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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종 목사
미국의 영문학교수인 버지니아 몰렌코트(Virginia Mollencott)는 어느 날 꿈속에서 깊은 물밑으로 가라앉는 체험을 합니다.
절대적 절망 속에 빠져들어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고 인정했을 때 빠져있는 깊은 심연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칠 흙 같은 어둠 속을 통과하여 영광스런 빛으로 나아가며 "죽음은 부활에 닿아있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어둠 속에서, 실패와 고난가운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내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절망과 고뇌에 빠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 때 밝음 속에서 하나님을 느낀 것보다 더 강하게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어둠 속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길들여진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의해서 밝음과 어두움,물질과 영혼을 선과 악을 대립된 개념으로 생각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이원론적인 생각에 빠져 하나님은 무조건 "빛", "선", "소망" "아름다움"이고, 반대로 사탄은 "어두움", "악", "절망", "추함"이라는 생각이 우리 머리 속에 무의식적으로 꽉 차있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생각의 한계는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을 둘로 쪼개서 악은 하나님이 아니고,어둠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하나님의 부재의 영역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고대 그리이스, 헬라인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의 사고 속에 들어와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여 성경의 바른 해석을 왜곡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의 대표가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적인 이원론 입니다.
그들은 남성은 선하고, 여성은 악하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선이요 빛이고, 여성은 악이요 어둠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헬라의 이원론과 헬라의 염세주의가 혼합되어 보이는 물질의 세계는 악이며,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선의 세계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물질을 버리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보이지 않는 영혼만 사모하며 거룩하고 고상하게 살아야 되는 것으로 알고 결국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만든 하나의 우상이며 욕심으로 만든 금송아지이지,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둠입니다.
하나님은 밝은 빛 속에도 계시지만 어둠 속에도 계십니다.
어둠이 무조건 악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의 계심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나쁜 일에도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심각한 문제 중에 한 가지가 어디에든지 무엇이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어느 장소에만 있고 어떤 사건에만 간섭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축소시키는 것 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도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 !
그 분은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도 계시고, 빛 가운데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공도 하게 하시고 실패도 하게 하십니다.
창세기 1:2절을 보십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흑암이 깊다는 뜻은 빛이라곤 전혀 없는 곳을 말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계셨습니다.
이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을 거둬 지옥 불에 던진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밤이 되게 하고 빛을 낮이 되게 하고 하루 24시간 속에 빛과 어둠이 함께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 속에로, 깜깜한 어둠과 좌절 속에로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 그 처소를 광야에 짓게 한 것이 성막 입니다.
성막은 크게 뜰, 성소, 지성소 세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이 세 영역은 각각의 자리를 뜻하는데,
지성소는 하나님의 자리,
뜰은 인간의 자리,
성소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종 제사장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의 명암을 보면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뜰 은 백성들의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뜰은 낮에는 밝고 밤에는 어둡습니다.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제사장의 자리입니다.
벽은 황금 기둥이고 지붕은 네 겹 세마포로 덮었고, 떡 상과 촛대와 분향단이 있습니다.
촛대가 일곱 개가 있는데, 이것은 제사장들이 관리하는 촛불로 항상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서 언약궤만 있고 창도 없고 문도 없고 지붕도 닫혔습니다.
그 안 촛불도 없는 완전 흑암 입니다.
매우 의미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가 가장 그리고 항상 밝아야 하고,그 다음은 제사장들의 사역공간인 성소가 밝아야 하고,그 다음 백성들의 공간인 뜰이 어두워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인 지성소가 가장 어둡고,그 다음이 제사장들의 공간인 성소가 등불로 밝혀지고그 다음 백성들의 공간인 뜰은 낯에는 밝은 태양이 빛나고,밤에는 어둠이 덮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빛도, 어둠도, 영혼도, 물질도, 모두 다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도, 악도, 모두 다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빛도 어두움도 차이가 없습니다.
선도 악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2500여 년 전 벌써 이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사45:7“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우린 이러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까지 너무나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저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밝음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치는 어둠 속에서 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있는 그 곳에 항상 하나님은 계셨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저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방황하고 고뇌하고 갈등하는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저는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선악간의 대립과 분쟁과 갈등으로 하나님께 가야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순간에 "내가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다." 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 속에 나의 삶이 포용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이 주님 안에서 열납 되어서 주님과 내가 한가지로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고백되어지는
그 순간에 저의 신앙은 이제 바뀌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전인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신앙의 진정한 목표 는 불가능하기만한 완전한 인간(신 같아지려는)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용납되어지고,하나님 안에서 나의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가장 인간다운, 본래의 나 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 내가 계획했던 나의 목회를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면서 그리스도 없이는 나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들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가야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공해야 인정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실패할 때, 오히려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나와 함께 그 고통의 죄를 져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그 때에 비로소 내 삶의 밝음이 비춰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비로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만난 욥!
욥이 바로 이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의 주제 는 의인이 당한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욥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이원론적인 사고 속에 갇혀 계시던 하나님이 모든 것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게 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욥은 의인이였습니다.
그 의인이 어느 날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고통과 고난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욥 자신도 어려웠지만 욥기를 읽는 모든 독자들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왜? 욥은 선한데,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허락하셔서 욥에게 해당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악한 일을 겪게하셨는가?
선악간의 갈등 속에서 욥의 신앙이 계속 나아가지만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평행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욥을 찾아오는 길과 욥이 고난을 거부하고,부정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접근하는 길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38장- 42장에서야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말씀하심으로 욥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바르게 전환되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42:6절에 욥이 회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고백하게 이릅니다.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티끌과 재는 가장 처절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을 회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회개의 내용은 38장부터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욥은 당대에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이 거의 하나님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부정적인 요소로 자기를 계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폭풍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원시종교에서 폭풍과 태풍과 천재지변은 신의 진노를 받은 사람이 당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저주와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은 욥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부정적인 이미지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욥기 38장 9절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흑암으로 강보를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흑암은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흑암으로 강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강보는 아이를 싸는 이불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저주와 사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악한 사건들도 하나님은 사랑하고 감싸고 있다는 말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은 선이고 자기는 선한 하나님을 향하여 줄다름질 쳐왔기에 그 결과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욥에게 욥기 38:9절 말씀은 욥을 당황하게 하고도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욥에게 네가 지금 광명의 길로만 왔다고 얘기하는데 흑암도 내가 짓고 광명도 내가 지었거늘, 네가 어찌 알겠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욥기38절 19절에 보면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말씀하십니다.
욥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욥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하나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비로소 "하나님은 모든 것의 하나님이 되신다" 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고 해악만 끼치는 들나귀, 들소, 사자, 까마귀들도 모성애가 없는 타조도, 악어나 하마 같은 짐승들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기르시고 먹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거룩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죽이고 멸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지금까지 자기 기준의 거룩한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양이나 그 양을 잡아먹는 호랑이도 둘 다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쪽의 하나님 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악하고 죄 속에 있었는데,그 곳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악과 죄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속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당신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으로 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한편의 짧은 시를 소개함으로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 시는 가수 이며 작곡가 인 캔 메디 가 지은 어둠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문입니다.
이 시는 작자가 죄악과 고통과 어둠에 빠져서 버림당한 줄 알았던 자기에게 찾아온 예수의 모습이 마치 병아리를 한낮의 뙤약볕에 매, 독수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어두운 날개 아래로 모으는 어미 닭의 모성애로 비유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시인은 밝은 세상 속에서 공포 가운데 있던 병아리가 어미의 날개 밑,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펑안함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오시오, 달콤한 어둠이여
와서 나를 안아 주오
오시오, 나의 어머니여
와서 나를 잡아주오
내게 평안을 주오
한 낮의 뙤약볕을 피할
안식처를 주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계란이 딱딱하고 뚜꺼운 껍질을 깨고 자유함을 얻는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미의 날개 속에서 어두움의 따뜻함을 받아야 깨져서 밝은 세상을 보듯이,병아리로 깨어난 뒤에도 위험이 올 때마다 또 다시 그 어미의 날개아래 어둠 속으로 피신하듯이 죄악 세상에서 어두움과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십자가의 어두움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또다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십자가 그늘 아래로 우리를 부르심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병아리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그 날개 아래 어두움으로 다시 모으는 어둠의 신비 지금 당신의 절망과 실패가 그런 신비의 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아멘. --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