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의 역사
기억을 더듬고 살려서 우리가 겪었던 3월 26일의 역사 네 項目을 최근 것 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써 보려고하네.
2010년 3월 26일:
西海 北方限界線<NLL> 경비업무를 수행하던 哨戒艦 天安艦이 짙은 어둠이
내린 백령도 앞 바다의 우리 領海에서 북한 潛水艇이 기습 공격한 魚雷를 맞고 爆沈되어 40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된 날인데, 그 후 이들을 위해 구조활동을 벌이던 한주호 준위도 순국한 일이 뒤를 이었다네. 호주, 영국, 스웨덴, 미국 등 5개국의 24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합동조사단은 5월 20일 “천안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뢰공격으로 침몰되었다”라고 공식 발표하여 이 사건은 북한정권이 저지른 蠻行임을 온 천하게 알렸다네. 이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에도 불구하고 종북좌파들을 비롯한 북한을 편드는 모든 세력들은 한결같이 이 사건은 한국 정부가 저지른 자작극이라던가, 스스로 침몰했다라던가, 미군 잠수함이 저지른 짓거리라던가 등등의 비과학적인 소설<fiction>로 오늘도 대응하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라네.
한반도는 南北이 他意에 의해 1945년에 分斷되고, 이런 體制가 69년 동안 계속된 지구상에서 唯一한 나라인데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으킨 전쟁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도발을 헤아릴 수 없이 해 왔는데, 최근에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3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비롯하여 미사일 발사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네. 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의 주린 배는 아랑곳없이 이런 불장난에 돈을 펑펑 쏟아붇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더구나 김일성을 시작으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三代 世襲王朝는 21세기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최대의 비극이기도한데, 북한의 國名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으로, 민주가 어디에 있으며, 자유가 어디에 있으며, 오로지 인민들을 수탈하는 정권만이 존재하는 게 현실인데, 이를 보다 못한 미국은 2004년에 “북한인권법”을, 일본은 2006년에 각각 제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에서는 야당과 종북단체들의 반대로 2005년에 發議한 북한인권법이 10년 동안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네. 이념이야 서로 달리 할 수 있다지만, 이처럼 陣營論理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앞날은 左右의 極限對立이 통일 전 까지는 가장 큰 障碍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
최근에 한국 사회에는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통일이 되는 그날 좌파세력들은 무슨 낯으로 북한 주민들을 대할 거며 무슨 말로 자기들의 과거 行蹟을 합리화하려는가?
1910년 3월 26일:
安重根(1879-1910) 義士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돌아가신 날인데,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30분에 하얼빈 驛頭에서 東洋平和를 위해서 大韓義軍 參謀中將의 신분으로 韓半島를 强制 倂合한 首魁며 1895년 10월 8일에 浪人들을 앞세워 明成皇后를 弑害해서 屍身을 불태웠던 天人共怒할 乙未事變의 총감독이였던 敵國의 將帥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를 六穴砲로 狙擊했다네. 이 저격 소식은 조선 반도는 물론 이웃인 중국에 크나 큰 반향을 일으켜서, 義人으로 推仰을 받고 있을 뿐만아니라 얼마전에는 하얼빈에 안 의사의 기념관이 중국에 의해 건립되어 그의 義擧를 기리고 있기도하다네. 이 기념관을 두고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管 義偉) 관방장관은 지난 3월 29일에 “일본으로 이야기하자면 범죄자 테러리스트의 기념관”이라고 酷評을 하더군.
을미사변이 외국에 알려진 것은 1895년 10월 12일에 Seoul’s Turbulent Affairs<격동의 서울 사건>이란 제목으로 소식을 전한 뉴욕 타임스가 최초며, 다음날에는 “The Morning Times”가, 10월 19일에는 “The Pullman Herald”가, 11월 26일에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매체인 The Press가, 11월 22일에는 텍사스의 ‘Fort Worth Gazette”가, 다음해인 1896년 1월 23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콜이 이사건을 아주 상세하게 보도하여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하네.
최근에는 재미 언론인 문기성 씨가 발굴한 “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에 따르면 同紙는 1909년 11월 18일자 기사에서 “…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돌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회색 양복차림에 모자(shooting cap)을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7연발 리볼버 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3발을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향해 쏘았다.” “… 그는 30분 만에 사망했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것이다.” “그는 저격 현장에서 붙잡혔고,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 왔으며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체포 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였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
“누가 쐈나?”
“…………”
“내가 당했군!”
이토가 이 세상에 살아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기도하다네.
금년 3월 26일은 안 의사가 순국하신지 104년이 되는 날인데 해마다 이 날에는 여기저기서 안의사 追慕의 禮를 올리지만 자고나면 그뿐인데, 정작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 꼭 하나 있는데 다름아닌 안 의사의 魂靈을 모셔와서 우리의 傳統 葬禮法에 따라 장례를 치르는 일이라고 하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國權이 回復되거든 故國으로 返葬<客死한 사람을 제 곳으로 옮겨 장사함>해 다오”한 것이 안 의사의 遺言이라고하네. 하얼빈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 의사의 묘지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찾아내려고 많은 애를 써 왔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장소를 찾아 내지 못했는데 만일 묻혔다면 그 곳을 일본은 알고 있겠지만 안 의사를 테러범으로 취급하는 일본이 그 내용을 알려주겠는가. 또는 화장해서 흔적도 없이 없앨수도 있었겠지만, 어찌되었던 이제는 의사가 고국 땅에 편히 쉬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안 의사를 崇仰하는 모든 분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라네. 아직까지 안 의사는 서울 효창공원 의사 묘역에 비석도 없이 “墟墓”가 있을뿐이라네.
오늘도 일본은 100여 년 전에 한반도를 집어 삼킬 때 보다 더 醜惡한 行態를 계속 반복하며 즐기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경제, 정치, 기술, 문화 등에서 누리는 큰 나라의 位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小人輩的인 稚拙한 짓거리로, 일본은 언젠가 이런 業報를 어떤 형태로던지 반드시 치루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기도 하다네.
1875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雩南 李承晩(1875-1965) 박사가 태어나신 날이라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 박사만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이 또 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속에 우뚝 서게 된 직접직인 계기는 한반도가 6.25전쟁으로 共産化가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이 礎石을 이 박사는 온갖 難關을 헤쳐가며 뚝심으로 밀어붙여 미국과 맺은 ‘韓美相互防衛條約’을 체결했기 때문이라네. 한반도가 공산화가 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 땅에 살면서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온갖 혜택을 마음껒 누리면서도 대한민국을 꿈속에서도 저주하며 꿈을 꾸며 사는 종북좌파들의 “千秋의 恨”이기도하다네.
이 박사는 그 흔한 銅像 하나도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저 있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기도하다네. 지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인천 만국 공원에 세워진 1950년 10월 15일 세계 海戰史에 빛나는 “仁川上陸作戰”의 주인공이며 6.25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종북좌파들이 떼로 몰려가서 끌어내리겠다고 아우성을 치니, 보다 못한 미국 하원에서는 그럴거면 그 동상을 미국으로 가져와야겠다고 한 일이 있으리만치, 대한민국은 左右의 對立이 極을 달리는 곳이기도하다네. 참으로 속 좁은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며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될 기회주의가 판친 나라라고 定義하니, 그럼 이런 나라에 사는 저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인가? 우리나라만큼 역사보기의 偏見이 극에 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은 지난해에 26,200불의 일 인당 국민소득을 이룩한 경제규모에, 貿易高나 수출은 전 세계에서 7.8위에 오를만큼 경제적으로 큰 나라여서 그런지, 역대 대통령들은 다투어 記念館을 만들기에 정성을 쏟는데, 동상 하나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처지의 이 박사로서는 기념관을 만든다는 것은 焉敢生心 꿈도 꿀 일이 못되는 것이 현실이라네! 역사를 제 보고 싶은대로 보는 세력들은 이 박사를 南北分斷의 元兇으로 여기기도 한다네.
보기에 따라서는 황당하다고 해야 할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네. 서울 汝矣島에 있는 國會議事堂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큼지막한 동상을 세우고, 그 헐었던 자리를 “李承晩記念公園”으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라네!
1827년 3월 26일:
서양음악사에서 樂聖이라고 부르는 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이 他界한 날이라네. 이태리 작곡가들의 독무대였던 오페라를 독일 것으로 완성하고 정착시킨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베토벤에서 교향곡은 끝났다”라고 그의 교향곡을 極讚했으며, 베토벤의 “9번 合唱交響曲”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年末에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送年音樂會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네. 생애에 단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던 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는 첫 對面에서 자기 친구에서, “두고 보게. 저 친구<베토벤>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작곡가로 우뚝 설 것이라”고 豫見하기도 했다네. 또 베토벤을 모델로 쓴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에서, 로맹 로랑<Romain Rolland>은 “만약 하느님이 인류에게 범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아 간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네. (신동헌 지음 “음악사 이야기” 중에서)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 본 Anselm Huttenbrenner휘텐브렌너는 “1827년 3월 26일 그의 침실로 들어갔을 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결국 臨終을 지켜 본 사람은 나와 요한(동생의 부인)만이 자리를 지켰다. 오후 5시 경 오른손을 들어 잠시 무엇인가를 찾는 듯 하더니 이내 멈추었고, 올려진 손이 침대 밑으로 떨어진 후 그는 눈을 감았다. …. 3일 후인 3월 29일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비엔나 역사상 가장 엄숙한 장례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약 2만 명이 군중들이 장례행렬을 이루었으며, 이날에는 빈의 모든 학교가 휴교하였으며, 베토벤의 유언에 따라 피아노 소나타 제12번이 葬送行進曲으로 연주되었으며, 바링<Wahring>의 공동 묘지의 碑石에는 “Beethoven”이란 단어 하나만이 쓰여졌다고하네. (조수철 지음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에서)
201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