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소피스트 수사학을 비판하다
아테네 민주정치 아래에서 대중 설득 능력을 제공하는 수사학은 매우 유용했고, 그만큼 수요가 많았다. 고르기아스를 비롯한 소피스트가 수사학 교사 역할을 했다. 소피스트에게 수사학은 어떠한 분야 · 상황 · 관점이든 토론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보편적 기술”이었다. 플라톤은 수사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수사학이란 기술과 전혀 관계가 없는 활동이네. 그것은 상황판단이 빠르고, 과감하고 따라서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이 하는 활동이지. 이러한 활동을 한 마디로 아첨이라고 부르겠네. ··· 하나의 수완 또는 숙련일 뿐일세.”
수사학은 기술이 아니라 숙련에 불과하며, 수사학에는 진상을 파악함이 없다. 플라톤이 내린 수사학 비판의 핵심이다. 기술과 숙련의 차이는 무엇인가? 플라톤에게 기술은 단순한 숙련과 달리 각 기능에 맞도록 탁월함을 갖춘 상태다. 각 진상을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본성 이해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하지만 수사학에는 그러한 앎이 없다. 단지 상황에 따라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대화를 끌고 가는 술수고, 그러한 의미에서 아첨에 불과하다.
구체적 비판을 위해 지식과 믿음을 구분하여, 소피스트의 수사학을 믿음에 연결시킨다. “지식과 믿음은 같은 것이 아니네. ··· 수사학이란 이것 저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믿게 하지, 알게 하는 것은 아니네. 결론적으로 법정이나 집회에서 옳고 그름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름을 믿게 해주는 사람이지.” 기술이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한데, 수사학에는 지식의 요소가 없다. 군중에게 정보를 주거나, 근본 문제를 이해하도록 인도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알게 하는 지식은 없고, 그저 어느 쪽이 옳다는 식의 믿음만을 전달한다.
기술은 내적인 진리 이해에서 출발하는데, 수사학은 내용은 없이 말하는 술수를 통해 자기편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뿐이다. 특히 ‘아첨’이라는 규정은 자기 가치관에 맞도록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의뢰자의 기호에 맞도록 설득력 있는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의 수사학은 기술의 문제이기는커녕 사람을 손쉽게 다루는 데 타고난 성향을 가진 교활함에 불과하다. 수사학은 왜곡된 믿음으로 설득시키기 때문에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
2. 변증술을 옹호하다
플라톤은 소피스트 수사학의 문제와 함께 글을 통한 교육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글쓰기에는 그림 그리기와 마찬가지로 기이한 점이 있네. 그림 속의 사물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네가 어떤 질문을 던지면 무겁게 침묵한다네. 글로 쓰인 말도 똑같지. 자네에게는 마치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글 내용 중에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서 질문을 던지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네.”
글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해줄 수 없다. 글의 일방적 성격 때문이다. 글은 상당한 내용을 갖춘 듯 보이지만 사실은 더 필요한 내용에 대한 질문을 허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로부터 무언가 명석함과 확실함을 얻으려는 생각은 순진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데아에 접근하려면 상기에 의존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상기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을 상기수단을 통해 일깨워야 한다. 그런데 문자는 일방적 · 일회적 성격 때문에 일깨우는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이 상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소피스트처럼 지식이 아닌 믿음에 의존하는 말은 진리의 길을 방해한다. 오직 앎이 있는 자의 말이 상기수단일 수 있다.
이제 남는 것은 지식이 있는 모든 말은 상기수단으로서 우리를 이데아로 인도하는지의 문제다. 즉 나름대로 지식이 있으면서 말을 사용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연설이나 교육 등이 모두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다. 플라톤은 숙련에 불과한 수사학으로 아첨하거나 문자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식을 담고 있는 연설의 긍정성을, 페리클레스(Pericles)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페리클레스는 수사술에서 누구보다도 완전한 자였을 걸세. 모든 위대한 기술은 한담(閑談)과 자연에 대한 사변적 지식을 함께 필요로 한다네. 왜냐하면 그것에 맞는 정신의 높이와 철저한 수행 능력이 바로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지. ··· 그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아낙사고라스와 가까이하면서 자연에 대한 사변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고, 지성과 정신의 본성에 대한 깨우침에 이른 뒤, 그로부터 연설 기술에 유용한 것을 이끌어냈다네.”
〈페리클레스〉
아테네 민주정의 상징인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소피스트보다는 긍정적이다. 진정한 의사는 단순히 숙련이나 경험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치료약과 영양분을 주입해서 몸에 건강과 체력이 깃들게 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말과 규범적 행동을 주입해서 영혼에 원하는 바의 신념과 탁월함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본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충분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페리클레스가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정신의 본성을 깨우쳤기 때문에 그의 연설은 소피스트의 수사학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방식이 대안은 아니다. 페리클레스에게는 긍정성만큼이나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대범한 지혜의 소유자인 페리클레스가 두 아들을 키웠다는 걸 알지? 이들을 아테네인 가운데 어느 누구 못지않은 기수로 가르쳤고, 음악과 체육을 비롯하여 기술에 의존하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 어느 누구 못지않도록 교육시켰네. 그들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드는 걸 원치 않았겠나? 하지만 그건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는 게 아닌 듯싶네.”
아무리 정신의 본성을 깨우쳤어도 가르침을 통해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 연설이나 교육은 참된 지식인 이데아로 인도하는 상기수단일 수 없다. 상기수단은 말 그대로 수단일 뿐이어서 최종적으로는 수단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연설이나 교육은 가르침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상기를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그러했듯이 대화를 통해 스스로 한계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수사학과 변증술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다.
변증술을 대화 자체로 좁게 이해하면 안 된다. 대화가 중요한 수단임은 분명하지만 내용은 감각에서 벗어난 이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변증술에 도달하려면 철저히 이성을 불러일으키는 공부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그 출발을 수학에서 구한다. 수학이야말로 개별 사물이나 감각을 넘어서 순수하게 하나(一者)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수학에 기초하여 기하학으로, 더 나아가서는 천문학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변증술을 통해 종합되어야 한다.
마지막에 변증술이 있다고 해서 하위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변증술이 최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건 변증술적 논변이 끝을 맺어 줄 바로 그 ‘본 악곡’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가 변증술적 논변에 의해서 일체의 감각은 쓰지 않고 이성적 논의를 통해 ‘각각인 것 자체’로 향해 출발하고, 그래서 ‘좋은 것 자체’를 ‘지성에 의한 이해 자체’에 의해서 파악하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때, 그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의 바로 그 끝에 이르게 되네.” 변증술이 최종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교과 위에 놓인다.
변증술 자체가 인식은 아니다. 변증술은 상기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이데아이며 인식은 여기에 연결되어 있다. 변증술적 사고가 의견을 넘어서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가?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난점이 발생했을 때, 플라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여기에서도 동원된다. “변증술적 탐구 방법만이 이런 식으로 즉 가정을 하나하나 폐기하고서,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리 자체로 나아가네. ··· 이것을 우리는 습관 탓으로 종종 ‘인식’으로 일컬었지만, 다른 이름이 필요하네. 의견보다는 더 명료하지만, 인식보다는 한결 불분명한 그런 이름이 말일세. 이를 우리가 ‘추론적 사고’로 규정했던 것 같네.” 의견과 인식의 중간에 있는 ‘추론적 사고’가 변증술에 연결된다. 이 추론적 사고는 잘못된 가정을 하나하나 폐기하면서 원리 자체로 나아가는 사고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 훈련에서 수학이나 기하학, 천문학과 같이 감각을 포함하지 않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3. 언어는 사물의 본성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플라톤의 모든 인식론적 요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필요하다. 객관적 · 절대적 관념론의 체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철학의 매개가 되는 언어의 객관성과 절대성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만약 언어 자체가 주관적이거나 상대적이라면 이를 통한 인식의 작용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인식의 체계가 문제가 되는데, 당장 진리 인식의 유일한 길로 주장되는 상기 작용이나 변증술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변증술은 언어를 이용한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언어가 객관적일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논의가 정당성을 상실한다. 플라톤도 이 점을 인식한 것 같다.
《크라튈로스》는 언어학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대화편이다. 언어의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 작업에 대해 헤르모게네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저는 많은 사람과 명명의 올바름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약과 약속에 토대를 둔 것과는 다른 낱말의 올바름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누가 어떤 사물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 그것이 올바른 이름이고, 다시금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고 이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것이 이전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것이 됩니다. 마치 노예에게 다른 이름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름은 본성으로부터 그 이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낱말을 만들고 사용하는 지시와 습관에 의해서 그 이름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명명과 언어 외적 대상의 관계가 필연인지 또는 합의에 의한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가운데 헤르모게네스는 언어를 관습론 입장에 근거하여 논의한다. 사물의 이름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서 직접 비롯되지 않는다. 그저 사람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 특정 사물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저렇게 이름을 붙이고, 관습으로 굳어지면서 각각의 이름이 정해진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관련하여 절대적 기준이 없다. 자기 나름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만큼 명명은 주관적 요소가 지배하거나, 적어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일단 명명의 문제로 논의하지만 절대적 · 객관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맞닿을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언어가 하나의 약속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예에게 다른 이름을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역설한다. 노예에게 이런 이름을 붙였다 다시 저런 이름을 붙이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 행위다. 하지만 명명은 개인적 행위와는 다른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어떤 사물을 명명할 때,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말(馬)이라고 부르고, 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면, 같은 사물이 공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불리지만 내게는 특별히 말로서 불리고,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공적으로 말로 불리는 것이 내게 사람으로 불려도 되는가?” 공적 차원과 사적 차원을 구분하여 접근한다. 사회적 합의로 공유한 이름을 내 마음대로 바꾸거나 다르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에 의존하지만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언어의 객관성을 인정할 수 있다.
헤르모게네스는 명명을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적 약속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는 입장이다. “같은 것인데도 나라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낱말이 있음을 알고 있고, 어떤 그리스 사람이 또 다른 그리스 사람과 다른 낱말을 사용하고, 그리스 사람이 이방인과 다른 낱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도시국가에서 같은 대상에게 다른 낱말을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와 비교하면 더 크게 차이난다. 명명이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개인이든 사회적 단위이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서 비롯되는 이상 자의성 ·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언어가 사물의 본성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근거로 곧바로 언어의 자의성을 규정하는 논리는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사물은 자기의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서 이리저리 이끌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고유한 실체성에 따라서 스스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이름을 사물 스스로 짓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명이 사물의 본성과 무관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사물의 고유한 실체가 갖는 본성과 명명 작업이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옷감 짜기를 비롯한 몇몇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옷감을 짜기 위해서는 옷감 짜는 도구인 베틀 북이 있어야 하고, 이 도구를 사용하는 직조공과 또한 도구를 만든 목수가 필요하다. 노 젓기도 마찬가지다. 도구로서 노가 있고 이를 사용하는 뱃사공이 있다면 도구를 만든 목수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명명 문제와 연결 짓는다.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낱말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 도구는 교사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이 사용한다. 최종적으로는 낱말을 만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플라톤은 사물의 본성과 명명하기의 연관성을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통해 논증한다. 각각의 도구인 베틀 북이나 노를 만드는 목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술이란 베틀 북이든 노든 옷감 짜기와 노 젓기라는 본성에 정통한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본성에 따른 적합한 도구를 만들어야만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도구일 수도 없다.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기술을 가진 사람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옷감을 짜다가 북이 파손되어 목수가 다른 북을 만들 때 파손된 북이 아니라 잘된 북을 본떠 만든다. 여기에서 잘된 북이란 본성에 가장 적합한 참된 북 즉 이상적 북이기 마련이다. 즉 개인이 제멋대로 하는 게 아니라 본성에 따라 도구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명명하기에 있어서도 도구인 낱말을 만드는 사람은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기술자다. 그러면 목수에 해당하는 사람 즉 낱말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인지의 문제가 생긴다. 플라톤은 이를 입법가와 연결시킨다.
같은 대상을 사회에 따라 다른 낱말로 사용하는 현상도 본성과 무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입법가라면 사물의 본성에 따라 그에 적합한 낱말을 만들면서 닮은 이름을 소리와 음절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러한 모든 입법가가 낱말을 같은 음절로 나타내지 않아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네. 왜냐하면 같은 목적을 위해서 같은 도구를 만들지 않는 모든 대장장이가 같은 형상을 같은 철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네. 그가 동일한 형상을 주지만 그러나 다른 철이네.”
같은 것을 다른 음절로 표현해도, 혹은 어떤 글자가 첨가되거나 삭제돼도 사물의 실체가 존재하는 한 낱말이 그 본성을 담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본성에 맞도록 베틀 북이나 노를 만들지만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하더라도 기능이 본성에 맞도록 되어 있으면 형태의 차이는 문제될 게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대상의 낱말 차이가 의미의 차이를 낳으면 문제겠지만, 같은 대상을 두고 낱말이 조금 다르다 해도 의미가 일치한다면 문제없다. 기본적으로 진정한 입법가가 낱말을 만들 때 소리와 음절의 차이가 같은 대상의 의미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본다.
플라톤이 언어가 사물의 본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집요하게 논증하려 한 것은 결국 언어 문제가 그의 철학을 정당화하는 핵심 영역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임을 증명하여 이데아론을 정점으로 하는 그의 절대적 관념론을 정당화하려 했다.
----------------------------------------------
*** 언어(language, 言語)
마음으로 들어가는 통로이자 마음을 비추는 거울
심리학에서 언어를 다룬다는 사실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심리학의 중요한 주제인 사고(인지심리학 참조)가 언제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언어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 자체에 관심이 있는 언어학자들과 달리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에 관심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사피어(Edward Sapir)와 그의 제자 워프(Benjamin Whorf)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초기에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언어 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의 형식을 띠었지만, 이후에는 언어와 사고가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언어 상대성론(linguistic relativity)으로 수정하면서 사피어-워프 가설은 언어 상대성 가설(linguistic relativity hypothesis)로도 불린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에도 ‘우리 아내’라고 표현할 정도다. 만약 영어권의 외국인에게 아내를 ‘our wife’라고 소개한다면 어떤 반응일까? 영어권에서는 공동 소유의 개념이 아니면 ‘our’라고 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너무나 당연하게 ‘my’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내 학교’, ‘내 부모’라고 한다면 무척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고, 서양 사람들은 집단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한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이 주장을 가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주장의 그 특성상 충분한 경험적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언어 연구에 있어서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앞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문화(문화심리학 참조)의 차이가 언어와 사고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