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요한복음 3장 19-21절
3:19 αὕτη δέ ἐστιν ἡ κρίσις ὅτι τὸ φῶς ἐλήλυθε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καὶ ἠγάπησαν οἱ ἄνθρωποι μᾶλλον τὸ σκότος ἢ τὸ φῶς ἦν γὰρ αὐτῶν πονηρὰ τὰ ἔργα
3:20 πᾶς γὰρ ὁ φαῦλα πράσσων μισεῖ τὸ φῶς καὶ οὐκ ἔρχεται πρὸς τὸ φῶς ἵνα μὴ ἐλεγχθῇ τὰ ἔργα αὐτοῦ
3:21 ὁ δὲ ποιῶν τὴν ἀλήθειαν ἔρχεται πρὸς τὸ φῶς ἵνα φανερωθῇ αὐτοῦ τὰ ἔργα ὅτι ἐν θεῷ ἐστιν εἰργασμένα
* 묵상할 내용:
"악의 부활"
-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낫다.” 악 vs. “주님의 평가 기준에 모자라다.” [무익한 종]
- “다들 그렇게 산다.” 악 vs.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않으셨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삶]
- “그래도 잘산다.” 악 vs. “주님의 뜻만 따라 사는 것이 삶이다.” [가치관]
- “사는 거 별거 없다” 악 vs. “주님이 주신 시간, 생명, 주님께 바칠 소중한 제물로 살아야 한다.”
[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님의 계시(啓示)는 인간의 잘못을 드러내며 각자가 그것을 대상화해서 인식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잘못된 삶을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주님의 말씀은 각자의 삶 속에서 멈추어야 하는 것과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움직여야 하는 것에 집중해서 읽고 적용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주님 말씀의 대상에서 당연한 듯 자기를 제외시키게 된다. 더 명확히 말한다면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여기는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주님 말씀을 왜곡시킨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단어나 문장은 자기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단어나 문장은 다른 사람을 향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학적 오류이다. 기독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심판의 말씀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자기 죄가 용서받았고 천국에 갈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에 잘못을 지적하며 삶을 바꾸라는 주님의 말씀은 원천적으로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 없이 폐기된다. 그들은 그런 말씀은 단지 세상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완전히 틀렸다.
이러한 오류를 강화시키는 것이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작성한 소위 성서라는 사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요한복음 3장이 시작되면서 드러난 것은 니고데모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었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3:1)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요3:10)이라는 니고데모는 주님께 대하여 그럴듯한 칭찬(요 3:2)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상식 이하의 대답과 변명만 늘어놓는다.(요 3:4, 3:9) 주님은 이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꾸짖으신다.(요 3:3, 3:5, 3:10-12) 그런데 본문은 주님의 비판과 평가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맺지 않는다. 그런 상태로 니고데모는 사라져버렸다. 니고데모의 회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대한 단순한 반응조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니, 본문은 니고데모의 사라짐조차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주님께서 잘못을 드러내며 심판하셨던 것은 바로 니고데모의 죄다. 그리고 니고데모와 연결된 당시 권력자들과 대제사장이 회장직을 맡은 산헤드린(συνέδριον) 공의회가 저지르고 있는 악이다. 헤롯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건설되고 있던 성전을 중심으로 거래된 온갖 이권들은 신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유대인의 선생이나 지도자들에 의해 합법화되었다.
주님은 앞서 이러한 악의 온상인 성전을 뒤집어엎으셨다.(요 2:14-16) 그런데도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는 복음서라는 문서를 남기면서 성전과 연결된 니고데모와 당시 권력가들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두루뭉술하게 빛과 어둠이라는 모호한 말(요 3:19-21)로 은폐시키며 상황을 끝내버렸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 본문이 향해야 하는 주님 심판의 대상과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분노 또한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삶 속에서 신의 뜻을 따라 위로부터(ἄνωθεν: 요 3:3, 3:7 헬라어 원문: 이와 관련해서 이전 자료 참고 : 천모(천국의작은모퉁이) | 2023년 2월 26일 (요 3:1-5) "위로부터 난 자"(‘거듭남’, ‘중생’이라는 표현은 오류) (1) - Daum 카페) 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못을 드러내시며 심판하시는 주님의 계시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둠(요 3:18)을 단지 교회 밖 세상 사람들과 연관된 것이라고 단정해버린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교회를 빛이라고 여기고 그곳으로 가는 것만으로 자신이 진리를 따른다고 믿기 때문이다.(요 3:21)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신의 백성 중에서도 그들의 지도자이며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를 향해 심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은 니고데모와 그가 연결된 권력의 죄를 잊어버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본문을 읽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죄를 인식조차 못 하게 해버렸다. 이것이 사악한 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날이 선 분노의 특정한 대상을 사라져버리게 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사라졌다. 제자들의 글로 인해 그의 죄가 은폐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죄에 주목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니고데모의 죄를 묻지도 않는다.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니고데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까지 왜곡되었다. 결국 니고데모는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주님이 사하시지 않는 죄를 제자들이 사해버렸다. 명백히 주님의 심판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주님께 맞선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행태이다.
결코 주님의 심판은 제거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무리 인정하려 들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엄중한 주님의 심판은 이 시간에도 계속 임하고 있다. 주님의 심판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공동체가 만든 성서라는 글에, 그 글을 읽고 가르치고 전하는 자들에게, 또한 그들로부터 배우는 자들에게, 니고데모와 당시 종교 정치 지도자들과 지금 지도자라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 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성전에, 그리고 그것을 섬긴다는 기독교인들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주신 시간과 생명을 아무런 가책 없이 사용하고 있는 온 세상에 임하고 있다. 거부하고 싶겠지만 피할 수 없는 주님의 판결이다. 유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