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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 자신을 기도하심
1절 이 말씀을 하시고 13-16장의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말하고 가깝게는 요16:33의 고별설교의 마지막 부분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언하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몸 동작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함으로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이 기도도 역사적으로도 실제 존재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은 눈을 감고 땅으로 얼굴을 숙인 것과 반대되는 눈을 뜨신 상태에서 하늘을 주시하시면서 기도하셨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은 마14:19, 막6:41, 눅9:16의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실 때의 기도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요11:41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본 장에서만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 20번 나타난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제일 많이 "아버지"가 기록된 장이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pathvr(파르테)는 아람어로 히브리어에서 온 ba;'(아바)을 부르심으로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사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이다(마6:9). 때가 이르렀사오니 지금까지는 여러 차례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요2:4, 7:6, 8, 30, 8:20)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고난 속에서 능히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과 희생을 받아주실 것을 의탁하신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의 목적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알려지는 것이다(롬11:36, 롬16:27, 고전10:31, 엡1:6, 12, 14).
2절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요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와 동일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8:28)들이다.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내시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요 이 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영생"을 보장하신 내용은 눅18:29-3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 모든 인류"를 말씀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아들에게는 이미 마지막 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요5:27)가 있으며 이제 자신을 드림으로(요10:18)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지게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2편에 땅에 대한 아들의 지배를 명령하셨고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5번이나 말씀하셨다(17:2, 6(2번), 9, 24).
3절 유일하신 참 하나님 movnon(모노스) "유일한, 하나의"는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요소이다. 이 말은 유1:4에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같은 용법으로는 사37:16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막12:29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요5:44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딤전1:17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용어를 주장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하느님"이나 단순히 "천부"라고 할 때는 유일신 "하나님"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하늘의 사상'이 있는 동양철학과 어울려져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예언된 대로 성령으로 잉태(마1:18, 20, 23)하시고 예정대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엡3:11). 아는 것이니이다 ginwvskwsin(기노스코신) "아는"으로 번역된 이 용어는 현재시재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있어 하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앞으로도 지속될 영원성을 갖는다(마25:46). 예전에 알고 있었거나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있는 것은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4-5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순종하여"(빌2:8)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신 것은(1절) 예수님의 사역의 완성을 전제한 것이다. 아버지는 '보내신 자'(요4:34, 요5:36), '일을 맡겨 주신 자'(요3:35)로 나타난다. 이런 아버지와의 영화로운 관계는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것이다.
17:6-19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심
6절 세상 중에서 구별하는 의미로 본 장에서 "세상" kovsmo"(코스모스)은 18번 나타난다. 이 구별은 세상의 죄와 사단의 지배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요(요6:37) 아버지의 선택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는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셨다(마6:13). 뿐만 아니라 마5:16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께 맡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는 구약의 율법들을 제자들이 잘 지켰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기(요14:15, 21, 요15:10) 했지만 아직까지 제자들이 말씀을 지킨 정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영접했다는 것은(요6:30) 곧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것이다.
7절 지금 저희는 ...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지금" nu'n(뉜)은 "현재"를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로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연재 드디어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13장에서부터 계속 반복되어온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체에 대해서 이제 깨달아 알게되었다.
8-9절 내게 주신 말씀들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깝게는 요16장의 말씀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서 온 것인 줄을 알았고 또 믿었다.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심은 세상을 구하시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다가올 환난을 생각하며 제자들을 위해서 먼저 간구하고 계심을 말한다. 세상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요3:16) 세상도 알고 믿게될 것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21, 23절).
10절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영광을 아들이 받았지만 그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에 예수를 통한 영광의 길이 되는 것이다.
11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떠나실 것이며 세상에는 제자들만 존재하게 된다. 즉 아직까지 보내실 보혜사 성령도 없기 때문에 잠시 동안이지만 제자들은 홀로 남아있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주권에 있는 것처럼 제자들 또한 하나가 되어 보호받을 것을 간구 하신 것이다.
12절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멸망의 자식 가룟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모두 지키셨다. 가룟유다의 경우는 시41:9의 말씀이 응한 것이기에 구약의 성취라는 의미에서 이미 예정되었던 것이다. "멸망" ajpwvleia(아폴레이아)는 "파괴, 상실, 파멸"로 곧 저주를 의미한다(요3:16, 롬2:12, 고전8:11). 살후 2:3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멸망의 자식"을 말할 때 사용되었는데 가룟유다의 경우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룟유다의 경우 그 운명이 멸망에 무조건 처하게 되어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도록 타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예수님을 따라갔는가 하면 가룟유다의 경우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한 것에서 차이를 알 수 있다.
13절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11절에 이어서 '아버지께 간다'는 말씀을 또 한번 강조하셨다. 이 말씀 자체가 제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십자가의 형틀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곳 '아버지께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14절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마19:27, 눅18:28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라고 한 말과 같이 다른 제자들도 함께 쫓았다. 쫓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떠나간 이도 있었다(마19:22). 요일2:16에서 말하는 '세상의 정욕과 안목 이생의 자랑'을 버린 것이다. 이것은 곧 원문을 다시 옮긴다면 [내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저희도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습니다.]
15-16절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떠나시지만 제자들은 남아있어야 했다. 남아있는 곧은 세상이었으며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이후에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마28:20, 막16:15).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과 모든 것을 등지라는 뜻이 아니며 그 속에서 보호받게 하실 것을 간구 하신 것이다. 개역성경에 있는 "빠지지 않게"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로 번역에서 추가된 것이다. 원문에는 thrhvsh/"(테레세스) "보호하다, 지키다, 굳게 붙잡다"로 원문대로는 현대인의성경 "악한 자에게서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가 좀더 정확하다.
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aJgiavzw(하기아조) "거룩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 성별하다"의 뜻으로 이 용어는 단순히 "깨끗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진리 안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살도록 해달라는 부탁이다. "거룩"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께만 있는 성스러움을 말할 때 사용된다(창2:3, 출3:5).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셨다(출19:6).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거룩한 것'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레2:3, 10, 레6:17).
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본문에 두 번 나오는 ajpostevllw(아포스텔로) "보내다, 파견하다"는 단순히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명을 부여해서 보내는 사명의 대위임(the Great Commission)이다(마28:18-20). 이것은 11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요17:20).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 사명의 계통인 것이다.
19절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예수께서 죄가 있거나 아직 깨끗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aJgiavzw(하기아조) "거룩하게"를 사용하신 것은 아니다. 70인역(LXX)에서 구약을 옮길 때 이 단어는 제사장을 성별하는 경우(출28:41)와 희생 제물에 대해서 성별 할 때 사용되었다(출28:38, 민18:9). 이제 예수님께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시고(히3:11) 또한 제물이 되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사53:7).
17:20-26 미래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
20절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는 제자들(가룟유다는 제외)만 위함이 아닌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lovgo":로고스) 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21절 다 하나가 되어 예수그리스도가 16장 고별설교에서부터 본 장 기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반복하시며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설명하심으로 결국은 그들은 믿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현재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안에 포함되어 그리스도의 한 몸(고전12:13)에 속할 것을 간구 하신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하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모든 교단이 하나로 통합되어 한 기구 안에서 믿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0:38, 요17:11, 23) 우리도 하나되어야 한다. 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그것을 나누며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관계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15장의 비유말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있어 한다.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요1:14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요16:14의 당신이 죽으심으로 얻게될 십자가의 영광까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셨다(딤후2:12, 계20:4). 그 이유는 오직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23절 하나되는 길은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teteleiwmevnoi(테텔레이오메노이) "완성하다, 성취하다, 온전케 하다"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때도 사용되었다(요19:28). 히7:28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고 하신다. 요한은 요일4:12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하심으로 하나됨의 방법으로 '서로 사랑'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절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이것은 천국을 말씀하신 것으로 구원을 위한 기도이신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의 음성을 기억할 수 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창세 전부터 계셨던 것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예수로만 바라본 결과였다. 분명 예수께서는 창세 전부터 계셨으며(요17:5) 아버지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4).
25절 의로우신 아버지여 "의로운, 거룩한" divkaio"(디카이오스) 형용사를 요한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시키고 있다. 아울러 의에 대해서 심판하실 하나님으로 나온다(요16:8). 이것은 구약의 예언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에 적용시켜 오직 의로운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한 것이다(렘12:1, 시116:5, 시119:137, 요일1:9, 계16:5).
26절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신 것은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신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신 것이다. 요한은 그 기도의 결론을 아버지의 사랑(ajgavph:아가페)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에게 주고자하신 사랑으로 기도를 마치신다. 요13:1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13:23)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사랑"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3:16, 35, 요5:20, 요8:42, 요10:17, 요13:1, 34, 35, 요14:21, 23, 요14:31, 요15:9, 12, 13, 17, 19, 요16:27, 요17:23, 24, 26, 요21:15, 16, 19).
18:1-11 체포당하신 예수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e[pw(에포) "말하다"는 17장의 예수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번역과 현대인의성경에서는 "기도를 마치신 뒤에"로 옮겼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시내" ceimavrrou(케이마르로위)는 '겨울에 흐르는 시내'의 의미가 있으며 실제로 겨울 우기 동안에만 약간의 물이 흐르고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乾川)이다. 이곳은 다윗이 이 시내를 건널 때에 친구인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하여 감람산으로 간 적이 있다(삼하15:23, 30-31). 거기 동산이 있는데 "동산"으로 번역된 kh'po"(케포스)는 "정원"이라는 의미인데 아마 어떤 울타리가 쳐진 곳일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이 곳을 "겟세마네"라고 기록했고(마26:36, 막14:32) 누가는 "감람산"(눅22:39)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마태, 마가가 말한 곳도 cwrivon(코리온) "어떤 지점"을 말하는 것으로 네 기자의 기사를 종합해 볼 때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고 부르는 "정원, 농원"을 말하고 있다.
2절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으로 눅22:39에는 "습관대로, 늘 하시던 대로" 자주 찾았던 장소였다. 가룟유다도 이 장소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를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3절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공관복음에서는 유다가 데려온 사람들이 '대제사장, 장로들이 보낸 무리'(마26:47, 막14:34, 눅22:47)라고만 기록했는데 요한은 '군대'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spei'ran(스페이란) "군대"는 군단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인들이 왔다. 12절에 천부장이 이끄는 군대인 것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군사가 왔을 수도 있다. 이들은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왔다. 공관복음서는 '검과 몽치'만 언급했는데(마26:47, 막14:43) 요한은 '등과 홰'를 말했다. 이 때는 유월절(니산월 14일) 전날로 당시 월력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만월의 상태이지만 이 때가 밤이었고 구름에 가려 어두웠을 수 있기 때문에 필요했을 것이다.
4절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예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이 때 생각하시고 있었다(요7:6). 그래서 때가 오지 않았을 때는 그 자리를 옮기신 적도 있었다(요10:39, 요11:54). 나아가 가라사대는 예수께서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고 이제 그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시행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나아가셨다. 이런 일이 닥치게될 줄 아시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이 자리를 제자들처럼 어두움을 이용하여 벗어나실 수 있었지만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일임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잡히시는 일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5절 예수의 질문에 무리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했다. 나사렛예수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전할 때(요1:45)와 예수의 십자가의 명패에 쓰였다(요19:19). 예수의 이름에 나사렛을 더함으로 분명히 그들이 알고 체포하려고 하는 신분확인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E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라는 요한의 문체에 넣었다. ☞ 이 방법은 요15:1을 참고하기 바란다.
6절 내로라 하실 때에 70인역(LXX)에서 출3:14에서 ejgwv eijmi oJ w[n(에고 에이미 호 온)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할 때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께서 하신 이 신적 권위의 대답은 모세가 하나님의 성호를 물을 때 하나님께서 대답한 말과 같은 표현으로 예수를 잡기 위해 온 무리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이라고 대답하는 이 말에 순간 물러가 엎드려졌던 것이다.
7-9절은 5-6절은 반복해서 물으시고 대답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잡히시고 계시는 이 현장이 단순히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체포되시고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확인이며 스스로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잡히시는 그 장소에서도 그 분위기를 주도하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또한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제안하심으로 제자들은 피해가 없도록 하셨다. 이것은 막14:50과는 대조되지만 요한은 단순히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보호 속에 이루어진 일임을 말한다. 양 때를 보호하시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요10:11, 요6:38).
10절 시몬 베드로가 ...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이 긴급한 상황에서 주를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말을(마26:33-35)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순간 칼을 빼어 들었고 '말고'라는 대 제사장의 귀를 베어버렸다. 본문에는 칼을 든 자(베드로)와 베인 자의 이름이 분명히 언급됨으로 이 급박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 모두 사실임과 동시에 현장의 분위기를 소상히 전달해 주고 있다. 공관복음에서 기록하지 않은 오른편 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공관복음에는 칼을 사용한 베드로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마26:51, 막14:47, 눅22:50). 이것은 칼을 사용한 베드로의 신분에 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저자들의 배려로 보여진다. 그러나 요한이 기록할 당시는 이미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되고 한참 후에 기록되었기에 그 위험의 요소가 없었다고 판단된 시기였던 것 같다.
11절 검을 집에 꽃으라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에 제재를 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데 칼을 놓으라는 명령은 공관복음에서 마태26:52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며 눅22:51에는 이 말씀대신 예수께서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는 예수께서 원수를 치료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pothvrion(포테리온) "잔, 컵"을 말하며 목적격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상징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숙명, 운명"을 뜻한다. 요한복음에는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지만 공관복음에 여러 번 사용된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고난으로 말한다(막10:38, 39, 막14:36). 본서에는 빠져있는 겟세마네기도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있기도 하다(마26:42, 막14:36, 눅22:42).
18:12-27 안나스 앞에 선 예수
12절 군대와 천부장 spei'ra kai; oJ cilivarco"(스페이라 카이 킬리알코스)는 보병부대와 "천부장" 그 지휘관이 동행하여 예수의 체포를 공식적인 명령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부장"을 말 그대로 천명을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보다는 작은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 증거와 정황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결박하여" e[dhsan(에데산)은 "묶다, 감다"의 뜻이지만 이 말은 투옥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13절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예수가 로마의 군대들에게 잡혔지만 누구의 사주와 지시로 이루어졌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수 체포의 우두머리는 대제사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질적인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예수를 인도했다. 가야바는 그의 사위로 그 해 대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는 안나스가 처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나스는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Quirinius)에 의해 A.D. 6년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어 A.D. 15년 유대지방의 행정관이었던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서 경질되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으나 로마 지배하에서는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로마인들이 대제사장직을 임의로 교체하곤 하였다. 안나스의 위는 그 후 5명의 아들들과 사위인 가야바(눅3:2, 행4:6)에게 이양되었지만 유대인 사회에서 막후 권력은 여전히 안나스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제사장 참고하라
14절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는 요11:50을 말한다. 그는 산헤드린회원에게 예수 한사람을 인해 유대인 전체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여 곤란에 빠지는 것보다 예수를 빨리 넘겨주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15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베드로와 함께 예수를 따라갔던 제자 중에 하나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혀오고 있지 않은 저자 요한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 이유는 저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처럼 본 서를 기록하고 있는 데다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인데 실증적인 증거는 없지만 요한이 제사장 집 가문이었다는 것이다.
16절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베드로는 자유롭게 문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베드로의 예수 부인은 이 여종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의 신변이 염려되어 여기까지 왜 따라왔는지는 모르나 결국은 예수의 예언이 이 때문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17절 문 지키는 여종 hJ paidivskh hJ qurwrov"(헤 뒤로로스 헤 파이디케스)라고 이 여종을 설명하고 있다. qurwrov"(파이디케스)는 "어린 소녀, 하녀"를 말한다. 막14:66-67에서 '대제사장의 여종'이라고 말하고 마26:69, 70, 눅22:56-57은 단순히 여종으로만 말한다. 요한이 정확하게 '어린 소녀 종'이라고 말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은 이 여종을 통해서 일어났는데 목숨까지 주를 위해 버리겠다고 호언 장담한 베드로에게 소녀 여종의 질문에 부인하는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18절 그 때가 추운고로 유월절은 양력으로 3, 4월경이며 예루살렘은 해발 850m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봄이라고 해도 밤에는 매우 쌀쌀했을 것이다. "숯불" ajnqrakia;n(안드레키안)은 "타오르는 숯불더미, 모닥불"를 말하는데 매우 오래된 표현으로 신약성경에서 본 절과 요21:9에만 나온다. 이런 세밀한 기록으로 미루어 요한이 이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19절 대제사장은 가야바가 아닌 안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야바를 가리키고 안나스는 배후에 있었다고 만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공관복음이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가야바의 질문은 안나스의 질문과 다르게 나타난다. 안나스의 질문은 예수의 의도에 있다면 가야바는 예수가 메시야 인가를 묻고있다(마26:57-68, 막14:53-65, 눅22:54, 55, 63-71).
20절 드러내어 놓고 ...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예수께서는 비밀스런 조직이나 교훈을 주지는 않으셨다. 안나스가 묻는 질문의 의도는 반정부적인 행위나 은밀히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교훈은 공개적이었고 제자들도 비밀스런 조직이 아니었다.
21절 이미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공개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문제가 있다면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는 것이다. 거짓 증거나 은밀한 가르침이 있었다면 들은 자들이 알 것이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거짓 증인들은 많이 나와서 예수의 일에 증거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26:59-63, 막14:55-59).
22절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 사람은 "곁에 있던 관원 중에 한 사람"을 말한다. 산헤드린 경호원이나 대제사장의 경호원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과잉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한 행동으로 보인다. 랍비 율법에 의하면 '심문 중에 있는 피고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야 한다.' 이 사전 심문은 여러 가지 불법적인 면이 드러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도 불법적이며 아직 죄인으로 판결이 난 것도 아닌데 사람을 때리는 것은 육체적 가혹 행위로 엄연한 불법이다. 특히 유대인에게 있어서 뺨을 치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금지사항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죄 없이 관원에게 뺨을 맞은 것은 모욕이다. 그러나 이 행위는 결국 이사야50:6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23절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이 말씀은 예수의 정당한 항의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제판 하여 정당하게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정식 제판이 아닌 상황에서 죄를 강제로 고백하는 유도 성 질문과 관원의 자기 과잉충성심으로 보여지는 구타행위는 불법적인 것이었다.
24절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는 자신의 행위와 유도 성 질문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예수를 돌려보낸다.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자세히 다루어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마26:57-68, 막14:53-65, 눅22:66-71).
25절은 18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베드로가 불을 쬐며 부인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안나스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질문을 한다.
26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는(10절 '말고'였다.) 이 사람의 질문에 의해서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을 하게 된다. 베드로의 부인에 질문한 사람들이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마태는 첫 번째 두 번째가 여종인데 다른 여종들이며 세 번째는 '거기 섰던 사람들'(마26:69-75) 마가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여종으로 동일인이었고 세 번째는 '옆에 서 있던 사람들'(막14:66-72) 누가는 첫 번째 질문자가 여종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어떤 사람'(눅22:54-62) 요한은 첫 번째 여종이며 두 번째 '사람들', 세 번째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친척 관계인 사람이 질문을 했다고 전한다. 이 기사들은 서로 상충된다기보다는 횃불에 둘러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밤중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확인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27절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로 요한은 베드로의 통곡을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이 때의 정황을 다시 정리하면 세 번째 부인이 있은 직후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셨고(눅22:61), 그 때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었다(요13:38, 마26:72-74, 마가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눅22:62).
18:28-40 빌라도 앞에 선 예수
28절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요한은 가야바의 심문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 전에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신성모독죄(마26:57-66, 막14:53-64, 눅22:66-71)를 뒤집어쓴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은 직접 언도하여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만 관정에 넘겨지고 자신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더렵혀진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다.
29절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사형권한이 없는 산헤드린공의회는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법적인 권한이 있는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A.D. 26-36)에게 넘긴다. 평소에는 총독은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으나 유월절 축제기간이라 민란이나 소요를 대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고 반문함으로 피고의 혐의사실을 물어 로마의 재판 절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의 고발에 못마땅해 하면서 귀찮아했던 것 같다.
30절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이들이 빌라도에게 말한 예수의 죄목은 행악자 kakopoiov"(카코포이오스)였다. 이 말은 법률적 범죄위반 여부와 관계없는 "심성이 나쁜, 악한"자를 가리키는 매우 감정적인 말이다.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웠지만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통하는 범죄 사실이고 로마의 법에는 '신성모독 죄'라는 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런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는 "행악자"라고 말한 것이다.
31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한마디로 '행악자'를 재판하는 것은 유대인 스스로가 하면 되지 자신에게 올 것까지는 없다는 뜻이다. 또한 유대인의 명절에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데 이런 일로 불편하게 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준 것은 그 목적이 자신들에게 사형권한이 없기 때문에 사형을 목적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32절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흥분된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해 가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이러한 죽음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20:19, 요3:14, 요12:32, 33).
33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요18:28절에 유대인들은 더렵혀진다는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빌라도는 자신의 자리에서부터 문 입구까지 뛰어다니며 질문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다. 빌라도의 질문은 예수께서 무력으로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왕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미 이러한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유대인 스스로가 예수를 넘겨줄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 해도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34절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유대인들은 '자칭 왕 그리스도'(눅23:2)라고 고소했을 때 빌라도가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빌라도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35절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께서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넘겨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빌라도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예수께서 반 정치적으로 행동하시고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의 왕이 되려고 한 증거를 포착하지도 못했으며 현재 예수께도 그러한 점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직접 예수께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행동이 어떤 것이었느냐 묻는 것이다.
36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로마나 유대인 왕으로가 아니다. 예수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요17:24)
37절 네가 왕이 아니냐는 36절의 대답으로 "그러면 네가 basileu;"(바실류스) "왕"이냐"리고 질문한 것이다. 예수의 대답은 거리낌이 없이 내가 왕이니라고 하심으로 분명히 만 왕의 왕으로 오신 것임을 증명하셨다. ejgw; eij"(에고 에이스)는 "나는 ...이다"의 표현으로 요한이 사용한 것으로 ☞ 요15:17 참고하라 예수가 왕이신 것은 육적으로는 다윗왕의 가문에서 출생했고(마1:1, 롬1:3),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롬1:4).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표현했는데(시47, 48편, 삿8:23) 예수께서는 그의 아들 되심으로 왕으로 오셨다(고전15:25).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gennavw(겐나오) "낳다"는 육체를 입으시고 성육신 하신 것을 말하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는 [누구든지 진리의 편에 있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이다. 예수 자신이 말씀이며(요1:1-3) 진리이다(요14:6).
38절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빌라도는 예수의 말씀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마도 이상주의적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 유대인들처럼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이 심문한 것으로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39절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38절에서 빌라도는 예수께 무죄를 확인했으면 자신의 판결대로 유대인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무조건 석방했어야 옳았다. 이것은 엄연한 빌라도의 직무유기에 해당했다. 이 질문을 던짐을 물론 예수를 놓아주려고 한 의도는 엿보이나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무조건 죽이려고 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40절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빌라도는 무죄인 예수를 살인과 반란의 음모자 바라바(마27:20)를 놓아준다는 제의로 로마 당국자로 책임을 진 사람으로 그 책임을 회피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들의 동요를 두려워하여 또 인심을 얻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주었다.
19:1-16 사형 선고를 받음
1절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예수의 유죄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질 한 것은 엄연한 잘못이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달래고 화해 행위로 예수를 채찍질했다고(눅23:16, 22)는 하나 오히려 유대인들은 동정심을 갖기보다는 적개심만을 일으켜 더욱 사태가 꼬여가고 있었다. 채찍질 당한 것은 이사야53:5의 성취였다.
2절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로마의 군인들은 자칭 왕임을 희롱하며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는 리시움스피노숨(Lycium Spinosum)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거시덤불'이 범죄한 아담에 내려진 형벌이라고 생각한다면(창3:18)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쓰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색 옷을 입히고 이 부분은 막15:17과 일치하는데 마태는 '홍포'(마27:28)로 기록했으며 누가는 '빛난 옷'(눅23:11)이라고 기록했다. 종합해 볼 때 '홍포'인데 예수를 왕으로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이 옷은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아3:9). 로마의 군인들은 조롱으로 했지만 사실은 진실이 된 것이다.
3절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평안할지어다"는 Cai're(카이레)로 "환영하다, 축하다"의 뜻으로 로마 군병들은 조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만세!]라고 외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rJapivsmata(흐라피스마타)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게 때렸다." 마27:30, 막15:9에는 침 뱉은 사실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4-5절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빌라도의 관저에서 예수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희롱을 당했다. 그리고는 빌라도에 의해서 관저 밖으로 나오게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빌라도의 생각에는 이 정도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 같다.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빌라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빌라도는 분명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느라 예수를 놓아주지 못하고 로마 군인들에게까지 희롱 당하도록 허락한 것은 빌라도의 책임이다.
6절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이들이 주동이 되어 예수의 처형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27:20, 막15:8, 13에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동자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산헤드린회원)이었다.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ejkrauvgasan(에크라우가산) "아우성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음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예수께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이 폭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세 번에 걸쳐 예수의 무죄를 선포했다(요18:38, 요19:4). 그러나 무죄에 따른 예수의 신변을 보호해 주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밝히고 빠져나가려고 하는 데만 급급했다. 로마의 관원으로서 유대민족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요18:31). 또한 십자가의 처형에서 로마 관군이 개입되어 사형을 집행했다는 사실은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의 무죄를 선고했다고 해도 그에 따른 조치를 분명히 했어야 함에도 십자가형을 유대인들의 만류에 못 이겨 허락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닐 수 없다.
7절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요18:30에 이들은 처음에 "행악자"라고 고발했다. 그런데 이제야 진짜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자신들의 법대로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신성모독은 레24:16에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이행이 아니라 자신들의 적개심으로 인해 무조건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법대로 하면 죽음에 해당한다고 빌라도에게 설명함으로 적법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8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빌라도는 이교도이지만 신들이 사람에게 와서 그들을 해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태도와 담대함에서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 시점에서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꾼 사실도 말해주었다(마27:19).
9절 너는 어디로서냐 두려움에 사로잡힌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관정으로 데리고 들어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이 질문을 하는 의미는 '너는 사람이냐? 아니면 신이냐?'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께서는 이미 충분한 대답을 주셨다고 생각하시거나, 빌라도가 신적 믿음의 한계성을 가지고 잇는 상태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시거나, 당신이 십자가에 지셔야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계획되신 것이기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게 됨으로 침묵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침묵은 결과적으로 사53:7이 성취된 것이었다.
10절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예수께 자신의 권력을 확인시켜 예수의 침묵으로부터 답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시인한 것이 되었다.
11절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이 로마황제에 의해서 부여받은 사실만을 생각했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롬13:1). "위에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방인인 빌라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또는 '나의 아버지께로부터'라는 제자들에게 설명하실 때 사용한 어법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는 예수 처형의 문제에 책임을 예수님에 의해서 확실히 규명되는 말씀이다. "나를 넘겨준 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유대인의 대표기관으로 구성된 산헤드린공의회를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이들에게 더 큰 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빌라도에게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빌라도에게도 죄가 있다는 뜻이나 자발적으로 참여한 유대의 주동자들에게 더 큰 죄가 돌아간 것이다.
12절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빌라도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자신은 그 죄를 뒤집어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ejzhvtei(에제테이) "힘썼으나"는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빌라도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kravzw(크라조) "외치다, 소리 지르다"로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일종의 빌로도에 대한 시위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라고 말함으로 최대의 협박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는지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리고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을 한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이 얼마나 모순인가?
13절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legovmenon(리도스토로톤)은 "넓적한 돌이 깔린 곳" 즉 재판석을 말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대하7:3, 겔4:1, 겔40:17, 18, 겔42:3에 나온다. 앉았더라 ejkavqisen(에카디센)은 자동사와 타동사로도 사용되어 자동사로 볼 때는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은 것이 되지만 타동사로 보면 예수께서 재판을 받기 위해 앉으신 것이 된다. 빌라도가 재판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면 그 다음에 재판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타동사로 보는 견해와 다른 곳에서(마25:31, 행12:21, 행25:6) 이 단어는 자동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만 타동사로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은 요한이 이중적인 의미를 사용하는 습관이 있어(요3:3) 실제로 제판석에 앉은 자는 빌라도 이었지만 인간 배후에 있는 심판자이신(요5:22) 예수께서 그곳에 왕으로 앉아 계신 것이라는 것이다.
14절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요한은 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그 때를 다시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날과 시간이 공관복음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관복음은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식사였다고 전한다(마26:17-30, 막14:12-26, 눅22:7-23). 유대인들은 유월절 안식일이 겹치기 전에 서둘러 예수를 처형하려 한 것과(요19:31)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처형이 없었다는 점(마26:5)을 고려할 때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하고 있다. 공관 복음서와 요한복음이 사용한 달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은 예수와 제자들이 사용한 개인달력이었고 요한은 예루살렘의 공식달력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 정착되기 전이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하루 전에 유월절을 먹었지만 의미상 유월절 식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제 육시라 그런데 막15:25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제 삼시'였다.
(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마가의 제3시는 예수를 처형시킨 시간이 아니라 막15:24의 병사들이 제비뽑고 십자가형 이전에 태형과 조롱의 시간이 있어 상당히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로마의 시간법 즉 밤0시에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법을 따르고 마가는 일출을 시작을 구분으로보는 팔레스타인 시간법을 따라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서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전 6시가 되고 마가의 것은 9시가 된다. 약간의 시간차가 줄기는 했지만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는다.)
결국 이러한 시간 차이의 문제는 현재와 같이 시간이 표준화 되어있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또한 그 시간을 보는 것도 하늘의 해만 쳐다보고 3시인지 6시인지 사람마다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쓴 것에 비해서 유대인들이 자신에 야유와 소리를 지르며 협박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현재 몰골이 너희들의 왕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15절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Aron a\ron, stauvrwson(아론 아론 스타우로온) a\ron은 ai[rw(아이로)의 어근으로 "들어 올리다, 달리다"의 뜻으로 문자 적으로는 [매달아라 매달아라 십자가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요12:34)에서 예언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굴욕감에 자극을 주고 있다. 유대인의 왕을 로마정부에 의해서 죽인다면 수치가 아니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말이 빌라도가 아닌 대제사장들이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의 왕은 역사적으로 상징적으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며 영원한 왕으로 생각되어 왔는데(삿8:23) 대제사장이 스스로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한 것은 충격이다.
16절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빌라도의 태도가 어정쩡하다. 그러나 결국은 유대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넘겨주니라"의 paradivdwmi(파라디도미)는 "넘겨주다, 포기하다, 위임하다"의 뜻으로 빌라도의 재판은 스스로 판결하지 못하고 "넘겨준"것으로 판결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형 집행 과정에서 로마의 군대가 실행했고(요19:23) "넘겨준"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십자가형을 판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한은 마27:24에서 기록한 자신의 손을 씻음으로 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내용을 생략했다.
19:17-27 십자가를 달리심
17절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의 십자가 처형방식으로 예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힘겨워 하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것을 전하는 공관복음의 기사로 볼 때도 정확하다(마27:32, 막15:21, 눅23:26).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모습은 창22:1-6의 속죄제에 사용될 나무를 지고가는 이삭의 제사를 연상케 한다. 해골 (히브리말로 골고다) kranivon(크라니온) "두개골, 갈보리, 해골" 히브리 발음으로는 Golgoqa(골고다)라고 부르는 이 산의 모양이 해골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 아니면 이곳에 해골이 많이 굴러다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8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한은 예수의 처형과정을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처참한 그 광경을 다 기록할 수 없었던 요한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 처형의 방법은 양팔을 밧줄로 묶은 뒤 두 손에 못을 박았고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손이 찢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받침이 될만한 것을 발아래 붙였다.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피를 다 쏟고, 탈수와 호흡장애, 추위, 때로는 독수리의 공격을 받아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다.
19-20절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이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는 T자형이 아닌 십자가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처형에서 죄수의 각각 죄패를 붙이도록 했는데 예수의 죄명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달았다. 이 패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능한 모두 볼 수 있도록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3개국어로 쓰였다고 한다. 패에 쓴 기록이 약간의 차이가 보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마27:37), '유대인의 왕'(막15:26), '이는 유대인의 왕'(눅23:38),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19:19)이라고 적은 것에 대해서 마태는 히브리어(아람어)를, 마가는 라틴어를, 누가와 요한은 헬라어를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모두 동일하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데는 일치한다.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이 때가 유월절 기간동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형을 목격했던 것이다.
21-22절 대제사장들이 ...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죄패의 내용에 '자칭'을 넣어 다시 달 것을 권했다. 그러나 빌라도가 마지막 남긴 말인 이 말은(마27:22)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빌라도가 쓴 죄패에 쓴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분은 유대인의 왕뿐만 아니라 '만왕의 왕' 이셨다(단8:25, 딤전6:15, 계17:14, 계19:16). 빌라도도 이제 그분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3-24절 군병들이 ... 그의 옷을 취하여 예수님의 옷을 취하는 군병들의 행동은 당시에 관례처럼 되어있었지만 그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여준다. 당시의 옷은 오늘과 달리 값이 비싸기 때문에 집행자들이 그 조각들(허리띠, 머리를 덮는 천, 샌달, 겉옷)을 가져갔다. 속옷은 찢으면 쓸 수 없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가져갔다. 막15:24에서는 주사위를 던졌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시22:18의 성취이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 십자가 처형 때 처형장의 병사들이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지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거리는 마가의 기록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막15:40). 그러나 마27:56에서도 십자가 곁에 여인들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약간의 인물들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 혼란한 장소에서 저자들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저자들은 이 장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을 정리했다고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일치한다. 이 여자는 눅8:2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받던 중 예수께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26-27절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의 초점은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요한)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제자에게 어머니를 당부한다. 여자여 보소서 "여자여" Guvnai(귀나이)는 당시에 여자를 제일 정중하게 부르는 용어인데 한글 번역상 경히 부른 것처럼 이해될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말은 첫 번째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요2:4). 공동번역과 현대인의성경은 "어머니"로 옮겼다. 눅23:24 자신을 못박는 군병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눅23:24 옆에 있던 한 강도에게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는 말씀도 하셨다.
19:28-37 운명하심
28절 이 후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얼마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 예수께서 ... 내가 목마르다고 십자가상의 다섯 번째 말씀을 남기셨다. 예수께서는 그 극한 상황에서도 예언의 상세한 부분까지도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시42:1-2, 시63:1). 마27:46-48, 막15:34-36 기록했는데 성취에 대한 부분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세밀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29절 신 포도주 o[xou"(옥수스) "식초, 신 포도주"를 말하는 것으로 십자가 옆에서 로마 군병들이 마시던 것으로 보인다.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spovggon(스퐁곤) "해면, 해융"은 나무에 헝겊 같은 것으로 둘둘 말아서 봉을 만들어 예수의 십자가에 갖다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마27:48, 막15:36에서는 이 나무는 '갈대'였다고 기록한다. "우슬초" uJsswvpw/(히소포오)는 '히솦 풀'(공동번역)은 담을 타고 뻗어 올라가는 식물이다.
30절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마취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쓸개탄 포도주(마27:34), 몰약을 탄 포도주(막15:23)는 거절하셨으나 신 포도주는 허락하셨다. 마27:50, 막15:37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크게 외치시고 돌아가셨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 Tetevlesta(테테레스타이) "완수하다, 결론짓다"는 말씀을 남기시기 위해서 타는 목을 축이셨을 것이다. 구속사역의 완성을 공포하신 것으로 이제 우리를 위한 죄의 대가를 다 치렀음을 선언하신 것이다(고후5:21). 돌아가시니라 parevdwken(파라도킨)은 "넘겨주다, 위임하다, 내맡기다"의 뜻이 있어 학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스스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사53:12)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암시이다.
31절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mevga"(메가스) "큰, 위대한" 날이라고 한 것은 유월절과 안식일이 같은 날이 되기 때문인데 이 때는 금요일 오후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전이다.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달라 십자가형틀에 매달린 자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다리를 부러뜨리면 통증이 가중되고 받침대에 유지하던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죽게되는 것이다. 또한 신21:22의 시체가 밤이 새도록 매달려 있으면 안된 다는 율법도 작용했을 것이다.
32-33절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다리를 꺾는 것은 빨리 죽게 하기 위함인데 예수께서는 이미 죽음이 확인되어서 다리를 꺽지 아니했다. 막15:44-45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빨리 죽으신 것에 대해서 빌라도가 놀랐음을 기록했다.
34-35절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때 찌른 상처는 부활 후에 도마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요20:20, 25, 27). 요한이 본서를 기록할 때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가현설(Docetism) 등이 현존했으며 이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거듭해서 확인되고 본 자 저자 자신에 의해서 확인된 역사적인 사실을 그 증거가 참이라고 전하고 있다.
36-37절 이 일이 이룬 것은 ...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유월절 희생제물 '어린 양'은 그 뼈가 상하지 않도록 했는데 요한은 이런 구약의 대속의 희생제사를 가리키고 있으며(출12:46, 민9:12, 시34:20) 또한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슥12:10)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19:38-42 장사지냄
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자였으며(마27:57),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으로 존귀한 공의회원이었다(막15:43).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2km 떨어진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니고데모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요3:14).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ejpitrevpw(에피트레포) "위임하다, 허락하다"의 뜻으로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막15:44, 45에서 빌라도는 백부장을 보내서 예수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고 시체를 넘겨주었다.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고있던 요셉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독수리 밥이 되도록 또 많은 사람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대로 놔두었다.
39절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가 요셉을 도와서 예수의 장례를 치렀다는 기사는 본서에만 나온다. 니고데모는 은밀히 예수를 찾아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었고(요3:1, 2), 바리새인들의 독단적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요7:50, 51). '몰약'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탄생 때 가져온 예물 가운데 하나였다(마2:11). 침향으로 번역된 ajlohv(알로에)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발견되는 것으로 백합과에 속하는 식물에서 채취한 것으로 몰약과 섞으면 건조제와 방취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것을 백근 35kg에 해당하는 량은 장사지내는데 충분한 향료로 왕족의 장례에만 이렇게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40절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유대인의 장례 법은 시체를 향유로 깨끗이 씻어주고 향유와 향품과 함께 "세마포" ojqovnion(오도니온) "고운 베"의 옷을 입힘으로 마쳤다. 애굽의 장래법인 속의 내정을 모두 꺼내고 '미이라'를 만드는 것과는 달랐다.
41-42절 안식일은 가까이 되고 예수의 시체는 빨리 장사해야 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만일 예수의 시체를 지금 빨리 장사지내지 않으면 안식일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동산 안에 ... 새 무덤이 있는지라 kh'po"(케포스)은 "동산, 정원"은 십자가형이 있었던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요한만이 전하고 있다. 새 무덤은 바위 속의 무덤으로(막15:46), 아리마대 요셉의 것이다(마27:60).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형태의 무덤으로 입구는 바위 돌을 굴려 막도록 되어있었다. 이곳에 예수께서는 장사되셨다.
20:1-10 부활하신 그리스도
1절 안식 후 첫날 유대인들은 일주일의 기준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로부터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다. 안식일은 토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였다. 지금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는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께서 고쳐주신 후 예수를 따르며 봉사한 인물이며(막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왔으며 운명하실 때도 지켜보았던 여인이다(요19:25). 공관복음에는 이 여인 외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다(마28:1, 막16:1, 눅23:55, 24:1). 요한이 2절에서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저자 요한도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예수의 무덤은 큰돌로 닫혀져 있었고(막16:3-4),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서 봉인되어 있었다(마27:65-66). 이 돌문은 입구에 움푹패인 홈이 있어 고정되게 되어있으며 장정 다섯 명 정도가 힘을 합해야 겨우 열 수 있는 문이었다. 이 여인들의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을 여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면서 길을 떠나는 것을 막16:3에 기록했다.
2절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요한은 공관복음에 비해 이 부분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마28:2-7, 막16:5-7, 눅24:4-7). 어쨌든 여인들은 무섭고 놀란 마음에서 그 제자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아마 시체를 누가 다른 곳으로 옮겨 더렵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가져갔다" !'Hran(에란)은 비인칭 동사로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갔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는 막달라마리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3-4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갈새" h[rconto(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 제자가 함께 뛰어가고 있음을 연상케 한다. 얼마나 급히 뛰어갔는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도착했다. 눅24:12에는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뿐이었지만 요한은 다른 제자(요한 본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증거 함으로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옮겨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말했다면(마27:63, 64) 이런 반응을 베드로와 요한이 보일 리가 없었다.
5-6절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한의 성격으로는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푸려" parakuvya"(파라큎사스) 몸을 안으로 굽히며 자세히 관찰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침없이 무덤 안에 들어가 확인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용기 있는 행동에 8절 요한도 함께 들어가서 확인했다.
7절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5, 6, 7절이 함께 전하는 것은 "세마포" ojqovnion(오도니온) "베옷"(마27:59)이다.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개켜" ejntetuligmevnon(엔테튈리그메논) "봉하다, 싸다"로 접혀있는 것이 아니라 동그랗게 말려있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면 세마포가 이렇게 잘 정돈되어 있기는 힘들다.
9절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와 요한은 성경에서 예표한 부활의 의미를 아직까지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을 덧붙였다(시16:10-11, 110:1, 4, 사53:11-12).
10절 11절에 마리아가 무덤에 머물러 있었던 것에 반해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제자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눅24:12).
20:11-18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1절 제자들은 돌아간 상태에서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울면서" klaivw(클라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을 말한다.
12절 흰 옷 입은 두 천사인 사람이 있었다. 성경에서 천사가 나타날 때 후광을 가지고 날개를 달고(사6장) 나타나는 경우보다는 보통 사람으로 나오는 예가 더 많다. 또한 이런 광경을 처음 목격했을 마리아에게는 충격이었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게 기록한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일치된 기록을 전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또한 마리아가 전해준 이야기를 제자들의 상상이 포함되어 이렇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마28:2), 마가는 "힌 옷 입은 한 청년"(막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눅24:4)으로 각기 기록했다.
13절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삼일 전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 그 처참함과 슬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장래와 장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무덤에 둔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은 또 한번의 기막힌 일이었다. 예수를 사랑하고 따라다닌 그의 슬픔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도 그의 슬픔에 제일먼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천사가 그가 우는 슬픔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다(눅24:5, 6).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처음에 무덤에 함께 왔던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과 달리 "내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아무도 없고 혼자임을 말해준다.
14절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의 어떤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천사가 가리켜 일러주었는지 모르지만 돌아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전의 몸과는 다른 상태 즉 신령한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었다(고전15:51-53).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눅24:13-16), 해변에서 제자들(요21:4)도 처음에는 몰라보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유대인들 역시 예수의 부활 사건의 첫 증인이 그들의 생각에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꾸며낼 사람은 없었다.
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께서도 13절 천사가 마리아에게 질문한 것과 같은 내용을 하셨다. 마리아는 이 때 까지도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있었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덤 주위에 있을 사람은 '동산지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여기서 "주여"는 Kuvrie(퀴리에)로 kuvrio"(퀴리오스)와 다르게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 주님을 부른 것은 아니다.
16절 계속해서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하자 먼저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이에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Rabbouni(흐랍보니) "나의 주"라고 대답했다. 이 단어는 아람어 형태로 헬라어로는 didavskalo"(디다스칼레) "주인, 선생님"에 해당하는 말이다.
17절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는 왜 예수께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예수께 단순히 만지려 했던 것(KJV:Touch Me not)이 아니라 포옹하려고 했기 때문에 NIV 번역과 같이 "나에게 매어 달리지 말라"(Do not hold on to Me)는 의미로 '새로운 관계성'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지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마28:9, 요20:27). 그러나 원어의 a{ptou(합토우)를 "만지다"를 "매달리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매달리는 것으로 표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즉시 승천하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아버지께로 간 후에를 승천하시는 것으로 보면 마24:9과 모순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생전의 모습을 가지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태도를 보였고 예전으로 복귀하려는 그의 생각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 올라간다 하라를 혹자는 전반부의 부분과 연결하여 다시 해석하기를 '나를 만지지 말고 먼저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로 옮기기도 한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올라간다는 사실은 구원의 역사를 마무리 하는 것이며(요6:53-62), 그가 다시 오실 것을 뜻하며(요14:18, 23), 또 약속하신 성령을 임재를 말한다(요7:39, 요16:7).
18절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 이르니라의 본문에는 ajggevllousa(앙겔루사)가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a[ggelo"(앙겔로스) "천사, 기쁜 소식을 전한다"의 파생어로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이 단어는 "이르니라"는 ei\pen(에이폰) "말을 전하다"는 단어와 함께 지금 마리아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전달하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마리아가 전한 내용은 내가 주를 보았다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목격하고 확인한 사실과 또 주님이 당부하신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마리아와 다른 이의 이 소식에 대해서 누가는 제자들이 믿지 못하고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눅24:11)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9-25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19절 안식 후 첫날 이 날은 안식일(토요일 오후 해가 지고) 다음날로 현재의 일요일이 된다. 이 날에 그리스도가 새벽에 부활하시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 날은 "주의 날, 주일"이라고 부를만한 날이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첫 열매되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주의 날'이라는 공식적인 칭호는 고전16:2, 계1:10에 나타나지만 이 날이 안식일과 구별되는 분기점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로마인들의 태양의 날(Sun day)로 인정되어 A.D. 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서 공휴일이 되면서 '주일'을 성수하기 좋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태양의 날'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것이다. 눅24:37-44에는 제자들이 두려워 예수를 유령인가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fovbo"(프로보스) "공포, 놀람, 두려움"으로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또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몰라 겁에 질려 떨고있으면서 문을 "닫고" i{sthmi(히스테미) "붙잡다, 고정하다" 있었다(눅24:33-36).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Eijrhvnh(에이레네) "평강"은 '샬롬'에 해당하는 말이나 좀더 넓은 의미의 "고요, 번영, 다시 하나가 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도 "샬롬"과 같이 일상적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나(왕5:21, 삼상1:17, 마10:12, 행16:36) 예수께서 평안을 말씀하신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임이 분명하다(요14:27).
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체를 보여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 상처를 보여줌으로 제자들은 이전에 입으셨던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계심을 알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부활 후의 몸은 이전의 몸과는 다른 상태였다. 눅24:39-40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발에도 있음을 기록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ejcavrhsan의 어근 caivrw(카이로)는 "환영하다, 행복하다"의 뜻이다. 제자들은 두려움이 컸던 만큼 주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은 컸던 것이다. 이 단어는 마2:10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에 사용되었다.
21절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의 말씀과 같지만 앞에서는 처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며 지금은 그들을 보내시기에 앞서 주시는 말씀으로 그 뜻은 갔지만 의미는 다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주제는 요한복음 13장-17장까지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인데 부활하신 후에도 연속시키고 계신다. 요한 이런 사상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연결시키고 있고 결코 혼자가 아니시라는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요3:34, 요5:36, 요6:57, 요7:29, 요8:42, 요11:42, 요17:3, 8).
22절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는 마치 창2:7의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모습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때에 성령을 주셨지만 제자들은 성령을 50일 이후 오순절이 되어서야 받게된다(행2:1-4). "받으라" Lavbete(라베테)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에게 떡을 축복하시고 "받아 먹으라"(마26:26, 막14:22)고 하신 것과 같은 용어이다.
23절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2:6, 10). 그러나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또한 그를 믿고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선포를 할 수 있다. 이 권한이 처음 부여된 것은 제자들이었다. 또한 만약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죄 가 그대로 있다고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의 특징은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24절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던 자리에 없었다. 어쩌면 도마가 믿음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디두모" Divdumo"(디뒤모스) 아람어를 옮겨서 Qwma'"(도마스)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아람어의 뜻은 '쌍둥이'이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다른 제자들(10명)은 도마에게 주님을 만났던 사실을 말했다. "이르되" e[legon(에레곤) "말하다, 자랑하다"는 미완료 시제의 동사로 계속해서 여러 제자가 중복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던 사실을 자랑하면서 그의 못 자국과 상처들에 대해서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다. 부활의 사실을 도마가 믿지 않는 것은 도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믿지 못했었다(막16:11).
20:26-31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26절 여드레를 지나서는 부활하신 이후 8일이 지났으면 일주일이 지난 다시 주일(일요일)이 되었을 때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날 것을 약속하셨다(마26:32). 이 약속은 천사들을 통해서도 알려주었다(막16:7).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유대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이런 제자들의 행동에 제자들이 믿음이 부족하였다고 보는 견해와 도마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고 보기도 한다.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주님이 나타나셨다. 문이 닫혀있던 사실을 언급한 것은 제자들의 두려움이 계속되어 닫혀 있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그 문을 열고 오시지 않았다는데 있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것은 '도마' 한사람 때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미 나타나셨던 적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마가 제시한 믿음의 조건들에 대해서 허락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기독교의 믿음에서 부활의 믿음을 빼고는 믿음이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믿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a[pisto"(아피스토스) "믿지 않는, 믿음 없는" ajlla;(알라) "그러나" pistov"(피스토스) "확신하는, 충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해 주신다. a[pisto"(아피스토스)는 마17:17, 막9:19, 눅9:41 고전6:6, 고전14:22, 고후4;4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켰다.
28절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도마가 이미 예수님을 확인했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ajpekrivqh(아포크리노마이) "스스로 말하다, 자진하여 대답하다"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kuvriov" mou kai; oJ qeov"(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라고 고백한다.
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께서는 도마의 믿음은 인정하셨고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이 불가결한 요소가 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육체적 표적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에게 축복하셨다(요20:29, 벧전1:8).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과 같이 다니고 보지는 못했지만 반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축복'을 가질 수 있다.
30-31절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shmei'a(세메이아) "기적, 이적, 표적"이 poluv"(폴뤼스) "양이 많은, 수가 많은" biblivw/(비블리온) "책, 파피루스"에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요한은 신학적인 주제로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공관복음에서 나오는 이적과 기사 35개 중 요한은 7개만 다루었다. 자신이 이적과 기사를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31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서의 내용은 사실상 20장에서 결론을 맺었으며 본 장은 후기 형태로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를 어떻게 예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지(15-19절),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의 재림이 있게 된다는 초대 교회 내의 헛소문을 교정하고(20-23절), 예수 부활 이후의 선교사역이 제자들에 의해서 수행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21:1-14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심
1절 디베랴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는데 바다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불려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요6:1), '긴네렛 바다'(민34:11), 겐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러졌는데 "디베랴 바다"라고 불러진 이유는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타내셨으니 ejfanevrwsen(에파네오센) "명백히 나타내다, 밝히 드러내다"로 요2:11에 처음 갈릴리에서 표적을 보여주실 때도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하셨다. 이 장소가 다시 갈릴리 지방이라는 것과 처음 표적과 이제 부활의 육체를 입으신 예수께서 자신이 보여줄 표적(마12:38에서 요나의 표적-부활)을 그동안 언급하셨다는 흥미로움이 있다. 본문은 요한이 제자들과 갈릴리로 갔음을 별도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간접적으로 제자들이 갈릴리에 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2절 이곳에 있는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 다른 제자 둘(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한다)
3절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고 다른 제자들도 쫓았다. 베드로의 이 말은 그가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선포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무례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없이는 이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4절 날이 새어갈 때 prwi?a"(프로이아스) "새벽,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안개가 있어서, 바닷가에 계신 예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알 수 없었는지는 모른다. 이러한 상황적인 면에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설마 이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5절 얘들아 Paidiva(파이디아)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나 현재 어른들에게도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옮긴다면 "여보게들, 젊은이들" 정도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mhv ti(메 티)로 부정관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이미 고기가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묻는 것이다. "고기"로 사용된 prosfavgion(프라스파기온)은 "빵과 함께 먹는 반찬"을 의미하는 물고기를 뜻한다. 아마 예수께서는 '아침으로 먹을 물고기를 잡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 같다.
6절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이 장면에서는 갈릴리 어부생활을 했던 제자들을 테스트하려고 했다거나 그들의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배 오른편) 고기가 가는 길을 아시고 가르쳐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밤새도록 던진 그물을 그저 한번 더 던져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제자들은 이미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눅5:1-11). 바로 말에 주춤거릴 필요 없이 순종했던 것이다. 그리하면 얻으리라 "얻으리라"로 번역된 말은 ijscuvw(이수퀴오) "할 수 있다"이다. 실망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네 말대로 오른편에 한번 더 던져보아라 너희는 할 수 있다'는 외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아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순간 힘이 솥아 오르며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eJlkuvsai(엘퀴에인) "끌어올리다"는 그리스도에게 사람을 인도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요6:44, 요12:32).
7절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일먼저 주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해 편안한 복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러 그는 헤엄치고자 했다. 배가 서서히 육지에 다다르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영을 하려면 옷을 벗고 있는 상태가 편안한 것인데도 그는 옷을 다시 입었다. 이것은 예수를 만나기 위한 그의 예의로 옷을 입은 것이다.
8절 오십 간쯤 phcw'n diakosivwn(페콘 디아코시온)은 "이백 규빗"인데 1규빗이 45cm 된다고 볼 때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이다(공동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했다).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고기를 옮겼다.
9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지칠 대로 지쳐있는 제자들을 위해 마련 예수님의 이 아침준비는 제자들이 감동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0절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시키신 것은 예수께서 마련하신 고기가 부족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신 분이(요6:1-13) 부족하게 준비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잡은 고기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에 대한 축복과 교훈을 주고자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1절 일백 쉰 세 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이 내용으로 인해서 수많은 우화적 성경해석을 낳게 했다. 그러나 요한이 숫자까지 기록한 것은 이 날에 있었던 일이 역사적 사실이며 어부들은 고기를 팔거나 나룰 때 고기를 세어서 하기 때문에 고기의 숫자를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다. 한편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ijcquv"(잌뒤스)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릿글자를 따 놓은 것과 일치해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했다.
12절 와서 조반을 먹으라 ... 묻는 자가 없더라 이미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이와 같이 하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따뜻한 음성에 이미 그가 주님이신 사실을 알았고 제자들은 그 아침의 현실이 꿈처럼 믿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으며 제자들은 밀려드는 감격에 차마 예수께 말을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13절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에서 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시고 또 모자라는 부분을 공급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잡아온 것은 고기였다. 빵은 예수께서 마련하신 것이었다. 혹자는 이 때의 일이 오병이어(요6:1-13)와 같은 역사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14절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 후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요20:16), 두 번째 도마 외의 제자들이 모였을 때(요20:19-23), 세 번째 도마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이 모였을 때(20:26-29)와 그리고 네 번째 나타나심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세 번째가 된다.
21:15-23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 부탁하심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불렀던 이름이다(요1:42). 예수님이 지어주신 '반석'(베드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요18:17, 25, 27) 이름에 맡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책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해서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다른 제자들은 어떠하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부하던 베드로의 자신감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마26:33, 35, 눅22:33, 요13:37).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는 ajgapa'/"(아가페) "신적 사랑, 헌신적인 사랑"으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filw'(필로) "애정"으로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 단어의 구분을 요한은 특별히 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적인 사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요3:16, 요5:20, 요14:21, 요16:27).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음에도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였다. 본 절과 17절까지 '먹이라' -> '치라' ->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된다. '먹이라'는 것과 '치라'는 명령은 구분 된다기 보다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그만큼 베드로에게 주어진 양들은 매우 어리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16절 두번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어서 질문하시고 본 절에서는 베드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묻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전 절에 종속시키면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로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대답 또한 내 양을 치라이다. 17절에도 나타나는 "내 양"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에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주님의 양을 돌보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17절 세 번째 ... 근심하여 예수께서는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계신다. 베드로는 아마도 자신이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순간 그는 "근심하여" lupevw(뤼페로) "고통 하다, 슬프게 하다, 서운하다"의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진심으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아시오매" ginwvskw(기노스코)라고 말했다. 15, 16절에서 "아시나이다" oi\da(오이다) "보다, 깨닫다"만 있는데 본 절에는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하여 oi\da", su; ginwvskei"(오이다스 호 기노시스) 자신이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친히 더 잘 아실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같은 의미의 질문과 대답을 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세 번이나 부인하여 떨어진 명예를 확실히 회복시켜 주셨고 베드로에게도 자신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ajmh;n ajmh;n levgw(아멘 아멘 레고)는 요한만이 사용한 것으로 요한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임무나 명령을 할 때 아멘 아멘을 사용했다. 요한은 또한 '아멘'이라는 단어를 항상 말씀의 첫 부분에 두 번을 반복적으로 기록함으로 말씀의 중요성을 증가시켰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이것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행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띠 띠고"는 유대인의 옷은 띠를 제대로 메어야만 제대로 갖추어 입은 옷이다.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에 대한 예언이 틀림없다. 베드로도 십자가에 달려서 팔을 벌리고 죽었다. 이 기록은 1클레멘트5:4, 6:1 유세비유스 교회사(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2.25)에서 전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세 번 질문에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잘 이행하고 그의 마지막까지 보고계시는 주님의 예언이다.
19절 어떠한 죽음으로 "죽음" qavnato"(다다토스)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며 양을 돌보다 순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 doxavsei(독사신)을 돌리는 것이었다. 나를 따르라 !Akolouvqei(아콜루데이) "좇으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베드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임을 말해준다.
20-21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는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 이미 여기서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가 예수를 따르고 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15-17절에서 주어진 "내 양을 먹이라"또한 베드로를 주시해서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마지막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다른 제자의 마지막에 대해서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22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은 현대인의 성경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로 번역되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 suv moi ajkolouvqei(쉬 모이 아콜로이데이)고 반복하신다. 여기서 su(쉬) '너'가 강조를 나타내기 위한 위치에 놓여있음을 살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요한의 운명과 베드로의 운명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이 말씀이 초대 교회에게 잘못 알려졌던 것을 요한 자신이 스스로 밝혀주고 있다. 초대교회 사람들에 의해서 요한은 죽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본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고 다시 정정해 주고있다.
21:24-25 결론
24절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는 본서의 저자가 확실히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로서 베드로와 같이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면은 없지만 반대로 온유하며 예수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본인을 본 복음서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한번도 밝히지 않은 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식으로만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본서의 증인으로 "우리"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정확하게 누구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도 교회들', '에베소의 장로들', '요한의 동역자들' 아니면 본서를 읽는 모든 독자들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25절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는 사실상 본서의 글을 마감한 요20:30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도 좋다. bibliva(비블리아) "책, 두루마리 책"을 가리키는 이 말은 '파피루스'를 말하는데 현재의 종이와 달리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히 이 용어는 신학자 모리스(L. Morris)가 말한 것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본에는 본 절의 마지막에 아멘(Amhvn.)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