 어느새 화사한 봄날이 친구처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낙뢰를 동반한 폭우 한 가운데서는 세상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지만, 기다리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푸른 하늘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결국 관건은 기다림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의 얼굴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요셉의원 고 선우 경식 원장님께서 생전에 저희 수도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입니다.
참고 또 참으십시오. 그리고 또 참고 또 참으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이 때로 견딜 수 없이 남루하고 때로 비참하다 할지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언젠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실 깜짝 선물을 기대하면서, 언젠가 우리에게 ‘잘 참고 걸어왔다’고 건네주실 표창장 수여식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걸어가는 것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요,
이 시대 우리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내가 걷는 길이 돌밭길이라 할지라도 걷다보면 분명히 아름다운 들길, 화사한 꽃으로 만발한 꽃길도 만날 것입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줄 시원한 냇가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옛 친구, 고마운 얼굴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장 18절)
우리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입니다.
매일 견뎌야 할 몫이 너무나 힘겨울 때 마다
예수님 위로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코린 1, 7)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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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 루카 9,23-26
연습의 종교인가, 실전의 종교인가?
저는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라고 따집니다.
저는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소극적인 선교지역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자들이 먼저 천주교를 연구하여 받아들이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지쳐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에 진저리가 나서 더 실용적인 학문을 찾다가 서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성리학보다 천주교가 더 실용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성리학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 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좀 복잡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理)는 ‘진리’를 나타내고, 기(氣)는 ‘힘’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힘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리학에서도 이와 기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학문이 실용적인 면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실용적인 면을 잃게 되는 이유는 ‘실전’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리학도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이들에게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데 이용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이 탁상공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리학이 창조와 운동, 소멸의 원리였다면 그것이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각자 안에서 실용적으로 적용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연습만 하고 실전에 쓰이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한국의 실학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천주교가 더 실천적이요, 실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여 보니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 줌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했던 이벽과 정도전과 같은 분들은 철저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수련하였고 천주교가 실전에서 매우 실용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천주교는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도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순교자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가 하나의 연습의 도구가 아니라
실전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약간은 당시 성리학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들려고 연습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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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이영근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려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셋째>는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바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의 길>인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다’의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의 길>인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진다’는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는 것’이기에, 죄의 용서를 소중히 맞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날마다 죄의 용서를 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어도 안으로는 자비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의 길>인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지향이 오로지 예수님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선조 순교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지만, 살아있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순교현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곧 우리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더러 일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번 문초 때에 형리였던 사람이 다음 번 문초 때는 피고석에서 문초를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천주교교리를 순교자들로부터 배워 알게 되고 어느덧 신자로 돌변하여 자신들이 휘두르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입니다. 곧 심문 받는 형장이 바로 전교지요, 신앙의 증거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죽음은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이미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안에서도 죽었지만 살아있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부 떼르뚤리아누스는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순교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자들 삶과 복음을 돌아다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그러기에 순교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믿음의 승리의 십자가를 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당하면서도 안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박해하는 이들마저 사랑으로 품고 벅찬 기쁨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에 희망을 걸고서 말입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바쳐야하는 순교를 강요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신의 삶은 시대와 세속정신을 거슬려 박해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으로 녹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품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흔연히 십자가의 사랑을 끌어안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빠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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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성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 축일
제1독서(지혜 3,1-9)는 의인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말합니다.
세상에서 항상 악인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 충실한 의인들이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많은 유다인들은 물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저자들은 의로운 이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들이 받을 상급이 무엇인지 대답합니다. 의인들이 겪는 고통은 신앙인들의 믿음이 정화되도록 하는 시험이라고 합니다(욥 1,2; 시편 66,10).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일이겠지만, 의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개입이 있을 것인데,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날 것이며”(다니 12,3), 악인들은 “나뭇단 속에서 불붙은 도가니처럼, 곡식 단 속에서 불타는 횃불처럼 될 것”(즈카 12,6)이라고 합니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지혜 1,15)고 하는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상급을 영원한 생명(不死)이라고 합니다. 악인들에 의해 항상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시험당해야 하는 의인들의 육체적 죽음은 파멸로 여겨지지만, 단지 외적인 것이며, 이들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기 때문에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비록 현세에서는 고통을 겪을지라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주어지며,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라고 합니다. 의인들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같은 것이며, 그들의 죽음은 부르심에 응답한 결과입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맞갖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루카 9,23-26)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뒤에(루카 9,22)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당신을 따르는 것이 무슨 뜻이며, 베드로의 신앙고백(“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 9,20)이 무슨 뜻인지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고 만족해하는(루카 9,10-17) 사람들은 아직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결국 생명의 빵을 먹는다면, “날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이며 첫 번째로 갖춰야 할 태도는 “당신의 뒤를” “따르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초기교회는 이 세 가지를 “부활선포”, “세례”, 그리고 “공동체의 친교”로 알아들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이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라는(루카 6,27) 것이 아니라, 진실하지 않았던 어제의 삶을 정리하라는 것이며,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위선을 버리라는 것이고, 가슴을 치며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 세리처럼(루카 18,13)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조건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매일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고통)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입니다(사도 14,22).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입니다(루카 10,27-28). 그래서 예수님을 따름은 과거와의 단절로 시작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끝까지 순종하는 데서 끝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인 사람과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항구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예수님과 나누는 친교, 즉 예수님의 가르침(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게 살다가 고통을 겪는 사람을 말하는 동시에 삶의 목적이 하느님이었던 사람을 뜻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른다고 다짐하고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기지 않는 사람만이(루카 8,12)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가지게 될지라도 예수님과의 심오하고 생생하며, 창조적인 친교의 관계, 즉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실천에 옮기는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거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루카 12,8-9)과 같은 뜻으로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과 사랑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했으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로마 1,16),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도 역시 마지막 날에 그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2독서(로마 8,31ㄴ-39)는 사랑을 주제로 부른 구원의 승리자께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로마 5,1-11)의 구체적인 이유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바오로가 “나약하던(믿음이 없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다.”(로마 5,7.9)고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도,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매우 열정적인 찬미가를 통하여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리 뽑으셔서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정하셨고(로마 8,29),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로마 8,17).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이사 50,8-9)를 떠올리게 하면서 아무도 우리를 고발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죽음처럼 강하고” “저승처럼 억센”(아가 8,6)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고 또 하느님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개선행진을 할 것입니다(콜로 1,16; 2,15).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면서 간구해주심을 굳게 믿으셨던 분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분들을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했습니다.”(마태 10,28)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았고, 자기들이 겪을 죽음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비록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굳게 믿었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확신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에 바탕을 둔 양심에 의존하고, 예수님께 대한 앎과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아무도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목숨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은 분명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에 자기가 매일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은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고, 편견과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박해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에 더욱 혹독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창조주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근본을 찾아보고자 애썼기(신주를 불태웠기) 때문에 겪었던 아픔이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는 자발적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고, 성직자도 없이 자생적으로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기에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습니다. 여성 신자들은 현행범이 아니면 수색을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장옷 속에 필사한 교리서를 감춰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시작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의 죽음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연구하고, 효과적인 증거를 위해 이웃에게 전하려고 애를 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오늘,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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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1821-1846)와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지혜3,1-9 로마8,31ㄴ-39 루카9,23-26
구원의 여정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중 절정의 날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일만여명이 순교하였으니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9월에 맞이하는 한국 순교자 성인 대축일, 아마 주일이 아녔더라면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에서 오늘 의무기념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이날이 되면 17년전 2003년 잠시 미국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축하받았던 일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날은 독서기도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서간이 영어로 낭독되었고, 한국 순교 성인들 기념 미사후 여러 수도자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을 때 우리 순교성인들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늘 입당송 성가는 아쉽게도 부르지 못했지만 영성 깊으신 시인 최민순 신부 작사에 이문근 신부 작곡의 두 대표적 성가가 생각납니다. 언제 불러도 감동적인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성가, ‘순교자 찬가(283)’와 ‘병인 순교자 노래(289)’를 각각 1절씩만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시간되면 이 두 장의 성가 마지막절까지 깊이 음미하시며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무궁화야/부르자 알렐루야 서럽던 이 강산아
한목숨 내어던진 신앙의 용사들이/끝없는 영광속에 하늘에 살아있다”-
구구절절 우리에게 순교열정을 고무, 고취시키는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참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 순교 성인들입니다. 오늘 미사중 감사송도 이에 화답하는 듯 아름답고 깊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을 복음의 빛으로 불러 주시어,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셨으며, 그들의 갖가지 빛나는 덕행을 갖추고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마침내 아드님의 승리를 함께 누리게 하셨나이다.”
참 축복받은 한국입니다. 이건 제가 2014년 안식년때 전국에 산재한 순교성지들중 일부 성지를 방문하며 절감했던 사실입니다. 마치 한국땅 전국토가 하느님의 거룩한 땅 성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참 보물인 순교 성인들에 순교성지를 지닌 진짜 영적 부자 교회구나 하는 자부심도 들었습니다. 한국은 순교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의 가호하에 번영할 수 뿐이 없겠구나, 결코 망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핏 눈에 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하상 바오로 평신도의 생몰 연대도 충격입니다. 전 언제나 성인축일을 지낼 때 마다 생몰生沒 연대를 확인해 보며 저보다 더 살았나 적게 살았나 살펴 보곤 합니다. 성 대건 안드레아는 고작 25세의 꽃다운 청춘에 순교하셨고, 성 하상 바오로는 한창 중년의 나이인 고작 44세에 순교하셨으니 우리에겐 또 충격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분발심을 갖게 하는 순교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순교 성인들의 순교 영성의 DNA를 지니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분발하면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첫구절이 명쾌하게 그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범한 성인이 아니라 누구나 결심하고 실천하면 될 수 있는 평범한 구원의 여정에 성인의 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자 보람은 우리 모두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주목할 말마디가 ‘모든 사람’, ‘누구든지’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 모두 성인들이라 믿습니다. 어느 시인의 독백같은 고백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고단한 삶의 무게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생시켜 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돌아갈 영혼의 고향집같은 교회가 있고, 돌아갈 분,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렇게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고향집같은 수도원을 찾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에 이르는 순교영성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날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영성을 일상화,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씩씩하고 기쁘게 한결같이 도반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교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제 좌우명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바로 제1독서 지혜서가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돌보신다.”
그러니 분발하여 다시 십자가의 길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샘솟는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이 참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도대체 이런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앞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힘이 우리 모두 구원의 여정에,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약속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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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20. 반영억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사랑의 순교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백여 년 동안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지혜3,9).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혜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 하느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접하게 된 때에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 마더 데레사 -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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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나라는 1770년 무렵 실학자 이벽 등을 중심으로 실학을 연구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가운에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선교사에 의해서 시작된 선교와 달리, 나라 자체 백성으로 부터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전통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천주교와 충돌을 가져왔고, 조상 제사와 척양, 그 외 신심을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86년 병인 박해에 이르기까지 백여년 동안 일만 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개선, 실행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순교자들, 우리 나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그리고 무명 순교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들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은 모두 목숨을 다시 얻은 생명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의 생명을 잃었으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의 순교는 공동의 선과 의로움을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백색 순교라고 합니다. 참다운 신앙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곧 정의와 공정을 사는 것, 선과 진리를 택하는 것. 스스로 사랑과 자비를 위해 힘쓰는 것. 모두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주님의 말씀과 그 가치를 포함합니다. 특히 주님이 길을 위해서 매일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갑니다.
오늘 한국 성인 성녀 축일에 그 순교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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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매일미사
_유흥식 라자로 주교 집전
https://youtu.be/PHf7gh79J_w (50:27)
•2020. 9. 2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유흥식 라자로 주교 (대전교구장) 집전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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