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자회사가 하와이로 처녀비행을 한다기에, 하와이 나들이에 나섰다. 저가항공의 기내식이란 게 맛이 없는 것이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심하다 할 정도 품질의 하와이 전통 음식이라는 로코모코로 저녁을 때우고 7시간 반 만에 호놀룰루 공항에 내리니 아침이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후끈한 바람이 불고, 예약해둔 렌터카로 호텔에 짐을 맡기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나가 바닷바람으로 허파를 채운다.

야후에서 따온 와이키키 해변
20 수년 만에 찾은 와이키키의 좁은 해변은 크리스마스 휴가 여행객으로 꽉 찼고, 비키니 차림의 건강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이 휴가를 만끽하고 있다. 19세기 말까지는 이 땅의 주인이 폴리네시아계인 하와이 원주민이었으나, 미국이 제국주의 본성을 감추기에는 이 섬은 너무 아름답고 전략적으로도 꼭 필요한 지정학적 위치였으니, 어차피 하와이는 어느 힘센 국가의 지배하에 놓일 숙명의 땅인 것 같다.
버펄로에 있는 막내와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비행기 연착으로 내일에나 온다 하니 무료하여, 와이키키 중심가와 알라 모아나 쇼핑단지로 가서 둘러본다. 예술품만 없지, 온갖 유명상표들이 다 모여 있고 미국에서도 15번째의 규모라는 알라 모아나는 어께를 부딪치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빅 세일을 하니, 싸고 좋은 것은 그저 눈도장만 찍어둔다.
시차가 5시간이라 새벽 2시에 눈이 떠진다. 책을 보다가 졸음에 눈을 붙이니 아침이다. 지난 6개월간 집을 수리하느라 피로가 누적되어 ‘이번 여행은 휴식을 위한 것’이라고 정해놓았으나, 막상 여행을 오면 발걸음이 가는대로 순간순간의 변덕에 순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식구가 가자는 대로 가고 먹고 싶다는 음식은 조건 없이 OK.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마우이 섬은, 하와이 군도 130개 섬 중에서 빅 아일랜드 다음으로 큰 섬으로, 원래는 두 개의 섬이었으니 화산분출 용암이 서쪽의 섬과 할레이칼라 산을 연결하여 하나의 섬이 되었다. 빅 아일랜드에는 알려진 트렉킹 코스와 볼거리가 많다지만 근래에 예방약도 없는 뎅기열(dengue fever)이 유행한다하여, 방문을 다음 기회를 미루었다.
마우이로 가는 하와이안 항공의 주내기에 오르니 30분 만에 카훌라이 공항이다. 년 말 휴가시즌에다 예약도 하지 않은 탓에 렌터카 회사는 평소 요금의 배를 부르는데도, 마우이에서는 렌터카 없이는 꼼짝을 못해 바가지요금을 수용하니, 배가 아파도 대책이 없다.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하니 끌끌. 마우이 시사이드 호텔에 짐을 맡기고 호텔 부속 식당에서 맛없는 점심으로 한 끼를 때우고 3시에 체크인.
저녁에 아이를 픽업하러 공항에 가는데 GPS에 공항을 찍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대충 방향을 잡아 가면서 헤매는 모습을 언제 보았는지 경찰차가 와서, 공항 가는 길을 물어서 겨우 시간에 맞추었다. IT 강국인 우리나라처럼 모바일에 연관된 사회구조와 편리함이 생활화된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IT의 일상화가 외국에서 실현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대신, 우리나라의 첨단 시스템에 감사하면 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컵라면 하나 뚝딱하고, 세계최대의 화산이라는 할레이칼라의 소문난 일출을 보러 최근검색에 찍혀있는 할레이칼라 하나(haleakala hana)를 누르고 밤길을 나섰다. 40여분 가니 포장도로는 끝나고 비포장 산길로 접어든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는데 3000m가 넘는다는 산길의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오르다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 임도(林道)인 것 같고, 이 유명한 해돋이 명소로 가는 길이 비포장이고 이렇게 험난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문에도 일단 좀 더 직진하며 눈치를 본다.
정상이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비포장 임도로 차를 몰면서, 표현은 않지만 불안감에 침묵을 지키는 가족을 안심시키면서 차에서 내려 지형을 살펴보니, 그렇게 유명한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이 이렇다면 ‘누가 해돋이를 보려 밤길을 나서겠느냐?’는 의아심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라 판단. ‘지나온 갈림길에서 내리막길로 내려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합리적’이란 생각에, 방향을 바꾸어 온 길을 잠시 되돌아가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민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10여분 내려가니 안개 너머로 파도소리가 들리고 해변 가의 포장도로를 만나 ‘이 길이 정상으로 가는 길인가?’ 하고 20여분 달려도 오르막길이 계속되지 않고 업 다운만 연속되어, 마우이 섬 가운데에 있는 할레이칼라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섬 우측의 해변도로라 판단되고, 더 이상 가면 “험한 자갈밭 길로 렌터카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출입금지구역”일 것으로 짐작. 차를 거꾸로 돌리고 호텔로 되돌아가기로 작정. 정상의 일출구경은 내일 다시 하기로 하고, 이왕 나온 김에 섬의 새벽 풍경이나 즐기기로 했다.

안개가 햇살에 벗겨지면서 내려다보이는 해변 가의 정경은 폴 스쟌의 풍경화처럼 평화롭고, 평지의 활화산 분화구는 흰 연기를 품어댄다. 아침하늘에는 쌍무지개가 걸쳐있고 출근길 차들은 무지개 터널을 통과한다. 이렇게 색깔이 선명하고 뚜렷한 무지개를 가까이서 보기가 처음이라, 마음에는 김래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 이란 옛 소설이 떠오른다.
줄거리의 상당부분은 이미 내 기억의 망각 속으로 보내졌지만, 쌍둥이자매가 어릴 때 헤어졌다가 고교생이 되었을 때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런 무지개를 노상 보는 주민들이야 식상했겠지만, 어릴 적에나 가끔 보았던 큰 무지개의 뿌리가 땅과 만나는 광경을 처음 보는 황홀함은 나를 소년 시절의 꿈 많았던 시절로 되돌린다.
호텔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고, 서북부의 라하이나 구경이나 하자며 해변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전방에 사고가 났는지 길이 막혀, ‘에라 모르겠다. 쉬어나 가자.’ 하며 길과 접한 해변에 차를 세운다. 태평양의 잉크 빛 파도가 모래사장에서 밀려와 부서지는 해변 가에 발을 적시며 웃통을 벗어 제치고 가볍게 선텐을 하며 사진을 찍어보니, 지난 6개월간 집수리를 하느라 운동부족으로 허리가 굵어져 가슴은 아직도 빵빵한데도 폼이 나지 않는다. ‘생을 다 하는 날까지 이 몸매를 유지하기로 한 작정은 아직도 유효하다.’며 마음을 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