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요리책이다.
설날 떡국을 먹기 위해 '소고기 두근(양지머리 한근, 갈아놓은 소고기 한근) 귤 두봉(600g 정도)과 새우살 한 봉(300그램 정도), 다진 마늘 잔뜩, 쥐똥고추 서너 개, 청양고추 두세 개, 그리고 좋은 간장이 필요하다'64p 거나 '시금치는 끓는 물에 대략 사오십 초 데쳐낸다, 그러고는 찬물에 잠깐 씻으면서 물기를 짜낸다. 지나치게 꼭 짜면 채소의 즙까지 빠져나간다, 너무 덜 짜면 나물에 물기가 많이 생긴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양념으로 무쳐낸다. 이때 양념은 콩무물의 경우에서 고춧가루만 빼면 된다'27p 라는 식으로 온갖 우리집 부엌 구석에 있을법한 재료로 저녘 밥상 한끼 식사 레시피가 잔뜩이다.
사진으로 길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어서 온갖 상상력으로 재료를 그려보고 가스레인지에 뽀글뽀글 작은 소리를 내며 끓고, 그리고 예쁜 접시에 담아 사랑하는 사람이 내 정성이 담긴 식사 한끼 먹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본다.
유쾌한 주말드라마의 저녘 풍경 같은 모습이지만 이 글의 행간 곳곳에는 슬픔이 뚝뚝 묻어나온다.
음식이라고는 겨우 라면에 달걀 풀어 먹는게 전부인 50대 남자가 어느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를 위해 인터넷과 책을 뒤적거리며 암환자가 먹을 수 있는 맛있어 할 수 있는 음식을 고르고 더듬더듬 부엌에서 뚝딱뚝딱 칼질을 한다. 하나하나 요리 레시피마다 더 맛있게 먹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예배를 드리듯 경건하게 꼭꼭 씹는 무항생 대패삼결살을 보며 더 이상 남지 않는 짧은 시간들이 보인다. 중간 일러에 나오는 모래시계나 그 남자의 뒷모습은 이 어이없는 요리책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고 여느 밥 한끼는 누구나에게 똑같지만 대충 한끼를 때운다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다는 긴 여운이 남는다.잔잔한 밤 바다에 흐릿한 달빛에 비치는 하얀 파도처럼 너무 넘실거리지 않아도 정말 차고도 넘친다.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는데, 부엌에서이런 먹을거리를 만드는게 자연스럽다. 전에는 달걀라면을 끓여먹는 게 고작이었는데, 습관이 바뀌었다. 이러라고 아낸는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었던 것일까? (217p)
아내를 보내고 긴 세월 함께했던 중년의 남자는 혼자서 부엌에서 이제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밥 한끼를 차린다.
아내에게 가져다줄때는 늘 얼굴을 살핀다.
'맛있어'그러면서 얼굴이 펴지면 나도 안심한다. -중략-
'고추기름 친 것도 맛 좀 볼래?'
"응'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잘 먹지 못한다. 나도 다른 계란탕을 한 그릇씩, 두 그릇 먹었다.
어느 순간 아내는 남자가 해주는 식사를 기다린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라는 노래를 듣는듯 켜켜히 내색하지 못했어도 그냥 항상 옆에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표현하고 한끼 한끼 흡사 예술가가 작품을 빚듯이 한끼를 만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인다
노래의 울림처럼 요리책 아닌 레시피는 늘어놓는 요리재료만 읽어도 충분히 슬프다. 이 많은 레시피를 두번 세번은 하지 못하였을것임에 혼자 남은 길에 막막한 늙은 남자의 뒷모습이 더욱 애잔해보인다
출처: http://samahun.tistory.com/20 [은하수를 건너는 히치하이커]
첫댓글 간단한 소개 글이지만 애잔함이 밀려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