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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라오디게아 교회와 열심의 비밀 (계 3:14-22)
[역사적 배경]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이다. 맞은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는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라고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고,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습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계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심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이 생각납니다. 고전13:1-2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핍박도 없고 모든 것을 갖춘 가장 큰 교회였지만 책망만 받은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과도 같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았는데, 뜨거운 광천수가 솟아나는 히에라폴리스의 물이든 차가운 샘물이 있는 골로새의 물이든 라오디게아까지 오는 사이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그 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15-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9절에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1. 자만했기 때문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그들은 육신적인 형통을 영적인 형통으로 착각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핍박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가 부유했던 것처럼 교회 역시 부요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대지가 400,000평 이상 되고, 본관 이외에 다양한 부속건물들이 즐비했고 야외 원형극장도 1,500평, 야외 원형운동장도 2,000평 이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교인이 많고 시설이 좋은 것이 잘못이라기보다 이것 때문에 자만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평안하면 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처럼 궁핍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세계적으로 국민소득이 5.000불을 넘어가면 교인들의 믿음이 타락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한 야게의 아들 아굴의 기도가 참으로 위대한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2. 인간이 중심이었습니다.
19-20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신 걸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확실합니다(히12:8).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밖에 서 계십니다. 신앙에 대한 열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관심의 대상이었고 주인이었고 사람이 중심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이름과 같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안티오쿠스 2세가 자기 부인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어원을 보면 라오스(백성)+디케(정의, 공의)의 합성어로 "백성의 정의, 백성의 옳은 판단, 옳은 백성”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황은 사람중심, 자기중심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를 지나치게 자긍하는 인간의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고전3:18-20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습니다.
3. 예배도 합당치 않았습니다.
20절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더불어 먹는 것은 잔치를 가리킵니다.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것은 함께 더불어 먹되 네가 잔치를 베풀면 나도 함께 먹고 내가 베풀면 너도 나와 함께 먹겠다는, 잔치의 주체가 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잔치를 베풀면 나도 잔치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규모로 볼 때 예배를 성대히 드렸겠지만 나를 위한 예배였지 하나님을 위한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사람들의 호응을 위해 그들의 선호하는 것에 급급한다면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딤후4:3-4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기쁨으로 모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해드리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소홀하거나 죽어 있다면 교회는 세퇴하게 됩니다.
4. 기도도 합당치 않았습니다.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영적 권세와 능력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 일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열심할 때 이 영적 권세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무엇을 열심할 때일까요? 신앙전반이겠지만 능력과 관계된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드려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묵상기도가 전통인 교회에는 능력이나 은사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율법의 핵심을 안다면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은 물론 목숨까지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눅 10장을 보면 영생을 질문한 한 율법사에게 율법에 대해서 되물으시고 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 하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12:34) 칭찬하신 것은 그는 일반 율법사들의 대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다하며 -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은 율법의 여러 나열 속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대하15:12이나 대하 34:31이나 다니엘에 목숨을 다해 섬긴 기록은 있어도, 목숨을 다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막12:30). 그만큼 이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실력이면 곧 성경에서 예수를 발견하여 구원을 얻을 날이 올 것을 예상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과 힘만 바쳐도 능력이 오는데 다니엘처럼 목숨 걸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열심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14절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 모습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바라시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목숨까지 바친 예수님의 충성을 소유하기를, “참된 증인”은 죽음과 삶을 경험하신 예수님처럼 더 견고한 믿음을 가질 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나신 것은 신앙의 기초부터 바로 되기를 바라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종합해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은 성령의 깊은 체험이 없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믿음의 열심이 없으면 체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몸도 추워지면 감기가 오고 병이 오듯 우리 마음도 냉해지면 시험이 들고 믿음의 불이 꺼집니다. 마음에 항상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령한 제물을 자주 드리시기 바랍니다. 더 열심히 더 뜨겁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다니엘처럼 하루 3번씩 기도한다면 신앙의 불이 꺼질 수 없는 구조입니다. 다윗처럼 늘 찬송하며 산다면 역시 신앙의 불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불이 식을 기회를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심령의 제단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방언을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소리내어 찬송하고, 소리 내어 기도하고, 소리 내어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더욱 깊은 은혜 가운데 이끌어 줄 것입니다.
2.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토하신다는 것은 역겹다는 의미이신데 그 용례가 가나안에 입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하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18:25).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평안함과 만족이 없고 온갖 시험과 고통 뿐입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많다면 은혜 떨어진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성경 보는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이런 착각은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약1:23).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17).
4. 징계의 손길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18-19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순금(연단), 흰 옷(환난), 안약(소경, 미련, 어리석음) 등 모두 징계가 필요한 항목들입니다. 연단을 통해 거룩해지고, 큰 환난에서 흰 옷 입은 자들이 나왔고, 채찍이 미련을 멀리 쫓아내기 때문입니다(잠22:15). 즉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자원하여 사서라도 훈련을 받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목회적으로 본다면 먼저 자원하거나 혹은 고난 당하는 지체를 골라내어 기도의 제단과 훈련프로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라고 우선적으로 선택해 주신 자들입니다. 전도도 환난 당한 자에게 가장 먼저 가면 좋습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 하신 "사랑"은 원문에 친구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입니다. 진실로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5. 도전을 받게 해야 합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깨닫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앞서간 신앙의 모델의 간증을 통해서 두드리시기도 하십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기쁨으로 모셔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신앙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6.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에 교제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주님과 교제도 필요하고 성도의 교제도 있습니다. 몬1:5-6에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한 것과 같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예배나 성경공부나 영적대화가 교제입니다. 성도들이 소그룹에서 변화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의 영적 권세와 능력은 열심에서 나왔습니다. 누가 열심을 내야 합니까? 주님은 "네가 열심을 내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하셨듯 우리도 열심을 다하십시다. 열심이 없다면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권능은 열심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라오디게아 교회를 교훈 삼아 말씀의 감화와 뜨거운 성령의 체험으로 온전히 열심을 회복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