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핀다. 우윳빛 목련은 백조처럼 우아하다. 잔가지의 어린 꽃들처럼 쉬이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긴 목선을 담장 너머로 향한다. 겨우내 키워 올린 꽃눈을 겹겹의 껍질로 무장하고 아니 보여줄 듯 내숭이더니 봄비 내린 다음 날 툭 불거져버렸다. 마술사의 보자기에 싸인 흰 비둘기처럼 뾰족이 내민 고개가 물비늘로 흔들린다. 도도한 여인의 고개 쳐든 샐쭉한 옆모습인양해서 더 눈길이 머문다. 목련은 어쩜 삶의 이끌림과 부대낌을 달관한 나이의 성숙한 꽃이지 싶다
지난해 봄 한 여인을 만났다. 피기 전의 꽃봉오리처럼 턱선이 갸름하고 아니 꾸민 듯 차림새가 단정한 여인이었다. 조용한 행동과 말씨로 보아하니 꽤 지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남편은 바빠서 올 수 없다며 혼자서 집을 보고 단번에 덜컥 계약했다. 집 한 채를 장만하려면 보통 대여섯 채의 집을 보고 있는 흠 없는 흠을 잡고 가격을 흥정하고 다시 배우자나 어르신을 모시고 와서 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여인은 이 절차들을 생략한 채 단숨에 계약하게 되니 무슨 횡재인가 싶었다.
잔금 날은 혼자서 외제 차를 타고 왔다. 그녀의 신분이 무엇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잔금을 치르며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니 나보다 두살이 어린 나이였다. 꽤 어리게 보였는데 또래인 것도 놀랍고, 무엇이든 여자의 선택을 믿고 당신이 좋으면 난 좋아라고 말해주는 남편이 있다는 게 부럽기만 했다.
전형적인 아줌마 스타일로 변한 나와는 달리 투명한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 기분 좋은 향수의 냄새, 은근히 드러나는 富티, 그녀의 온몸에서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더군다나 작은 가전제품 하나를 바꾸어도 남편과의, 긴 협상을 해야 하는 나와 달리 아파트 한 채를 자신의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해주는 그녀에 대한 남편의 신뢰감이 날 주눅이 들게 했다.
목련이 진다. 바람에 후두둑 우박으로 쏟아진다. 벚꽃처럼 나붓나붓 꽃비로 날리지 않는다. 동백처럼 단숨에 절절한 핏빛 순교를 하지도 않는다. 오월의 장미처럼 초록 융단을 붉은 카펫으로 물들이지도 못한다. 빗물 고인 골목길에 그저 떡잎처럼 누렇게 널브러진다. 진창길에 빠진 장화가 자꾸 미끄러지듯 목련의 뒷모습은 누추하기 그지없다.
올봄 그녀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서둘러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다른 지방으로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겼다며 조바심을 냈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기라 조금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설명에 상관없으니 빨리 해결만 해 달라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집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다행히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임자가 나타났다. 볼일이 있어 타지에 잠깐 있다는 말에 계약금 중 얼마간을 송금하고 계약서는 며칠 뒤에 작성하기로 했다.
며칠 뒤 계약일이 다가왔으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집으로 올라가니 근심 가득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낯으로 그녀가 문을 열었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남편이 집 파는 것을 반대하기에 팔 수 없다고 했다. 남편과의 의논도 없이 혼자서 집을 내어놓았느냐는 말에 미안하다며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로 내려와서 매수자와 함께 해결방안을 찾고 있는데 어떤 초면의 남자 한 명이 불쑥 들이닥쳤다. 남자는 대뜸 여자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사기로 고발하려다 참는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이 여자 돈 많으니까 손해배상을 맘껏 청구하세요.’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하루가 너무 혼란스럽게 지나갔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란 작자는 낮에 사무실에서 난리를 친 돈 많은 유부남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녀는 내연녀 였던것이다. 집은 남자가 장만해준 것이었고 그걸 팔아 몰래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들킨 것 같았다.
온갖 유럽식 도자기로 장식된 부엌살림과 가구들, 고풍스럽게 꾸며진 침실과 은은한 조명등, 폭신한 수입 카펫, 청결한 욕실용품이 모두 거품이었단 말인가. 내가 눈으로 본 그녀의 생활들이 다 헛것이었다니 헛헛한 마음만 가득하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스스로 그녀에게 아름다운 허울을 씌우고 부러워하고 실망하여 아파하고 있을 뿐이다. 어쩜 그녀의 모습이 허상(虛像)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봐버리고 진실을 보지 못한 내 눈이 허안(虛眼)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목련의 뒷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겉 포장에만 열광한 내가 아닐까 한다.
목련이 한 그루 서 있다. 오늘따라 비를 맞아 초라하게 보인다. 바닥에 화장을 안 한 흐트러진 몰골로 꽁지 빠진 새처럼 고개를 숙인 여자. 남자의 독화살 같은 말을, 내리는 비처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여자,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눈동자에 붉게 차오르던 눈물 한 방울을 차라리 아니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마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이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복효근 시인의 「목련의 후기」중 일부분이다. 시인의 말처럼 떠나는 마지막 모습조차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은 정영 지나친 욕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피는 목련처럼 눈부셨던 그녀가 오늘 만은 더욱 그립다.
봄의 몸에 온통 열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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