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선
한강의 찻잔
박경선
24년 12월 6일, 한강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노벨상 뮤 지움(박물관)에 당신이 쓰던 찻잔을 기증했다. 그 찻잔을 쓸 때 어떤 루틴이 있어서 그걸 내어놓았나요?’ 여기서 루틴이란 말을 나는 ‘당신이 어떤 좋은 습관으로 그 찻잔을 사용했나요?’ 하는 물음으로 들렸다. 한강 역시, 자신이 찻잔을 평소 사용하던 습관에 대해 답했다.
“그 찻잔은 내 루틴을 담아내는 소중한 소장품이었어요. 하루에 몇 번씩 책상으로 돌아가 글을 쓸 때 그 찻잔으로 홍차를 마셨기 때문에 친근한 것, 그러나 단순하고 조용하게 한 마디 건네는 듯한 기분을 담은 것이라 그것을 기증했어요.”
이 대답은 ‘한강의 한강다운 조용한 성격과 그윽한 품격을 담은 찻잔’이라는 말로 들렸다. 평소 작가가 글을 쓸 때마다 곁에 있어 주었던 그 손때 묻은 찻잔이야말로, 대중이 느끼는 고가의 휘황찬란함을 깡그리 무시한 진솔함과 친근함을 끌어안은 물건이라 노벨상 박물관에 선물(기증?)한 것 아닌가? 여기서 나는 ‘우리의 인연 앞에 참 좋은 선물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TV 방송 프로그램 중에 ‘불후의 명곡’을 즐겨본다. 발라드, 뮤지컬, 국악풍 노래들이 독특한 목소리와 화음으로 위로를 건네주며, 참가한 가수들의 열정을 쏟아내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평생 롤 모델로 모시던 분과 함께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정홍일 가수가 권인하 가수랑 함께 무대에 서서 하던 말이 인상 깊었다.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우상으로 존경해 오며 권인하 선배님의 활동에 또박또박 댓글을 달았어요. 서울 올라오면 한번 보자고 해서 찾아가 만났지요. 달리 연습할 장소가 없으면 내 연습실을 쓰라며 연습실을 선뜩 내어주셔서….”
가수를 꿈꾸는 후배의 펜 심과 댓글이 고마워 ‘뭐라도 하나 더 도와주고 싶은 선배의 마음’이 두 사람의 인연을 두텁게 끌어당긴 것 같았다. 권인하 선배는 선배답게
“롤 모델로 삼기가 쉽지 않은데, 나 같은 사람을 롤 모델로 생각해 주어 고맙고, 이 프로그램에 함께 초대해 주어 고마워!”
하며 아주 겸손한 자세로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선후배 사이를 세월이라는 일직선상에 세워놓고 보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응원군 같은 관계이겠다. ‘후배의 댓글 응원이 선배와의 인연을 돈독하게 해주었고, 그 응원의 마음이 고마워 후배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연습실을 선물인 양, 제공해 주었겠다. 그렇다면, 교사들에게는 제자들이 보내주는 편지가 댓글의 응원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런 댓글 같은 편지를 평생 받아온 교사라면 그 제자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가장 좋은 선물이 될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더니 곧바로 장가를 가겠다고 청첩장을 보낸 준원이와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를 담임했는데 담임이 바뀌었을 때마다 편지를 보내더니 6학년이 되던 해에 내가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방송실에서 전근 가는 교사들이 전교생에게 인사말을 할 때 방송부원이던 준원이는 내 턱밑에 앉아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내 녀석이 눈물을 흘리다니!’
나는 속으로 당황했는데 떠나던 날, 천 마리 종이학을 접은 유리병을 들고 와 내게 이별의 선물로 건네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갔다. 그때가 2002년도쯤 되었으니 22년 전쯤이었지만 그 유리병 속에 고이 들어앉은 천 마리 종이학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헤어진 교사와 제자는 긴 세월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왔다. 준원이가 서울 대학 법대에 합격했을 때는 그해에 대학에 들어간 친구들과 나를 찾아왔고, 내가 서울대학교 교육행정 연수반 101기로 3개월간 서울대에서 연수를 받을 때(2011년)는, 서울대 2학년생이던 네 명의 제자들과 저녁을 같이 먹고 영화를 같이 보러 다니며, 나도 서울대생인 듯 착각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준원이가 2022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축하해주고 싶지만, 코로나가 창궐하여서 모임도 꺼리던 시절이라 찾아오고 싶다는 것을 거절했는데도 시골집으로 달려왔다. 나의 칠순 축하로 모인 형제들 앞에서 준원이는 당당하게 합격 축하 행진을 하며 박수를 받더니, 손 편지로 써온 장장 여섯 장의 편지를 낭독하며 울먹였다. 그 편지를 다 읽자, 우리 형제들이 달려 나가 준원이를 얼싸안아주었다. 달리 잘해준 것도 없는 담임에게 보내는 감사와 신뢰 앞에 나도 뭔가를 잘해주고 싶은 숙제를 안고 살았는데, 이번에 결혼한다니.
교사로 34년, 교장으로 7년, 대학원 강사로 10년을 지내면서 수도 없는 학생들과 인연을 맺어왔지만 준원이만큼 나를 신뢰해 주는 제자는 없는 것 같다. 롤 모델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속에 어릴 적, 따스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일은 너무나 황송하고 고마운 일 아닌가?
그런 준원이가 장가를 간다니, 나도 이번만큼은 권인한 가수의 후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강이 노벨 박물관에 기증한 찻잔처럼, 제자를 아끼는 소박한 마음이 가득 담긴 선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다른 제자들이 결혼할 때면 크리스털 패에 축시를 써서 전해주는 선물로 그쳤지만, 천 마리 종이학까지 접어주고, 장장의 감사 편지를 써서 달려와 낭독해 준 준원이에게는 나도 그 신뢰에 버금가는 정표를 남기고 싶어 벽장 속을 뒤져보았다. 부부 유기그릇 원앙 세트가 놋쇠 특유의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맏아들 장가갈 때 주고 싶어 20년 넘게 품고 살았는데, 지금껏 장가 안 보낸 맏아들과 유기그릇을 함께 품고 있으니, 우리 부부가 애정으로 소장해 온 물건임에 틀림없다. 준원이 부부가 특별한 날, 놋쇠로 만든 이 반짝이는 유기그릇에 밥을 담아놓고 마주보며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학인해가면 좋겠다. 준원이가 인사차 대구에 내려오는 날, ‘잘 살아라!’ 는 축하 말과 함께 그 품에 안겨주고 싶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맺은 우리 부부와의 인연이 또 그렇게 흘러가는 것도 잘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2024.12. 12. 1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