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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수필가가 되려면
- ‘이것이 본격수필틀이고, 본격수필이다’ -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과 교수
I. 열며
수필을 잘 쓰려면 이런 문장론에 밝아야 하지만, 수필의 수필틀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수필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가슴 속에 꽃씨, 거울, 옹달샘, 종소리, 엽서 등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 다섯 가지 조건은 수필을 잘 쓸 수 있는 ‘필요 조건’이지 수필을 정말로 잘 쓸 수 있는 ‘충분 조건’은 아니다. 수필을 정말로 잘 쓸 수 있는 충분 조건은 수필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수필틀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서는 수필을 수필틀대로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을 잘 쓰는 것인데, 수필틀은 모범수필문에 숨어 있기에 수필틀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세 개의 모범수필을 자주 읽고 틀을 잘 응용하면 된다.
문장은 변형과 보수에서 완성된다. 글 고치기는 명작을 낳는 작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2년에 걸쳐 쓴 <개미>를 120번 고쳐 썼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손질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을 완성하는 데 36년, 괴테는 <파우스트>를 완성하는 데 60년, 한국의 최명희는 <혼불>에만 17년 씨름하다 떠났다. 문장, 그것은 퇴고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다. 미국의 판매용어 전문가 호일러는 ‘살코기를 팔지 마라, 굽는 소리를 팔아라.’고 했다. 군침도는 감각의 자극, 그 이상의 설득이 어디 있겠는가. 책읽기를 하다 보면 어느 때부터 그냥 저절로 문장을 잘 쓸 수 있게 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책읽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까 좋은 문장을 외우면 자신도 모르게 묘사적 문장짓기를 잘 하게 될 것이니 수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좋은 문장을 베껴 쓰며 외우면 되겠다.
수필가는 풍부한 감성을 수필의 주제와 목적에 집중토록 해야 하고,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해야 한다. 다양한 시각과 풍성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펴야 한다. 언어와 문장, 특히 문학적인 표현이나 시어, 토속어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장’, 그것은 생각의 틀로 짜 보이는 하나의 건축물이다. 그 집이 잘 지어졌음을 판단하는 주체는 지은 목수가 아니라 들어가 사는 사람 자신이다. 문장 안에 들어가 보금자리를 틀고, 방의 배치, 광선의 조응, 통풍을 잘 생각해 보시라. 문장력이 튼튼해 질 것이다.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아야 한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잘 쓸 수 있으니 아래 세 개의 모범수필을 읽고 좋은 글쓰기를 연습한다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1. 떠나지 않는 목소리/송명화
2. 소금쟁이 /정성화
3. 종소리 /강숙련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 낸 수많은 세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책은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친구다. 방 안에 많은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책을 엮을 수 있는 분량의 작품을 써야 한다. 좋은 문장의 숨결따라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싶은 글을 써보고자 하는 작가는 서대문 문학신문사 문학연수원에서 본격수필이론에 다른 본격수필 쓰기 공부를 하면, 더 이상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다음의 수필틀과 문장술에 익숙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I. 펼치며
1. 본격수필문학의 창작이론 모형
수필이 ‘잡문’으로 폄하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필은 이것이다’하는 수필문학 창작 이론이 없어서다. 문학에 있어서 ‘잡문성’이라는 게 수필 장르에만 국한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잡문’하면 수필을 들먹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본격수필문학 이론을 정립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수필을 잡문시하는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1) 기존 연구의 비판적 접근
이러한 수필이론 모형에 관한 연구는 오창익의 <수필문학의 이론과 실재>에서 시도된 바 있다. 그는 수필의 ‘잡문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재의 동화 및 자기화’, ‘주제의식의 구체화, 의미화, 상상화’, ‘문장의 개성화’, ‘구성의 다변화’ 등의 기조로 하여 창작이론 형식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는 창작이론 모형을 구성적 요소와 기능적 요건을 나누어 전개하였는데, 전자에는 제재, 주제, 문장, 구성 네 가지를 들었고, 기능적 요건에는 ‘제재에의 동화’, ‘주제의 의미화’, ‘문장의 개성화’, ‘구성의 다변화’를 들었다.
이 이론모형 연구는 그가 결론에서 아쉬움을 토로했듯이 이론모형만 제시했지 형식 모형이 부족하고 예시, 예문이 부족했다. 특히 그는 수필의 구성요소를 4요소로 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수필 한 편이 완성되는 데는 ‘제재’, ‘주제’, ‘문장’ ‘구성’이 핵심요소라 하는데, 앞으로 이 점은 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현대수필창작론>에서 수필의 구성 요소를 오창익의 4요소에 ‘서두’와 ‘결미’를 추가하여 6요소라 정한 바가 있다. 조형성 측면에서 ‘서두’와 ‘결미’는 사실상 수필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다른 산문 장르와 변별적 특성을 갖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두 요소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2) 연구 방법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무형식의 글’ 등의 수필 개념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야기된 수필의 ‘잡문성’을 극복하기 위해 본고는 전통적 장르 구분으로 보면 ‘교술’에 속하는 수필을 수필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빠르게 하기 위해 ‘주제적 양식’이라 설정하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서 수필이 갖는 양상, 다시 말해 ‘자아의 세계화’를 구체적으로 세분하여 ‘체험’ ‘정서적 반응’ ‘상상’ ‘주제’ 등을 기조로 하여 본격수필창작 이론 모형을 제시하고자 한다.
(3) 이론모형 분석
원체스터는 문학의 4대 요소로서 정서, 상상, 사상(내용) 그리고 형식을 들었다. 여기에서 정서와 상상은 문학의 독자성을 만들고, 사상은 문학의 위대성을 결정짓는 주된 요소다. 그리고 형식은 정서와 상상과 사상의 내용을 담는 틀로, 내용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목적이 아니요 수단이다. 수필은 ‘사실’이나 ‘진리’보다 ‘진실’을 본질로 하는 만큼 무엇보다도 장르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하는 작업이 급선무가 아닌가 여겨진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다. 당연히 문학성을 확보해야 한다. 수필에 있어서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건이나 체험의 ‘구체성’과 주제의식의 ‘보편성’이다. 이런 두 요소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적 체험’과 이에 대한 ‘정서적 반응’ 그리고 ‘상상’의 결합이 공동 관심의 장, 즉 ‘주제’로 의미화되어야 한다. 이는 수필을 수필이게, 수필을 문학이게 하는 최소의 속성이자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이현복은 문학의 4대 요소, ‘정서’, ‘상상’, ‘내용’, 그리고 ‘형식’을 바탕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수필의 이론적 모형을 제시하였다.
- 본격수필의 창작이론 모형 -
(a) 현실적 체험 + (b) 정서적, 주관적 반응 + 상상 = 공동 관심의 장 (사실, 사물) (사상, 개성) (진리에의접근) (보편적 지식) <구체성의 확보> <보편성의 확보> |
체험과 정신적 반응의 관계는 a < b 관계가 바람직하다. 즉 한 일이나 본 일이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정신적인 반응이나 거의 같거나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수필임을 알아야 한다. 수필은 어떤 대상에서 감흥을 느꼈을 때, 이러한 시적인 느낌 속에 잠겨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사색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대상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이 의문이 자라서 미해결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이 의문에 대한 미해결성과 갈구가 형상화되는 과정에서 수필문학은 성립한다. 수필가는 (a)부분에서 ‘구체성’을 확보해야 하고, (b)부분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성의 확보는 ‘진리’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임으로 (a) +(b)에서 부분적으로 소설의 허구가 아닌 상상적 허구성(수필의 허구)이 도입될 수도 있다.
그러면 송명화의 수필 <떠나지 않는 목소리>를 수필창작 이론모형으로 분석해 보자.
(1) 칼날의 싸늘한 광채에 오금이 묶여 한기가 든다. 일본의 낭인 후지카쓰는 이 칼날에 정신을 모으고 한 나라의 역사를 난자하였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긴 칼집의 문구는 분명 그 처참한 범죄를 저지른 후에 새겼으리라. 그는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철면피한 정부로부터 잘 포장된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나보다. 세월이 흐른 뒤에 관음상을 기증하기도 했다는데 죽기 전에 숨겨진 죄에 대한 피해자 조선의 경미한 용서라도 기대했던 것일까.
(2)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온 길이다. 청마루의 넓적넓적한 나무판이 여유로웠다. 나지막한 뒷산의 솔솔한 오솔길을 산책하던 아기씨였을 적에 그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지만 자신을 잘 가다듬어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녀의 보랏빛 꿈속에 일본 낭인의 예리한 칼날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지. 제작자가 한껏 태를 내려고 노력한 민자영을 표현한 인형이 아담하였다. 그 완성도에 상관없이 나는 눈썹과 눈 사이가 넓어서 국모의 높은 체모가 절로 우러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3) ‘시대적 상황에 이끌려 심약한 왕 대신 여왕으로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여인’, 비극은 예감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 못지않은 담대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감각과 통찰력까지 갖추었다. 대원군이 기대했듯 어질고 후덕하기만 한 여인이었더라면 적들의 과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능란한 처세로 삼국간섭을 이끌어내어 일본의 거센 행보를 묶어놓고 말았으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어찌 무서운 존재로 비치지 않았으랴. 세상 사람들은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서재필, 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단언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나오곤 했다고 하니 그녀의 지략과 재략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4) 남성 중심의 사회, 여성은 집안에 소속된 존재로서 역할만을 강요받던 사회, 그래서 똑똑한 여인네들을 암탉으로 비하하고 소외시키려는 사회에서 그녀는 분연히 역사 속으로 나섰다. 개화라는 일관된 뚜렷한 목소리를 가지고 갈 길 몰라 헤매는 조국의 미래를 가녀린 어깨로 떠받치려고 지아비와 함께 고민하였다. 똑똑한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차지한 것이 본인에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은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5) 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돈다고 하지만 시대를 보는 내 눈의 범위가 좁아서일까. 아니면 우주 전체 또는 역사 전체를 느끼기에 우리들의 한 세대나 한 세기 또 그것의 열 배쯤 되는 시간은 한갓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다시 도는 역사의 바퀴를 보고 싶지만 굳건한 목소리를 내기에 우리의 힘은 미약하다. 전범의 입으로부터 ‘통석의 념’ 정도의 말밖에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기회가 날 때마다 일본수상은 보란 듯이 전범들이 누운 신사를 참배하고 우익단체들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댄다. 아무리 명분이 뚜렷하다 하여도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무식한 야욕 앞에서 약한 자가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6) 뮤지컬 ‘명성황후’를 본 적이 있다. 외국에서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에필로그는 가히 압권이어서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비탄에 잠겨 있는 백성들 앞에 명성황후의 혼령이 나타나 모두 결연히 일어나서 험난한 앞날에 맞서 줄 것을 당부하며 조선의 무궁을 기원하는 장면이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그녀는 흰옷을 떨쳐입고 두 팔을 번쩍 든 채 아리아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불렀다. 굴건제복을 갖춘 백성들의 우렁찬 코러스가 관객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안개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무대에 가득 차서 극중인물들의 비탄과 열정을 고스란히 관객의 가슴에 실어놓았다. 핏줄을 훑어 내리는 듯한 그 강한 아픔은 무엇이었을까. 관객들 모두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가슴에 한 번 더 묻으며 숨을 모았다. 오래도록 그 울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7) 미우라를 앞세운 작전 '여우사냥'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성공한 것이었다. 그들은 축배를 높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명성황후는 역사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시대의 파고가 너무 높았기에 난파하긴 하였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낸 그 삶은 아름다웠다. 끝내 피를 뿌리긴 하였지만 사랑했던 백성들의 가슴에 소중한 불씨를 묻었다.
(8) 우리가 그 불씨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열강의 여우사냥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을까. 산천 곳곳에 일본이 꽂았던 쇠침을 뽑아내었다고 안심한다면 핏발 선 눈동자들이 또다시 우리의 창을 기웃거릴게 분명하다. 독도를 지키고 고구려 역사를 지키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때 옥호루로 내달리던 야만의 발걸음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9) 온 몸을 타 내리는 한기를 떨쳐버린다. 쨍하고 흐르는 은빛 번득임은 낚시로 갓 잡은 갈치의 퍼득임을 닮았다. 저것이 왜 우리의 역사 속에 있을까. 한 발이나 되는 냉정한 칼날 위에 서릿발처럼 솟아오르는 분노를 뿌리고 돌아섰다.
(10) 바위에 부서지더라도 폭포는 떨어져야 하고
죽음이 기다려도 가야 할 길 있는 법.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11) 그녀의 비장한 아리아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목소리다.
위 수필을 <분석>해 보면,
(1)은 현실적 체험과 역사적 사실 및 주관적 반응(해설)이다.
(2)는 체험과 상상이다.
(3)은 주관적 반응이다.
(4)는 (3)을 발전시킨 주관적 반응이다.
(5)는 현실과 대비시킨 주관적 반응이다.
(6)은 체험이다.
(7)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다.
(8)은 상상이다.
(9)는 체험이다.
(10), (11)은 보편적 지식이다.
위 수필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1) 내면적 본질
현실적 체험(사실) ->주관적 반응 -> 상상 -> 보편적 지식
2) 외면적 본질
주제 : <여성으로서 일본의 만행에 맞서 호국의 중요성을 목숨으로 외친 명성황후의 뜻을 잊어서는 안 된다>를 향하여 (1)-(11)은 결속되어 있다. 그러나
ㅁ 고정된 형식이 아니다. (무형식의 형식)
ㅁ 주제가 있다. (주제적 양식)
ㅁ 언어의 특수한 사용 (문학적, 환기적 언어) :
․떠나지 않는 목소리 - 삶에 매몰된 우리가 잊고 있는 애국심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호국의 가르침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 - 일본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했음을 암시
․작전명 여우사냥 -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가 다루기 어려운 지략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암시
․열강의 여우사냥 -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거대한 서양의 자본에 끌려가는 걱정스러운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일반화
․아리아 - 무엇보다도 국가가 있어야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명성황후의 목소리를 빌어 호소하는 주제의식이 구체화된 인용
․핏발 선 눈동자들이 또다시 우리의 창을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됨을 암시
․쨍하고 흐르는 은빛 번득임은 낚시로 갓 잡은 갈치의 퍼득임을 닮았다 - 아직도 일본인들의 야욕이 사라지지 않고 몸부림을 치는 듯 느껴지는 절박한 심사를 명성황후 를 시해한 칼을 통해 나타냄
이 수필을 수필문학의 본질적 구조 요소를 중심으로 분석하면,
(1)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잊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며 호국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 (시대성, 독자적 개성)
(2) 산문정신으로 고정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정신에 의하여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인 체험, 그에 따른 정서적 반응을 솔직하게 묘사, 서술하였다. 그리고 주체적 비판정신에 의하여 일본의 만행과 계속되는 침략야욕을 비판하고 안보 부재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산문정신, 비판성)
(3) 인용한 아리아의 뒷부분 ‘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에는 주제가 암시되어 있으며 현실적 체험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제의식의 의미화)
(4) ‘떠나지 않는 목소리’라는 제재를 제목으로 했기 때문에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암시되어 나타나므로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함축되었다. (주제의식의 상상화)
본질적 구조 요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위한 ‘보편성’의 확보다. 기본적으로 주제 결상의 단일성, 단락 전개 원리 중 ‘통일성’ 그리고 논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수필이라고 쓴 글이 앞부분을 보면 이것이 주제 같고, 중간을 보면 저것이 주제 같고, 뒤를 보면 이것 같기도 저것 같기도 하는, 주제 파악이 애매모호한 글은 수필이라고 볼 수 없으며, 잡문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Ⅲ. 나가며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수필 창작의 이론 모형과 그 실제를 ‘현실의 체험’, ‘정서적 반응’, ‘상상’ 그리고 ‘주제 의미화’의 결합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본고 역시 본격적으로 수필창작 이론 모형을 연구한 것이 아닌 관계로 이 모형이 수필의 ‘잡문성’ 시비를 일거에 해소시킬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이론은 아니라 본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면 수필을 구성하는 6개 요소별 유기적 결합 관계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형식 이론 모형의 구체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차후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본문에 인용된 송명화의 수필 <‘떠나지 않는 목소리>’는 수필문학의 창작이론 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본격수필의 틀을 갖추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이라고 쓴 글이 ‘본격수필’이 되려면 위의 인용작품과 같이 수필의 내면적, 외면적 요소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특히 주제를 내면화 (간접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고 주제가 외면화되면 이는 수필이 아니라 작문이나 칼럼, 논설문이나 설명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한 달 후에 보자며 남편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육만 톤의 광탄선이 대어있는 부두 앞에서였다. 대사를 잊은 남녀 주연배우처럼 우리는 그냥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 때 멀리서 차 한 대가 우리를 보았는지 더 속력을 내어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데려다줄 차였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때는 남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봐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잡고 있는 남편 손의 감촉을 똑똑히 기억하는 게 더 나을지 몰라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태운 차가 쏜살같이 내달리는 동안, 나는 뒷유리창으로 남편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까만 근무복을 입은 그의 뒤편으로 푸른 바다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이제 그는 물 위에 떠있는 소금쟁이처럼 작아 보였다.
소금쟁이는 ‘소금장수’라고도 불린다. 무거운 소금자루를 지고 일어서기 위해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힘을 쓰는 소금장수의 모습과,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것의 모습이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소금쟁이처럼 수면(水面)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남편. 내 앞에서는 마치 수상 스키 선수처럼 한껏 폼을 잡지만, 바다 위에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을 것이다. 눈앞의 바다뿐 아니라, 외로움과 쓸쓸함의 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바다 등, 그의 앞에는 언제나 건너야할 바다가 있었으므로.
남편은 헤어지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아기를 낳아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배냇저고리 소매 안으로 보이는 아기의 손을 조심스레 만져보는데, 아기가 눈을 감은 채 내 손가락을 잡았다. 의외로 강한 힘이었다. ‘엄마를 믿고 이 세상에 왔어요’라는 의미로 느껴져 나는 그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의 손도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 당신을 믿고 이제 저 바다로 달려 나가겠다는 말을.
오래 전의 일이다. 추적추적 늦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부산 외항(外港)에 정박중인 남편의 배에 가기 위해서 통선장에 갔을 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에 러시아 선원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쭈그리고 앉은 채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비에 젖은 몸을 덥혀보려는지 그들은 연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다, 그저 자신의 그릇만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은 비에 젖어 떨고 있었고, 나는 삶의 뒷모습이란 저토록 애절하고 허기진 것이던가 싶어 몸이 떨렸다. 마음속으로 ‘주여, 부디 저 국물이 천천히 식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올렸다. 내 남편도 이국 땅 어느 낯선 거리의 처마 밑에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더운 국물을 들이켰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금쟁이 남편을 만나러 갈 때가 되면, 나는 한 마리 물방개가 된다. 생긴 내 모습이 동글동글 올록볼록 한데다, 마음까지 한껏 부풀어 오르니 영락없는 물방개다. 찰밥을 한 통 해 담고, 떡은 쉬지 않게 얼려서 넣으며, 밤과 땅콩은 삶아서 넣고 고구마는 날 거로 몇 개 집어넣는다. 그리고 식혜까지 한 병 보따리에 찔러 넣으면 제법 큰 부피가 된다.
남편에게로 가는 길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보따리를 보면 힘이 난다. 내가 보따리를 들고 가지만, 때로는 보따리가 나를 달래며 먼 길을 함께 가기도 한다. 살아가는데 자식이 짐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식 때문에 힘을 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늦은 밤 업무를 마치고 선실에 올라온 그가 출출할 것 같아 생고구마를 깎아 건네주었더니,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럼 다음에는 머리를 길러 아예 비녀까지 찌르고 오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남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금세 얼굴이 환해지는 사람이다.
아내의 역할 중에는 남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는 부분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전생(前生)에서 친정엄마와 딸의 관계였다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조금씩 닮아 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닮았다는 것보다 닮아간다는 것에 나는 큰 의미를 둔다. 그것은 어떤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아니며, 투박한 내 자신을 조금씩 다듬어 가는 일이므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소가 닭 보듯 데면데면한 부부 사이는 마치 안전핀이 낡은 폭탄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나와 상대방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가 편하겠지만, 만일 나와 영 다른 사람이라면, ‘내게 없는 부분을 그가 갖고 있어 다행이구나. 이래서 우리는 서로의 짝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인내란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하지 않는가.
잠든 남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목이 왠지 시려 보인다. 가족이라는 사슬, 밥벌이라는 사슬이 걸려있는 자리여서일까. 잘난 남편, 강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그에겐 또 하나의 사슬이었으리라. 빗물에 젖는 소금쟁이의 지친 발목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쇠사슬 철렁거리는 그의 발목을 이젠 두 손으로 감싸주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저런 말로 남편의 기를 꺾는 것은 소금쟁이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더 빨리 달려보라고 자꾸 다그치게 되면 멀쩡하던 다리도 힘없이 뚝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리를 잃은 소금쟁이는 달리지도 걷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물살에 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탁한 세상 속으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뛰어들지만, 더러운 웅덩이를 보게 되면 발을 담그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그리고 가끔은 더러움을 피해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면서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절망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도는 소금쟁이가 아닌가 싶다.
동요 ‘달 마중’에 나오는 소금쟁이는 행복하다. 비단 물결이 남실남실 어깨춤을 추고 머리 감은 수양버들이 거문고를 타는 밤에, 소금쟁이는 달빛을 받으며 냇가에서 즐겁게 맴을 돈다고 했다. 무엇이 그토록 소금쟁이를 행복하게 할까. 그것이 바로 내가 알아내어야 할 소금쟁이의 비밀이다.
종 소 리
누가 시(詩)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서면 ‘소리로 그린 감동’이란 표현으로 그 말을 써 보고 싶어진다. 문화의 차이는 감성의 차이도 만든다는데, 종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중에 종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형체도 없는 것이, 잡아 가두려야 가둘 수도 없는 것이 마치 청동의 꽃에서 나는 향기라고나 할까. 교회나 사찰의 새벽종소리를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통도사 절 밑에 있는 어느 호텔로비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경영주인 지인(知人)이 술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덕담을 건넸다.
“올해는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이겠지요?”
어쩜, 저런 말씀도 다 하실까! 그래요, 수필이란 종소리 같은 글일 거예요. 문득 내 가슴속에도 수필이란 종루(鐘樓)하나가 서 있음을 깨닫고 뭉클한 감동이 인다.
내가 쓰는 글-. 언어의 재료로 어설픈 종 하나 만들어 달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고 가만가만 소리를 따라 나서 보기도 한다.
소리는 저만큼 비켜나도 가슴 한 귀퉁이에 잔잔한 파장이 남아 있어야 제대로 된 종이다. 아무리 커다란 함성이라도 그의 몸속에 담기면 일단 숨을 죽이고 더 깊이, 더 맑게 가라앉아야 한다. 터져 나오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각혈하듯 토해 내는 생소리라면 종이 아니고 다만 쇳덩어리의 마찰음일 뿐이다.
수필 또한 마찬가지다. 치는 대로 울리는 종이 아니라 온 몸으로 소리를 가두었다가 육신을 덩덩 울려서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종이 수필일 것이다. 오관을 통해서 느낀 감동을 지그시 가두었다가 언어의 떨판에 얹어 가만가만 되돌려 내놓을 때 제대로 된 글이 될 것이다.
어찌 수필만 그럴까. 사람들의 삶 또한 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제각각의 종을 매달고 사는 것이리라. 예술가는 예술가대로, 교육자는 교육자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쉼 없이 자신의 종을 지키고 사는 종지기가 아닐는지.
연 전에 경주에서 에밀레종을 보았다. 옛 서라벌의 태평성대를 지키던 성덕대왕의 신종이다. 더 깊고 더 맑은 소리를 얻기 위해, 더욱 은은한 맥놀이의 여운을 얻기 위해 어린애기를 바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34년간의 주조기간을 보내고도 소리다운 소리를 얻지 못하다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제물로 삼고야 건져내었다는 종소리. 새벽마다 울려오는 그 애련한 소리를 듣고 서라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신라인들이 에밀레종에 쏟은 성심(誠心)이 근접하기 어려운 불가사의로 느껴질 뿐이다.
나는 가끔 상상 속에서 종을 친다. 소리의 끝을 따라 끝없이 가다보면 어느새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얼마나 더 공을 들여야 제대로 된 소리를 갖게 될까. 내가 쓰는 글이야말로 얼마나 더 성심을 쏟아야 할 것인가. 목숨보다 더 귀한 자식을 바쳐서 건져낸 여음이라는데,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버릴 수 있을까.
어릴 적, 교회당의 종탑 밑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타종을 지켜 본 적이 있다. 뾰족한 탑을 세우고 그 끝에 매달린 쇠종을 긴 줄에 연결하여 수없이 안벽을 때리는 서양종이었다. 거리낌 없이 쇠몽둥이추에 제 몸을 부딪치는 종을 올려 보다가 그 큰 소리에 얼이 빠져 버리곤 했다.
매달아 놓고 때려서 소리를 내기는 절간의 범종도 마찬가지다.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악기인 편종도 쳐서 소리를 내기는 마찬가지다. 종이란 무릇 자신을 고통 속에 버림으로 은혜 같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가 보다.
종을 치듯 수필을 쓰고 싶다. 어설픈 종루(鐘樓)일망정 정성을 다해 소리를 지키는 종지기가 되고 싶다. 아니 차라리 부딪쳐 고통 받는 종이면 어떨까.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순간들을 거치고 나면 나에게도 향기 같은 종소리가 여울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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