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9절.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 요약설교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고, 또 예루살렘 성도들을 때리고 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만족히 여기지 않고,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유대인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외국 성인 다메섹에 군사를 이끌고 가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오도록 공문을 요청해서 허락받았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재판했던 가야바였습니다(바울의 회심을 32년으로 보는 경우). 바울의 회심을 36년으로 보는 경우는 요나단입니다.
AD 37년에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죽고, 그 때 다메섹이 로마의 수중에서 벗어나고, 다메섹의 통치자가 유대인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다메섹으로 이주했고 특히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 다메섹 출신으로서(창 15:2) 아주 오래된 도성이었고, 로마가 다스리는 수리아 지방의 수도이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240킬로 거리이고 4-6일간 여행할 거리(four to six day’s journey)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을 피해 도망간 성도들이 다메섹 도성으로 피난 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마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수리아 지방의 수도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전도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공문을 유대나라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에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리아 지방 수령에게 유대 나라 대제사장의 공문을 보여주고, 유대인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요청하는 공문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여기 ‘공문’은 합법적인 수색 체포영장이었습니다.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늘로부터 비치는 빛은 유대인의 관념상 사울이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in the presence of deity)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가리킵니다.
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고전 12:27, 엡 1:22-23)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됩니다.
5절.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때 사울이 ‘주여’라고 호칭한 것은 여호와를 가리키는 호칭인데, 유대 랍비들은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as the voice of God Himself) 인식되었습니다.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울은 아마 기절하여 죽을 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바로 <자기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님>이란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는데,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고서 기절할 뻔한 것입니다.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1.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사울을 당장에 요절을 내지 않고, 새로운 인생길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사울이란 놈을 요절을 냈을 것인데요.
2. 주님은 엎드려 절망 중에 있는 사울에게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절망 중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절망 중에 엎드려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 때 사울은 자기가 죽인 스데반이 죽으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이 땅에서 일어났으나 눈 뜬 당달봉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남의 손에 이끌려서 안내를 받아야 하는 당달봉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겸손히 깨어지고 낮아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주님의 크신 용서와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우리가 교회에서 일꾼으로 일하려면, 이런 교만이 깨어짐과 주님의 은혜에 감복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겪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겸손한 성도들에게 많은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됩니다.
즉 사사기 9장 15절에서 가시나무가 나무들의 왕이 되어서 다른 나무들을 마구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9절.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 사울이 아나니아를 만나서 눈이 치료되고, 음식을 먹게 되기까지 사흘 동안 암흑 속에서 금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완전히 회개했을 것이고, 또 신학적인 재정립을 위해서 아라비아 3년과 길리기아 다소에서는 약 10년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1장 26절에서,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1년간 안디옥 교회에서 시무했고, 갈라디아서 2장 1절에 믿은지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으니, 바나바가 사울을 다소에서 찾아오기 전까지 10년을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이처럼 악한 원수 사울을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자, 사울은 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에 감복하여 평생 동안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서 모든 사람이 거절하는 장발장을 성직자가 받아주고 용서해주자, 장발장은 처음으로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서 변화되어 평생을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흥사는 깡패요 온갖 죄를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서 평생 충성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도 그랬다고 합니다.
어거스틴도 그랬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처럼 악독한 우리 자신을 용서하시고, 살려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지극히 감사하시고,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님 인도 안에서 살아가고, 전도하며 복된 열매를 맺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