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근에 햇볕을 쬔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막바지 장맛비가 꽤 길게 계속되고 있다. 추운 게 더운 것보다 낫다고 여길 만큼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밖에 나갈 일 없을 땐 맑음보단 비 소식이 더 반가운 내 입장에선 이 상태가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계속된다고 해도 크게 불쾌할 게 없지만, 그래도 애로사항을 하나 떠올려본다면 바로 습기로 인한 찝찝함이다. 한 번 시작된 비의 태도가 진득하지 않고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할 때면 그 찝찝함은 배가 되어 내 기분을 살짝 불쾌하게 이끄는데, 비로 인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일상에서 어떤 일을 대하며 맞이하는 찝찝함이란 그 결부터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나는 뭔갈 시작해서 그 끝을 보지 못할 때 받는 찝찝함이 싫어, 느낌상 어정쩡한 끝맺음이 예상된다면 시작도 안하는 성향의 소유자다. 원래도 그랬지만 여행자로 살며 그 성향은 한층 더 두드러졌는데, 특히 등산을 할 때 목적지까지 다녀오지 못하고 중도에 하산할 때 드는 찝찝함이 정말 싫다. 오늘 소개할 청송 주왕산을 꼭 5년 만에 다시 찾게 된 이유 역시 용추폭포까지만 다녀오며 획득한 케케묵은 찝찝함이 컸는데,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청송 주왕산 등산코스를 <대전사-용추폭포-가메봉-주봉-대전사>로 완벽하게 소화하며 5년 전부터 케케묵어 있던 찝찝함을 싹 씻어낼 수 있었다.
목적으로 삼은 산이 어디에 있든 늦어도 오전 10시부턴 오르기 시작해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 아래 중부내륙·당진영덕고속도로를 두루 달려 이번 청송 주왕산 등산코스의 시종점 상의주차장에 닿았다. 청송휴게소에서 가볍게 우동 한 그릇 챙기는 것까지 포함해 2시간 30분 정도 걸렸는데, 충북선과 중앙선 철도로 안동역까지 이동 후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쳤던 5년 전에 비하면 혁명적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그 여정이 쾌적해졌다. 봉화(B), 영양(Y)과 함께 오랫동안 경북 오지 BYC로 분류되던 청송(C)이 오지의 오명을 벗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당연 당진영덕고속도로인데,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왕복 4차선 도로의 꿈은 아직이지만 그보다 더 값진 고속도로를 먼저 얻게 된 것이다. 이로써 주왕산만 소화해도 최소 1박2일 일정을 잡아야 했던 청송 여행에 대한 부담감 역시 당일치기로 확 줄었다. 한편 이날 청송 주왕산 하늘은 무채색의 흐림이었으나 미세먼지 상태는 아주 좋아 산행에는 과연 제격이었다. 제격의 이유는 햇빛이 전혀 없어 그 빈자리를 상상만으로도 시원한 산바람이 채웠기 때문이다. 주왕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가 위치한 상의주차장을 나서 가장 먼저 마주친 중간 거점은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주왕산의 모습을 품은 대전사였다. 대전사 뒤로 우뚝 솟은 돌기둥을 통해 국내 3대 바위산의 위엄이 바로 느껴졌는데, 친절하게도 사진 잘 나오는 위치를 표시해놓아 사진으로만 봤던 그 풍경을 손쉽게 담을 수 있었다.
대전사 이후엔 용추폭포와 주봉 가는 길목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나는 용추폭포, 가메봉, 주봉 순으로 주왕산 등산코스를 세웠기에 혼란 없이 내 길 잘 택해 나아갔다. 물 맑은 계곡을 바로 옆에 두고 학소대까지의 길목은 청송 주왕산이 지닌 이국적인 매력의 맛보기처럼 여겨졌는데, 구배 없이 평탄한 흙길 걷기는 격렬한 산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운동으로 충분했다. 한편 용추폭포로 진입하는 학소교에 앞서 마지막 화장실이 있으니 꼭 들러줘야 확실하게 가뿐한 몸과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중국의 깊은 산 속 협곡에 머무는 듯한 이국적인 매력이 절정으로 치닿는 청송 주왕산의 용추폭포와 절구폭포, 이 구간은 수 많은 이들이 주왕산을 찾는 보편적인 이유로써 내겐 5년 전의 찝찝함이 시작된 반환점이기도 하다. 겹겹이 닫혀 있다 열린 자연의 문처럼 여겨지는 석문에 들어서는 느낌은 5년 전 그때처럼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행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설치된 나무데크 따라 용추폭포의 가장 윗부분까지 나아가면 가메봉 가는 길목인 후리메기와 절구폭포의 분기점이 등장하는데,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절구를 꼭 닮은 절구폭포를 거쳐 후리메기로 진입하게 되었다.
계곡와 등산로가 겹쳐진 후리메기 구간은 이날 경험한 구간들 중 가장 험난해 지금 생각해도 그저 재빨리 통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청송 주왕산 등산코스 중 가메봉코스 지도 속 후리메기삼거리~가매봉 구간이 왜 붉은색으로 표시되었는지 단박에 체감되었는데, 바위와 나무 잡고 천천히 나아가야하는 것보다 진행 방향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심리적 어려움이 컸다. 다행히 탐방로 느낌 나는 길목을 잘 택했으나 입문자를 위한 진행 방향 표시가 최소한 리본으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의주차장을 나선지 3시간 반만에 청송 주왕산의 최고봉인 882m 가메봉과 만났다. 앞서 언급한 후리메기 구간만 빼면 정상까지 여정은 대체로 수월, 하지만 탐방객 대부분은 용추폭포까지만 둘러보고 되돌아간다는 걸 정상부에서 30분 정도 혼자 머물며 실감했다. 가메봉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여러 높고 낮은 초록의 산등성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날씨 좋은 날엔 저멀리 영덕의 동해안까지 보인다는 문구를 접한 기억이 있어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은근 기대했지만 바다의 위치 정도만 겨우 추측 가능했다. 그렇게 아침 일찍 올라 운해를 감상하는 게 주왕산 가메봉의 가장 확실한 백미라는 걸 깨달으며 주봉 코스 통한 하산 여정이 시작되었다.
가메봉 입구에선 3.7km, 상의주차장에선 3km 위치인 주봉(해발 720m), 주봉 그 자체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주변 풍경은 청송 주왕산이 지닌 국내 3대 바위산의 면모를 가장 확실하게 풍긴다. 주왕산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 주봉이기 때문일까? 청송 주왕산의 경우 100대 명산 인증장소가 최고봉인 가메봉이 아닌 주봉으로 되있다. 용추폭포의 압도적인 인지도에 이어 탐방객들이 굳이 가메봉까지 오르지 않는 다른 요인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더불어 앞이 탁 트인 구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인지 산세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여럿 마련되어 가메봉 코스보다 더 많은 정성이 투입되었다는 게 실감된다. 바위산의 촉감을 양 발바닥으로 쉼 없이 느끼며 하산길에 임하다보니, 등산할 땐 홀연히 지나쳤던 주봉마루길 입구와 출구의 연을 맺으며 주왕산 가메봉, 주봉 코스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