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에는 제목(詩題)이 꼭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목이 없는 경우 후대에 시제를 달 수도 있고,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처럼 無題라는 제목도 있지요. 그러나 대개 제목이 달려있으며, 어떤 경우는 아리송한 내용인데 시의 제목을 보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시의 제목에는 사람 이름이 등장하구요.
시의 제목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대개 호(號)나 자(字)를
앞서도 말했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왕이나 어른의 본명을 쓰거나 말하는 걸 꺼리는(諱)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에 다른 이의 이름을 올릴 때, 제자나 아랫사람이 아니면 굳이 본명을 쓰지 않지요.
여기에서는 조선시대에 한시를 배우거나 과거를 준비하는 이들의 필독서라는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우리나라의 한시를 모은 ‘韓國漢詩/ 民音社 刊’에서 유명한 이들의 이름이 올라있는 제목을 가려 뽑아 봤습니다.
♣ 다른 이에게 주거나(贈~) 부치는(寄~) 시
- 贈東坡 / 黃山谷 : 宋대 山谷 황정경(黃庭經)이 스승이며 벗인 소동파에게 준 시의 제목
- 贈上京夫子 / 三宜堂 金氏 : 조선 정조 때 여류시인 삼의당 김씨가 서울가는 부군에게 줌
- 寄崔孤竹 / 洪娘 : 함경도 경성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인 홍랑이 연인인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사람인 최경창(崔慶昌)에 부침
- 寄燕巖 / 朴齊家 : 실학자인 박제가가 스승인 燕巖 박지원에게 부침
♣ 다른 이의 시에 화답하는(和~) 경우
- 五月旦和戴主簿 / 陶淵明 : 동진(東晉) 대 도연명이 쓴 시로, 5월 초하루 대주부(관직명)에게 화답
- 和陶淵明擬古 / 蘇東坡 : 동진 대의 도연명의 擬古 시에 송대 소동파가 화답
♣ 다른 이의 시에 운을 맞추어 시를 짓는(次~韻) 경우
- 次工部韻示謹甫 / 申叔舟 : 신숙주가 두보 시의 운으로 지어 謹甫 성삼문에게 보여줌
- 次工部秋晴韻 / 成三問 : 두보의 秋晴에 성삼문이 차운
♣ 그 외
- 夢李白 / 杜甫 : 두보가 이백을 꿈에서 보고(이백과 두보는 워낙 이름난 시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본명을 호처럼 구별없이 널리 쓰였음)
-子瞻謫海南 / 黃山谷 : 황정경이 字가 자첨(子瞻)인 소동파가 海南으로 귀양감을 읊음
- 題狎鷗亭 / 崔敬止 : 조선 세조 때 부제학을 지낸 최경지가 狎鷗亭 한명회를 꾸짖어 지은 시의 제목
- 題冲庵詩卷 / 金麟厚 : 조선 중종 때 대학자 김인후가 冲庵 김정(金淨)의 시집을 보고 지음
관직명이 號 대신 쓰이는 경우도 허다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의 경우, 잠시 지방에서 역임한 변변치 않은 벼슬 공부외랑(工夫外郞)이 그의 다른 이름 杜工部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중국에서는 초급 과거시험 합격자인 秀才를 성(姓) 다음에 붙여 평생 통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시험이라 하여 초시(初試), 성균관 입소자격을 주는 진사(進士)에 들었으나 더 이상 관직에 오르지 못했어도, 마르고 닳도록 ‘김초시’ ‘최진사’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허다했지요.^^ 여기 관직명이 붙은 한시의 제목(試題)도 몇 가지 올립니다.
- 王右軍* / 李白 : 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를 칭송하여 이백이 지은 시. 王右軍은 그가 右軍將軍 벼슬을 잠시 역임했다 하여 평생 따라다니는 별칭
- 對酒憶賀監 / 李白 : ‘술을 대하니 하지장 어른 생각이’. 이백을 이끌어 주며 그에게 하늘에서 귀양나온 신선(謫仙)이란 별칭을 붙여준 하지장(賀知章)이 여러 벼슬을 역임했는데 그중 秘書監에서 유래.
- 高都護驄馬行 / 杜甫 : 고구려 출신 당나라 고선지(高仙芝) 장군의 벼슬이 安西大都護였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와 그의 명마를 기려 두보가 지은 시제
- 和韋蘇州詩寄鄧道士 / 蘇東坡 : 당나라 시절 소주(蘇州)에서 벼슬을 했다 하여 韋蘇州란 이름이 붙은 위응물(韋應物). 송나라 때 옆동네(杭州)에서 관리를 한 소동파가 그의 시에 화답하여 지어 鄧도사에게 부친 시의 제목
여기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를 묘사한 이백의 시(王右軍*)를 올립니다.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맑고 천진하여
瀟灑出風塵 깨끗한 마음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으로 한 도사가 지나가다 (*왕희지가 사는 마을)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만났다네.
(유명 서예가 왕희지가 도덕경을 써 주면 데리고 가던 거위를 주겠노라 하였다나..)
掃素寫道經 왕희지가 흰 비단을 쓸듯이 도덕경을 쓰는데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써주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버리니
何曾別主人 어찌 주인과 작별 인사인들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