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다르게! / 정희연
시험, 연애, 취업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이다. 나도 그랬었다. 공부, 관계, 꿈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할 뿐 시간만 흘러갔다.
뭘 볼까? 리모콘을 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넷플릭스를 접하며 시간이 나면 가끔 영화를 본다.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가 출연하고 2018년 2월 개봉되었다.
「혜원이도 곧 대학생이 되어 이곳을 떠나겠지! 이제 엄마도 이곳을 떠나 아빠와 결혼으로 포기했었던 일들을 시도해 보고 싶어. 실패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엄마도 이제 이 대문을 걸어 나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갈 거야. 모든 것이 타이밍 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 내리게 하고 싶어서 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에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엄마가 딸 혜원이에게 보낸 편지다. 엄마는 4살 때 아빠의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왔다. 병든 아빠의 요양 때문이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엄마는 도시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다. 엄마는 늘 타이밍 이라고 했다.
혜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중 남자친구는 합격했지만 혜원은 고시에 떨어져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비워두어 얼어붙은 집. 난로를 켠다. 배가 고프다. 다행이 한 줌의 쌀이 남아있다. 눈 덮인 밭에서 먹을 만한 배추와 파를 손에 넣는다. 된장국을 끓여 허기를 달랜다. “맛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수능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날, 엄마가 집을 나갔다. 고모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보물찾기하듯 숨겨 놓은 엄마의 편지 속에는 떠날 수밖에 없는 구구절절한 변명이 가득했지만 정작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은 없었다.
남은 것은 밀가루 뿐이다. 날이 추우면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반죽을 만든 후 두 시간 동안 재워 놔야 하기에 눈을 치울 때 딱 알맞다. 어제 남은 재료로 배추전도 같이 부쳤다. 꽁꽁 얼었을 때 수제비를 한 입 먹으면... 음~. 이제 한 줌 남은 쌀도 더 이상의 밀가루도 없다. 읍내를 나갔다 오거나, 큰고모에게 자진 신고 하거나 아니면 쫄쫄 굶거나. 혜원은 잠시 숨을 고르려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숨고 싶은데 시골은 그러기가 어려운 곳이다.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아픈 곳 만 콕콕 찝어 내는 친구가 있다. 은숙이는 그런 애다. “시험은 합격 한거야? 남자친구는 붙은 거야? 알겠다! 시험은 떨어지고 친구는 붙고, 어이구! 자존심 상해서 잠수 타려고 이곳으로 왔네~에.”
“아 그게 아니고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
“우리 재하도 부를까?”
재하는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려왔다.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며 최근에는 작은 과수원을 시작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인 은숙이도 전문대를 마치고 농협에 취직했다. 여기서 태어나 한 번도 떠나 본적이 없는 친구는 이곳이 촌스럽고 답답하다며 늘 푸념했다. 이 마을을 탈출해 도시로 가는 것이 은숙이의 유일한 꿈이다.
혜원이는 사계절을 보낸다. “집중해!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요리할 때 마다 떠오르는 엄마. 늘 기억 속 엄마와 대결하는 기분이다.
시루떡: 아주머니가 해준 것은 달지 않은데 단맛이 나고 네가 한 것은 짜지 않은데 짠 맛이 나.
막걸리: 긴 긴 겨울밤 엄마는 막걸리를 만들어 먹곤 했다. 시큼하고 쿰쿰한 어른의 맛이었다.
감 자: 봄에 처음 심는 것 중에 감자가 있다. 아직 춥지만 땅속 온기는 감자 싹을 품어 밖으로 틔워낸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그 모든 건 타이밍이다. 감자싹이 나오면 다른 작물을 심을 준비를 해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농촌에 허투루 쓰이는 시간은 없다.
기다림: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밤 조림: 밤 조림이 맛있다는 건 가을이 깊어졌다는 것.
잡 초: 이놈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마음의 걱정처럼 잘도 자라난다.
서울 친구: 친구들은 모른다. 나도 이곳에서 토양과 공기를 먹고 자라는 작물이라는 걸.
재하의 사과: 이거 너 주려고 처음부터 찜해 둔 건데 이 태풍에도 안 떨어지고 끝까지 버티더라, 너랑 다르게!
곶 감: 곶감이 벌써 맛있어 졌다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이다.
은 숙: 연락도 없고, 통장에 스쳐 지나가듯 지나가는 월급 같은 년! 오래 남을 줄 알았더니 눈 깜박 할 사이에 도망쳐 버렸어!
재 하: 도망친 것 아닐걸, 그냥 나는 혜원이가 금방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주 심기! 지금 혜원이는 아주 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주 심기: 양파는 모종 심기에서 시작된다. 가을에 씨를 뿌려두었다가. 발로 잘 밟고 건조와 비를 피해 멍석을 열흘 정도 덮어두었다가 싹이 나면 걷는다. 싹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것이 아주 심기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다. 아주 심기를 하고 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들떠 말라 죽을 일도 없을 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이제 엄마의 편지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랑이 그만의 작은 숲이었다. 혜원이도 자기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답장을 쓴다.
엄마!
나는 엄마와의 다른 감자빵을 만들어 보았어. 엄마 빵은 감자가 안 보이고 안 씹히는 게 섭섭하기도 했거든. (중략). 엄마는 늘 감자 수확철인 유월 말쯤에 해줬었지. 엄마의 것이 맛있었던 건 엄마의 요리 솜씨가 아닌 햇감자의 맛이었단 걸 실토하시지...? 그래도 엄마 빵이 이 세상에 제일 맛있었다는 건 인정!
혜원으로부터 나를 보게된다. 가난, 공부, 건강, 일상, 꿈 중요한 일을 외면하면서 그때 그때 열심히 사는 척 얼버무려왔다. 공부도 운동도 부자가 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졌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힘을 얻고, 엄마가 아빠와 결혼으로 포기했던 일을 다시 찾으려 떠나는데 말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타이밍이다. 봄, 곶감, 아주 심기는 그냥 오고, 시간이 지나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리틀 포레스트(작은 숲)를 다시 본다. 재하의 사과가 귓전에 맴돈다 “이거 너 주려고 처음부터 찜해 둔 건데 이 태풍에도 안 떨어지고 끝까지 버티더라, 너랑 다르게!”
첫댓글 저도 이 영화 재밌게 봤는데. 오늘 비바람 치니 한번 더 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타이밍에는 어쩔 수 없는 운도 작용하더라구요.
예,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운도 따라줘야 힘이 더 나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 새기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영상이 좋았습니다. 내 스타일에 맞게.
저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 본 적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독후감 쓸 정도로 인상적으로는 아니지만요.
지금도 정 선생님은 부지런히, 충분히 잘 하고 계십니다.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인상 깊게 본 영화입니다. 일본 영화 느낌이 났는데 리메이크한 것이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시골에 살고 싶게 만들죠.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참된 삶을 찾고 싶게요. 요리하는 소리와 먹는 소리도 인상적이었어요. 비 오는 소리 듣는 것처럼요.
맞아요, 보고있으면 시골에 살고 싶게 만들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할 겁니다. 막걸리를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하고, 이번 글을 쓰면서 두 번이나 봤습니다. 전에 본 것까지 다하면 여 일곱번은 본 것 같아요.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