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산 시 깊이 들여다보기
일상, 비루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위하여
―이강산 신작시를 중심으로
김효은
1.
시인의 촉수와 더듬이는 쉴 틈이 없다. 그들은 또한 항상 무언가를 응시하게 마련이므로 분주하다.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이를테면 그것이 숭고한 이념이건, 불안한 내면이건 혹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건, 맹렬한 사회 비판이건 간에 그들은 언제나 부지런하게 그것들을 응시하며 노래하는 데 여념이 없다. 심지어 잠들어 꿈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그들의 펜은 항상 무언가를 썼다 지우기를 괴로운 심사와 함께 강박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대게 어떠한 시를 쓰겠다는 시론과 의식, 나름의 고집스러운 지향점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 처음부터 “이름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쓰겠다고, 사회의 변방에 소외된 채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눈길을 주며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는, 소박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나는 시를 쓰겠노라는 고집스런 시인 한 사람이 있다. 이강산 시인은 초기부터 일관되게 유독 병들거나, 가난하거나, 이리저리 떠돌거나 혹은 늙고 힘이 없거나, 억울하게 해직되거나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로 써왔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화려한 수사나 그 흔한 언어유희도 없다. 다만 꾸밈없이 일상을 있는 그대로 소탈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려내는 일상은 가끔 외려 벌어진 상처마냥 적나라하다. 그는 첫 시집에 실린 「목련꽃」이라는 시에서 “시 쓰는 일도 그렇게 제 살점 드러내는 일” 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이웃의 상처까지도 마치 제 살점인 양, 측은하고 아픈 눈으로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 말 건네고, 손 내미는 훈훈한 시를 쓴다. 신작시를 살펴보기 앞서 우선, 첫 시집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변두리 마을에서나
어둠의 모퉁이에서나
불 끄고 조용조용 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이름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일반 독자든 전문 문인이든
읽어서 좀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의 특별한 것
모난 돌이 정에 맞듯
그래서 눈길이 가고 손길이 닿는
그런 시를 써야 했다
……중략……
시가 개성이 없어 출판이 어려운 것 같다
전화통화를 한 뒤, 술을 마셨던가
그 즈음의 일이다
두어 편, 사람들의 안부를 다시 묻고 있던
―「이를테면」 부분
요즘에도 “읽어서 좀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의 특별하”고 화려한 시가 단연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묵묵히 담아내는 시인들에게는 “시가 개성이 없어 출판이 어려울 것 같다”라는 차가운 냉대와, 문단의 무관심이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시인 역시 위의 시에서 “모난 돌”처럼 “눈길이 가고 손길이 닿는” 그런 요란하고 좀 잔인해 보이는 시를 써야 했다라고 신세 한탄하듯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다분히 반어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시인이기보다는 “노동자가 되었거나/싸움꾼이 되었”어야 했다라고 하며, 변두리 어두운 모퉁이에서 “조용조용 잠드는 사람들”과 “이름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래도 꿋꿋하게 써나가겠노라고,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의 안부를 끊임없이 묻겠노라고, 반어적으로 다짐하듯 작품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담긴 일상은 이렇게 지극히 눈물겹고 비루하고 아픈 일상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정이 깃들어 있고, 무엇보다 그들 틈바구니 사이에, 더불어 그의 시의 행간 사이에 희망이 여기저기 꽃망울 져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리라. 그 꽃망울이 비록 ‘무녀리’처럼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게 엄동설한에 홀로 피어있을 지라도 말이다.
나는 초겨울 아침의 개화가, 저 무녀리가 불안하다
볼수록 춥다
반가움이 아니다
내게 꽃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가슴 서늘한 무녀리겠는가, 생각뿐이다
내게 마른 호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내 밑바닥 드러낼 수 있는가, 생각뿐이다
―「무녀리」 부분
신작 「무녀리」라는 작품의 일부분이다. 무녀리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한 배(腹))에서 먼저 태어난 무리 중에 가장 보잘것없고 작은 짐승의 새끼, 또는 말이나 행동이 좀 모자란 듯이 보이는 못난 사람을 일컫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작고 보잘것없고 못났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나오다’라는 뜻으로 ‘문열이’라는 어휘가 변형되어 ‘무녀리’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한파주의보가 내린 초겨울 아침에 피어난 영산홍 한 송이를 마주하고 있다. “두 해 째 춘삼월 활짝 피어 꽃다발 이루었던 것”이 엄동설한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시인은 “월동(越冬) 잘 하려나 훔쳐보던” 가녀린 가지 끝에서 느닷없이 한파주의보가 내린 추운 날씨에 꽃망울이 피어난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불안하고 춥다라고 그래서 반갑지만은 않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가 4연에 이르러 급기야 시인은 한겨울에 핀 영산홍을 ‘무녀리’로 안쓰럽게 바라보는 자신 역시, 꽃에게 무녀리로 비춰질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 시인에게 “마른 호수가 그랬던 것처럼” 마른 호수에게 시인 역시 밑바닥을 다 드러낸 채 나약하게 서 있는 “가슴 서늘한 무녀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체로 살아 있지만, 보기에 따라, 대상에게 ‘나’는 어쩌면 “부르르 몸 떨리는 주검”일 수도 있다는 논리는 섬뜩하지만, “은행잎 덮고 죽은 고양이”처럼 일면 측은하기도 하다. 그러나 ‘무녀리’라는 말의 속뜻처럼, 작고 가녀리지만, 맨처음 문을 열고 나오는 용기와 힘은 혹한(酷寒)보다도 더한 세상의 풍파를 견디게 하는 단단하고 따뜻한 아름다움이 그의 시에는 묻어 있다.
2.
「아카시아」와 「기저기」라는 작품은 둘 다 늙고 병든 가장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을 담고 있다. 먼저 「아카시아」라는 작품에서는 다소 측은하면서도 해학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어젯밤에 “부들부들 손 떨며 쌀밥에 숟가락 꽂던 늙은 가장”이 오늘은 보란 듯이 활짝 꽃을 피웠노라고 하며, 아카시아의 개화 장면과 노인의 웃는 모습을 병치하여 묘사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상추쌈 하나도 제대로 싸지 못한 채 불안하게 된장을 한 덩이 엄지발톱에 떨어뜨린 것을, 마치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진 듯 묘사하여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아카시아꽃이 한 송이에 여러 개의 꽃이 매달려 있듯, 시인은 또한 노인과 어린 손자가 한데 어우러져, 함께 생명으로 꽃피어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 역시 누구나의 인생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정겹고도 보편적인 여운을 준다.
김장독 묵은지마냥 쟁여있는 기저기들
귀 먹은, 귀 없는 아버지 배냇저고리 같다
어머니의 숨겨둔 초경 같다
새록새록하다, 기저기 층층마다 식구들 탄생 설화가 구구절절이다
삼베 호박잎 무명 광목 노랑고무줄……
그렇다, 일곱 식구 너나없이 기저기부터 시작이었다
―「기저기」 부분
「기저기」라는 작품에서 또한 화자는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늙은 아버지를 “아흔 살 어린이”라고 표현한다. 늙고 병든 노인을 버려두고, “야반도주 하듯” 떠나간 다섯 자식들을 두고 화자는 “잔인하기도 하다”라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한때 일곱 식구의 옷으로 가득 찼던 장롱은 텅 비었고, 이제는 “아버지 기저기 하나로 꽉 차”있을 뿐이다. 시인은 그러나 아버지의 기저귀를 ‘배냇저고리’와 ‘어머니의 초경’에 비유한다. 그들에게도 분명, 생명의 첫 시작과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저귀부터 시작해서 기저귀로 끝나는 게 인생이라고 시인은 이야기 한다. 시인은 “기저기 층층마다 식구들 탄생 설화가 구구절절” 넘쳐나 “새록새록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홀로 남은 노인네들의 기저귀는 미리 준비해 장롱에 넣어둔 수의(壽衣)처럼, 쓸쓸하고 적막하다.
3.
「생닭」과 「호수 가정식백반」에서는 후미지고 지저분한 도시의 골목길과 그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을 가볍게 스케치하고 있다. 이를테면, 「생닭」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봐도, 배드민턴 치는 “초롱다방 아가씨들”, “불법 영업하는 닭집에서” 생닭 한 마리 사들고 나서는 “서른여덟까지 셋집 옮겨다니”는 화자, “엄나무 삶아놓고 기다리는 어머니”, “사흘에 한 번씩 투석하느라 닭털 뽑는 짱구 형님” 등,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하고 힘겹게 근근이 살아가는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또한 “여관촌 골목”이니,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낡고 허름한 여관과 여인숙, 다방이 밀집한 곳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는 뜨내기 노동자들이나 불법체류자, 다방 레지, 월세방을 전전하는 빈민들이 모여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고향이며 눈물이며 쏟기도 할” 많은 사연과 우여곡절들이 있기 마련이며, 또한 어딘가에 피를 나눈 가족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일상은 결코 신파적이거나 눈물겹지만은 않다. “고요하거나 소란하거나 늘 이마마한” 여관촌 골목에서 “초롱다방 아가씨들”은 자기네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배드민턴을 치며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으로 보이는 화자는 그 옆을 지나가다가, 아가씨들 사이에 끼고 싶어 연신 기웃거리며 안달이지만, 닭 삶을 물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어머니 생각에 차마 그 길을 힐끗거리며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아가씨들의 셔틀콕을 두고 “막 끓는 물에서 꺼낸 암탉마냥 거지반 털이 뽑히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어쩐지 그들의 삶처럼 군데군데 털이 빠지고 다쳐 벌어진 생채기마냥 볼품없고 안쓰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아직 “병아리 같은 아가씨들”과 ‘사흘에 한 번 투석하는 짱구 형님’ 그리고 서른여덟의 ‘나’에게도 “왕년의 전설”은 있었을 것이니, 그네들끼리 모여앉아 한 잔 기울이며 풀어놓을 이야기 또한 “여관촌 골목”처럼 굽이굽이 굴곡지고 긴, 인생의 파노라마 사진 같은 것이리라.
「호수 가정식백반」에서도 시인은 “호수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다소 거친 삶의 일상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백반 쟁반 두 판 거머쥐고 발발발, 배달 가는 동현엄마”, “밥그릇 쓸어 모아 뿅뿅뿅, 달려가는 상주댁”, 한겨울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막일하는 사내, 이들은 각각 장수하늘소와 소금쟁이와 청둥오리 등으로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조선후기 사설시조 한 수를 읽는 것처럼 다소 외설적인 느낌도 풍기는 듯한 이 시는 풍자와 해학이 재미있게 녹아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얼음호수라도 분주하게 건너야 하는 이들의 삶은 춥고 고단하지만, 몇 마디 주고받는 농지거리와 눈길만으로도 얼어붙은 깃털을 녹이기에는 이미 충분하다.
요컨대 이처럼 이강산의 시는 비루하지만 나름대로 소탈하고 정겨운 일상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단지 동정하는 시선이나 시적 대상으로만 관조하듯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 함께 어우러져 부대끼며 온기를 나누는 시, 절망이 아닌 희망이 깃든 시를 쓰는 그의 삶도 시작(詩作)도, 비록 팍팍하고 녹록지 않겠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힘’만은 ‘무녀리’의 그것처럼 가열(苛烈)하고 준엄(峻嚴)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힘이 곧 삶의 힘이고, 또한 시의 힘 아니겠는가.
김효은
경기도 안양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시에』201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