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의 추억(영전)
울릉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인생살이”를 한번 더 음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좋은 모습
보다 철없던 어린모습에 사회를 향한 강한 연단의 과정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정든 울릉산
천과 울릉 지인들께 감사함과 죄송함뿐입니다
1. “피, 눈물 나는 사연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1972년 10월 유신헌법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공무원들이 각 마을로 파송되어 주민들을 모아두고 유신헌법의 필요성을 홍보할때였다(통구미
담당함).
군청 전공무원이 회의실에 모여 홍보상황 보고회를 할 때였는데, 회의벽두에 이모군수님께서
“석홍이! 왜 싸웠느냐?” 하시는 물음에 젊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피, 눈물 나는
사연이 있읍니다!" 라고 답하니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울릉의 추억 1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내가 주재 근무했던 태하동에서의 주택건축문제가
야기되어 계약되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기초공사만하고 본토로 나가버려서 그 업자를 찿아
가기도하며 애를 쓰고 있었는데,마침 이웃에 어렵게 살고 있는 이모씨가 공사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애를 먹다가, 본 계약자가 입도하여 겨우 공사를 완료한 일이 있었다.
그때 애를 먹이던 그 이모씨는 사기성이 강하고, 불량자로 부정적인 평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사생활에서도 노모를 수시로 구타하고, 본처는 어린 남매 여럿을 두고 도망가 버렸다.
그 후 육지에서 속아서 재혼으로 시집온 착한 유치원교사출신의 아내와 단간방에서 여러 자녀들과
어렵게 생활하고있었다. 주택건축에 손해를 보고 손을 떼게하고 본 계약자에 의해서 집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이모씨는 수시로 군청에 들러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고가 있던 날도 그는 군청을찿아와 돈을 꾸어 달라고 하여 좀 나무라고 돈을 빌려준 후에 마음이
안되서 부두가 식당으로 내려가서 식사대접을 하면서 “육지서 시집와서 고생하는 부인께 잘해주라”
고 얘기했는데, 그는 그 말에 마치 자기 부인과 나와 불륜관계가 있는 것처럼 오해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동안 갖은 손해와 피해를 당하면서도 선하게 예우를 했던 것이 억울하여 그동안 참았던 울분이
폭발했다.
“너도 인간이냐?” 하며 소주 2병을 같이 먹고, 먹이기도하며 축강에 끌고 다니면서 구타를 해서 경찰이 동원되고........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고, 이후 이모씨의 경찰출신이란 친척이 나서서 공무원이 민간인을 폭행했다며.....
나에게 보상을 요구해서 무척 억울했지만 치료비로 적지 않는 보상을 하고 그 후 그 집을 매입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매각해버렸다.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이모군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전부 알고 계셨다. 군수 관사를 찿아 사과를
드렸더니
“치료비는 왜 줬느냐! 이야기 들어보니 나쁜 사람이던데”....하시며 꾸지람보다도 위로를 해주시어서 당시 무척 고맙고 죄송했었다.
2. 고모할머니의 입도와 떠나심.
아직 어린나이에 출세에 조급함과 무엇이던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젖어 건방지게도 작지만
집 건축의 어려운 도전과 체험은 얻게 되었지만 그로인한 상처와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포항 시골에 사시던 어머니 같은 고모할머니께서 걱정이 되어서 울릉에 입도하시게 되었다.
자식이 없으셔서 나의 갓난아기 때부터 나를 돌봐주셨고, 친정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시기에 나의 삶에
귀한 교육자와 어버이가 되어주셨다(육지로 나온후 함께 생활하시다가 99세로 돌아가심).
입도하셔서 약수터 가까이서 같이 생활하시다가 습기가차고 몸이 아파서 도저히 울릉에는 못 있겠다며
서너달 후에 육지로 떠나셨다.
떠나시던 날 육지의 복지시설에서 갖고와서 가족처럼 키우던 개(쫑)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고모할아버지께서는 6.25전후 안동경찰서 수사과장, 대구경찰서 사찰주임 등 경찰간부로서 공비토벌중 총상 등으로 본인의
출생과도 깊은 관계가있으며 고모할머니는 철저한 인격과 원칙과 그러면서도 사랑을 아끼지않은 불도가 깊으셨음)
3. 방 황.
고모할머니가 떠나시고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집 건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당기고,
겉은 멀쩡하나 속은 병들어 있었다. 매일 퇴근 후면 술을 마시고 잠들 곤했다. 자취하기가 힘들어서
식당을 정해놓고 식사는 해결하며 후회와 자책과 우울증현상까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술이
취해서 잠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울릉극장문 앞 계단 밑에 웅쿠리고 있을 때도
있었고.....
승진장을 주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이모군수님께서는
“인간부터 되라”고 책망하셨다. 생활에 질서가 없어서 하숙집으로 옮겨서 생활을 했다.
4. 기도의 어머니 채 봉희 선생님의 입도.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생각지도 않던 귀한 손님들이 울릉의 하숙집을 찿으셨다.
서울에서 전도사로 계시는 기도의 어머니 채봉희 선생님과 그 교회 친한 권사님과 두분이시다.
채선생님은 복지시설 때의 보모로서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결혼도 않고 복지시설의 외로운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헌신적으로 돌보셨던 사랑의 원자탄이셨다.
내가 고교 3년 때 공무원시험을 합격하여 발령 나기 전에 서울의 봉직하시는 교회에서 하루저녁을
함께 지내면서 성경책을 펴서는
“홍아! 이 3가지만 지키며는 꼭 성공한단다”, 하시며, 첫째는 <십일조>, 둘째는
<술, 담배금지>, 세째는 <여자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련된 성경요절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사회에 나가면 이 3가지는 꼭 지켜야 한다며 성경위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하고 다짐했던, 그리고 교회에 가셔서 밤 세워서 홀로 기도하셨던 사랑덩어리
기도의 어머니였다.
울릉에서 같이 관광도하고 천부 송곳산 밑 바닷가에서 해수욕도하며 2박3일간을 같이 지내시다가
울릉을 떠나서 서울로 가셨다.
5. 돌아온 탕자.
속옷 몇 벌을 선물로 주시곤, 기도의 어머니 채봉희 선생님이 떠나시는 날, 부둣가에서 떠나는
청룡호를 바라보며 남들이 보던 말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당시에 배에 승선할 때면 경찰들과
같이 입구에서 울릉자연 분재나 수석 등의 불법반출을 단속하곤 했음에도).
한참이나 주저앉아 울면서 <“선생님의 그 약속 3가지를 지켰더라면 이렇게 타락 하지 않고
성공했을 것”>이라며 세상 출세와 탐욕과 무엇이던 할 수 있다는 교만, 그리고 실패와 낙망에 따른
우울과 고뇌, 술취함의 방황하는 탕자와 같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죄스러웠다.
그리고는 이래선 안 되겠다하여 하숙집의 짐들을 정리하여 도동 위 산중턱, 산골짜기에 있는
기도원에서 가까운 초가집 단간 방으로 짐을 옮겼다. 전기도 없어 호롱불로 생활했다.
매일 새벽이면 기도원에서 전도사님과 둘이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생활에 들어갔다.
술도 끊어버리고,산골짜기에서 매일 출근하며 식사는 식당을 정하여 해결하며 회개하며 돌아온
탕자가 되고 있었다.
6. 울릉을 떠나다(승진과 영전)
산속에서 회개하며 기도생활한지 한 달쯤 되었는가? 도청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달성군청으로의 이동발령이 경북도지사 결제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도청산림과에 전화하니
“축하한다, 대구에 있는 달성군청으로 발령이 결제 되였다”는 축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1969, 7월부터 1973, 9월까지 (4년 3개월)의 정던 울릉의 산천과 고마운 지인들께 작별인사와
감사인사차 2박3일간 울릉 도일주를 걸어서 다녀왔다.
“석주사! 한턱내라”며, 경북도지사 발령장을 전해주시는 김봉진 산림계장님의 발령장엔
당시 5급 갑에서 4급 을로 승진하여 달성군청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영전이요,
축복이었다.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배설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누리는 기쁨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본 글은 2014년에 <울릉문학회>에 기고한 글을 약간 교정하여 올렸습니다)
2015. 4. 6.
오산시 내삼미동 자택에서 호세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