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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Writing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대니 샤피로. Dani Shapiro 1962~
[들어가며]
야구 경기에서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전부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딱히 스포츠펜이 아닌 나는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진심을 다해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전부를 배울 수 있다는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나는 평생 글을 써왔다. 청소년 시절에는 소프트커버 일기장이나 스프링제본 공책, 자물쇠와 열쇠가 딸린 일기장에 썼다. 연애편지와 거짓말, 이야기와 편지를 썼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읽었다. 쓰지도 읽지도 않을 때는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저기 어딘가 삶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고, 글쓰기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주었다. 공책들 속에서 나는 외롭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런데 글쓰기가 나를 구원했다. 글쓰기는 내게 무한으로 열린 창을 보여주었고,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게 했다.
랄프 월도 에머슨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좋은 작가는 자신에 대해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자신과 만물을 관통하는 우주의 실을 향하고 있다.” 글을 쓰려고 앉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학생이 나를 찾아와서 관찰해도 좋은지 물어왔다. 나를 지켜본다고? 거절할 수밖에. 앉았다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가 커피를 좀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끓이고 다시 올라와서 또 앉았다 일어섰다 머리를 빗고 다시 앉아서 화면을 들여다보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일어나서 개를 쓰다듬고 다시 앉는 나를 지켜보는 가엾은 학생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삶이란 용기와 인내, 끈기, 공감, 열린 마음, 그리고 거절 당햇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상냥해야 하고, 가리개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을 관찰하고 버텨야 하고, 절제하는 동시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실패해야 한다.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평생을, 언젠가 사뭬엘 베케트는 이렇게 썼다.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그러러면 위대한 편집자 테드 솔로토로프가 내구성이라 불렀던 것이 필요하다. 강의실에 앉은 작가 지망생들을 볼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자질이다. 그들 중에는 다른 d들에 비해 재능이 많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최선을 다해 작업한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성공이나 명예를 향한 야심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을 타고났거나 눈앞의 문학적 명성에 집중(이런 사람들은 내 생각에 단거리 주자다)하기보다 수십 년을 버티며 꾸준히 글을 쓸 사람들도 있다.
당신이 작가이건 아니건, 나는 이 책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에 필요한 자질들을 발견하고 다시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닌지 저마다 은밀히 궁금해 한다. 우리는 더듬거리고, 사랑하고, 패배한다.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힘을 발견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무릎을 꿇는다. 우리는 초조하고 앞으로의 일을 알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삶은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지금 여기로 몰아간다. 오직 우리가 종이 위로 펜을 가져가는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젊었을 때 내가 작가라는 걸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과정에서 본보기가 되어준 너그러운 이와 스승, 조언자 들이 없었다면, 나의 황량한 언어의 불모지에서 직접 글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채, 혹은 무엇이 나를 형성했는지 모르는 채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서서히, 그리고 고요히 스스로를 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가 내 삶을 구했고, 글을 쓰며 살다 보니 글쓰기를 가르치게 되었다. 날마다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데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할 수는 없다.
종이는 당신의 거울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 거울에 비친다. 당신은 반발심과 부족한 균형 감각, 그리고 자기혐오와 마주하게 되지만, 고유한 시야와 배짱, 꺾이지 않는 용기도 직면하게 된다. 이제까지 무엇을 성취해왔건 우리는 날마다 산 밑자락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을까? 까다로운 수술을 앞둔 외과의사도 산 밑자락에 있다.. 최후변론에 나서야 하는 변호사도, 자기가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도, 학기 첫날 출근하는 선생님도 산 밑자락에 있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를 책임자라고, 혹은 상황을 파악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삶은 대개 바로 거기 있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우리를 때려눕히는 것이 tfka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런 교훈을 오랫동안 배우고 겪어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상흔]
나는 나이 든 부모의 외동아이로 자랐다. 내가 작가가 되는 데 어떤 초년기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 그 목록을 작성한다면 ‘외동아이, 나이 든 부모’가 상단에 있을 것 같다.
부모는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이었다. 우리 집은 코셔 가정이었고, 안식일인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는 차를 운전하지 않았고, 전등과 라디오,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고, 피아노를 칠 수 없었으며, 숙제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 하릴없이 보내야 했다.
우리 집에는 거의 모든 방에 전화기가 있었는데, 어머니 서재에 있는 전화기에는 수화기를 들면 다른 사람이 다른 전화선 수화기로 통화 내용을 듣는 걸 방지하는 작은 장치가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할 때마다 그 장치를 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들어서는 안 될 얘기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염탐하면서 문학 수업이 시작되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알아내고, 발견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가 자라서 되고자 하는 사람, 되고자 하는 것을 위한 훈련이었다.
[파도에 몸을 싣고]
[내면의 검열관]
내면의 검열관은 나를 멈추게 하려고 한다. 건열관은 내가 휴업하길 원한다. 조언이나 솔직함을 가장한 검열관은 내게서 가장 약하고 가장 취약한 온갖 부분을 조준하는 유도미사일 같다.
[모퉁이]
작게 시작하자. 페이지 위에 담으려는 세계, 아는 것 전부, 이제껏 떠올려온 온갖 생각들, 만나온 사람들 한 명 한 명, 당신의 내부에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감정들의 모음 등. 이걸 전부 한 번에 생각하려면 꼼짝없이 마비상태가 될 것이다 ~~~글을 쓸 때는 한 번에 한 단계씩 접근해야 한다. 처음부터 세계 전체를 떠올릴 수는 없지만, 보도의 갈라진 틈이나 까진 구두 뒤축을 묘사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갈라진 보도나 까진 구두뒤축은 빛의 핀 홀처럼 이야기에, 인물에, 우주에 진입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결국 어디서 시작할지가 너무 중요하지 않은가? 계획이 필요한 건 아닌가? 어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첫 단어가 뒤에 이어지는 단어들을 전부 지배할 거라고 확신한다.
모퉁이를 만들자. 퍼즐을 잘 맞추는 사람은 모퉁이부터 만든다. 그들은 색깔이나 모양을 무시하고 그저 각진 모서리만 찾는다.~~~에세이는 단어 하나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의 문장이, 그 다음에는 하나의 단락이 이어진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야기 전체를 알려고 안달하지 말자. 첫 데이트에 나가서 증손자를 상상하는 꼴이니까. 대신 아주 작은 세부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짧고 나쁜 책]
[자기만의 방]
친구 하나는 전철에서 주로 글을 쓰는데, 그저 하던 작업을 마치려고 F열차를 탄다. 이리저리 밀쳐대고 시끄러운 전철에서 머릿속이 맑아진다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침대에서 글을 쓴 걸로 유명한데, 웬디 웨서스타인도 그랬다. 이탈리아 재봉사의 아들이었던 케이 탤리즈는 아침마다 맞춤 정장을 차려입고 지하 서재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서서 글을 썼다. 아는 작가 한 사람은 늦은 밤에 작업이 가장 잘 풀린다고 한다. ~~~우리 작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느라 나날을 소모한다.
[견인장치]
[희미한 빛]
고통은 더 깊은 기억을 새긴다. t라면서 갑자기 충격을 받았거나, 배신당했거나,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던 때를 생각해보자. 아마 그날의 날씨가, 불어오던 바람이, 반쯤 차 있던 재떨이가, 나무 바닥에서 긁힌 자국이, 입고 있던 스웨터에 좀막은 자국이, 멀리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기억날 것이다. 고통은 우리 안에 세부를 새긴다. 커다란 기쁨도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길 강력한 감정은 그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자. 적막과 고요를 키우자. 새로이 발견하게 될 때까지 강한 감정 쪽으로 향하자. 애들러 가족은 내게 처음으로 특정한 종류의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내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다.
내면에 깃든 이런 흔적들은 종종 우리를 이야기로 이끈다. 존 디디언은 이를 가장자리 주변을 맴도는 희미한 빛이라고 했다. 에머슨은 어슴푸레 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탁월한 에세이 <자기 신뢰>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스치듯 반짝이는 어슴푸레한 빛을 감지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허가]
우리는 스스로를 허가한다.~~~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라. 스스로 작가인 것처럼 행동하자. 앉아서 시작하자. 방금 뭔가 아름다운 걸 창조한 것처럼 행동하자. 여기서 아름다운이라는 말은 진짜로, 보편적인 것을 의미한다. 누가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자.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을 보여주자. 그게 당신이 할 일이다.
[독서]
내 책상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어느 작가의 일기>와 토머스 머튼의 고독 속의 명상>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과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도 가까이 두었는데, 이들 동시대 작품 두 권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근접 삼인칭 서술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어서였다. 장의자 옆 책 더미에는 올해 나온 <미국 최고의 단편소설>과 <미국 최고의 에세이>가 있다. 내게는 이처럼 언제나 몰입해 읽을거리가 있다.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자양분과 영감을 얻지? ~~~잘 쓴 산문은 그 자체로 영양이다.
우리는 토머스 핀천의 복잡하게 얽힌 문장들을 따라가면서, 혹은 레이먼드 카버의 여백 많은 미니멀리즘에서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고 우리가 쓰는 글에 이러한 가능성의 감각을 적용한다.
좋은 문장들의 음악으로 귀를 채우자. 우리가 마침내 쓰던 원고로 돌아갈 때 이 음악이 우리를 실어 나를 테니까.
[디딤돌]
어떤 작가에게 디딤돌은 인물이다. 어떤 작가에게는 장소다. 누군가에게는 플롯이거나, 대화 한 토막이다. 우리를 이야기 안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 무엇인가? 시작해도 좋을 때는 언제인가? 산을 오를 때는 어딘가에 의지해야 한다. 바위틈에 발을 넣고 몸을 지탱한다. 길이 어둠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길잡이를 삼을 만한 것이 없어도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한 단어를 쓰고, 다음 단어를 쓰고, 서투르게나마 몇 페이지를 쓰고, 그래서 더 이상 하찮은 덩어리가 아니라 소설이나 회고록,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부를 만한, 엉성한 페이지 몇 장에 불과하지 않은 걸 쓰려면 추츠파(chutzpha)가 필요하다. 추츠파는 이디시어로 설명하기 힘든 방식으로 섞인 용기와 자만심을 뜻한다.
콜레트가 자신에게 가장 본질적인 예술이란 글쓰기가 아니라 기다리고 감추고, 부스러기를 모으고, 다시 붙이고, 다시 금박을 입히고, 가장 나쁜 것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저 시시함과 인생의 맛을 잃는 동시에 회복하는 법을 배우는 내면의 업무라고 썼던 걸 기억한다.
[씨앗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가 작가라면, 자신의 역사적 토대 없이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플래너리 오코너는 언젠가 유전 시절에서 생존한 이라면 누구나 평생 지속되는 소재를 갖고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 씨앗들이 소재다. 내가 글을 쓰는 중이고,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다면, 이는 내가 이 씨앗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내면의 장소들을 통과해왔다는 의미다. 이 씨앗들은 너무나 작고 항상 찾아내기 어렵다.
[빈 페이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도록, 나중에도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분석은 소용없다.
[아웃사이더]
[습관]
가끔 내게 날마다 글을 쓰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일주일에 닷새 동안 글을 쓴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믿기 어려워한다. ~~~그럼 어디서 영감을 얻죠? 그들이 묻는다. 저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자리에 앉아 영감의 길목에 저를 내려놔요, 정말 관심이 있어 묻는 사람에게는 종종 이렇게 답해준다. 내가 자리에 앉지 않으면, 거기서 작업하고 있지 않으면 영감은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갈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파티가 벌어지는 장소 맞은편에 바로 그 남자가 있는데, 머저리에 불과한 데이트 상대에게 빠진 여자가 그 남자를 절대로 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말해도 모자라다.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내 이름이 박힌 소책자 하나가 겨우 나왔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누가 느낄 수 있을까? 마라토너가 달리고 싶은 기분이 될 때까지 기다리나? 교사가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서 일어서는가? 잘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추정컨대 오직 행위만이 생산적이다. 할 일을 하는 것만이 그에 대한 욕구를 가능하게 한다.
[대단한 아이디어]
나는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될 때를 경계하는 법을 익혀왔다. 내가 가장 잘 쓴 작품들은 단서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불편하지만 생산적인 느낌에서, 걱정이 되고, 남몰래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길을 택했다는 확신에 사로잡혔을 때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뭔가 커다란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일단 내밷는다. 제일 먼저 남편에게 말을 꺼낸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소설을 생각 중이야.” 혹은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를 들고 말한다. “재판에서 오판이 나오게 한 배심원에 관한 좋은 이야기가 여기 있는 것 같아.” 나는 앉아서 생각하기보다 떠들면서 긴장감을 푼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가 발견한 단어들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죽어 있다. 말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일종의 경멸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 말을 인덱스카드에 옮겨 써서 책상 메모판에 붙여 두고 아직 쓰지 않은 것에 대한 과한 생각이나 말들이 늘 유용하지는 않다는 경고장으로 삼았다. 결국 표현되지 않은 것의 긴장감으로 글을 쓴다면, 그것을 표현해버렸을 때 그 긴장감은 어디로 갈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내보내야 한다. 처음 가보는 산 밑자락에 기꺼이 서서 겸허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것이 당신보다 혹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자. 길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음 걸음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시작하면 속삭여라, 나는 모른다고.
[작업을 시작하자]
[한 명의 독자]
우리는 누구를 위해 쓸까? 친구나 적, 아니면 전 애인? 가족? 넓은 독자층? 자기 자신? 글을 쓸 때 머릿속에 사람이 많을수록 글을 완성할 수가 없어진다. 머릿속에서 바빠질 뿐이다.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아무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기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던 커트 보니것의 충고를 귀하게 여기고자 한다.
한 명의 독자는 꼭 아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살아 있지 않아도 되고, 실존 인물이 아니어도 좋다. 보니것은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를 위해 글을 썼다. 작업을 공유할 수 없지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작가에서 독자에게로 뻗어나가는 선은 단 하나다. 작가는 홀로 글을 쓰고, 독자는 고독 속에서 읽는다. 서로는 서로에게 미지로 남겨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가 구축된다.
위대한 책에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그 순간 연결된 작가만을 생각한다. 책날개에 작가의 사진이 있다면 단서를 찾아보기도 한다. 눈이 슬픔을 담고 있나? 왜 시선을 돌렸을까? 반쯤 미소 지은 얼굴이 뭘 숨기고 있지?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작가가 곧장 우리를 향해 썼다고 상상한다.
나는 늘 한 사람의 독자를 특정하고 글을 쓴다. 나의 유일한 독자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나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아버지에게 닿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내가 어떤 여성이 되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가끔은 엄마를 향했다. 내 문장 하나하나가 애원 같았다. 나중에 나의 유일한 독자는 남편이 되었고, 여전히 그렇다. 지금 단 한명의 독자에게는 내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언젠가 내 책들에서 자기 어머니를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미스 코로나]
[현재를 살기]
[야망]
대학원생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맡았던 몇 년간, 봄마다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원고가 담긴 커다란 봉투들이 우편함을 가득 채웠다.
[안개]
E. L. 닥터로는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 시골길을 차로 달리는 일과 글쓰기를 비교했다. 전조등이 비추는 곳까지만 볼 수 있어도 천천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 집에 도착한다. ~~~추리소설이나 플롯이 복잡한 스릴러물을 쓰는 게 아니라면, 시작할 때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작가들은 드물다. ~~~~우리가 원고에서 이전까지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분출하도록 한 다음에도, 생각하고, 다듬고, 구조를 다시 짤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행운]
[안내자들]
[무엇을 아는가?]
당신을 사로잡은 장소에서, 당신이 집착하고 두려워하고 욕망하는 지점에서 글을 쓰는 것과 직접 통과해온 것을 글로 쓰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안다. 예컨대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정신분석가인 64세 남성이 아니다. 하지만 내 세 번째 소설<난파선 묘사하기>에서 나는 그 인물이 되었다. 내가 솔로몬 그로스먼이었다. 에마 보바리, 그건 나다 라고 플로베르는 말했다. 나는 나보다 서른 살 이상 나이가 많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으며 가져보지 않은 즐거움을 누린 남자의 마음과 영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질문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솔로몬은 아침에 일어나 자위한다. 나는 어떻게 스스로에게 그런 장면을 쓸 권한을 주었을까?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러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러기 전에도, 하는 중에도, 이후에도 어떤 기분을 느낄지 알았다. 우리의 한계는 오로지 공감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우리는 슬픔과 비통함, 상실, 즐거움, 희열, 갈망, 쾌락, 부당함, 질투, 산산 조각난 마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최근 나는 MIT 연구자들이 설계한, 입으면 나이 든 것처럼 느껴지는 ‘노년체험 시스템’Age Gain Now Empathy System(AGNES) 우주복을 입어봤다. 스키 바지처럼 보이는 것을 올라타듯 입었다. 허리춤 벨트에는 동작 범위를 제한하는 굵은 고무 밴드가 달려 있었다. 벨트에 고무 밴드로 연결된 헬멧도 썼는데, 이건 목을 돌리는 힘에 제약을 가하고 움츠러들게 했다. 고글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밑창에 날카로운 플라스틱 스파이크가 박혀서 걸을 때마다 아픈 슬리퍼도 신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1.5 킬로미터를 걸어보는 기회였다. 내가 여든 살, 어쩌면 아흔 살이 된 모습이었다. 미래가 흘긋 보이는 듯했다. 숟가락을 집어 드는 일이 이렇겠구나, 의자에서 일어나고 계단을 올라가는 일이, 늙고 허약해진 신체-적 경험을 상상하는데 AGNES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관점은 예리해졌다. 나는 보행 금지 표시가 깜박이는 브로드웨이를 건너려는 구부정한 노인에 대해, 혹은 생활지원시설에서 탈출하려는 치매환자 여성이 고속도로 갓길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경험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그런 순간들을 살아본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라는 것이 어떤지 안다. 유실된다는 것을, 두려움을 안다.
[피아노]
어머니는 수요일마다 하교한 나를 차에 태워 30분 거리의 이웃 동네에서 하는 피아노 레슨에 데려갔다. 가는 길에 우리는 하워드존슨 식당에 들렀고, 나는 스위스초콜릿 아몬드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차를 타고 가는 길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화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의 맛은 정확히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감각과 관련된 세부적인 것들이 종종 생생하게 남기도 한다. 늦은 오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쪽 고속도로에서 꾸준히 쉭 하고 들리던 소리, 등에 닿은 좌석 커버, 더는 젊지 않은 어머니의 손이 운전대에 놓인 모습, 어머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짙은 갈색의 캐딜락 엘도라도를 몰았다. 왜 그 차였을까? 나는 모른다. 부모는 과시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 같은 인물을 만들어낸다면 그녀가 엘도라도를 운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야기나 시, 에세이, 긴 작품의 서두 등 무엇이건, 괜찮게 느껴지는 글을 썼다면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자.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 언어가 움직이는 방식에 주목하자. 바라던 효과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나는 나보코프의 어떤 문장들, 혹은 델모어 슈워츠의 <책임은 상상력에서 시작한다>의 결말을 떠올린다. 쉼표의 급류에 따라 우리를 빠르게, 우리가 거의 헐떡일 정도로 빠르게 실어 나르는 유동적인 문장의 흐름을. 돈 드릴로의 무조적 병치를. 헤밍웨이의 깔끔한 스티카토 박자를, 창자에 꽂힌 칼 같은 마침표를, 당신의 언어는 어떤 악기를 불러내는가? 첼로? 전자기타? 오보에? 당신은 협주곡을 쓰고 있나? 아니면 굫야곡을? 자장가를? 귀를 기울이면 당신 자신의 목소리 리듬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오감]
도시에서 신는 좋은 신발은 전날 밤 내린 비로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근처 인동덩굴에서 호박벌들이 웅웅 거린다. 인동덩굴 냄새가 끼치자 여자 친구와 행복했던 한때가, 지난여름에 둘이서 갔던 소풍이 떠오른다. 그는 코를 조금 훌쩍인다. 콧물이 흐른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어 휴지를 찾아보지만 대신 포춘쿠키 포장지만 나온다.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난다. 그는 여자 친구가 먹을 걸 좀 줄지 궁금하다. ~~~이 방법은 종이 위의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가장 쉬운 길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가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그의 신체에 들어간다면, 이 글에는 많은 것이, 호박벌이, 인동덩굴이, 포춘쿠키가 나타날 것이다. 그의 사색은 그의 신체가 겪는 현재와 연합하고 연결될 것이다. 결국 이런 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우리는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듣고, 만진다. 이런 감각들은 우리의 내적 삶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운수 나쁜 날]
[어둠 속에서 글쓰기]
[신뢰]
어느 때가 되면 자기가 쓴 작품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쓴 문장을 너무 많이 보면 그 의미가 희미해지고 그저 종이 위의 구불구불한 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달 원고에 매달려왔고, 이제는 기억에 붙들려 돌에 새겨진 것처럼 보인다. 되돌릴 수 없다. 바꿀 수가 없다. 투박한 표현도 오타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많은 인물이 목욕가운을 입고 있지? 왜 목을 가다듬고 있지? 아니면 왜 파스타를 먹고 있지?
우리에게는 자신이 아닌 독자가 필요하다. 작품의 장점을 찾아내는 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지점에 도달했는지 어떻게 알지? 어떤 작가들은 여러 번 퇴고하고 나서야 남들에게 작품을 보여준다. 또 어떤 이들은 정기적으로 신뢰하는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내 첫 독자는 남편 마이클인데, 대개 저녁마다 그에게 작업한 원고를 조금 읽어준다.
[리듬]
중요한 건 작업 틀을 설정하는 것, 즉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하루 세 장, 일주일에 닷새, 산수를 해보자. 나도 언제나 계산한다. 일주일이면 열 다섯장, 한 달이면 60장.
[작성]
우리는 대부분 작업 과정에서 어느 시점이 되면 화면에 직접 작성한다. 데스크톱과 노트북, 아이패드를 비롯한 다양한 거기에. 우리는 눈에 띄는 스타벅스에 들어가거나, 기차나 비행기 통로 끝에 있다. ~~~ 우리 작업을 화면으로 보면 깔끔하고 단정하고 끝나지 않았는데도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단번에 덤벼들고, 검색하고, 재배치하고, 복사해서 붙여 넣고, 강조하고 지우는데, 그러다 보면 하양 스크린 전체가 변한 부분들을 집어삼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변화]
[다시 시작하기]
글쓰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저항하고, 미루고, 경로에서 이탈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도구와 능력이 있다. 모든 문장은 새롭다. 모든 단락과 장. 책은 우리가 한 번도 닿지 않았던 나라다.
[틱]
반복되는 단어, 친숙한 표현, 이걸 단서로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이 보인다면, t고도를 늦추자. 아니, 멈춰야 한다.
[구조]
우리에게는 닥터로가 말 한 안개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나치게 많이 안다면 가는 내내 작업은 고통 받을 것이다. 눈앞에서 경련하다 죽을 것이다. 우리는 사체를 끌고 가다 마침내 지쳐서 포기하고 말 것이다.
개요는 우리가 작업을 통제하고 있으며 어디로 간느지 알고 있다는 환상을 안겨준다. 그래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창작 과정에는 반대급부로 작용한다. 형식에 맞추어 그림을 그린다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조리 그레이엄은 마크 스트랜드가 캔버스에 쓴 시를 이런 식으로 묘사한다. “실그러진 세로단들은 추상화처럼 보인다.: 형태를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다. 제대로 된 것이 나타나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실수하거나 변화를 감내하거나 변주를 시도하는 정신.” 실수하는 정신, 이것이 형태를 움직인다. 이 근사한 생각에 우리는 의지할 수 있다. 실수 자체가 작품을 살아 있게 한다니, 구조는 중간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머릿속에 들어오자마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참 활발할 때에, 통제를 포기하려는 순간에, 그리고, 그러고 나서야 구조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동안 고딕 성당을 건설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나타난 형태는 토벽 집일 수 있다. 우리는 시작이 진정한 시작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가 있는 지점이, 165쪽이 실은 시작점이라는 걸 깨달을지 모른다. 비중 없는 인물이 한자리 꿰찼다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그 책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50년 세월을 다룬 도입부가 필요하다는 걸, 진정한 구조가 스스로 드러날 때 늘 기쁘지만은 않다. 더 많이 작업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토대를 강화해야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건설해야 할 수도 있다는 예기다.
무언가 진짜를 창조하고 있다면, 구조는 결국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보라, 저기 풍경이 있다. 당신은 벽돌을 쌓는다. 순간들이 연결된다. 역사와 유산이 현재를 물결치며 통과한다. 하나의 목소리가 음앇 선율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안개 사이로 형태가 나타난다. 기대와는 다를 수 있다. 희망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 것이다.
[채널]
“우리는 위대함을 달성하는 일에 완전히 관심을 꺼야만 위대해질 수 있다.“고 토머스 머튼은 썼다. 만족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
[2막]
삶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안목과 규율이 필요하듯 이야기의 중반부도 그렇다. 우리는 한 발짝 물러나 어디에 있는지 살펴본다. 만들고 있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의도적인가? 아니면 우연히 흔들리고 있는 건가? 종반부의 진창을 능숙하게 다루면 다양한 형식을 고려한 이야기를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작 e나계 이후에 느리고 꾸준한 상승부가 이어지고,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우아하게 이끌어내며 정점을 쌓아가는 고전적 서사의 아치는 우리가 사용 할 수 있는 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평범한 삶]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계시는 일상에 있다는 걸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점을 알고 잇었다.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저 자기 일을 보러 나가는 여성이다. 클러리서 댈러웨이를 비범하게 만드는 건 그녀 내면의 삶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에마 보바리와 샤를 보바리는 곤경에 처한 평범한 사람이다. 포크너는 “자신과 충돌하는 인간 내면의 문제만이 좋은 글을 생산 한다”고 말했다. 박동하는 심장이라면 필히 내재하고 있을 이런 충돌을 조명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독자에게 공감하고, 하나 되는 감각을 갖고, 발견하게 해주므로. 여기서 우리는 개별성에서 벗어나 인간됨이라는 일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을 받는다.
매럴린 롭니슨은 소설 <하우스키핑>과 <길레아드>에서 평범하지만 닞을 수 없는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는데,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처럼 인용부호를 써서 이해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려면 무심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네덜란드 회화를 생각해 봅시다. 햇빛이 대야를 비추고, 한 여자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입고 있었던 듯한 옷차림으로 옆에 서 있어요. 평범한 대상을 무심하게 포착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죠. 또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같은 작품에서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화가의 눈을 포착한 까닭은 거기 뭔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어서겠죠. 에드워드 호퍼 작품에서도 이런 면모를 찾아볼 수 있어요. 저 햇빛을 봐! 저 사람을 보라고! 이는 천재의 사례들이죠. 문화가 예술가를 귀하게 여기는 건 그들이 저걸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라는 건 베르사유 궁전이 아닙니다. 햇살 한 줄기가 비친 벽돌 벽이죠.”
저걸 보라고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가리키고, 빛을 밝히는 것, 하지만 우리의 주목을 요하는 건 이미 밝게 빛나며 손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기 위해, 감성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법” - 을 발전시킨다. 나긋나긋한 희망과 꿈, 기쁨, 취약함, 슬픔, 두려움, 갈망, 욕망을 - 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풍경이다. 감정을 이입해 상상하면 편의점 금전등록기 앞에서 일하는 여자를, 트럭 휴게소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자를,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비행기 복도를 오가는 어머니를 흘긋 볼 수 있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안다. 저걸 봐 인간의 위기를, 누적된 평범한 축복을, 혹은 견딜 수 없는 상실을, 그리고 여전한 한 줄기 햇살을, 빨래하는 여자를, 도살된 소를, 우리를 붙드는 삶을, 우리가 아는 삶을.
[비밀들]
인물의 내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생각은 했지만 말하지 않고 남긴 것들을 이야기한다. 인물이 행동하는 동기임에도 인물 자신에게,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작가에게조차 감춰진 채 남아 있을지 모르는 것. 적어도 이야기를 처음 발견한 순간엔 그럴 수 있다. 우리가 인물에 대한 완벽한 서류를 취합하고 가계도를 꼼꼼히 작성했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인물의 집착을, 은밀한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는 죄를, 근원적인 욕망을, 가장 내밀한 갈망을 발견한다. 시작할 때는 알 수 없다. 가장 마음을 뒤흔드는 발견을 하게 될 때는 삶이 그렇듯 중반부에서다.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인 <무법자의 마음>에서 제인 앤 필립스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 중 누가 작가가 될까? 그리고 왜?” 글을 쓰는 이의 뿌리를 되짚어 시초로, 씨앗으로, 비옥한 토양 깊숙이 자리한 가냘픈 새순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린 시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주변세계를 이해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라면, 어린 시절이 아닌 어디서 이처럼 알고 이해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찾을 수 있을까? 가끔 나와 남편이 친구의 이혼이나 배신, 금전적 문제, 친구가 유산한 일 등 여느 어른의 문제에 대해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데 숙제하느라 바쁜 줄 알았던 아들이 자기 방에서 끼어들 때가 있다.
[수련]
[상속]
[늘 그렇지는 않아]
[횡재]
[동굴]
[통제]
우리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고민한다. 잘 고치는 일에 우리 말고 또 이렇게 많이 신경을 쓰는 이들이 있을까? 고요함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특별히 머그잔을, 제일 아끼는 펜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를 숙고하고, 큰 목표를 잡고, 음악적인 면과 의미를 모두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을 읽어내기]
쓰는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역설은 신중하게, 심사숙고해서, 집중력을 발휘해, 진심으로 고른 단어들이 페이지에 한 번 기입되고 나면 눈앞에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언어는 우리가 문장을 빚어내고, 이런저런 요소들을 움직여보고, 구두점을 두고 고심하고, 소리 내어 읽어볼 때, 입술로 느껴볼 때만 우리 것이다. 우리가 듣고 만지고 볼 수 있게끔 빚어낼 때 장면은 살아서 숨을 쉰다. 우리는 화가들처럼 언어의 내부에 있다. 템페라, 가느다란 선, 캔버스 위 마르지 않은 물감 등으로 작업하는 화가들처럼, 여전히 과정 중에 있고 여전히 살아 있는 도구로 작업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행에 옮기고 나면, 언어가 페이지 위에서 물감처럼 마르고 나면, 그걸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쓴 것을 새롭게 보는 능력이 없다면 꼭 필요한 작업을 할 수 없기에 이는 난제일 수밖에 없다. 작품 내부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말이다. 우리에게는 냉정함이 아니라 명철함이 필요하다. 집착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낙관주의를 원하는데, 그러려면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응원해주는 사람도, 흠 잡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평정심을 지니고 자기 자신을 읽어내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내 작업에 접근하는 법을 익혀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왔다. 낮선 환경에서, 평상시와 다른 시간에 촛불에 의지해서, 아니면 해변에서, 지하철에서, 평소처럼 읽는 버릇을 깨보려고 노력하며 원고뭉치를 들고 다니며 읽어보았다. 원고 폰드를 바꿔보았다. ~~~내가 지닌 최고이자 최상의 비밀무기는 이것이다. “다른 사람인 척하기.” ~~~원고를 한 번 공유하면, 원고는 전과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우매함]
우리는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일지도 모르고, 온갖 인상적인 학위란 학위를 모두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세 가지 언어의 동사변화를 구사하거나 입자물리학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녔고, 멘사 회원일지도 모르겠다. 한데 이런 종류의 영리함은 페이지 위에서 문장 한 줄을 따라갈 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리함이 문제일 때도 있다. 지적이고 박식한 유형의 작가 몇몇을 아는데, 그들이 너무나 영리한 나머지 그들의 작품이 고생한다. 로켓 과학자나 신경외과 의사가 될 정도로 영리한 건 아니어도, 작가가 되기엔 너무 영리한 것일 수 있다.
스토리텔링에 관해서라면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동물처럼 우매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원래 원초적인 것이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암송을 하건, 이스트빌리지 술집에서 큰 소리로 낭독을 하건 상관없이, 스토리텔링은 우리가 주변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성 너머의 무언가를 활용하는 건 당연하다. 이로써 우리는 의도해서 파고들 때보다 더 깊게 이해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우리 정신은 어지러이 움직이며 좌고우면한다. 이쪽으로 가야 하나? 아니 저쪽인가? 단어들이 점점 얽히고 설켜서, 생각하는 과정이 이미 우리가 싸지른 혼란을 풀려는 시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장애물을 만든 것은 우리고, 장애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우리다. 우리의 정신은 빛을 가리는 거미줄을 자아낸다. 우리는 뒤늦게 예측하고, 제한된 의식의 늪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야기의 길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심오한 내면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단어가 우리를 앞선다. 우리는 단어를 듣고 옳다고 느낀다. 내가 그걸 어떻게 했지? 글쓰기를 마치면, 물감이 마르면, 초고를 고치고 다시 쓰고 또 쓰는 작업을 하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자문한다. 대답 중 하나는 당연히 “열심히 작업했으니까”가 된다. 우리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꾸미고, 읽고, 조사하고, 배우고, 탐구했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쯤 속임수를 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속임수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했지?
우리는 귀를 쫑긋하고 눈을 크게 뜬 동물이다. 우리는 부드럽고 눅신한 대지에 한쪽 발굽을 내려놓고 다음 발굽을 내민다. 바스락거리는 잎사귀, 부러지는 나뭇가지, 지나가는 실바람, 우리는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고민하느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모른다. 있는 것이라곤 새둥지, 아기 사슴, 고목의 옹이진 뿌리 아래 E하리를 튼 뱀뿐이다. 우리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맥동하는 우리 몸, 우린 여기 있다. 생생하게, 기민하게, 몸을 떨면서. 우리는 혈거인이다. 날카롭게 긴 화살촉으로 그림을 그린다. 소년을. 곰을. 달을.
[규칙 깨기]
앤드루 숀 그리어는 <맥스 티볼리의 고백>에서 서사의 구조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챕터가 이어질수록 화자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게 설정했다. 매리언 위닉은 자신이 알았던 망자들에게 바치는 퍼즐과도 같은 비가이자 짧지만 매우 예리한 회고록인 <글렌 록 부고>를 썼을 때, 규칙을 깼다. 다 죽었다고? 근데 왜 신경 써야 하지? 조 브레이너스가 쓴 회고록 <나는 기억한다>의 모든 문장은 나는 기억 한다로 시작한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반복을 피해야 한다는 글쓰기 선생의 목소리가 없는 것이다. 컬럼 매캔이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썼을 때, 그는 독자들에게 수많은 화자들의 스토리라인이 연결될 때까지 따라갈 의지가 있느냐 묻지 않았다. 이들 중 누구라도 내면의 검열관이 덮치게 놔두었더라면 이런 책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이 작가들이 없었을 것이다.
[침 뱉기]
[담배 타임]
[인물]
인물은 유형이 아니다. 인물을 만들 때는 예상 가능한 요소들을 피해야 한다. 언어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클리셰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인물의 경우, 우리는 진실하면서도 늘 그렇지는 않은 것을, 인물을 독특하고 미묘하며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찾는다. 이러한 특수성은 당연히 주요 인물들에게 적용되지만, 조연들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바 끝에 앉은 남자. 병원 접수대의 직원, 길에서 쇼핑백을 들고 있는 여자, 이들은 주인공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들러리가 아니고, 부분적 색체를 조금 더하려고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들러리나 부분적 색채가 없는데, 페이지 위에 있을 리가 없다.
스스로 질문해보자. 이 인물은 어떻게 걸을까? 어떤 냄새가 나지? 뭘 입고 있지? 어떤 속옷을 입고 있지? 어디 억양이 배어나지? 배가 고플까? 목이 마를까? 최근에 읽은 책은 뭐지? 전날 저녁으로 뭘 먹었을까? 춤을 잘 추나? 펜읋 십자말풀이 퍼즐을 풀까? 어려서 동물을 길렀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개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물론 우리는 이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을 더의 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 수업에서 인기깨나 있는 방법이 유전학, 습관, 신체적 특징 등을 동원해 인물들에 완벽한 서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 방식이 딱히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아마도 이런 목록과 전사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정작 글을 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법을 걸러낼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 속에서 인물과 충분히 오랫동안 깊이 있게 지낸다면 가족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인물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면 뭐가 되었건 쩔쩔 매지 않게 된다. 좋아하는 음식? 알레르기 유발 원인? 내밀한 부끄러움? 짜증나는 습관? 우리의 인물들은 한 번 형태를 갖추고 나면 우리가 깨어 있건 꿈을 꾸고 있건 우리 의식의 일부를 차지한다.
우리는 누구도 클리셰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의 총합이다. 어떤 유형, 특정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불그스레한 안색에 실크 포켓 스퀘어를 장식한 감색 블레이저에 하양 바지를 입고 양말 없이 스웨이드 로퍼를 신어E으며 젊은 금발 여성을 팔에 안은 남자로 보일 수는 있다. 클릭, 클릭, 클릭, 당신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판단을 내린다. 트로피 아내를 얻은 부유한 사업가로군, 그런데 그 남자가 방금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면? 팔에 안은 젊은 금발 여성이 수술을 앞둔 그를 찾아온 딸이라면? 최근에 아내를 잃었다면? 버니 메이도프에게 전 재산을 잃었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찰나의 첫인상에 근거해 평견과 투사를 동원해서 즉시 어떤 가정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그림을 놓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것 보는 것마다 공감적인 상상력을 발동할 수 있도록 연마할 것.
[거리]
오랫동안 코미디 작가로 활동하며 성ㄱ오적인 커리어를 이어온 한 친구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웃긴 것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말한다. “나는 먼저 웃어.” 그가 말한다. “그러고는 거기서부터 뒤로 돌아 가는 거야. 마냥 앉아서 ‘오, 정말이지 이건 사람들을 다 쓸어버릴 거야’라고 생각만하는 작가에게서 지속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예술작품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해.” 다 쓴 우너고에서 유머가 나온건 비애감이 나오건(둘 사이에는 뜻밖에 연관성이 있다는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쓰는 도중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다이앤 키튼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성공한 극작가를 연기하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명랑하게 글을 쓰다가 초조하게 고개를 흔들고 울다 웃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작가라면 약을 바꿔야 하나 고민해봐야 한다.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분노,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작업 수단이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동시에 만들어낼 수는 없다. 분노와 울분이 미학적으로 작동하려면 작가는 이에 거리를 두고 프랑크 오하라가 <내 감정들의 기억>에서 언급한 것처럼 써야 한다. 분노는 일관적이지 않다. 관찰된 분노는 일관적일 수 있다.
~~~눈을 감고 매트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미첼은 불붙인 성냥이나 밝게 타오르는 향을 떠올려보라고, 그러고는 불꽃이 꺼지는 모습을 상상하라고 말했다. 끝부분이 빨갛게 타들어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재가 남는다. 나는 그때부터 창작과정에 적절한 은유처럼 보이는 차가운 재의 이미지를 늘 갖고 다닌다. 우리는 일관적이지 않은 불꽃으로부터 글을 쓰지 않는다. 연기로부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재가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 재 안에는 불꽃과 연기를 만들어낸 물질이 그득하다. 그걸 만질 수 있는 건 오직 지금이다. 우리는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을 수 있다. 우리는 마음대로 형태를 빚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것이다.
[테두리들]
음악가이자 암 투병자인 조슈아 코디는 회고록<원문 그대로임>에서 이렇게 썼다. “내게는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테두리에, 프레임에 맞서 쓰는 것이다. 삶에 관한 무언가에, 아무것에나, 예컨대 암이라는 프레임을 씌워보자. 그러면 심지어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미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 ”
이게 무슨 뜻이지? 나는 구조가 글쓰기 자체에서 솟아나온다는 생각을 고집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프레임 어쩌고 하는 말은 뭐람? ~~~프레임은 구조가 아니다. 구조는 프레임 내부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프레임은 아니다. 프레임은 당신에게 일관성을 부여하고, 당신이 이야기에서 엇나간다고 알려준다. 코디의 표현에서 테두리에 맞서 글을 쓴다는 건, 패치워크 이불의 한 조각을 명확하게 할 때 도움이 된다. 우리가 딛고 선 대지 한 조각에. 우리 지형도의 정밀하고 독특한 한 부분에, 우리 세계에.
토바이어스 울프의 <이 소년의 삶>에서 이야기를 둘러싼 프레임은 유년 시절이다. 프랭크 매코드의 <안젤라의 재>, 프랭크 콘로이의 <시간 멈추기>도 마찬가지다. 수재너 케이슨의 <처음 만나는 자유>나 마사 매닝의 <암류>에서 프레임은 정신질환이다.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 그 치명적인 유혹>이나 피트 해밀의 <마시는 삶>, 데이비드 카의 <총의 밤>에서 프레임은 중독이다. 루시 그리얼리의 <서른 개의 슬픈 내 얼굴>과 에밀리 랩의 <위탁 아동>에서 프레임은 상처다. 패트리샤 햄플의 <버진 타임>과 매릭 매카시의 <가톨릭 소녀 시절의 추억>에서 테두리는 영적 허기로 규정된다.
~~프레임은 이야기를 가늠하는 척도를 제공한다. 무엇이 이런 척도인지, 테두리인지 모른다면 그 안에 닥치는 대로 집어넣을 위험이 발생한다. 싱크대처럼, 모든 게 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게 동일한 호소력을 갖거나 울림을 주지 않는다. 픽션을 쓰건, 논픽션을 쓰건 이는 진실이다. 프레임은 강제적으로 분별을 요구한다. 저것이 아니라 이것, 이질적인 것과 무절제한 것, 과잉된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코디의 말을 빌리자면 프레임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미 어딘가에 도작”하게 한다. 이 말은 예컨대 중독에 관한 이야기에 어린 시절이 담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머니와 딸의 유대관계가 프레임인 이야기가 영적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프레임을 알고 틀을 만들어낸다면,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어떤 규칙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 프레임은 창의적인 결정을 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할 것이다. 여기 창문이 있다. 창밖을 보자. 뭐가 보이나? 아, 다른 창문들도 많은 집 안에 서 있다면 . 나중엔 그 창문들을 통해 봐도 된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이 창문 앞에 서 보자. 볼 것이 너무나 많다.
[월요일들]
[몰입]
[가장 좋은 부분]
[노출]
[위험]
[결정권을 쥐고]
[부족]
[인내심]
[당신의 것]
[메아리]
한 작품의 완성을 앞두고 잇을 때, 우리는 느슨한 끝을 전부 단단히 동여매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모든 인물과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하고 예쁜 띠로 꾸러미를 묶고 싶다고. 인물들의 딜레마와 내면의 삶 안에서 수백 시간을 보낸 우리는 이들과 자주 사랑에 빠졌다.
[휴식]
[춤]
[배신]
[다친 손가락]
[관리자]
[Review]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물레방앗간을 운영하는 사내가 있다. 그는 물레방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사내는 물레방아의 구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레방아의 회전축과 날개바퀴에 작용하는 힘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체역학 분야의 책들을 탐독하며 하나하나의 원리를 알아낼 때마다 쾌재를 불렀다. 그러는 동안 기계에 기름을 치고 피댓줄을 조이고 늦추는 일을 게을리 하여 물레방아는 고장 나 버렸다.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하고 또 나중에 하는지에 대한 순서라고 했다.
인생에서 한가한 시간이 찾아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주변을 살피고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있고 악기를 배우거나 또 여행을 다니고,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게 무슨 대수냐며 끝까지 생업에서 손을 놓지 않는 이들도 있다.
책을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글을 쓰는 일은 전문가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점차 많은 아마추어 작가가 글쓰기에 동참하는 모습을 주변에서도 보게 된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록을 블로그에 올리고 기획사에 투고하고 또 회고록을 쓰기도 한다.
흔히 인생의 행복은 자아실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 자아실현이 동물적 자아가 아닌 이성의 법칙에 따를 때 진정한 행복이기에 인생은 언제나 타인의 생각과 또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며 또한 발견하는 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나름대로 생각하기는 글을 쓰면 인생에 대해 배워야할 전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야구 경기에서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전부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딱히 스포츠펜이 아닌 나는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진심을 다해 꾸준히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전부를 배울 수 있다는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본문)
글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래서 짧은 단락의 글이라도 쓰려면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중심 주제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형식과 구조를 갖추고, 이성적 판단이 올발라야 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시간을 두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민화를 그리는 학생이 짧은 시간에 호랑이를 화폭에 그리자, 사회자가 어떻게 이렇게 세밀한 모습까지 그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은 서슴없이 ‘자꾸 그려보면 어렵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학생은 하루 보통 여덟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예능은 재능이 있어야겠지만 그만큼의 노력도 필요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글쓰기에 조언을 주는 책들을 보면 공통으로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잘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 글쓰기인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태생으로 인기 작가이다. 현재는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 대학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뉴욕 타임스 등 에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교과서적인 책이 아니라 여러 편의 에세이 형태의 글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전문 작가뿐 아니라 글쓰기를 배우는 모든 이들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늦게 글쓰기를 시작해서 글쓰기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본문)
“글을 쓰는 삶이란 용기와 인내, 끈기, 공감, 열린 마음, 그리고 거절 당햇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상냥해야 하고, 가리개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을 관찰하고 버텨야 하고, 절제하는 동시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글을 쓸 때는 한 번에 한 단계씩 접근해야 한다. 처음부터 세계 전체를 떠올릴 수는 없지만, 보도의 갈라진 틈이나 까진 구두 뒤축을 묘사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갈라진 보도나 까진 구두뒤축은 빛의 핀 홀처럼 이야기에, 인물에, 우주에 진입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작가이건 아니건, 나는 이 책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에 필요한 자질들을 발견하고 다시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닌지 저마다 은밀히 궁금해 한다. 우리는 더듬거리고, 사랑하고, 패배한다.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힘을 발견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무릎을 꿇는다. 우리는 초조하고 앞으로의 일을 알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삶은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우리를 지금 여기로 몰아간다. 오직 우리가 종이 위로 펜을 가져가는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이상하고 틀렸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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