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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지식
제목 :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성경 : 벧후 1:1~2
찬송 : 453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61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지난 주일까지 베드로전서를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베드로후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서신들은 보통 ‘바울 서신, 공동서신’등으로 분류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베드로전후서는 공동서신 가운데 들어가 있는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공동서신은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입니다. 이 일곱 개의 서신들의 공통되고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 속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처한 교회가 당하는 위기들을 어떻게 교회가 이겨낼 수 있는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었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그리고 역시 주의 형제 유다가 함께, 교회의 ‘온전한 신앙’(regula fidei)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낸 결과로서 신약의 정경 안에 포함된 귀한 보물입니다.
신약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서신은 대체로, 사도 바울이 강조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을 바로 잡으면서, 동시에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세속의 홍수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역할을 감당하고자 기록되었고 그래서 신약 정경 안에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본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세상 속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짝을 이루는 베드로후서는 ‘교회 속의 세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후서는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버린 세상, 그 세상의 세속적이며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즉, 거짓 교사들을 통해 급속도로 ‘주의 몸 된 거룩한 교회’ 안에 번져가는 ‘거짓 가르침’이라는 독종 바이러스와 ‘부패하고 더러운 행위들’이라는 고통스러운 증상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그 주제에 있어서나 제시하는 신학적 해법에 있어서도 연속적이며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교회가 마치, 노아의 방주가 40일간의 홍수를 뚫고 아라랏 산에 이르는 것처럼, 이 땅의 순례자 된 교회는 ‘세례’ 곧 ‘죄를 벗을 뿐 아니라 주께서 오르신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는’(벧전 3:20~22) 십자가의 길 곧 선한 양심을 따라가는 제사장 공동체라고 설명했습니다(벧전 3:16; 벧전 2:20).
교회에 관한 베드로전서의 이런 이미지를 잠시 빌리자면, 베드로후서의 이야기는 마치, 이렇게 홍수로 인한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 같은 세상 위에 떠 있는 방주와 같은 교회 안으로 어쩔 수 없이 ‘쏟아지고 밀려드는’ 비바람과 사나운 바다 물결 같은 ‘이 세상’을, 교회는 과연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이냐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가 ‘세상 속의 교회’를 다룬다면, 베드로후서는 그 세상이 교회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상태, 즉 ‘교회 안의 세상’을 다루는 것입니다. 둘 다 치명적으로 중요하고, 그래서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서신 안에서 베드로후서를 뒤이어 나오는 요한서신은 ‘세상을 맞닥뜨린 교회’라는 주제에 관한 절정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후서 1:1절은 이 편지에 대해서 기초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 그리고 이 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내는 사람의 특징적인 묘사들과 또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장소에 대한 언급입니다.
√베드로후서 서론
√1)저자인 사도 베드로
1:1절의 원문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서신을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이 저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의 진실성을 그대로 받아드린다면,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합니다. 시몬 베드로라는 분명한 증거는 1장 후반부에 나오는 ‘변화산의 체험’(1:12~18)에서 더욱 확증됩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왜 자신의 이름을 ‘시몬 베드로’라고 불렀을까요?
‘시몬’으로 쓰기도 하는 ‘시므온’은 히브리어 음역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히브리 이름이었던 ‘시몬’은 복음서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베드로후서 1:1절의 문맥에서 ‘시몬’이라는 칭호가 의미 있게 들리게 하는 중요한 관련 구절들이 몇 개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시몬’을 처음 보시고 그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하셨던 장면입니다.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 구절에는 베드로후서 1:1절에서처럼, ‘시몬’과 ‘베드로’가 함께 나옵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자신을 굳이 ‘시몬 베드로’라고 한 표현은, 자신이 원래 ‘시몬’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된 자신의 운명과 신분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칭호라 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몬(들음)이었던 나를 반석(베드로) 되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자신은 오직 ‘반석 같지 않은 나를 교회의 반석과 같은 사도’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1절의 더 큰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시고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게 하시고, 또한 그를 결국 반석답게 세우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시몬’으로 부르시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게 하신 복음서의 본문도 의미가 깊습니다. 당시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마 16:16). 예수님께서 이에 응답하실 때에도, ‘시몬’과 ‘베드로’라는 칭호가 같이 등장합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서처럼, ‘시몬 베드로’라는 두 명칭의 조합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교회의 설립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강조점은 베드로후서 1:1절의 문맥에서도 마찬가지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들 모두에서, ‘시몬 베드로’라는 자기소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과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약속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표현입니다.
베드로전서 마지막 단어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오직 그만이 교회의 참된 반석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후서를 시작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참된 반석이 되신 그분을 고백하고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요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해 교회를 견고히 세워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 무리를 부탁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부활하신 목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시몬’으로 부르십니다(요21:15,16,17) 그리고 마침내는 ‘베드로’라는 명칭도 함께 기록됩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9)
여기서도 ‘시몬’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을 배반한 연약한 베드로의 내면과 삶을 대변합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를 ‘베드로’(반석)로 부르시며 그분의 양 무리 곧 그분의 사랑하시는 교회를 목양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라는 자기소개는 마치, ‘부족하나마 주께로부터, 그의 양 무리를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하게 세우기를 부탁받은 종이요 보냄 받은 사도’라는 절절한 개인 간증과 신적 권위가 포함된 표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한 서신을 쓰는 마당에, 자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자요, 그가 맡기신 그의 교회를 책임 있게 지켜 내야 할 사명을 받은 자임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첫 구절의 ‘시몬 베드로’라는 표현이 범상치 않은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의 경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찾아와 그들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을 인준 받고자 했던 예루살렘의 첫 번째 공의회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회의를 주제했던 당시 ‘총회장’은 주의 형제 ‘야고보’였지만, 먼저 입을 열어 상황을 정리하고 하였던 인물은 ‘베드로’였습니다(행 15:7-11). 결국 상황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자는 야고보였는데, 그가 앞서 변론했던 베드로를 언급하면서 ‘시므온’(행 15:14)이라는 친밀한 칭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가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그가 베드로를 ‘시므온’이라고 불렀고, 베드로는 지금 베드로후서에서 자신을 ‘시므온’으로 소개하는 것도 우연치 않아 보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가 바울이 전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복음’을 옹호하면서 확언한 대목입니다.
행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중요한 점은, 사도행전에서 ‘시므온’은 베드로가 한 이 표현이, 지금 베드로후서 1:1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묘사하는 내용과 특징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우리와 동일하게’라고 한 표현은, 바울이 전하고 실행한 그대로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유대인 자신들도 이제 바로 ‘그런 방식을 따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던 ‘시므온 베드로’의 목소리가 베드로후서1:1절에서 수신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그대로 담겨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흥미롭습니다.
1절에서 수신자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서 ‘동일하게 받은 자들’입니다.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이런 ‘동일한 방식,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한 것인데, 이런 강조점은 사도행전에서 ‘시므온 베드로’가 발언했던 내용과 표현에 있어 상당 부분 일치하고 일관되다 할 수 있습니다.
√2)베드로후서 수신자들-소아시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듯이 베드로후서 1:1절에는 발신자인 ‘시몬 베드로’ 외에도, 수신자에 대한 길고 특징적인 묘사가 나타납니다.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으며 어떤 교회였을까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 교회적으로 확인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떠 올린다면(행 15:1-21), 유대인-그리스도인의 수장(首長)격인 베드로가 주로 이방인-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수신자 교회에 이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지도)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베드로전서의 경우처럼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지역들, 즉,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거하던 교회들인 셈입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로마와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에게 해 동쪽 그리고 흑해 남쪽의 변두리 지역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행정력이 완연히 미쳐 헬라화가 많이 진행된 곳이고, 1세기 말엽까지는 기독교의 복음이 거의 널리 전해진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에게 해 연안의 ‘아시아’는 요한 계시록에서 상세히 묘사되는 일곱 교회들이 있던 지역으로, 그 세속적 부와 타락, 거짓 교사들의 활동과 미혹, 배도와 타락이 극심했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어디에서 썼을까요?
베드로후서도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곳과 같은 장소, 즉 ‘바벨론’(벧전 5:13)이라 불렸던 로마에서 베드로가 보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전서에 이은 ‘둘째 편지’로서, 역시 자신이 ‘바벨론’이라 부른 로마에서 기록하여 그 바벨론과 같은 거짓되고 부패한 세속의 강력한 미혹의 물결이 휩쓰는 로마 변방 아나톨리아 반도에 흩어진, 주로 이방인-그리스도인 교회들에게 보낸 격려와 경고의 서신입니다. 베드로가 쓴 첫 번째 편지가, ‘여행자료 임시 거주 외국인’과 같은 ‘세상 속의 교회’에게 그 세상 한복판에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 나라’로 살아갈 사명을 격려했다면, 이제 둘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그 ‘세상 속의 교회’ 속으로 넘쳐 들어온 바벨론의 강력한 미혹, 그 거짓 가르침과 썩은 사람의 유혹에 맞서 대적해야 한다고 강력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3)편지를 기록한 시기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죽음이 임박했던 시기(1:14) 즉, 대략 64-67년 정도라고 봅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공식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시기는 로마의 황제 숭배가 본격화되는 트라얀 황제(98-117년) 이후인데, 베드로전후서는 모두 이런 공식적 핍박 훨씬 이전에 있었던 갈등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전서가 당시 로마 변방의 일상적 차원에서 부딪히는 사회적 갈등이나 소외감, 비난, 그리고 ‘사회적 적대감’에 민감한 서신이라면, 베드로후서는 오히려 그런 일상적 차원에서 교회가 내면적으로 부딪히는 유혹과 탐욕, 방탕과 부패의 강력한 ‘세속적 영향력’을 상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베드로후서의 배경은, 로마가 황제 숭배를 강화하면서 공식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핍박하는 1세기 후반의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멉니다. 베드로후서는 아직 그런 처절한 핍박과 고통의 날들이 밀려오기 직전, 세속적인 탐욕에 물든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방탕하고 부패한 삶의 유혹에 혼미해져 가는 교회를 행한 호소이며, 성도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종말의 거룩한 소망으로 일깨우며, ‘신적 성품’에서 성장함으로써 교회 안에 밀려오는 세속을 이겨 내야 할 당면한 목적에 집중합니다.
√4)거짓 교사들의 정체와 특징
영지주의자들
쾌락주의자들
실제적 무신론과 세속주의자들
√이들의 특징은?
1)자의적 성경해석이다(1:20; 3:3-4,16).
2)영적교만이다(2:1,9-11, 3:3-4).
3)탐욕이다(2:3,13-15,20-22).
4)방종이다(2:2,7,10,14,18,20-22).
5)종말의 부인이다(3:3-5).
6)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2:1-6,12, 17-22).
베드로후서는 이렇듯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그들의 부패한 삶의 영향력 속에서 신음하는, 혹은 그럴 위험에 처한 교회를 향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아예 교회 안에 숨어 들어와 진을 치고, 양 무리를 잡아 낚아챌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에게 베드로후서는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긴급하게 필요한 서신입니까!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악한 영향력에서 과연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거짓 목자들의 손아귀에 잡힌 양 무리를 건져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짐승과 같은 그들의 이빨에 물린 양들을 꺼내고, 그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지켜 낼 수 있을까요?
베드로후서는 이런 고민을 가진 교회, 이런 질문을 가진 성도들에게 적실하고 결정적인 대답을 줍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베드로후서 1장에서 제시하는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는 교회의 마땅한 해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적 성품’이고(1:2-11), 둘째는 ‘올바른 성경해석학’입니다.
왜 이 두 가지입니까? 무슨 이유로 베드로는 다양한 해법들 가운데 이 두 가지에 집중했을까요? 간단히 생각하자면, 이 두 가지 해법이 거짓 교사들의 전략을 깨부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은 그들이 성경을 ‘제멋대로’(자의적으로 1:20)해석하는 그 엉터리 해석법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종말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바로 잡기 전에 그 토대가 되는 그들의 자의적 해석학을 먼저 공략한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왜 ‘신적 성품’을 해법으로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탐욕과 방종을 통한 부패한 행실로 성도들을 유혹하려 할 때, 성도들을 지켜 내는 유일한 방법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와 성품의 변화 곧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길만이 저들의 더럽고 부패한 윤리-도덕적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을 막아 내는 데는, 더 큰 교회로 성장하는 것도, 이단 세미나도, 더 많은 헌금과 봉사도, 윤리 세미나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바른 성경 해석과 신적 성품으로 성장하는 ‘성경적 교회 성장’만이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답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있고,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 신학자도 많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정말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될까요? 또한 성도들도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하면 정말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될까요? 그 대답은 ‘안다’라는 말의 의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다’는 것이 단지 ‘정보’를 습득한 정도의 지식을 가리킨다면, 신학이나 성경을 공부하면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도 그렇듯이 ‘안다’고 할 때, 성경에서 그 ‘앎’은 종종 사람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깊이 안다든지, 혹은 부부가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실제로, 깊이 알고 경험해서 결국 서로를 닮아가는 것처럼 아는 지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앎’이라는 것 즉, 지식을 가진 사람,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의 ‘존재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앎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은 곧바로 ‘은혜와 평강으로 차고 넘치게 되는’ 변화와 직결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식으로 그치지 않으며, 성도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길도 역시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 가득한 불만과 불평, 그것이 무엇이든 부족한 것에 대한 좌절과 시기, 이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근본적으로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써’가 답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내 속에서 이 모든 ‘비 은혜’의 쓴 뿌리를 이겨내는 답입니다. 말씀이 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처음부터 이렇게 처방을 제시하며 편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평강(에이레네)이란 원수의 모든 공격을 제압하고 다스려 승리를 얻은 상태에서 누리는 안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위험이 몰려오고, 점점 짓눌려 내버려진 것 같을 때에, 그렇게 평강을 잃은 상태에서 무엇을 합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평강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본문은 역시,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써’라고 답합니다. 다음 주일에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항상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