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의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하나님 나라의 법칙: 여섯 번째 믿음과 영적 반응
12월 3일 토요일
Ⅰ. 믿음이란 ‘외부자극’에‘영적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과 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더 나가는 디딤돌로 사용하는가 혹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걸림돌로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면 10%만 우리에게 닥친 외부적인 일들이고 나머지 90%는 그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했느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한 자신의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때의 반응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반응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 폭풍을 만났을 때 육적 반응과 예수님의 영적 반응을 말씀을 통해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3-26).
바다에 큰 놀이 일어 제자들이 탄 배가 물에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섭고 놀라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환경에 따른 반응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며 반응하십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는 육적 반응이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영적 반응입니다.
‘육적 반응’은 ‘외부자극’이 가지고 있는 권세에 지배될 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육적 반응에 뒤따르는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입니다. 세상적 권세에 지배된다는 것은 그 권세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권세에 동의할 때 나타나는 마음의 반응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마귀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영적인 어떤 실체도 우리의 동의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두려움은 육신이 우리에게 억지로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것에 대한 체험적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영적 반응은 반드시 선포의 형식을 취합니다. 외부자극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능력은 말로 선포될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19-20).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믿은 대로 선포해야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능력과 권세가 있어도 믿음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은 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술로 선포하는 대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면 항상 선포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Ⅱ. 믿음과 행동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유명한 곡예사가 있습니다. 외줄 아래는 보호장치가 없어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곡예사가 구경꾼들에게 “내가 이 장대 하나로 균형을 잡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물론 당신은 건널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곡예사가 “그럼 누가 내 목에 목마를 타고 함께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경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믿음과 행동하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곡예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실제로 맡기는 것이 바로 믿는 대로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7-18).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46-52)
진정한 믿음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한 면이 지워져 그 가치를 잃어버린 동전과 같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마음으로 믿었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에 따른 행동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1-19).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치유함을 받고 제사장에게 간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가다가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믿음입니다. 기적이 믿음에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보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의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And...
우리의 문제는 심령은 새로워졌는데 우리의 생각은 아직 구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을 믿음으로 훈련하는 것이 영적 성숙의 지름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외부의 반응이 아니라 심령 안에 박힌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외부자극에 대한 육적 반응(감각적 반응)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영적 반응이어야 합니다. 결국 계시적 믿음의 표현은 외부자극에 대한 영적 반응입니다.
인생의 반응은 마치 드넓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연과 같습니다. 바람에 대한 반응에 따라 연은 높이 날 수도 있고, 바닥에 곤두박질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폭풍이 올 때 우리의 반응이 영적 반응이냐 육적 반응이냐에 따라 높이 날 수도 있고 소망 없이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 오감에 의해 생기는 인식이 우리 마음에 뿌리는 생각을 부정하며 동시에 우리 심령에 하나님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 말은 환경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속박하려는 환경의 권세를 부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존재하지 환경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선포하며 승리를 취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적 반응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육적 반응과 영적 반응에 대한 훈련이 안되면 절대로 영적 반응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적 반응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영적 반응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면 선택할 수 없는 비이성적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작은 일부터 영적 반응을 훈련하십니다. 그 훈련에 잘 따라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택이 때로는 이상한 일 당함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육적 반응은 세상의 경험과 정보, 지식에서 옵니다. 그러나 영적 반응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심중에 하나님 말씀이 새겨져야 영적 반응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서 말한 곡예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믿음과 행동이 일치 안 됨을 보게 됩니다. 곡예사가 외줄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는다면 목에 올라타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믿는다면 내 모든 인생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말로는 구세주라고 하면서 인생을 맡기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을 하나님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비록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 진정 영적 반응으로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경험,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짓 자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경험이나 지식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부정의 환경을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여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서리라
https://youtu.be/ynCHN7fAcs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