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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1962년 경제자립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정부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들을 굶기지 않도록 정부의 책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내레이션: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종합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역사,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포항에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이회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제철소 포항제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허준/방송인: 포항제철하면은 요즘 고등학생들한테는 아~ 수능 만점자 나온 고등학교, 학교로 인식이 되는 요즘은 다 포스코라고 하죠.
최원정: 다 포스코라고 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젊은 사람들한테도 포항제철은 익숙한 단어는 아닐거예요.
김동환/삼프로티브이 대표: 왜냐하면 포항제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포스코(POSCO) 란 회사가 법인명이고 제철회사가 두 군데 있잖아요. 경북 포항과 전남 광양에 있고,
최태성: 어쨋거나 모든 분야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산업의 쌀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사실 산업의 쌀 하면 반도체가 떠오르는데 이 당시의 산업의 쌀은 철강이었죠.
김동환: 철이라는 게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절에 미-중무역갈등 초기에 보복관세를 제일 먼저 때린 게 중국산 철강제품에 대해서 25%를 때려버리거든요. 이게 워낙 산업에 기본이 되는 소제이다 보니까 그 정도로 세계경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철강인 거죠.
최태성: 가장 기억이 나는 광고가 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광고: 철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멈춰 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 광고가 너무 멋있었고요.
허준: 우리 어렸을 때 생각해 보세요. 자석을 배울 때 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이게 철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철이 없는 세상을 상상을 못했죠.
이시원/배우: 철이 없었으면 여기 방송국 스튜디오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유우머로) 우린 왜 철이 없을까? 왜 우린 철이 없을까?
이시원: 지금은 우리나라 제철기술이 규모가 크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 철강산업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어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원래 한국은 철강산업이 거의 없었죠. 겨우 대장장이 수준으로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북쪽지역에다 제철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게 대륙진출을 위해서 하는 건데 38도선 이남에는 그나마 있었던 게 인천과 삼척에 소규모의 고철 덩어리를 가지고 제강을 하는 수준이었는데 광복 이후에 거기에 있었던 제철소 기술자들이 철수를 해버리잖아요.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원정: 1960년도면 굳이 제철소 라는 게 급하게 필요했었나요?
최태성: 그런데 뜬금이 없지 않아요?
김동환: 전쟁 후 잖아요. 복구작업을 해야 되는데 다리 끊어진 거 다시 해야 되고 무너진 건물 다시 올려야 되는데 철이 안 쓰이는 데가 없죠. 철도에 건물에 하물며 국가 안보에 중요한 무기도 다 철이잖아요.
이시원: 철강 산업은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나라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였네요.
박태균: 이걸 잘 할려면 돈과 기술이 필요하잖아요.
이시원: 그럼 돈은 어디서?
박태균: 그 당시에 미국의 원조가 1950년대는 그랜트(grant) 라고 해 가지고 물품을 주는 무상원조에서 1959년 이후에 차관(loan)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근데 차관의 특징이 뭔가 하면 계획을 가지고 오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계획을 보고 계획이 실효성이 있다고 하면 차관을 주는 거예요.
최원정: 사실 돈 빌려주는 사람의 마음이지,
최태성: 그렇지, 내 마음이지
최원정: 어떻게든 증명을 해 봐
박태균: 기회가 한 번 왔어요. 그게 베트남 파병 때예요. 64년에 미국 쪽에서 박정희 정부에 베트남에 파병을 해달라고 하니까 그래서 오케이 하겠다. 1965년 5월에 미국 쪽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을 한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이 피츠버그를 한 번 들릅니다.
김동환: 철강도시
박태균 지금은 미국의 철강이 굉장히 안 좋아져서 회색도시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피츠버그가 엄청난 미국의 철강을 대표하였고 미식축구팀 이름도 스틸러스였습니다. 그 정도로 사실 철강산업의 중심인데 거기에 가서 철강회사 사장을 만나 가지고 우리가 철강회사가 필요한데 어떻게 안 되겠냐 그랬더니 포이 회장이 너네 기술가지고는 되겠냐 근데 혹시 한번 국제차관단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
최원정: 경부고속도로 할 때도 보면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근데 포항제철 만큼은 중요한 인물이 여기서 등장을 합니다. 혹시 교수님과 같은 집안 출신인가요?
박태균: 故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저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요.
최원정: 태자 돌림에
최태성: 아까 제가 듣는데 우리 포스코라고 하셨어요. 뭐지하고 제가 봤거든요. ~ 확인 들어갑니다~ 우리 포스코 같은 경우엔~
일동: 웃음
박태균: 제가 그럼 지금 여기 안 있죠
이시원: 회식에서도 싹 쏘시겠죠.
박태균: (오해금지) 저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아마 제가 알기로는 본관도 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에 박태준씨를 포항제철소 건설책임자로 임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는 인자를 잘 알아!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이게 박정희 대통령이 임자라고 얘기한 사람이 몇 사람 없어요.
이시원: 보통 임자는 부인한테 지칭하는 말 아녜요.
허준: 이 물건에는 임자가 있다 라는 표현에 임자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 사람 그런 뉘앙스가 내 사람한테만 부르는 단어~그럼 두 사람이 굉장히 친한 선후배, 동기는 아닐 것 같고~
최태성: 1948년에 처음 두 사람이 만나요.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선생님과 제자로 만나는 거에요. 당시 교관이던 박정희가 문제를 낸 것이죠. “대포의 탄착지점을 계산 하시오” 라는 문제를 냈는데 문제가 어려워서 다들 못 풀었는데 딱 한 사람만 맞춘 거예요. 그 사람이 바로 박태준 생도예요. 이렇게 되면 저는 교직에 있으니까 아는데 다 어려워서 전멸했는데 누가 단 한 명이 그걸 맞추었다 하면 그 학생만 빛이 들어와요. 쫙 들어오는 데 그런 느낌으로 아마 박정희와 박태준의 인연이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이유가 있는 것 같애요. 박태준씨는 우리가 광복되기 직전에 일본에 있으면서 와세다 대학엘 들어가서 1년 반 정도를 다녔어요. 이 정도면 최고 엘리트였어요. 그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군에 들어간 거예요.
허준: 제가 또 좋아 하는 게 야사 아니겠습니까. 군사정변을 일으킬 때 이미 실패하면 최소한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잖아요.
김동환: 그렇죠.
허준: 그래서 혹시 내가 잘못되면 임자가 우리 가족 좀 돌봐줘 이렇게 얘기하고 작전에서 박태준을 빼버렸다는~
최원정: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의장 가족을 돌보는 거예요.
박태균: 거기에 지금 5.16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서실장에 임명되구요. 또 그 이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상공위원회 위원이 또 되거든요. 이후에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자제분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봐준 게 박태준 회장이었다는 부분들의 얘기가 있습니다.
이시원: 진짜 인생의 보험을 든다면 본인 주위에 누구 한데 가장 들겠어요?
최원정: 갑자기 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데 시원, 자기가 해주게
이시원: 진짜로 그런 보험을 들 정도면 가장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최원정: 나도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여기서 지금 제일 똑똑 하잖아요.
김동환: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믿을 수가 있어서~ 똑똑해서 배신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사람은 한 길로 정말 배신하지 않고 내 주변에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었겠죠.
최원정: 상공담당이면 지금으로 치면 경제 부총리 급인 거잖아요.
김동환: 보면 알거든요. 부하 직원들도 보면 자네는 영업 맨이야 이 친구는 기획통이야 아마 박태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봤을 때 경영 쪽 괜찮은데 이런 생각을 했었을텐데 실제로 그렇게 해서 경영을 맡긴 경우가 있어요. 대한중석광업 이라는 회사가 있거든요. 중석이라는 게 텅그스텐을 얘기해요. 1964년 여기 사장을 시킵니다. 그런데 맡을 때는 적자였어요. 근데 박태준 사장이 취임 1년 만에 흑자전환을 시킵니다.
이시원: 한 마디로 나는 임자를 잘 알아가 아니라 나는 임자가 잘 하는 걸 잘 알아 였네요.
최원정: 요때 박태준 회장의 나이가 불과 30대 후반 밖에 안 되었는데~
허준: 내 나이 때 였네요.
최원정: 생각해 보세요. 우리 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는데 (이시원을 향해) 자기 보다 어렸어.
이시원: 제 나이보다 어렸어요?
박태균: 제철소 만들라고 해놨는데 박태준씨한테 여기저기서 압력이 막 들어가는 거예요. 제철소 만든다니까 돈이 보이잖아요. 돈 냄새는 잘 맡잖아요.
이시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군요.
박태균: 거기에 블랙 머니가 또 생기고 그러면 그게 정치권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이렇게 되니까 박태준씨가 나 이래 가지고 못한다. 해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납니다. 만나서 하루 바삐 급하고 효율적으로 빨리 끝내야 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임자 필요한 게 뭔가? 한 번 써봐!
이시원: 소원을 말해봐
최원정 & 허준: 이거예요? 그게 아직 남아 있어요?
박태균: 박태준이 적은 요구사항 메모, 이걸 만들어가지고 잘 하겠다. 건드리지 마라. 우리는 가장 효율적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요구사항 위에다
최태성: 거기다가 누구 사인 한 거예요?
박태균: 그렇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사인 이예요. 70.2.3일자
일동: (깜짝 놀라면서) 아!
이시원: 한 마디로 결재 사인인 거예요.
김동환: 내가 봤다는 거죠.
최태성: 조선시대 종이 마패 같애요.
박태균: 이것만 보여주면 되는 거죠.
최원정: 부루 마을의 무적카드 황금열쇠 같애요.
이시원: 이렇게 했는데 사인을 바로 해주셔~ 그러면 일할 맛 난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리라 이럴 것 같애요.
최원정: 아니 최고 권위자가 인정도 해주고 나한테 막강한 책임까지 주었으니까 건설로 바로 들어가면 되겠네요.
최태성: 건설로 바로 들어 갈려면 이제 철광석이 들어 올려면 항구가 있어야 될 것 아녜요. 항구가 들어올 수 있는 도시는 다 후보군으로 올라와요. (동영상,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쏟아지는 제철소 유치공약, 김장섭/포항영일 울릉(경북 제5지구/민주공화당/종합제철공장을 월포에 유치완공시키겠습니다. 양달승/제10지구 민주공화당-종합제철공장을 유치한다)
박태균: 충청도 출신이었던 김종필(충남서천출신)은 충청도 어디에다 하고 싶은 게 있구요. 이후락 씨는 고향이 울산출신이니까 울산에 하고 싶구요. 가장 괜찮다 싶은 유력후보지 쪽은 삼천포(현 사천시) 였어요.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결국은 갑자기 포항으로 결정하게 된 거는 처음에 조강생산능력을 연산 50만~100만톤으로 생각했다가 이걸 300만톤 정도로 늘리는 거예요.
최원정: 시작도 하기 전에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데~
김동환: 놀라운 건 이거죠. 지금으로 치면 400만 톤이 큰 건 아니지만 그 시기에 우리는 산업화 초기시기 이기도 하고 수출전망도 없던 시대였잖아요. 근데 300만 톤의 제철소를 계획한다. 그거는 사실 발상의 전환인데~
최원정: 규모가 커져야지 채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인데,
김동환: 단위 생산량이 증대하면서 비즈니스가 된다는 얘기예요.
박태균: 그러구 나니까 300만 톤이면 1967년 이때가 포항이 인구 5만 명의 아무것도 없던 한적한 어촌이었어요. 그리고 바다는 접해 있구.
이시원: 노는 땅인데 바다가 접해 있으면 지금 굉장히 좋은 입지 조건인가요.
최태성: 생산량을 늘려야 된다는 그 조건변수가 삼천포 제철에서 포항 제철이 되었군요.
박태균: 그렇죠,
------------(동영상), 종합제철소 유치에 성공한 포항, 대규모 환영대회가 열리기도, 이후 부지매입 & 거주민 이주작업 시작----------
최태성: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찬란하고 화려하고 빛나는 모습도 있지만 일단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 아녜요. 이주비와 보상비가 많지 않았을 거예요. 그분들이 국가발전을 위해서 희생한 부분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마음 따듯한데요.
이시원: 우리는 돈 얘기만 하고 있었는데
김동환: 규모의 경제 얘기한 저는 뭐가 됩니까.
내레이션: 의욕적인 추진과는 반대로 건설계획은 꼬여만 간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금, 특히 국제부흥개발은행 (IRBD)이 내놓은 보고서는 상황을 더욱 악화 시켰다.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노동 및 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개발을 우선해야 한다. 부정적인 시선은 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국제경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장난감 같은 것 부실기업을 하나 더 만드는 것 밖에 안돼(1969.5.30),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박태준,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 박태준은 귀국길에 잠시 하와이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불현듯 아이디어 하나가 떠 오른다.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종합제철소를 위한 장소는 마련됐고 돈이 문제인데 누가 봐도 이건 문제가 있지 않나, 이게 될까 의심은 들었어요.
최태성: 지금 봐도 저는 좀 객기다 너무 황당하지 않아요?
허준: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너 컴퓨터 사준다고 아빠가 약속할 테니까 공부 어떻게 할꺼야. 그러면 계획표 세우잖아요. 꿈나라, 아침 공부, 점심 공부, 저녁 공부 되겠니? 이렇잖아요. 300만 톤? 박 사장, 되곘니 이런 상황이잖아요.
박태균: 맞아요, 맞아요, 근데 이게 이제 그랜트가 아니고 차관으로 주는 거잖아요. 그랜트는 그냥 써하면 되는데 론은 어쨋던 이자는 싸더라도 돌려받아야 되는 돈이에요.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될만한 계획서를 가지고 와야 돈을 빌려주죠.
최태성: 누가 봐도 그랬을 것 같애. 제철소 건설 말이 안될 것 같아요.
허준: 한국은 그냥 가발이나 만들어 이런 거 아닙니까?
이시원: 믿어 줄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이걸 하고 금방 다음단계로 갈 거예요! 믿어 주세요.
박태균: 믿을 만한 게 있어야 믿죠.
이시원: 돈은 안 떼어 먹는 다니까요.
최태성: 돈을 투자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최원정: 지금으로 치면 세계 최빈국에서 나 반도체 사업할 거예요 라는 그런 수준 아니었을까요?
김동환: 충격적인 숫자를 하나 알려드릴게요. 1965년에 대한민국 1인당 GDP가 얼마인지 아세요?
최태성: 지금은 얼마죠?
김동환: 2022년 지금 3만 3천 달러 넘죠 (정확히 3만3591달러),
최원정: 천 달러?
김동환: 108달러입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3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이시원: 진짜요?
최태성: 그런 나라가 제철공장을 짓겠다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거죠.
김동환: 그 무렵에 미국이 터키하고 브라질에 돈 빌려 줬다가 떼이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일동: 아이고 야
김동환: 미국 입장에서도 108달러 국가에다가 차관 주면 못 받는다는 확률이 굉장히 높아요. 일본 바다 건너에 제철소가 있는데 사서 써~ 이렇게 됐다 구요.
최태성: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안 돼죠. 그때 보면 일제 강점기 내내 수탈당했죠. 6.25전쟁 끝나가지고 엄청난 포탄 속에서 그냥 석기시대로 돌아간 거예요. 있는 건 사람과 돌맹이 밖에 없어요. 겨우 이제 옷 좀 만들고 가발 만들고 조금 나아지는 상황인데 300만 톤 철을 만들겠다고 하면 이건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이시원: 땅까지 마련해 놓고 주민들까지 이주 시켜놓고 근데 지금 혼자 휴가 즐길 때 입니까? 하와이를 왜 가요?
박태균: 그 당시에 비행기는 미국-한국 직항이 없었어요. 코퍼스社 회장이 “하와이 내 별장에서 잠시 쉬어 가세요” 그래서 들렀는데 눈앞에 뭐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최태성: 하와이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뭐가 들어왔군요.
박태균: 하와이에 가장 많은 관광객을 보낸 나라가 어느나라인지 아세요?
최태성 & 이시원: 일본~
박태균: 일본입니다. 맞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일본 식당이 보였겠죠.
최원정: 그게 포항제철소 공장 짓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죠?
박태균: 1965년에 한일협정을 맺는데요.
일동: 아~
박태균: 엔화가 보인 거죠. 가만 있어. 우리가 돈이 들어올 곳이 있긴 한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애요.
최원정: 대일청구권자금은 일제 강점기에 수탈당한 한국인의 재산권 및 기타 징병, 징용 등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띠는 자금, 그게 어떻게 연관이 된 거죠?
박태균: 그때는 청구권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받았죠. 배상금이란 이름으로 받은 건 아니고요. 그래서 그 당시 한 3억 달러(1080억 엔)를 받게 되었었구요.
최태성: 무상이죠?
박태균: 네, 이 3억 달러를 일본의 생산물과 용역으로 10년 동안 나눠서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허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 40년 동안 그렇게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국민을 억압하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켰는데 이거를 돈으로 환산을 해서 끝을 낼 수 있다 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저는 이해가 안 가요.
최태성: 금액을 가지고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은 아니죠. 이 문제 뿐만 아니라 과거사 문제 해결 못했죠 독도문제 아무 것도 해결 못한 상태에서 고작 3억불을 받았다는 비판의 소리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 거죠.
최원정: 요 때 일로 최근에 강제징용피해배상을 포스코가 혜택을 봤으니 너희도 참여해야 한다 라는 논리로 작용한 거네요.
최태성: 그 역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서 나온 거죠!
최원정: 한일협정 관련 자세한 이야기는 그날 273회를 참고해 주세요. 다시 포항제철로 돌아오면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소 건설에 쓰겠다.
박태균: 차관을 주거나 돈을 줄 때는 용처가 다 있어요. (청구권협정 3억 달러에 대한 사용처 명기) 용도를 돌려야 되는 문제가 남아 있어요.
최태성: 그리고 그걸 돌리려면 일본 한테도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허준: 내가 받아서 어디다 쓰던 이걸 왜 거기에 허락을 받아요?
최태성: 일본이 주니까!
허준: 내 차를 누가 들이 받아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저 업체에 가서 수리를 해야 돼요 라고 하면 내가 어디에 가서 수리를 하든 뭔 상관이야?
박태균: 줬는데 만약 한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무기개발을 한다면 이건 일본 입장에서 보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때 남아 있던 청구권 자금 1억 달러가 이미 농림수산 부분에 사용하기로 묶여 있었던 거예요. 이걸 돌려야 되잖아요. 박태준씨가 일본말을 잘 했잖아요. 그래 일본으로 날아가서 설득을 하는 거죠. 우리가 제철소 만든다고 일본에 위협이 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금 이걸 해놔야 일본의 안보에도 좋지 않습니까. 북한도 있고 한데 그 당시 시점에서는 북한의 1인당 GDP가 우리 보다 높았어요. 우리도 그걸 높여서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게 궁극적으로 일본한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최원정: 정말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돈으로 손대기 싫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가야 되는데 그런데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는 관계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당시 박태준 회장의 심정 인터뷰한 게 있거든요.
-------------(동영상), 故박태준 회장/2008년: 그 책임감이란 게 어마어마한 거요. 대일청구권 자금 대부분을 내가 쓰면서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만드는 제철소가 쇳물도 안 나온다 이렇게 됐을 경우 어떻게 되겠어? 나는 밤에 자면서 생각하다가도 끔찍해~
최원정: 어찌보면 바로 선조들의 목숨 값을 가지고 도박을 해야 되는 상황인데 아마 이것 결정하기 너무 어려웠을 것 같애요.
이시원: 인생의 배수진을 친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애요. 이게 안 되면 나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 선조들까지도 그냥 피해만 입고 끝나 버리는 거잖아요.
최태성: 포항제철 창립이념이 製鐵報國이에요. 철을 만들어서 나라에 보답한다는 얘기인데 내가 이걸 다 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여기서 국가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라고 한다면 선조들한테 무릎 꿇고 사죄할 수 밖에 없는 걸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철보국이란 말이 나온 거죠. 야~ 포항제철이 선조들의 피와 땀을 갈아 넣어서 만든 공간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네요.
이시원: 저는 이게 뭐가 옳은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은 우리가 받았던 수탈과 피해에 대한 보상액인데 이걸 어떻게 보면 국민의 것이잖아요. 국민을 위해서 여러가지 기반사업을 만드는데 쓰였잖아요. 이걸 어떤 식으로 분배를 해야지 옳은 건지~
박태균: 사실은 판단의 문제인데 그 당시 저희의 기간산업이 고속도로 댐 발전소 등 당시 너무나 부족했던 부분이었거든요. 어떤 부분이 우선이냐는 속에서 정권의 판단이 기간산업에 투자한 것이 거든요. 지금도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어째든 이걸 정치자금으로 그냥 날리기 보다는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구요.
최원정: 처음에 내세웠던 경제개발 약속은 어느 정도 지키긴 했지 않았나 싶은데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장면들이 많찮아요.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만 하면 과정도 돌아봐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땅도 해결됐고 돈도 마련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건설을 시작하면 되겠네요.
-------------(동영상) 1970년 4월 1일, 10년 세월에 걸친 끈질긴 시도와 좌절 끝에 일관제철소 종합 착공식을 알리는 팡파레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내레이션: 마침내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됐다. (롬멜 하우스/현장 사무소) 허름한 현장 사무소에서 밤을 잊은 고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건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회사건설) 누구도 해보지 못한 종합제철소 건설, 모두들 배워가며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황량한 모래 벌판 위에 제철소를 세우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 그것은 모험이었다.
최원정: 저희가 녹화한 것의 절반 정도를 한 것 같애요. 이제 첫 삽을 떴어요!.
최태성: 제철소가 지어지기는 하는 겁니까?
최원정: 2부작인가요?
이시원: 보니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회사건설! 한다.
김동환: 저게 군인정신이죠.
이시원: 정말 이게 얼마나 한푼 한푼 소중해요.
최태성: 요즘 저런 표어 걸면 악덕회사예요!
허준: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사인 거잖아요. 앞에 가건물 하나 지어놓고 롬멜 하우스 페인트로 쓴 거 보고서 여기 진짜 전쟁터였을 것 같다.
김동환: 그렇죠, 박태준 사장이 공사 현장에 있었을 때 모습을 보면 저게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다. 왜냐면 철모는 아니지만 안전모를 쓰고 있는데 보면 항상 지휘관이 갖고 있는 지휘봉을 들고 다녀요. 어쨌든 첫 삽을 떠가지고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총 건설비가 1204억 원의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거예요. 공사기간만 39개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철소 건설역사에 가장 최단기에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태성: 우리의 8282 정신이 나왔다는 얘기~
최원정: 경부고속도로보다 더 큰 건설사업이었던 거죠.
박태균: (허준씨를 향해) 여기서 롬멜 하우스 얘기 좀 해봐요 왜 롬멜 하우스예요?
허준: 롬멜 (Erwin Rommel)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지휘관으로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전격전에 능수능란하였다.
박태균: 모래
허준: 모래 위의 영웅으로서
박태균: 사막의 여우!
허준: 저 지역이 모래사장 지역이죠. 그래서 롬멜 하우스란 포항제철 건설현장이 사막전을 치른 롬멜 장군의 야전지휘소와 비슷하다고 붙인 이름 이군요.
최태성: 작은 초소 같은 곳이잖아요. 여기에 1968년 11월 12일 박장희 대통령이 내려온 거예요. 엄청난 돈이 투입이 됐는데 굉장히 기대를 갖고 올라갔는데 그냥 허허벌판이야,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이렇게 얘기했나 봐요, 제철소가 이래서 지어 지겠어?
이시원: 최고 지도자는 보통은 와서 사기도 북돋아주고 이래야 되는데
최태성: 박태준 사장이 그 말을 듣고 당황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어떻게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보통 두 가지죠. 하나는 침묵을 한다. 혼자 소주를 마신다. 두번째는 부하직원들을 달달 볶는다.
최태성: 몇 번째 하실 거예요?
최원정: 저는 첫번째죠. 멋지지 않나요?
최태성: 박태준 사장이 참 대단한 거 같애요. 박태준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화를 냈대요. 각하는 어쩌다가 한 번 오시지만 우리는 24시간 여기서 묵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버럭 화를 냈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했네 라는 일화가 있어요.
박태균: 아까 목소리도 비슷했는데~
이시원: 직원들은 좋았겠어요 대통령이 와도 우리를 보호해주는 거잖아요.
최원정: 나는 혼자서 소주를 마신다고 했는데 역시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때려 치우겠습니다.
최태성: 그리고 다음에 보직 해임~
허준: (최원정을 향해) 임자, 포항에 너무 오래 있었네, 남산(?) 좀 다녀오게.
박태균: 또 하나 유명한 얘기가 같이 건설현장에 있는 사람들한테 항상 얘기했다는 거예요. 이게 어떤 돈인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부모님들이 일제 강점기에 그 피해를 입어 가지고 받은 돈인데 이걸 허투루 쓰면 안 된다. 그래 가지고 그 당시에 이게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안짓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한다. 실패하면 너희 다 우향우 해가지고 영일만 바다에 들어가라.
최태성: 영혼 없이 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역사적 소명을 갖고 국가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김동환: 박태준 회장 세대는 식민지배가 바로 몇 년 전에 있었던 것이기에 실감이 나기 때문에 이 자금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굉장히 달랐겠지요. 그리고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을 자기가 건설비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박태준 회장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런 마음을 느꼈을 텐데 이 자금을 빨리 써야 되지만 아껴 써야 돼, 그러니까 공기단축을 하는 게 아껴 쓰는 거거든요. 그래서 박태준 회장이 쓴 방법은 突貫工事法이라는 걸 써요. 突자가 돌파할 때 돌자인데 자원이나 사람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기를 단축시키면서 효율을 높이는 공사법을 돌관공사법이라고 하거든요. 늘 우리는 돌파해야 한다. 우리는 돌관공사해야 한다. 그렇게 현장을 누볐다는 얘기입니다.
최태성: 그 시대를 대표하는 K-공사 스타일입니다.
허준: 지금 얘기하는 갈아먹는다는 표현이 예전부터 있었군요.
최원정: 오늘 특별한 분을 모시고 현장의 생생함을 전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주세요. 자기 소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엄하용/1971년 입사/포스코중우회 사무총장: 저는 1971년에 포항제철에 입사를 해서 지금은 퇴직 임원들의 모임인 포스코 중우회에서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엄하용이라고 합니다.
이시원: 71년도 입사시면 거의 50년 전이네요.
최태성: 71년도면 제가 태어난 해입니다.
허준: 그럼 공사를 하고 있을 때 입사를 하신 거예요?
엄하용: 입사를 해서 포항에 갔는데 지상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모래 벌판인 거예요.
허준: 빨리 하고 돈 덜 들일려고 이렇게 까지 했다 라는 것이 있어요?
엄하용: 시멘트를 타설해서 기초를 완성해야 되는데 그게 3개월 정도 공기가 늘어지니까 그럼 이것이 설비를 일본에서 제작해서 가지고 들어오는데 이게 연기가 되면은 가지고 와서 갔다 놓을데도 없어요. 그래서 24시간 突貫作業을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직원도 다 내려오고 저 같은 경우는 레미콘 차량에 선임탑승을 하는 겁니다. 운전기사 옆에 앉아서 운전수 졸지 못하게 감독하는 거죠. 2개월간 그야말로 전쟁상황이었죠.
최태성: 몇 달만에 콘크리트를 전부 타설한 거예요?
엄하용: 두 달만에 5개월 분의 레미콘 시멘트를 타설을 해서 공기를 만회했습니다.
최태성: 대단하다, 대단해.
엄하용: 마지막 다 채울 때 마지막 한 삽은 박태준 사장님이 직접 넣으셨어요.
이시원: 마지막에 숟가락만 얹으시고
최원정: CEO 나 회장님은 원래 그러는 거예요.
엄하영: 직원들 다 모아놓고 다 함께 밤에 만세를 부르고 청주를 갖다 놓고 돌려 마시면서 즐긴 적이 있습니다.
최태성: 노동만 했잖아요. 불만은 없으셨어요?
최원정: 거의 열정 페이잖아요.
엄하용: 사람 마다 다 차이가 있겠죠. 저도 내가 왜 여기 계속 근무해야 되나 하는 생각을 몇 번 했었어요.
최태성: 그 정도로 노동력이 쎄긴 쎘군요.
엄하용: 제가 건설반에서 처음 근무를 했는데 걸어서 다녔어요. 현장까지 도보로 30~40분 정도 걸립니다. (동영상), 근데 바람이 불면 정말 모래 바람에 1미터 앞이 안 보였어요. 입 코 눈 귀에 온통 모래 투성이 였어요. 모래 바람이 워낙 심하니까 직원들이 시멘트 포대를 눈만 뚫어 가지고 그걸 뒤집어 쓰고 일을 했어요. (모래 벌판에서의 특수복장), 당시 포항에 많이 떠돌았던 소문은 포스코 덕분에 포항 시내 안과병원이 번창한다. 안과 이비인후과에 질환자가 많았습니다.
허준: 박태준 회장님 하면 정강이에 멍이 들어 있어야 박태준과 친한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들은 다 한번씩 조인트를 맞는다?
엄하용: 다행히 저는 조인트를 맞아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박태준 회장님이 조인트를 갈긴게 전혀 없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소문이 쫙 납니다.
최태성: 아까 우향우 정신을 했는데 실제로 그런 말이 체감이 되셨어요?
엄하용: 늘 말씀하셨고 아까 보신 롬멜 하우스 그 앞에서 조회를 하고 우향우 하면 바로 포항 영일만이죠. 여기서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가서 빠져 죽어야 된다 그렇게 늘 강조하셨어요.
허준: 강하게 하셨을 때는 그렇게 하셨는데 칭찬 하셨을 때 최고의 표현은 뭐 였어요?
엄하용: 최고의 표현은 들어보지 못해 가지고~ 잘 모르겠는데 최고의 칭찬은 그만하면 잘 했어! 이러면 상당한 칭찬이죠.
최원정: 포항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신 분이세요. 오늘 귀한 얘기를 들려주신 엄하용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시원: 들어보니까 감동 안 해야 안 할 수 없는 것 같애요. 근데 경부고속도로 지을 때도
김동환: 많이 죽었죠.
이시원: 위령비도 저희가 보고 그랬잖아요.
박태균: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만약에 실수가 나오면 이미 공정이 70~80%가 진행이 되도 다 부시고 다시 해라.
허준: 강직한 분이라서 그런데 우리 상사가 아니고 너네 상사였으면 좋겠어요.
이시원: 아랫 사람에게 그러면 힘들어요.
김동환: 어쨌든 어느 이름 뒤에 앞에 신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대단한 경우가 아니면 잘 안 쓰잖아요. 박태준 신화 통상 그렇게 쓰니까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왜 없겠어요. 그러나 신화적인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는 다 인정을 해야 될 것 같은데 그 중에 한 분이 이 분에 대한 평가가 있어요. 처음에 차관을 받아야 되는 데 차관이 불가하다는 보고서를 쓴 분이 있어요. 이 분이 그 다음에 나는 보고서를 제대로 썼고 지금 다시 보고서를 쓰라고 해도 이건 안 된다고 보고서를 썼을텐데 내가 당신을 만났으면 나의 보고서는 달라졌을텐데 내가 못 만났기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됐다.
최태성: 멋 있다!
이시원: 핑계가 좀 구차하네요.
김동환: 출세할려면 그렇게 해야 돼요.
최태성: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등소평이 78년에 일본에 가서 부탁을 했대요. 우리 중국에도 포항 제철소 같은 제철소 하나 지어 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공장이야 지을 수 있는데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지 않나요?
박태균: 박태균이 가면 되는데
최원정: 이름이 비슷하다고, 건설현장에서 아까도 선생님 만나 뵈었지만 정말 열심히 모든 걸 다 바치고 열심히 일랬던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공사입니다. 철이라는 게 집에 있는 고철을 녹이면 철이 되는 거 아녜요? 철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요?
최태성: 저도 몰라요. 녹이면 나오는 거 아닌가요?
최원정: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 데요. 철을 만드는 기술이 어마 어마 하다면서요. 직접 저희가 배워 볼까요?
------------곽재식/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 안녕하십니까? 곽재식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철소 간단하게 말해서 철을 만드는 철공장이죠. 그럼 종합 제철소 라는 건 뭘까요?
이시원: 종합적으로 철을 여러가지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
곽재식: 센스가 있으시네, 철강을 만드는 데 모두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데요. 세 가지 과정을 다 갖추고 있는 제철소를 종합제철소 또는 일관제철소 라고도 부릅니다. 철을 만드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땅-불-바람 세 가지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공중에는 산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공기 중에 산소가 피부 세포로 들어와 가지고 산화작용을 일으키면 그것 때문에 노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항산화 물질을 녹여 가지고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Fe O C), 철이라는 건 그 자리에 40년, 50년만 있었겠어요. 수천 만년 수십억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 거란 말예요. 그래서 철이 훨씬 산화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철광석을 캐면 녹슨 철과 비슷한 상태로 대부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다시피 적철석의 경우는 철 2개+산소 3개 꼴로 붙어 있는 산소로 인해 녹슨 것과 같은 형태로 들어 있어요.
이시원: 그렇다면 산소와 철을 분리시키는 게 핵심 기술이겠네요.
곽재식: 대단 하시네요, 그걸 어떻게 할까요. 철광석을 캐가지고 피부과에 보낼 수도 없고 항산화물 화장품을 발라서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태성: 어떻게 해요?
곽재식: 철보다 산소를 더 잘 붙는 탄소(C) 같은 물질을 넣어 가지고 산소를 철에서 떼어내서 녹슨 철 같은 철이 순수한 철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로에 탄소를 석탄과 철광석을 같이 넣고 온도를 1200도 정도 되는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면 산소가 떨어져 나오면서 순수한 철이 쇳물로 녹아서 저절로 흘어나오게 된다는 거죠. 여기까지를 쇳물을 뽑아내는 것을 제선공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갓 나온 쇳물에는 이것 저것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고 탄소도 지나치게 많고 부러지기 쉽고 질이 좋지 못합니다. 이걸 다 걷어내고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을 해줘야지 쓰기 좋은 튼튼한 강철이 됩니다. 요 강철 만드는 작업을 제강공정이라고 하죠. 강철을 만들어 내면 그 강철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야 되겠죠? 펴 가지고 철판으로 만드는 겁니다. 얇게 펴 가지고 종이조각 처럼 얇게 펴 가지고 한다든가 그런 작업을 마지막으로 하는데 그걸 압연공정이라고 합니다. 제선-제강-압연 세 개를 다 할 수 있는 제철소를 종합제철소 라고 하는 거죠.
이시원: 귀에 쏙~쏙~들어와요.
곽재식: 그리고 또 한 가지 高爐 자체가 어마어마합니다. (용광로 사진), 이를 흔히 용광로 라고 부르는 고로라고 하는 건데요. 높을 高 자를 써서 고로입니다. 고로=높은 화로, 보통 우리나라에 있는 대형 제철소의 고로하면 고로 밑바닥에서 맨 위에 까지 고로의 높이는 얼마일까요? 아파트 40층 높이 그리고 이 안에 철광석 석탄~ 철광석 석탄~ 철광석 석탄~을 차례로 쌓아서 하부에서 열 공기를 불어 넣어서 전체에 불을 부치면 산더미만한 철광석과 석탄의 덩어리가 전체적으로 살짝 뜨는 느낌이 난다고 합니다. 너무나 반응이 강력해 가지고 바람을 어떻게 불어 넣는지 어떻게 철광석과 석탄들을 잘 조합하여 쌓는지에 따라서 쇳물의 품질과 생산량이 달라진다 라는 거죠. 좋은 쇳물이 나올 때 어떤 소리가 날까요?
일동: 철~철~철~철~
이시원: 그렇다면 우리나라 철강기술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곽재식: 포스코가 출원한 고로 및 제선 관련 기술 특허만 2천 건이 넘는다 라고 하거든요. 저는 정말 고생 고생 하시면서 이 기술개발에 노력하신 과학기술인들 제철기술 노동자들이 일등 공신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원정: 일본은 우리가 이렇게 까지 발전할 줄 몰랐겠죠. 얼마나 약 오를까요.
허준: 고로가 한 번 불 꺼지면 손해액이 어마 어마 하다던데?
곽재식: 이상이 생겨서 고로 안에서 쇳물이 굳어버리면 골치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고로 같은 경우에는 불을 안 꺼뜨리고 수십 년 동안 유지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허준: 수십 년이요?
곽재식: 우리나라 포스코 고로 같은 경우는 처음 쇳물 뽑아 내면서 불을 붙이고 작년에 (2022년) 태풍으로 불 꺼지기 전까지 불이 꺼진 일이 없습니다. 계속 유지했어요.
최원정: 지금은 복구가 된 거죠?
곽재식: 지금은 복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허준: 시간제 같은 느낌이네요.
곽재식: 우리나라 제철소가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게 무엇이냐? 출선비가 높다는 것입니다. 출선비, 제선공정에서 쇳물이 철철 잘 나오느냐 말하는 것으로 고로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수치죠. 출선비가 높다 라는 말은 같은 용량의 고로를 가지고 운영을 하는데 다른 제철소보다 더 많은 철을 뽑아낸다. (포항 종합제철소 전경사진), 한국 사람들이 잘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계속 철광석을 짜내는 거예요. 계속 끊임없이 나오게
이시원: 뽑아내고
곽재식: 그 핵심적인 노하우가 뭘 것 같으세요?
허준: 계속 여러가지 시도를 해 봐야죠!
곽재식: 이 방송 일본 기술자들이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비밀입니다.
허준: 아니 일본 기술자도 모르는 걸 곽 교수님이 아신 다고요?
곽재식: 어쨌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삼한에서 철을 만드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가지고 삼한 사람들은 철을 마치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외국에 철을 수출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생각해 보면 한반도의 남부지역, 지금 우리나라에 제철소들이 있는 지역, 삼한 지역에서 마침 철을 만들어서 해외에 수출도 많이 하고 철강주 쪽에 투자하신 분들은 고철이 돈처럼 느껴지실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과학 기술이 현대산업에 동 떨어져 있는 민족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의 민족으로서 전통을 다시 활용해 가지고 이만큼 산업에 앞서 나갈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곽재식이었습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73년 6월 8일, 7명의 직원들이 태양열로 붙인 불꽃을 들고 달렸다. 완성된 용광로에서 드디어 불을 지핀다. (화입식), 3년 넘게 흘린 땀과 눈물, 그 성패가 좌우되는 날이기도 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를 지켜보며 그렇게 하룻 밤이 지나갔다. 하지만 불을 지핀지 스무시간 쇳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고로에 구멍을 뚫는 비상작업이 시작됐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쇳물이 고로에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모여 섰던 사람들은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소리 높이 만세를 외쳤다. 애타게 기다려왔던 제철보국의 꿈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패널 일동: (감동 눈물) 박수! 만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시원: 안 나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랬던지
허준: 쇳물이 안 나와서 고로에 구멍을 뚫는 비상작업까지 했다 라고
최원정: 시뻘건 쇳물이 진짜 선조들의 피다 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찡해요.
이시원: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요. 이해가 가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와 빨리 좀 나와 주지~ 이렇게 기다렸는데
최태성: 아이 낳는 심정이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진통을 21시간 가까이 했으니
이시원: 왜 우리 애만 이렇게 안 나와~
최원정: 애 낳아 본 사람처럼 왜 얘기 해, 귀한 아이를 받은 느낌이에요.
박태균: 현장에 계셨던 분들이 사표를 들고 갔다는 것 아녜요. 쇳물이 안 나오면 나는 이제 사표 제출하겠다.
허준: 다들 많이 지쳐 보여요
김동환: 근데 환호성 터뜨리고 쇳물이 나오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잖아요. 나 또 돈 얘기 안 해. 어마 어마한 청구권 자금을 넣어가지고 여기가 경제성이 있어야 흑자가 나고 흑자가 나야 재투자를 해서 세계적인 제철소가 되는데~ 조업 첫 해에 무려 242억원의 흑자를 냈습니다.
이시원: 이게 가능해요?
김동환: 이렇게 조업 첫해에 흑자를 달성한 세계 최초의 제철소가 되는 신기록을 냈구요. 이게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30만 톤인 최초 규모로는 적자였을 거예요.
이시원: 포항제철의 성공 덕분에 우리나라의 중공업과 여러 산업이 같이 일어날 수 있었잖아요.
김동환: 그렇죠,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와서 포항제철이 완전 민영화가 되거든요. 근데 사실 민영화가 된 이후에도 경영을 보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CEO가 바뀝니다.
티브이 뉴스: (동영상), 포스코 회장이 전격 사퇴를 표명했습니다. 정치권의 외압이 있었던 게 아니냐 라는 의혹이 나오고 있는데 포스코 임원 인사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박태균: 이제 크게 시작하니까 거기에 정치적 입김들이 다시 들어가기 시작하는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민영화된 은행이나 포항제철을 볼 때 거기에 새로운 회장이 가거나 CEO가 갈 때 정치권의 입김을 가지고 이미 보도가 나오는 거예요. 특히 포항 제철은 선조의 피와 눈물이 녹아 있는 돈이 들어간 거 아녜요. 저는 정신 좀 바짝 차리고 지금까지도 너무 중요했지만 앞으로도 중요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최태성: 지금 보면은 참 어이 없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 되는 우향우 정신, 우향우 정신으로 기어코 쇳물을 뽑아낸 많은 노동자들 그분들이 이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김동환: 18세기부터 산업의 주도권은 제철산업의 주도권과 같이 움직였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터넷 시대고 플랫폼 시대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제철산업의 비중이 전만은 못 합니다. 그런데 모든 제조업에 제철산업은 필수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잖아요. 영국에서 미국. 독일을 거쳐 일본, 한국 이제 중국까지 가고 있는데 적어도 제철산업의 기술력과 주도권의 측면에서 일단 스톱 시켜야 되겠다.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산업국가로서 계속 있어야만 산업국가로서의 지위를 앞으로 더 확보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최원정: 잘 살아보세 시리즈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의 뭉쿨한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제철의 역사는 사람이 일궈낸 역사임을 실감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공영방송 50주년기획-잘 살아보세 402회 ③ 특명! 포항제철을 건설하라 에서 정리).
요약
①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민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1962년 경제자립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들을 굶기지 않도록 정부의 책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종합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역사,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포항에 신화가 시작되었다. 포항제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포스코(POSCO)란 회사가 법인명이고 제철회사가 두 군데 경북 포항과 전남 광양에 있다, 모든 분야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산업의 쌀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사실 산업의 쌀 하면 반도체가 떠오르는데 이 당시의 산업의 쌀은 철강이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절에 미-중무역갈등 초기에 중국산 철강제품에 대해서 25% 보복관세를 제일 먼저 때려버렸다. 이게 워낙 산업에 기본이 되는 소제이다 보니까 그 정도로 세계경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철강이다. 철이 없으면 여기 TV방송국 스튜디오도 없을 것이다.
② 원래 한국은 철강산업이 거의 없었다. 겨우 대장장이 수준으로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서 북쪽지역에다 제철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38도선 이남에는 인천과 삼척에 소규모의 고철 덩어리를 가지고 제강을 하는 수준이었는데 광복 이후에 거기에 있었던 제철소 기술자들이 철수를 해버려서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1960년도면 전쟁 후다. 복구작업을 해야 되는데 끊어진 다리와 무너진 건물을 다시 해야 되는데 철이 안 쓰이는 데가 없다. 철도에 건물에 국가 안보에 중요한 무기도 다 철이다. 철강 산업은 잘 살기 위해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였다. 돈과 기술이 필요했다. 그 당시 1950년 미국의 원조는 그랜트(grant) 라고 물품을 주는 무상원조가 1959년 이후에 차관(loan)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차관의 특징이 계획을 보고 계획이 실효성이 있으면 차관을 주는 거다. 기회가 한 번 왔다. 베트남 파병 때 64년에 미국에서 박정희 정부에 베트남에 파병을 해달라고 하니까 오케이 했다. 1965년 5월에 미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 박정희 대통령이 철강도시 피츠버그를 들렸다.
③ 지금은 미국의 철강이 안 좋아져서 회색도시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당시 피츠버그는 미국의 철강을 대표하였고 미식축구팀 이름도 스틸러스였다. 거기에 가서 철강회사 사장을 만나 우리가 철강회사가 필요한데 어떻게 안 되겠냐 그랬더니 포이 회장이 너네 기술가지고는 되겠냐 근데 혹시 국제차관단을 한번 만들어 보라. 경부고속도로는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를 하였는데 근데 포항제철 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인물이 등장을 한다. 故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에 박태준씨를 포항제철소 건설책임자로 임명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인자를 잘 알아! 아무 소리 말고 맡아” 박정희 대통령이 임자라고 얘기한 사람이 몇 사람 없다. 보통 임자는 부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④ 1948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난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선생님과 제자로, 당시 교관이던 박정희가 문제를 냈다. “대포의 탄착지점을 계산 하시오” 문제가 어려워서 다들 못 풀었는데 한 사람만 맞춘다. 그 사람이 바로 박태준 생도였다. 아마 박정희와 박태준의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박태준씨는 광복 직전 일본 와세다 대학엘 1년 반 정도 다녔다. 이 정도면 최고 엘리트였다. 그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군에 들어간 거다. 군사정변을 일으킬 때 실패하면 최소한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다. 혹시 내가 잘못되면 임자가 우리 가족 돌봐줘 이렇게 얘기하고 작전에서 박태준을 빼버렸다.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의장 가족을 돌보는 이유다. 5.16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서실장에 임명되고 그 이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회 위원이 되고 이후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자제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봐준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을 경영 쪽으로 일을 맡겼다. 대한중석광업 이라는 회사가 있다. 1964년 여기 사장을 시킨다. 맡을 때는 적자였다. 근데 박태준 사장이 취임 1년 만에 흑자전환을 시켰다.
⑤ 이때 박태준 회장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다. 박태준씨한테 제철소 만들라고 해놨는데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갔다. 제철소 만든다니까 돈이 보였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거기에 블랙 머니가 생기고 그러면 그게 정치권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이렇게 되니까 박태준씨가 나 이래 가지고 못한다. 해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만나서 하루 바삐 급하고 효율적으로 끝내야 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임자 필요한 게 뭔가? 한 번 써봐! 박태준이 적은 요구사항 메모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70.2.3일자). 조선시대 종이 마패 같았다. 최고 권위자가 인정도 해주고 막강한 책임까지 주었으니까 건설로 바로 들어가면 되었다. 건설로 바로 들어 갈려면 철광석이 들어올 항구가 있어야 된다. 항구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는 다 후보군으로 올라왔다. 충청도 출신이었던 김종필(충남서천출신)은 충청도 어디에다 하고 싶고 이후락 씨는 고향이 울산출신이니까 울산에 하고 싶고 가장 유력후보지는 삼천포(현 사천시)였다. 갑자기 포항으로 결정하게 된 거는 처음 조강생산능력을 연산 50만~100만톤으로 생각했다가 이걸 300만톤 정도로 늘렸기 때문이다.
⑥ 시작도 하기 전에 무리하게 생산량을 늘렸다. 지금으로 치면 400만 톤도 큰 건 아니지만 그 시기에 우리는 산업화 초기이고 수출전망도 없던 시대였다. 근데 300만 톤의 제철소를 계획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규모가 커야 채산성이 높아진다, 단위 생산량이 증대하면서 비즈니스가 된다는 얘기다. 300만 톤이면 1967년 이때 포항 인구 5만 명의 한적한 어촌이었다. 바다는 접해 있어 좋은 입지 조건이다. 의욕적인 추진과는 반대로 건설계획은 꼬여만 간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금, 특히 국제부흥개발은행 (IRBD)이 내놓은 보고서는 상황을 더욱 악화 시켰다.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노동 및 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개발을 우선해야 한다. 부정적인 시선은 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 박태준,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 박태준은 귀국길에 잠시 하와이에 머물게 된다.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불현듯 아이디어 하나가 떠 오른다.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⑦ 근데 이게 그랜트가 아니고 차관이다. 그랜트는 그냥 쓰는데 론은 이자가 싸더라도 돌려받아야 되는 돈이다.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될만한 계획서를 가지고 와야 돈을 빌려준다. 지금으로 치면 세계 최빈국에서 나 반도체 사업할 거야와 같다. 충격적인 숫자는 1965년에 대한민국 1인당 GDP가 108달러, 2022년 지금 3만 3591달러, 그런 나라가 제철공장을 짓겠다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거다. 그 무렵 미국은 터키와 브라질에 돈 빌려 줬다가 떼였다. 미국 입장에서도 108달러 국가에다가 차관 주면 못 받는다는 확률이 높았다. 바다 건너 일본에 제철소가 있는데 사서 써 이렇게 됐다. 일제 강점기 내내 수탈당했고 6.25전쟁 끝나고 엄청난 포탄 속에서 그냥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있는 건 사람과 돌맹이 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옷 좀 만들고 가발 만들고 조금 나아지는 상황인데 300만 톤 철을 만들겠다고, 그 당시에 비행기는 미국-한국 직항이 없었다. 코퍼스社 회장이 박태준에게 “하와이 내 별장에서 잠시 쉬어 가세요” 그래서 들렀는데 하와이에서 석양을 바라보는데 뭐가 들어왔다. 일본 사람하고 일본 식당이 보였다.
⑧ 1965년에 한일협정을 맺는다. 대일청구권자금은 일제 강점기에 수탈당한 한국인의 재산권 및 기타 징병, 징용 등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띠는 자금, 그때는 청구권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받았다. 배상금이란 이름으로 받은 건 아니다. 한 3억 달러(1080억 엔)를 일본의 생산물과 용역으로 10년 동안 나눠서 받기로 되어 있었다. 40년 동안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국민을 억압하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켰는데 이걸 돈으로 환산해서 끝 낼 수는 없다. 금액을 가지고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문제뿐만 아니라 과거사 문제, 독도문제도 해결 못한 상태에서 비판의 소리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요 때 일로 최근에 강제징용피해배상을 포스코가 혜택을 봤으니 너희도 참여해야 한다 라는 논리로 작용한다. 그 역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서 나온 거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소 건설에 쓰겠다. 차관을 주거나 돈을 줄 때는 용처가 다 있다. 청구권협정 3억 달러에 대한 사용처 명기, 용도를 돌려야 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걸 돌리려면 일본한테도 허락을 받아야 되었다. 일본이 줬는데 만약 한국이 무기개발을 한다면 이건 일본 입장에서 보면 안 되는 거다. 이때 남아 있던 청구권 자금 1억 달러가 이미 농림수산 부분에 사용하기로 묶여 있었다. 이걸 돌려야 된다. 박태준씨가 일본말을 잘 했다. 일본으로 날아가서 설득을 하였다. 우리가 제철소 만든다고 일본에 위협이 되겠나.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금 이걸 해놔야 일본의 안보에도 좋다. 그 당시 북한의 1인당 GDP가 우리 보다 높았다. 우리도 그걸 높여서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게 궁극적으로 일본한테 도움이 된다.
⑨ 정말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돈은 손대기 싫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가야 되는데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는 관계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시 박태준 회장의 심정 인터뷰가 있다. 故박태준 회장(2008년)-그 책임감이란 게 어마어마하다. 대일청구권 자금 대부분을 내가 쓰면서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만드는 제철소가 쇳물도 안 나온다 이렇게 됐을 경우 어떻게 되겠어. 나는 밤에 자면서 생각하다가도 끔찍했다. 어찌보면 바로 선조들의 목숨 값을 가지고 도박을 해야 되는 상황인데 아마 이것 결정하기 너무 어려웠다. 인생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이게 안 되면 나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 선조들까지도 그냥 피해만 입고 끝나 버리는 거다. 포항제철 창립이념이 製鐵報國이다. 철을 만들어서 나라에 보답한다는 얘기인데 내가 이걸 다 쓰는 데 여기서 국가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라고 한다면 선조들한테 무릎 꿇고 사죄할 수 밖에 없는 걸 알고 있다. 야~ 포항제철은 선조들의 피와 땀을 갈아 넣어서 만든 공간이다. 이건 판단의 문제인데 그 당시 우리의 기간산업이 고속도로 댐 발전소 등 너무나 부족했던 부분이었다. 어떤 부분이 우선이냐는 속에서 정권의 판단은 기간산업에 투자였다. 지금도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어째든 이걸 정치자금으로 그냥 날리기 보다는 훨씬 나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⑩ 처음에 내세웠던 경제개발 약속은 어느 정도 지키긴 지켰다. 땅도 해결됐고 돈도 마련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건설을 시작하면 된다. 1970년 4월 1일, 10년 세월에 걸친 끈질긴 시도와 좌절 끝에 일관제철소 종합 착공식을 알리는 팡파레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마침내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됐다. 롬멜 하우스/현장 사무소, 허름한 현장 사무소에서 밤을 잊은 고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건설=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회사건설, 누구도 해보지 못한 종합제철소 건설, 모두들 배워가며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황량한 모래 벌판 위에 제철소를 세우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 그것은 모험이었다. 이제 첫 삽을 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회사건설! 이건 군인정신이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사다. 앞에 가건물 롬멜 하우스 하나 지어놓고 진짜 전쟁터였다. 박태준 사장이 공사 현장에 있었을 때 모습은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었다. 안전모를 쓰고 있는데 항상 지휘관이 갖고 있는 지휘봉을 들고 다녔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총 건설비가 1204억 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거다. 공사기간만 39개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철소 건설역사에 가장 최단기에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보다 더 큰 건설사업이었다.
⑪ 롬멜 (Erwin Rommel)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지휘관으로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전격전에 능수능란하였다. 롬멜 하우스란 포항제철 건설현장이 사막전을 치른 롬멜 장군의 야전지휘소와 비슷하다고 붙인 이름이다. 작은 초소 같은 곳이다. 여기에 1968년 11월 12일 박장희 대통령이 내려왔다. 엄청난 돈이 투입 됐는데 굉장한 기대를 갖고 올라갔는데 그냥 허허벌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얘기했다, 제철소가 이래서 지어 지겠어? 박태준 사장이 그 말을 듣고 당황하였다. 박태준 사장이 참 대단하다. 박태준 사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화를 냈다. 각하는 어쩌다가 한 번 오시지만 우리는 24시간 여기서 묵고 있다. 그런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했네 라는 일화가 있다. 또 하나 유명한 얘기가 있다. 이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부모님들이 일제 강점기에 그 피해를 입어 가지고 받은 돈인데 이걸 허투루 쓰면 안 된다.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안짓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실패하면 나와 너희 다 우향우 해가지고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는다.
⑫ 박태준 회장 세대는 식민지배가 바로 몇 년 전에 있었던 것이기에 이 자금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굉장히 달랐겠다.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을 자기가 건설비용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박태준 회장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런 마음을 느꼈을 텐데 이 자금을 빨리 써야 되지만 아껴 써야 돼, 그러니까 공기단축을 하는 게 아껴 쓰는 거다. 그래서 박태준 회장이 쓴 방법은 突貫工事法이다. 자원이나 사람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기를 단축시키면서 효율을 높이는 공사법이다. 늘 우리는 돌파해야 한다. 우리는 돌관공사해야 한다. 그렇게 현장을 누볐다. 1971년 포항제철은 포항에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모래 벌판이었다. 돈을 덜 들이고 시멘트를 타설해 기초를 완성해야 되는데 그게 3개월 정도 공기가 늘어지니까 설비를 일본에서 제작해서 가지고 들어오는데 연기가 되면은 가지고 와서 갔다 놓을 데가 없다. 24시간 突貫作業을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직원도 다 내려와서 레미콘 차량에 선임탑승을 하여 운전수 졸지 못하게 감독하는 데 2개월간 그야말로 전쟁상황이었다. 두 달만에 5개월 분의 레미콘 시멘트를 타설을 해서 공기를 만회했다. 마지막 다 채울 때 마지막 한 삽은 박태준 사장님이 직접 넣었다. 직원들 다 모아놓고 함께 밤에 만세를 불렀다. 노동력이 쎄긴 쎘다. 건설반 직원들 걸어서 현장까지 30~40분 정도 걸린다. 근데 바람이 불면 모래 바람에 1미터 앞이 안 보였다. 입 코 눈 귀에 온통 모래 투성이었다. 모래 바람이 워낙 심하니까 직원들이 시멘트 포대를 눈만 뚫어 가지고 그걸 뒤집어 쓰고 일을 했다.
⑬ 직원들은 롬멜 하우스 앞에서 조회를 하고 우향우 하면 바로 포항 영일만이다. 공사를 잘 못해 쇳물이 안 나올 경우 여기서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가서 빠져 죽어야 된다 그렇게 늘 강조하였다. 그렇게 포항에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쓰여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만약에 실수가 나오면 이미 공정이 70~80%가 진행이 되도 다 부시고 다시 하였다. 어쨌든 어느 이름 뒤에, 앞에 신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대단한 경우가 아니면 안 쓴다. 박태준 신화 통상 그렇게 쓴다. 신화적인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는 다 인정을 한다, 이 분에 대한 평가가 있다. 처음에 차관을 받아야 되는 데 차관이 불가하다는 보고서를 쓴 분이 있다. 이 분이 그 다음에 나는 보고서를 제대로 썼고 지금 다시 보고서를 쓰라고 해도 이건 안 된다고 보고서를 썼을텐데 내가 당신을 만났으면 나의 보고서는 달라졌을텐데 내가 못 만났기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됐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등소평이 78년에 일본에 가서 중국에도 포항 제철소 같은 제철소 하나 지어 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공장이야 지을 수 있는데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지 않나요? 건설현장에서 정말 모든 걸 다 바치고 열심히 일랬던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공사였다.
⑭ 제철소는 간단히 말해서 철을 만드는 철공장이다. 종합 제철소는 여러가지 종합적인 철을 만드는 곳이다. 철강을 만드는 데 모두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세 가지 과정을 다 갖추고 있는 제철소를 종합제철소 또는 일관제철소 라고 부른다. 철을 만드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땅-불-바람 세 가지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공중에는 산소가 많다. 철이라는 건 그 자리에 수천 만년 수십억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철이 훨씬 산화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보통 우리가 철광석을 캐면 녹슨 철과 비슷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적철석의 경우는 철 2개+산소 3개 꼴로 붙어 있는 데 산소로 인해 녹슨 것과 같은 형태로 들어 있다. 그렇다면 제철소는 산소와 철을 분리시키는 핵심 기술이 있어야 된다. 철보다 산소가 더 잘 붙는 탄소(C) 를 넣어 가지고 산소를 철에서 떼어내면 녹슨 철 같은 철이 순수한 철로 되돌아가게 된다. 고로에 탄소를 석탄과 철광석을 같이 넣고 온도 1200도 정도 되는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면 산소가 떨어져 나오면서 순수한 철이 쇳물로 녹아서 저절로 흘어나오게 된다. 여기까지 쇳물을 뽑아내는 것을 제선공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갓 나온 쇳물에는 이것 저것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고 탄소도 지나치게 많고 부러지기 쉽고 질이 좋지 못하다. 이걸 다 걷어내고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을 해줘야지 쓰기 좋은 튼튼한 강철이 된다. 이런 강철을 만드는 작업을 제강공정이라고 한다 강철을 만들어 내면 그 강철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펴 가지고 철판으로 만든다. 얇게 펴 가지고 종이조각 처럼 만드는 그런 작업을 마지막으로 하는데 그걸 압연공정이라고 한다. 제선-제강-압연 세 개를 다 할 수 있는 제철소가 종합제철소다.
⑮ 또 한 가지 어마어마한 高爐 자체가 있다. 흔히 이걸 용광로 또는 고로라고 부른다. 높을 高 자를 써서 고로다. 高爐=높은 화로, 보통 우리나라에 있는 대형 제철소의 고로하면 고로 밑바닥에서 맨 위에 까지 고로의 높이는 아파트 40층 높이고 이 안에 철광석 석탄~ 철광석 석탄~ 철광석 석탄~을 차례로 쌓아서 하부에서 열 공기를 불어 넣어서 전체에 불을 부치면 산더미만한 철광석과 석탄 덩어리가 전체적으로 살짝 뜨는 느낌이 난다고 한다. 너무나 반응이 강력해 가지고 바람을 어떻게 불어 넣는지 어떻게 철광석과 석탄들을 잘 조합하여 쌓는지에 따라서 쇳물의 품질과 생산량이 달라진다. 좋은 쇳물이 나올 때 어떤 소리는 철~철~철~철~ 우리나라 철강기술은 포스코가 출원한 고로 및 제선 관련 기술 특허만 2천 건이 넘는다. 이는 정말 고생 고생 하면서 기술개발에 노력한 과학기술인들과 제철기술 노동자들이 일등 공신이다. 고로가 한 번 불 꺼지면 손해액이 어마 어마 하다. 고로 같은 경우에는 불을 안 꺼뜨리고 수십 년 동안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포스코 고로 같은 경우는 처음 쇳물 뽑아 내면서 불을 붙이고 작년에 (2022년) 태풍으로 불 꺼지기 전까지 불이 꺼진 일이 없었다. 계속 유지했다. 지금은 복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철소가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게 출선비가 높다는 것이다. 출선비는 제선공정에서 쇳물이 철철 잘 나오느냐를 말하는 것으로 고로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수치다. 출선비가 높다 라는 말은 같은 용량의 고로를 가지고 운영을 하는데 다른 제철소보다 더 많은 철을 뽑아낸다.
ⓐ 우리나라는 삼한에서 철을 만드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가지고 삼한 사람들은 철을 마치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외국에 철을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반도의 남부지역, 지금 제철소들이 있는 지역에서 철을 만들어서 해외에 수출도 많이 하였다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과학 기술이 현대산업에 동 떨어져 있는 민족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의 민족으로서 전통을 다시 활용해 이만큼 산업에 앞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1973년 6월 8일, 7명의 직원들이 태양열로 붙인 불꽃을 들고 달렸다. 완성된 용광로에 드디어 불을 지핀다. 3년 넘게 흘린 땀과 눈물, 그 성패가 좌우되는 날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를 지켜보며 그렇게 하룻 밤이 지나갔다. 하지만 불을 지핀지 스무시간 동안 쇳물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고로에 구멍을 뚫는 비상작업이 시작됐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마침내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쇳물이 고로에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모여 섰던 사람들은 모두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소리 높이 만세를 외쳤다. 애타게 기다려왔던 제철보국의 꿈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시뻘건 쇳물이 진짜 선조들의 피다 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찡하다. 어마 어마한 청구권 자금을 투자했는데 이게 경제성이 있어야 흑자가 나고 흑자가 나야 재투자를 해서 세계적인 제철소가 되는데 조업 첫 해에 무려 242억원의 흑자를 냈다고 한다.
ⓒ 포항제철은 이렇게 조업 첫해에 흑자를 달성한 세계 최초의 제철소가 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건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기에 가능했다. 30만 톤 최초 규모로는 적자였을 거다. 포항제철의 성공 덕분에 우리나라의 중공업과 여러 산업이 동반 일어날 수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포항제철이 완전 민영화가 되었다. 민영화가 된 이후 경영을 보면 정권이 바뀔 때 마다 CEO가 바뀐다. 거기에 정치적 입김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민영화된 은행이나 포항제철을 볼 때 새로운 회장이나 CEO가 갈 때 정치권의 입김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다. 특히 포항 제철은 선조의 피와 눈물이 녹아 있는 돈이 들어간 특별한 곳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지금까지도 너무 중요했지만 앞으로가 중요하다. 포스코를 회상해 보면 절체절명의 우향우 정신을 잊지 말고 새로운 사명감으로 연구개발과 품질향상에 매진해야 되겠다.
ⓓ 18세기부터 산업의 주도권은 제철산업이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재는 인터넷과 플랫폼 시대로 제철산업의 비중이 전만은 못 하다. 그런데 철은 모든 제조업에 필수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제철산업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그게 영국에서 미국. 독일을 거쳐 일본, 한국 이제 중국까지 가고 있는데 적어도 한국은 제철산업의 기술력과 주도권의 측면에서 일단 스톱 시켜야 되겠다.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산업국가로서 계속 있어야만 현대 산업국가로서의 지위를 앞으로 더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