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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적 우주관
➀비결정론
양자론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양대 기둥입니다.
현대문명의 어떤 분야도 양자론의 수혜를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실험적으로 잘 입증되고 실용성도 뛰어난 이론입
니다.
그러나 이 같은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양자론은 인류 지성사에서 볼 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양자역학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이 과학자는 물론 일반인들이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아직도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과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양자역학이 뉴턴역학이나 상대론과는 다른 사상적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바로 이들 두 이론이 내포한 철학적 차이로 인해 발발한 학문적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리라고 봅니다.
비결정론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비판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양자론의 철학적 의미(확률론 혹은 비결정론)를 가장 잘 알려주는
문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주사위를 던졌는지 던지지 않았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신이 주사위를 던졌다든가 혹은 던지지 않았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알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선문답 같은 논쟁을 이해하기에 앞서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뉴턴역학의 가장 큰 철학적 의미는 뉴턴의 운동법칙이 내포한 인과론적 결정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자연의 인과 관계를 수식화한 최초의 과학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결정론이란 세상의 모든 일은 일정한 인과 관계에 따른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우주 역시 일정한 자연 법칙에 따라 운행됩니다.
이를 최초로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구현한 사람이 뉴턴입니다.
그가 정립한 고전역학에 따르면, 임의의 시간에 어떤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속도)을 알면 이로부터 그 물체의 모든
과거와 미래의 위치와 속도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물체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정보가 현재의 순간에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뉴턴은 이 같은 인과율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미분방정식이라는 수식으로 정식화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미묘하게 바꾸긴 했지만 결정론적인 측면에서는 고전역학의 이념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고전역학에서 결정론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물체는 정지해 있든, 움직이든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라는 것은 뉴턴의 운동법칙 중 관성의 법칙입니다.
특정 시간에 이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알았다면 이 법칙에 의해 이 물체의 향후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운동이 변하는 물체에 대해서도 주어진 힘을 알면 ‘힘과 가속도 법칙’(운동 제2법칙)을 활용해 속도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고, 이로부터 이 물체의 미래 특정 시각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체 하나하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면 이들의 총합인 우주의 일반 운행도 결정론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이념이자 철학입니다.
고전역학이라고 해서 확률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볼츠만은 열역학 분야를 연구하면서 뉴턴역학의 한계를 느끼고 확률의 개념과 통계적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무질서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증가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은 운동의 필연성을 운동의 확률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역학의 확률은 근본적인 우연성과 비결정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열역학적 대상의 운동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기술적인 방법의 하나로 확률과 통계를 도입한 것일 뿐입니다.
이들 개개의 대상은 원리적으로 여전히 결정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확률을
사용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양자론의 비결정론과 확률론적 결정론
양자론은 확률을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성격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적 대상을 기술하는 파동함수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알고자 할 때 이 파동함수는 입자가 어느 곳에서 발견될 확률을 알려줄 뿐입니다.
우리가 직접 관측을 하면 특정 위치에서 발견됩니다.
그렇다면 이 파동함수가 알려주는 입자의 다음 위치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것은 입자가 다음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입니다.
파동함수는 측정 전후 상태가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파동의 붕괴를 거치는 불연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미래의 상태를 확률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은 결정론의 본질과 어긋납니다.
양자론에서는 미래 예측은 고사하고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현재 상태마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고전역학에서는 입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알면 미래의 상태를 정확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대상들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위치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속도의 값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파동의 어디에 입자가 있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처럼 양자역학에서는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만큼 미래의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 같은 불확정성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최소한 수학적(물리적)으로는 플랑크 상수(h)라고 하는 작용양자의 존재에
귀착됩니다.
이 작용양자는 만유인력 상수처럼 자연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일종의 자연상수입니다.
이 상수들의 존재가 존재론적이든 아니면 공리적이든지 관계없이, 이들 상수를 통해서만 자연 현상의 수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양자 세계의 불확정성은 인간의 제약된 인식 능력에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작용양자에 의한 자연
자체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소원자에서 전자가 에너지를 받아 들뜬 상태에 있다가 어느 순간 빛을 방출하며 안정 상태로 전이합니다.
이 과정에서 언제, 어떻게 전자가 전이하는가 하는 문제는 일정한 인과율 없이 완전히 우연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처럼 ‘방사성 물질이 언제 어떻게 붕괴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우연과 확률의 문제입니다.
즉, 우리는 1시간 안에 붕괴할 확률이 50%라는 것을 알 뿐이지 언제 어떻게 붕괴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다만, 이러한 확률이 정확하게 50%가 되더라는 것은 실험과 관측에 의해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자연, 특히 양자역학의 대상 계에는 우연과 확률이 본질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인과율이란 어떤 사건의 원인이 있은 다음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인과 결과 사이에 최소한 빛의 속도에 해당하는 시간 경과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를 아인슈타인의 국소적 인과율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원인과 결과가 즉각적으로 혹은 동시에 발생한다면 이는 국소적 인과율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양자론은 국소적 인과율을 위배합니다.
‘EPR 논쟁’에서 살펴보았듯이 양자론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국소적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한 입자에 대한 관측 행위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 입자의 쌍입자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양자론에는 고전역학과 상대론의 인과율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일정한 인과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에 따른 결정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양자론에서는 인과율이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힙듭니다.
인과율이 전제되지 않은 자연과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양자론은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과율, 즉 확률에 근거한 ‘확률론적 인과율’과
‘확률론적 결정론’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②비실재론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양자론에 대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의 하이라이트인 ‘EPR 논증’의 핵심은 실재론 논쟁입니다.
EPR(Einstein-Podolsky-Rosen)은 완전이론의 조건으로
(1)완전성 기준
(2)실재성 기준
(3)국소성의 가정을 내세운 뒤
양자론이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논증했습니다.
이들 세 가지 기준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실재성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EPR은 양자론이 불확정성 원리로써 물리적 실재를 제대로 기술하지 못한다고 논증한 것입니다.
물론 EPR의 논증은 후에 벨의 부등식과 아스페의 실험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양자론의 비실재론적 성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실재론(實在論 realism)은 ‘인식론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대상이 의식이나 주관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 논의하는 실재론이라고 할 때 이 개념이 철학적 범주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실재’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실재의 정의 즉, ‘물리적 실재(physical reality)’ 혹은 ‘과학적 실재’ 개념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양자론적 ‘비실재론’이라 한 것은 양자역학의 철학이 실재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반실재론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의 실재론은 아인슈타인과 뉴턴의 과학적 실재론과 상충되지만 그렇다고 대상이 인간의 의식에 의해 창조
된다는 관념론이나 반실재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실재론’이란 고전적인 과학적 실재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의 기본 가정은
(1)인간의 관찰 여부와 독립적인 실재 세계의 존재,
(2)동일한 실험에 의해 보편적 결과 획득,
(3)국소성의 원리 만족 등 세 가지입니다.
이들 기본 가정도 하나로 압축한다면 (1)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관측 대상은 인간의 의식과 의도에 관계없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와의 논쟁에서 이를 거시세계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저 하늘의 달은 인간이 바라보지 않아도 존재한다.”
이에 대한 보어의 답변은 “아인슈타인 박사와 내가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달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누가 확인할 것인가. 달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였습니다.
양자론은 아인슈타인의 실재론 조건을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적인 이유는 ‘측정’에 있습니다.
양자론의 표준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관찰자는 상보적인 두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며, 단지
원하는 측면을 선택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양자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핵심은 측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선택입니다.
따라서 양자론에서는 측정된 물리량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측정 이전의 혹은 측정할 수 없는 ‘어떤 실재’를 상정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양자론의 다양한 해석들은 결국 측정 문제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동함수가 과연 개별 입자의 상태를 실제로 완전하게 기술할 수 있는가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미시 물리적 대상이 단지 현상적 과정일 뿐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실재인가의 문제입니다.
‘숨은 변수 이론’은 이에 대해 숨은 변수들을 추가하면 파동함수가 완전한 실재를 기술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파동함수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완전한 기술 방식을 제공하지 못함을 보여주었지만, 완전한
기술 방식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의 질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이론이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현재 불완전한 양자론이 ‘숨은 변수’의 보완을 거쳐 실재를 기술하는 완전한 이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숨은 변수’는 벨의 부등식과 아스페의 실험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시각에서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파동함수가 실제 입자를 완전하게 기술하건 못하건 간에 확률해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측정 이전의 실재에 대해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슈뢰딩거 고양이’의 경우 관측자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 고양이의 생사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져간 전자상자 사고실험이나 스핀보존 사고실험에서도 한쪽을 확인하기 전에 다른 쪽의 상태를
결코 미리 알지 못합니다.
만약 영원히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영원히 알 수 없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론은 측정을 떠나 실재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양자론의 실재론 논쟁은 EPR 논문이 노골적으로 제기했습니다.
EPR에게 중요한 것은 입자의 실체(reality)였고, 실체를 서술하지 못하는 양자론은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자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규정한 불확정성 원리의 오류를 파고들었습니다.
EPR의 논증은 기막힐 정도로 정교했으나 결국 벨의 부등식과 아스페의 실험에 의해 오류로 판명되었습니다.
오히려 ‘국소성 가정’이 부정되고 우주가 비국소적임(얽힘)이 확인된 것입니다.
불확정성 원리대로 미시세계의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 스핀 등의 물리량에 있어 측정과 무관한 본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확인된 것은 관찰 대상은 관측자와 분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인 속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대상의 물리적 속성은 관측자와 상호작용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입니.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은 전적으로 각각의 관측 장치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리적 변수인 위치와 운동량도 측정 장치와 상호작용 아래에서만 값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두 물리량은 동시에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양립 불가능합니다.
입자-파동, 위치-운동량은 서로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보완적입니다.
보어에 의하면 입자와 파동,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 관계에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재의 기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즉 실재의 올바른 기술은 관측 장치와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따르면 실재는 다른 실체들과의 어떤 관계와도 독립적인 속성들을 갖는 그런 실체입니다.
반면 보어에게 실재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이며, 측정은 그 관계의 한 가지 특수한 경우입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들의 발견’이 물리학의 목적이며, 보어에게는 ‘전에는 전혀 없었던 실재의
구성’이 과제가 됩니다.
관찰된 것만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측정 과정에서 양자적 대상의 상태와 측정 장치의 거시 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일이 문제가 됩니다.
관측자와 독립적인 ‘물리적 실재’를 가정한 EPR 논증에 대한 보어의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관찰을 통해서만이 실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는 가정에 의존하며, 따라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재의 가정을 거부합니다.
보어의 입장은 관계성과 통일성의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보어는 양자 현상의 결과는 독립적 실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측정 장치와 대상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고립된 물질 입자는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의 속성들은 다른 체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되고, 인지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관측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양자론의 반실재론 논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때 드러납니다.
‘관찰자 및 관측 장치와 독립적인 물리적 대상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관찰하지 않으면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양자론의 해답은 ‘관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입니다.
결론적으로 양자론은 물리적 대상은 외부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할 따름입니다.
관측 대상을 관측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과학적 실재론의 첫째 전제인 ‘관측자와 독립된 존재’를 위반하지만 이것이
개별 관측자의 인식이 개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원자를 기술할 때 관측과 관측자의 상호작용이 완벽하게 기술되지 않는다고 해서 원자의 존재가 우리에게
의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자론을 관념론이나 반실재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자와 같은 미시세계의 대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와 분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의 확인은 순전히 관측 장치에 달렸습니다.
즉, 관측 대상은 관측 장치와 독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측을 통해 얻어지는 값은 무엇일까요? 관측은 측정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값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관측을 통해 물리량이 창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대상에 이미 존재하던 값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답을 던집니다.
여기서 이미 존재하던 값은 대상의 절대적인 속성이 아니라 실험 장치에 대해 상대적인 속성입니다.
관측이란 곧 관측 대상과 관측 장치 간의 상호작용입니다.
이를 기술하는 것이 바로 양자역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역학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적인 실재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독립적인 실재와 우리(관측
장치를 포함한)와의 상호작용에 관한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엄연히 존재하는 원자가 우리에게 괴이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존 과학적 실재론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보어의 설명입니다.
그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비록 고전역학의 관점에서 반직관적이긴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의
틀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상보성 원리입니다.
상보성은 경험에 기초하여 실재에 충실하려는 실재론적인 개념입니다.
양자역학에 대한 보어의 이 같은 철학적 관점을 일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은 ‘상보적 실재론’이라 부릅니다.
물론 상보적 실재론은 과학적 실재론에 속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보어의 실재론은 고전역학적인 실재론의 관념을 보다 경험에 충실하게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아인슈타인에게 실재는 물리적 실체로서 이해되며, 보어에게 실재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은 실체를 통해 관계를 해명하려 했으며, 보어는 실재의 개념을 시스템 전체의 관계망 속에서
밝히려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희망과는 달리 관측자(관측 장치)와 독립적인 물리적 실재를 추출해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시세계로 비약한다면, 우리 자신을 제외한 본질적인 우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③비국소성, 관계론적 우주관
양자론이 밝힌 사실 중에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우주가 국소성을 벗어나 비국소성을 갖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국소성(locality)이란 한 공간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와 분리된 다른 공간적 영역에서 일어난 작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비국소성(non-locality)은 위의 국소성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양자론은 국소성의 위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관측은 전 우주에 걸쳐 있는 파동함수를 순간적으로 붕괴시키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국소성의 위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빛보다 빠르게 정보가 전달될 수 없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볼 때 국소성을 위반하는 양자역학의 기술 방식인 파동함수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EPR 논쟁에 대한 벨의 부등식과 아스페의 실험은 양자론의 비국소성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공간의 새로운 특성
우주가 비국소적인 성질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특수상대성이론을 위반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론은 이를 공간의 새로운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 과정을 관측 대상과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따라서 EPR의 실험 결과는 모순이 아니며, 자연 자체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봅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관측 입자와 관측자는 분리될 수 없는 동일 체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대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공간의 특성에서 비롯된다는 게 양자론의 해석입니다.
고전역학 및 상대성이론에서 공간의 핵심적인 특성은 하나의 물체와 다른 물체를 각종 영향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우주의 반대편에 있는 두 물체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자적 연결고리는 두 물체를 하나로 묶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공간은 이렇게 상호 연관된 물체를 구별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두 물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양자적 연결고리는 결코 그들 사이에 놓인 공간 때문에 약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양자론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공간의 개념입니다.
공간의 비국소성이 확인됨에 따라 “우리를 포함한 우주 전체는 어떤 식으로든 얽힌 관계가 아닐까.”하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허황한 게 아닙니다.
하나의 칼슘원자에서 방출된 두 개의 광자처럼, 우주에 산재하는 모든 만물은 태초에 한 지점에서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우주의 근원까지 추적해 들어간다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는 양자론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빅뱅에 의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물질이 한곳에서 쏟아져 나왔으므로, 지금 우리의 눈에 다른 지점으로
보이는 ‘공간’도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동일한 지점이었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관계론적 우주관
지금까지 양자론에서는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결정론, 실재론 그리고 국소성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양자론의 출현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과학사의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자론이 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우주관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로서 고전적 양자론의 교과서를 완성한 막스 야머(Max Jammer)는 닐스 보어의
양자론의 우주관을 관계성과 전체성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관계성이란 관찰자 및 관측 장치와 관측 대상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전체성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주는 비국소적이며 양자적으로 연결된 단일체입니다.
보옴과 벨도 양자론을 통해 전체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우주는 부분을 전체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자론의 우주관이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유기체 철학과 맥을 같이 한다는 과학철학자 최종덕의
연구는 흥미롭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은 과정과 관계의 망(nexus)일 뿐.”이라며 자연을 관계망의 총체로 정의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우리의 자연을 사건들의 상호 관계적 구조로 본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심지어 이런 말도 했습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오직 그 자신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신일지라도 없다(There is no entity, not even God, which requires
nothing but itself in order to exist.).”
이처럼 과정과 관계 속에서 우주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사유체계가 유기체 철학입니다.
관계가 진정한 실재이며 대상은 추상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양자론의 관계성 혹은
전체성과 맥을 같이합니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 역시 유기체적 패러다임으로 연결됩니다.
보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그에 대한 과학 기술의 관계에 상보성을 적용시켰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한 완전한 물리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교한 실험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실험을 통해 그 유기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생세포를 관찰하기 위해 그것을 떼어내 현미경 앞에 갖다 놓으면 그 세포는 이미 생세포가 아니라 죽은 세포
일 뿐입니다.
이처럼 고립된 단위체가 아니라 전 체계의 관계 요소로서 이해될 수 있는 실재의 속성을 담은 실재론을 전체론적 실재론
(holistic realism)이라 부릅니다.
결국 양자론은 관계성과 전체성을 본질로 하여 우주를 하나의 관계망 속에서 파악하는 관계론적 우주관과 자연관을
제시합니다.
이는 고전역학에 제시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우주관과 대비됩니다.
다시 말해 우주는 부품들로 분해하거나 조립할 수 있는 거대한 시계라기보다 모든 부분이 전체와 분리 불가능한 거대한
유기체적 관계망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관계론적 우주관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조송현
인저리타임 편집장/동아대 겸임교수/국제학 박사(Ph.D.), 물리학 석사(상대성이론 전공)
전 국제신문 논설위원/정치부장/사회부장/문화부장/노조위원장
저서: '우주관 오디세이',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