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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한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5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
信天함석헌
동포 여러분!
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한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오래 억누르고 짜먹었던 악독한 제국주의 일본이 역사의 정당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해방이 와서 새 역사 창조의 좋은 기회를 만나면서도, 우리는 깊은 깨달음을 못가져 통일된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이 그어놓은 죄악의 38선에 걸려 어리석게도 민족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27년을 서로 의심과 미움과 공포 속에 맞서 오는 동안에 세계 대세는 변해 갑자기 화해의 기운으로 돌아, 우리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듯 통일문제에 들이닥치게 됐습니다.
문제는 엄숙하고 다급해 에누리 없습니다. 바로 풀면 살 것입니다. 못 풀면 민족이 온통 멸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한번 생각을 깊이 하고 결심을 크게 하여 온 겨레의 마음과 힘을 한데 묶어 민족통일의 큰일을 이루도록 할 것이지, 결코 낡아빠진 나쁜 버릇과 소소한 이해 이론의 차이에 걸리고 빠져서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영원한 역사의 심판에 떨어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이 역사를 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민족입니다. 지구 위에 크고 작은 민족은 많고, 일찍이 있다가 이미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져 버린 것도 적지 않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늙으면서도 오히려 싱싱한 힘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민족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어지신 조상의 나셨던 곳으로 존경하고 사모하는 저 한배뫼 같이 늙고도 젊은 민족이요, 그 꼭대기의 밑모르는 소에 하늘의 신비가 깃들이 듯이 우리 속에도 영원에 통하는 한 삶의 거룩한 역사의 의지가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죽는 것도 아까워서 나라의 힘으로 보호하거든 하물며 우주 개벽 이래의 연륜을 가지는 역사적 민족의 거목(巨木)이 위급에 닥쳤는데 어찌 보고만 있단 말입니까?
누가 늙은 나무를 읊은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천년 묵은 늙은 나무 가지는 다만 두어서넛 (古木千年枝二三 고목천년지이삼)
천연의 슬픈 빛 띄고 동으로 또 남으로 (天然调悵向東南 천연조창향동남)
늙어갈수록 온몸 뚫려 빈 댓속 같고 (老去全身通似竹 로거전신통사죽)
봄 오면 산 기운 얼굴에 넘쳐 쪽보다 더 푸르다 (春來一面活如藍 춘래일면활여람)
평생에 눈비 맛을 다 겪고 났건만 (平生雨雪經過盡 평생우설경과진)
머리 돌려 쓰다 달다 한마디도 없구나 (猶不回頭說苦甘 유불회두설고감)
읽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기상같이 생각됩니다. 두서넛밖에 아니되는 가지에 슬픈 빛 띄고 천연히 서는 나무, 독한 벌레에 속은 다 파 먹히었지만, 그래도 그만큼 욕심은 없이 뚫린 속이요, 생명력은 날마다 스스로 새로워 푸른빛이 전신에 넘칩니다. 비바람에 시달린 그 나무같이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허물도 많고 부끄러운 데도 많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쓰다 달다 한마디 말없이 태연히 견디는 모습이 얼마나 눈물겹습니까? 그런데 그 성스러운 늙은 나무를 그래 철없는 정치가란 나무꾼 애들의 장난하는 도끼에 맡겨 찍혀버리게 둔단 말입니까? 사람인 담엔 못할 일입니다.
우리 조상은 남·북 만주의 거친 풀밭, 반도의 자질구레하고 험한 골짜기를 다스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동안, 또 자기네 속에서도 그 풀, 그 가시, 그 짐승, 그 버러지와 마찬가지로 솟아나는 여러 가지 사납고 더럽고 독한 본능 충동을 다스려 밝고 의젓한 문화를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르게 독특한 식으로 닦아냈습니다. 잘못했던 일도 많고 실패했던 것도 많지만, 그러니만큼 그런 중에서도 지지 않고 이겨 남았으니만큼 그 점이 더욱더 귀하고 가꾸어 낼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문화민족입니다.
이제 이 역사, 이 문화가 정치세력의 싸움으로 인하여 서느냐 넘어지느냐 하는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극도로 발달하는 과학 기술로 인해서 그전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정치에는 도리도, 도덕도 없고 노골적인 권력주의 실리주의만 날뛰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결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 나라들의 민중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민중은 언제나 인간적이요 평화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침략주의적입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틈에서 정치적으로 자주하지 못하고는 결코 민족적 생존도 문화 창조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갈라져 싸우는 민족이 자주독립 못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과 역사를 이러한 위기에서 건져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어지신 동포 여러분!
나는 지극히 작고 알차지 못한 못난 씨알의 하나입니다. 본래 타고나기도 작게 타고 났지만 정성이 모자라 공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것도 없고 행하는 것도 형편없습니다. 그러한 나는 감히 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천하 경륜의 포부와 재주를 품으면서도 제갈량(諸葛亮)은 “구전성명어남양(苟全性命於南陽)이요 불구문달어제후(不求聞達於諸侯)”라고 했는데, 나 같이 못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지러운 시절에 났다가 내 조그만 분에 따라 조용히 살다가 가자는 것이 일찍부터의 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오니 사람들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기어이 밭고랑에서 끌어냈습니다. 감히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정의에 감격해서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하는 결심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나는 내 딴으로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고 그래서 주제에도 맞지 않게 격동하는 역사의 일선 가까이를 왔다갔다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받아 가지고난 약한 천성에 소위 “일을 해 보잔” 생각은 감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제 정말 꽃수레를 타는 그 날이 오나보다 했던 우리 수난의 여왕이 그 수난을 계속 감당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 그날인데! 도둑놈들이 그 꽃바구니를 덮칠 때마다 우리가 울기는 얼마나 했으며 강도들이 그를 구박할 때마다 우리가 이를 갈기는 얼마나 했는데! 새 나라의 상징인 제주도를 바라며 남해의 사나운 물결 밑을 기어갈 때에 우리 다리는 얼마나 떨렸으며 우리 목은 말을 이루지 못하는 기도에 얼마나 메었는데! 그렇게 해서 온 그날인데! 어떤 불쌍한 거러지 처녀에도 한번은 얼굴에 꽃이 피는 날이 오는 법인데, 우리 수난의 아가씨에만은 영원히 부끄럼뿐이란 말이냐? 그런 그날이 그래 오다 도로 간단 말이냐? 나는 먹던 밥 술을 놓고 미(美)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땅을 박차고 그 수난의 여왕을 위한 항변(抗辯)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재주 있고 없고를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격이 있고 없고를 걱정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머리가 좋아서 나라를 국수처럼 단숨에 말아먹을 줄 알았던 누구의 말처럼 나는 미친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이들은 나더러 당치도 않은 정치에 입은 왜 내미느냐 하지만 내 마음으로는 정치가 아닙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전문 소방부만 불 끄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내가 덤벼들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우리 여왕의 짓밟히는 꼴을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래서 씨의 앞에 나서서 말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지 이제 10여 년입니다.
그러나 나는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그렇게까지 들어주시고 이 못생긴 나를 그렇게까지 밀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반대 세력이 육해공(陸海空)의 몇 사단을 풀어 나를 에워싼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비하면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럴수록 나는 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의 말장이에 머물고 있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참이 모자라서 그럴 것입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부족 내 잘못을 알면서도 또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페스탈로치의 말을 빌어서, 영글지 못해 제철이 되기 전에 빨개 떨어지는 병든 과일이 떨어지면서도 그 마음은 그 뿌리를 가꾸자는 데 있다고나 하고 싶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씨알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의 전체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만이 참 통일입니다. 5천만 씨알이 한통 치고 한데 들어, 마치 태풍 밑에 노하는 바다마냥, 하나의 강한 전체의식에 일어나, 거룩한 혁명의 부르짖음을 외쳐야 합니다. 역사 창조의 힘은 거기서만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남북의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의미는 어디 있습니까? 이 전체운동을 일으키자는 데 있습니다. 대표가 오고 가는 것은 그 실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오고가는 운동이 거듭되면 될수록 그 진폭(振幅)이 차차 넓어져 나중에는 어느 부류나 어느 종류의 사람만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는 전체 씨알이 그 속에 삼켜 버리우게 돼야 합니다.
참 위대한 정치가는 민중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민중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요, 참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사람을 숭배하는 민족이 아니라, 바다가 철갑선을 맘대로 띄우고 놀리듯이 위대한 인물을 잘 들어 그 재주를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놀려 쓰는 민족입니다. 제 하는 일을 아는 것만이 사람입니다. 민중 전체가 제 하는 일을 알고 할 때 위대한 것은 나옵니다.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어떤 생명의 운동도 직선으로 올라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톱니 같은 오르내리는 굴곡을 그으며 올라갑니다. 모든 운동은 점점 줄어들고 내려가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떻게 위대했던 종교도 정치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차차 그 생명력이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나가기 위해서는 자주자주 부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체에 돌아가서만 됩니다. 정말 생명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체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는 아무리 잘하노라 해도 개체이기 때문에 전체에서 떠날 수밖에 없고, 받은 생명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 단체적 모든 생명체는 다 때때로 전체의 발전소에 들어가 다시 충전을 해서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이 원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원시사회에서부터 때때로 축제일을 두어 전체운동을 해서 생명의 고갈을 방지했습니다. 고등한 종교에서 하는 부흥회도 이 전체운동이요 정치에서 하는 혁명도 이것입니다. 참 혁명은 전체운동에 이르러서만 될 수 있습니다. 전체 민중이 한통 치고 들지 못하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닙니다. 이 의미에서 간디가 혁명이란 제일 원리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말은 옳은 말입니다. 전체가 제일원리입니다.
민족통일은 하나의 물리적인 운동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정신운동이요 생명운동입니다. 민족이 분열됐다는 것은 결코 밖에서 오는 물리적인 힘 때문이 아닙니다. 안에서 벌써 이 전체가 깨지고 생명력이 쇠퇴했기 때문에 밖에 힘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대로 분열된 민족을 다시 통일하려면 결코 물리적인 힘의 운동만으로 될 수 없습니다. 민중 전체가 하나의 전체의식에 들어 강한 영감에 움직이게 돼서만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영감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우리가 민중 전체가 일어서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정치를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말, 반드시 지금 있는 정치가 잘못됐다 해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의 이치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치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돼서만 참 정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격의 통일을 무시하는 지식이 참 지식이 아닌 것같이 민족의 통일을 무시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닙니다. 강제로 하는 지배뿐입니다.
통일이라 하면 갈라졌던 것을 다시 합하는 하나의 복귀운동같이 알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생명에서 엄정한 의미의 복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이 통일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하나의 자람이요 발전입니다. 우리 민족이 갈라진 것은 사람의 몸에 마비가 일어나거나 정신의 분열이 생긴 것처럼 하나의 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새로운 자람이 있기 전에는 하나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갈릴 수 없는 민족이 갈라진 것은 우리와 또 우리와 관계된 모든 나라의 정치악의 총 결과 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치악을 제해버리지 않고 통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새로남의 체험 없이 인격의 보다 높은 새 통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새로남의 체험에 없어서 아니되는 중요한 요소는 속죄의 체험입니다. 지난날의 잘못됐다는 의식이 남아 있는 한은 새로남은 없고 인격은 항상 분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 죄가 씻어져 버렸다는 확신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평안과 기쁨이 오고 새 영감에 차게 됩니다. 그것이 새 통일입니다. 한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국민이 한통 치고 든 감격 속에 지난날의 모든 정치악에서 청산되고 해방됐다는 느낌 없이 참된 새 통일에 들었다 할 수 없고 그러한 통일의식이 없는 한 역사 창조는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민중 전체가 일어서야 된다고 강조하는 가장 깊은 까닭입니다.
우리는 해방 때에 이것을 잘 경험했습니다. 아마 일제 말년의 민족정신의 상태를 가지고는 영영 남의 종노릇이나 했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식자 무식자를 구별할 것 없이,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교 신자까지를 넣어서, 마음에 결코 원치도 않고 옳다 생각도 않으면서 강제에 못 견디어, 다시 말하면 속의 정신적 나보다 육체의 생존을 더 중히 여겨서, 민족의 고유한 모든 전통을 버리고 양심을 짓밟고 거짓 살림을 했을 때, 우리의 개인적 민족적 자아는 여지없이 분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 심리 가지고 무슨 정신적 보람 있는 활동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하늘에서 떨어져 전 민족이 아무 한 것 없이 모든 죄에서 벗어났음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감격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해서 새 역사의 창조를 위한 정신적 준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경험은 또 3·1운동 때와 4·19때에 있었습니다. 그밖에는 별로 없습니다. 이제 오려는 통일은 그 모든 때보다도 더 중대한 일입니다. 이것이 만일 못 이루어지면 위에 든 그 모든 귀한 역사가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결코 단순히 정치나 외교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는 절대 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도덕적 종교적 모든 정치활동을 총합한 생명운동입니다. 남과 북의 정치 당국에 있는 이들은 이점을 특별히 깊이 생각 하셔야 할 것입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라” 한 예수의 말씀을 어디서보다도 더 깊이 여기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살고 죽음을 같이하는 동포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이때에 이기심을 활짝 벗어 버리셔야 합니다. 생명은 전체에만 있습니다. 전체가 약해질 때 사람은 점점 이기적이 됩니다. 그래야만 살 것같이 뵈기 때문입니다. 배가 깨지려 하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 제각기 제 살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배는 더 빨리 깨지게 됩니다. 그것을 평시에 이치로는 잘 알건만, 정말 그 마음이 필요한 그 순간에는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약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야만 사람은 사람이 됩니다. 전체의 제단 위에 자기를 불살라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민족의 가장 나쁜 병은 이것입니다. 좋은 교훈이나 되는 것처럼 입마다 말하기를 “내 발등의 불을 끄고야 남의 발등의 불을 끈다” 합니다. 약은 듯하지만 이 약음이 우리나라를 잘못되게 만들었고 우리 개인을 못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 민족의 집에 여러 차례 불이 일어난 것을 겪는 동안에 생긴 생각일 것입니다. 동정도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고치기에 마음이 약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람마다 제 발등의 불을 털기 때문에 불은 전체를 삼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뭐라 합니까? 공장은 망하는데 공장 주인은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만일의 경우 이 나라가 파산하는 날 자기만이 잘 살려고 외국은행에 비밀저금을 한다하지 않습니까? 또 이민이 자꾸 는다는 것도 무엇입니까? 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이민은 가난한 사람이 가는 것 아니라 제 것 가진 사람이 간다하지 않습니까? 그런 심정으로는 통일은 절대 될 리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심할 때는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강력하게 묶는 전체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통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밤낮 약한 것은 이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 위기에서 우리는 한번 큰 결심을 하고 죽기 각오하고 이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점은 특히 사회의 위층에 있는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민족통일 되려면 더구나 우리 민족같이 역사적으로 그런 폐습이 심한 나라에서는, 경제면으로, 권력적으로, 또 지식적으로까지, 불평등이 있어 가지고는 아니됩니다. 절대평등을 바라기는 어렵지만 될수록은 그 차이가 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위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이것은 하나의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혁신운동인데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를 그냥 가지고 있어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민족이 새 통일로 다시 나지 못하는 날 여러분은 누구와 같이 살려 하십니까? 외국에 도피시켰던 재산으로 외국 나가서 안락한 생활을 할 것을 꿈꿉니까? 설혹 된다손 그것이 어찌 사람입니까? 사람이 어찌 먹고 입고 쾌락 누리는 것뿐입니까? 여러분은 이 긴 역사를 가지는 민족의 망하는 것을 밖에 나가 구경하면서 마음이 평안하리만큼 비인간적입니까? 그러지 않을 줄 압니다. 나라는 여러분의 분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약간의 지위와 돈을 희생해서 민족개조의 큰 사업에 공로자가 아니되렵니까?
신기하게도 이 나라 이때에 같이 생을 받아서 나온 씨알 여러분!
우리는 뜻이 있어 이때에 났습니다.
우리를 내신 그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새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새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 역사의 방향을 한번 바꾸어보지 않으렵니까?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을 어찌 멀다 하리요?
우리는 우리의 이 수난의 여왕을 업고 한번 무지개의 다리를 못 오른단 말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어제까지 서로 꼭두각시라 욕을 하며, 서로 칼을 갈면서 적대하던 두 정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서로 의논을 하고 청천벽력같이 7·4공동성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 뭐라 했습니까?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초월해서 민족통일을 하기를 힘쓴다 했습니다.
사람은 말을 하지만 제 하는 말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말은 사람보다 위대합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습니다.
7·4성명하는 그 자신들도 그 하는 말의 뜻을 다 몰랐을 것입니다. 그 말의 참 뜻을 아는 것은 씨알입니다. 그 말씀을 하게 하는 정말 주인은 씨알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더러 그 뜻을 풀게 하십시오, 이렇습니다.———
민주주의 시대도 공산주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벌써 몇 십 년 전부터 세계 역사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의 어느 하나의 승리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해왔습니다. 잘나서 어째서 그런 까닭을 알고 한 말이 아닙니다. 무식하기 때문에 뭔지 모르고, 그저 그렇게 마음에 비쳐져서 한 소리였습니다.
구태여 설명하란다면 할 수없이 이랬습니다. “소설가가 소설을 써도 재미있게 쓰려면 원수를 갚아서 갚아지게 쓰지 않고 갚지 않으면서 갚아지게 쓰지 않느냐? 그런데 하물며 우주극이 아무리 졸렬하다면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다 멸절을 시켜 버리거나 민주주의가 반대로 공산주의를 다 정복해버리는 그런 식으로 되겠느냐? 반드시 공산주의보다도 민주주의보다도 높은 새 것이 나와서 문제가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이기는 것이 목적 아닙니다. 전체가 한층 더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 말이 들어맞은 셈입니다.
7·4성명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아닙니다. 다 그전에 지나간 배가 있어서 이제 언덕에 와서 철썩거리는 물결입니다. 닉슨 모택동의 회담, 닉슨의 모스크바 방문이 없었다면 결국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럼 닉슨이니 모택동이니 소련이니는 스스로 자주(自主)하는 것인가? 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들도 역사의 흐름 위에 뜨는 가랑잎인 점에서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 결코 하고 싶어 잘나서 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어쩔 수 없는 명령에 따라서 한 것입니다. 역사는 결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합의해서 진행되는 것 아닙니다. 물론 사람 없이 아니되지만, 마치 사지백체 없이 사람은 없지만 생명은 사자백체 이상인 것같이, 역사도 사람 이상인 뜻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뜻을 알 수 있는 데까지 아는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이제 그 뜻으로 말미암아 대세가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터 우리는 늘 후진국 의식만 가지고 남의 뒷 티끌만 뒤어쓸 것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우로 돌아 앞으로!”를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어디로 갈지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는 지금 나가는 방향일 수는 없으니 여기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이 무슨 방향입니까? 국가주의의 노선입니다.. 오늘의 모든 국가는 그 이데올로기나 제도의 차이는 있어도 국가주의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그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희생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담은 새로 갈 방향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을 결정하는데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만은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우리가 붙들어야 새 시대에 뽑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요소가 뭐냐? 역사적 유산인데, 그것을 내버리고 역사 진행이 있을 수는 없는데, 그럼 그 역사적 유산이 뭐냐 하면 곧 인류적인 죄의 짐입니다. 사람이 최후까지 가지고 가는 보물이 뭐냐 하면 곧 자기의 약함 곧 자기 병입니다. 유쾌했던 행복은 다 잊어도 좋지만 제병은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습니다. 그 병을 놓는 순간이 곧 자기의 최후인 동시에 새 생의 시작입니다. 인간 전체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은 최후까지 제 죄를 지고 갈 것입니다. 죄 벗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는 한 죄가 있을 것이요 죄가 있는 한 살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죄의 짐을 겸손히 잘 지면 떨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요, 그러면 새 시대에 들 것입니다.
씨알 여러분 부끄러워 마십시오. 우리는 인류의 죄를 지는 역사의 속죄양입니다. 유교의 찌꺼기도 우리가 받았고 불교의 찌꺼기도 우리가 받았습니다. 중국·인도의 문화가 중국·인도에서는 좋았는지 몰라도 우리게 오면 짐이 됐고 서양 문명이 서양서는 혜택이 됐는지 몰라도 우리에게서는 화근만 됐습니다. 민주주의도 우리게서 같이 병이 될 법이 어디 있으며 공산주의인들 우리게서 같이 악독한 것이 될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역사의 속죄양 아닙니까? 반드시 우리가 못나서만 아닙니다. 아니요, 병이 곧 사람의 삶이 듯이 우리 고난이 곧 우리의 보람이 있는 곳입니다. 이 비밀을 누가 압니까? 내가 보기에는 미래의 역사의 약속은 여기 놓여 있는 듯합니다.
속에 알갱이를 품은 씨알 여러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창조입니다.
내 말이 너무 거칠다 책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짐을 졌습니다. 엎어 졌습니다.
말을 못다 합니다.
되지 못한 말을 쓰는 동안에 9월 밤이 다 샜습니다. 아!
씨알의소리 1972년 9월 14호
저작집30; 5- 153
전집20; 14-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