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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북조北朝 북주 北周 연대 기원전 557年-581年남북조 시대 북조 북주 北周
中国历史朝代
출처: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북주 北周
북주(557년~581년)는 중국역사상 남북조 시대의 북조 중 하나로 후주(後周, 5대 이후 유용(用用, 곽위와의 혼동을 피함), 우문주(宇文周)라고도 한다.서위 권신인 우문태(宇文泰)가 국기를 세우고, 우문각이 우문호(宇文護)의 옹립 아래 정식으로 건립되었다.역오제는 모두 24년이다.
서위공제 3년(556년), 실제 손서위 정권을 잡은 우문태(宇文泰)가 죽자 셋째 아들인 우문각(宇文角)은 정식으로 천왕, 주공(周公)으로 칭해졌다.이듬해 초, 우문(宇文)씨폐서위공제는 건국하였고, 국호주(國號周)는 장안(현재의 시안한 장안성 유적)에 수도를 지어 북주(北周)라 칭하였다.
북주 효민제우 문각은 나이가 어리고, 대권을 장악하고 있다.사촌 우문호수.9월, 우문은 효민제를 호살하고, 우문육을 황제로 세웠다.우문호는 우문위(宇文护) 2년(560)에 독살되었으며, 우문옹( 帝 。)을 제자로 하여 북주무제(北周武帝)라 칭하였다.
건덕 원년(572년), 주무제 우문옹지주권신 우문호(宇文護)를 죽이고 국정을 직접 이끌며 다방면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577년, 북주무제는 북제를 멸하고 북으로 통일하였다.방. 581년 양견수선대주(楊根水)가 주(周)를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수(隋)로 개호하여 북주(北周)가 멸망하였다.
중국어명 주외문명 킹덤 Of Zhou는 북주, 우문주, 후주 시간 범위 557년에서 581년 도성 장안의 주요 도시인 친주, 량주, 옹주 등의 어종 중국어, 선비 어화 오수전, 샘, 오행포, 영통만국 인구수량이라고 별명하였다.약 1250만, 3250만(멸제후) 주요민족인 한족, 선비족, 강족, 저족 등 국토면적 180만km², 271만km²(멸제후) [1]의 개척자 우문각
카테고리
1국호
2 역사
▪ 북위분열
▪서천 공략
▪ 북주 조성
▪일통 중원
▪평란과 망국
3 정치
▪ 덕치 추앙
▪ 고용 방침
▪ 부패 척결
▪ 법
▪관제 개혁
4 경제
5 문화
▪ 사상문화
▪억제불도
6 군사
▪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다
▪ 부병 제도
▪ 군사력 증강
▪립 팔주국
▪ 12조 신제
7인구
8대 황제 가계
국호
북주의 국호는 "주"로, 우문각이다.작호는 명명되었다. 우문각(宇文 。)은 제(帝)를 칭한 후, 국호로 '주(周)'자 앞에 방위를 붙이고 '북(北)'자를 붙였다.북주(北周)라고 부르는 이유는 북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북주(北周)'라는 명칭이 '주(周)'라는 다른 정권과 구별될 수 있도록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동시에 북주, 그리고 '후주' [3] '우문주' [4]와 같은 호칭이다.
역사
북위분열
무사용
무사용
하발악은 북위 왕조의 명장이다.반란이 일어난 북위 말년에 하발악은 2천 명의 피폐한 졸로 삼진의 땅 반란 강적을 휩쓸었다. [5] 이주족이 멸망한 후 하발악은 관농을 옹위하고, 고환과 양대 군사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서로 두려워하였다.결국 하발악은 고희에게 몰래 몸을 맡긴 후모천열에게 살해된다.하발악의 죽음에 여야가 흔들리다.효무제는 그에게 시중, 태부, 녹상서사, 도독관중 20주 군사, 대장군, 옹주 자사를 선사하였다.시호는 무장(武壯)이다. 하발악(賀發岳)의 부하가 그 시신을 받아 옹주(石州) 북석(北石) 안원(安原)에 장사하고, 이후 우문태(宇文泰)를 총수로 옹립하여 후모천열을 물리치고 관롱(關陇)의 주가 되었다.사람
북위 효무제 토벌 고환 실패 후 관문으로 도망가다. 우문태는 그를 수용했다.얼마 후 효무제는 우문태에게 피살됐고, 우문태는 서위문제로 옹립돼 서위(535)를 세웠다.동방의 고환(高欢)은 효무제가 관문으로 도망치자 동위 효정제를 옹립하고 조정을 하북 업성으로 옮겨 동위(534년)를 세웠다. [6]
서위의 초창기에는 우문태가 대정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국세는 불안한데 우문태는 과감하게 위효무제 원수를 독살하고 남양왕을 보화(寶 。)로 세워서 황제가 되었다고 하여 새로운 황제가 그의 지배를 받아 국정을 독차지하였다. [7] 우문태는 동위대군을 세 번 싸워 대파하고 관문(關門)에서 우문(宇文)의 기초를 다졌다.우문태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며, 사람을 쓰는 데 한 가지 격식에 구애되지 않는다.이런 명장들이 제 몫을 해냄으로써 역할이 극대화됐다.서위를 더욱 강성하게 하다.그는 왕비와 양충의 등용에 힘썼으며 수나라 양씨 역시 이에 따라 출세하였다. [7]
서천을 공략하다.
후경이 멸망한 같은 해에, 소서는 강릉에서 황제로 등극하였다.한편, 그의 동생 샤오기도 청두에서 왕위에 올랐다.이듬해에 소기가 발병하여 강릉을 공격하여 패잔하여 죽임을 당했다.서위가 기회를 틈타 청두를 함락시켜 익주를 점령하다. [8]
양태청 3년(549), 후경공략 함량도건강, 장강 하류 강북의 여러 군에서 동위가 많이 점령하였다.창장(長江) 중상류 지역에 주둔하던 양종실(梁宗室) 제왕(帝王)은 자활을 걸고 서위의 힘을 빌어 서로 공격하며 제위를 다툰다.양양의 양옹주 자사, 악양왕 소萧이 형주 자사, 상동왕 소서를 침공해 서위에 패주하고 양왕이 되었다고 한다.
서천
서천
대보삼년(552) 소서는 강릉에서 이름을 얻었다제(는 양원제)입니다.서위에 출병하여 양, 익이주를 점령하고 이미 청두에서 왕으로 칭송되고 있는 양익주 자사, 무릉왕 소기를 제거하십시오.승성 3년, 양원제는 서위에게 그 자리를 돌려달라고 할 정도로 오만한 언사를 했다.9월, 서위대정승우문태파주국우근총영사중산공우문호,대장군양충등장5만 병사를 거느리고 양도 강릉으로 진격하다.10월, 서위군은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 서북)에서 번(樊, 지금의 후베이 양번), 덩(鄧, 현재 덩저우) 일대로 진격하여, 샤오詧이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도왔다.양원제는 소식을 듣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병사를 조정하여 서위군에 저항하였다.십일월 서위군도한수우문호양충봉은 정기를 이끌고 먼저 강진(江津, 지금의 형사 동남쪽)에 이르러 강길을 끊고 양수군을 동쪽으로 퇴각시켰으며, 하류 원군도 건널 수 없었다.양원제는 강릉의 요점을 나누어 나무들을 외곽에 배치하였다.위근군이 와서 장벽을 쌓고 내외를 차단하라고 명령하였다.강릉 남안 마두에는 양신주 서세보, 진안 왕 사마임약 등의 인솔군이 축루해 응원하고 있다.
시량 각처에 징병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서위군은 여러 길로 배치되었다.공성은 처음 좌절을 맛본 후 맹공을 가하고 내응하여 서문과 외곽으로 들어갔다.양원제는 보르네 성에서 물러나 그날 저녁 관헌에게 도서 14만 권을 분신하도록 하였고, 다음날 항복한 후 살해되었다.12월에 우근은 사절로 돌아와 포로로 잡힌 양왕공과 백성 수만 명을 장안으로 몰아냈다.서위가 소천을 양주로 세우다.그 후 장강 중류 상류의 가시나무는옹량익제주는 모두 서위의 소유이다. [9]
북주를 건립하다
서위공제 3년(556년) 우문태(宇文泰死적장자 우문각이 안정군공, 태사, 오오츠카 재로 계승했다.제자들은 어리고, 우문은 국가의 대정을 호위하여 관장한다.우문호는 내몽고 무천 사람, 우문태의 조카이다.우문호는 서위, 북주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우문씨정권이 서위에서 북주로 넘어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일환이다.우문호는 옛날 우문태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우근 대장의 지원 아래 군국 대사를 관리하고 대사마를 위해 국공을 봉진시켰다.그는 557년 우문태(宇文泰)가 아들 우문(宇文)의 자손이 여리고, 우문태(宇文泰)의 권세와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조기 정권을 잡으려다가 서위공제(西偉公帝, 명원곽)의 선(先)이 주(周)에 놓이게 되었다.곧 원곽을 죽였다. [9]
같은 해, 우문각은 주천왕을 칭하여 북주를 세웠다.대사마를 호위하여 진나라 공인을 봉하다.우문각 역시 소년은 굳세고 굳세며 불평불만이 우문호의 전권이었다.조귀, 독고신 역시 우문호에 대한 불복이다.그들은 함께 우문호의 제거를 독려했다.그래서 우문각은 무사들이 황궁 뒤뜰에서 어떻게 하면 우문호를 체포할 수 있는지 연습하고, 대신들과 상의하고,어느 날 궁중잔치를 벌이기로 하고 우문을 잡아 죽였다.그들의 음모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을 누가 알았으랴, 누군가 우문에게 밀고하고, 도리어 그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여 조귀(趙貴, 온 집안이 베껴 죽임)를 죽이고, 독고신인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후에 고독의 편지도 하사받았다.559년, 우문각은 폐위되었다(이후 독살됨). [9]
572년 북주구획
572년 북주구획
사후에 우문호천오츠카 재(당시 재상)우문태의 또 다른 아들 우문육을 옹립한 것은 주명제였다.우문호가 보니, 우문이 온문유아를 육성하여 바로 그를 황제로 세웠다.우문위는 우문호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약하고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일을 처리하면서 점점 자신의 총명함과 재주를 드러내게 되었다.그의 주위에는 점차 노신들과 원훈들이 모여들었다그는 경제 발전에 힘썼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이를 탐색하기 위해 우문은 능청스럽게 황제에게 군권을 제외한 모든 권력을 넘겨주는 '귀정우제(歸政友帝)'의 행동을 했다.우문위가 조금도 사양치 않고, 전표대로 다 받고, 자신의 이름을 부를 줄 누가 알았으랴.호가 황제(옛 북주의 최고 통치자는 황제 대신 천왕으로 불렸다)로 공식 바뀌었다.이 모든 것이 우문호의 의구심과 불안을 야기한다.그리하여 서기 560년에 어주를 시켜 명제의 먹이에 독약을 놓아 독살하였다명제. [9]
그 후 우문태 4남 우문옹을 황제로 세우고주무제를 위한 것이지, 실제 대권은 여전히 그가 쥐고 있다.우문호는 비록 성품이 온화하지만 대세를 알지 못하고, 위임하여 비인간적이고 오래 전권을 휘두르고, 또 원래 군략이 없으나, 두 번 벌제하여 모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제자들은 탐악하고, 요인들은 제멋대로이며, 어리석은 정치로 백성을 해친다.우문옹과 제위왕 우문이 직접 기획하여 건덕원년(572년)에 우문호를 주살하여 중탈하였다.정권. [10]
중원을 통일하다.
북제후주(北齊後主) 고위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혼군( 昏君)으로, 이정에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인데, 일상 생활은 매우 사치스럽다[11].고위직은 종일 총신, 미희들과 어울려 비파를 타며 무수(無水)의 노래를 불렀고, 근시는 화자를 백 번 만났다.제나라 백성들이 무수천자라고 부르는 별칭을 그에게 주었더라고위직은 그가 총애하는 개말매닭까지 의동군관개부로 봉했다.북제의 정치는 칠흑같이 어둡다. [12]
주무제우문옹
주무제우문옹
북주 무제는 북제의 혼탁한 정세를 읽고 출병하여 벌제를 결정하였다.575년 7월, 저우무제는 우문순(宇文純), 사마소(司馬 。)에게 전삼군(前三軍)의 통괄을 명했고, 우문성(宇文盛), 후모천경(後母陳琼), 우문(宇文)은 후삼군(後三軍)의 통괄을 불렀다.양견, 설판, 이목 등은 군대의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갔다.주무제는 스스로 육만 대군을 거느리고 하음(河陰)의 전쟁을 직시하였다.주군이 북제 경내에 들어왔을 때, 기율이 엄하여, "나무의 곡식을 짓밟는 것을 금하고, 범한 자는 모두 참수한다." [11] [13] 민심을 얻는다.오래지 않아, 주무제가 소속된 곳은 순조롭다.하음성을 함락시켰다맹진현 동). 제왕헌부(齊王憲部)는 무제(武濟)를 뽑고, 뤄커우( 洛口)로 들어가 동, 서이성(西二城)을 함락시켰다.주군이 중성(中城, 지금의 맹현 서남쪽)을 포위한 지 20일이 되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주무제가 본부를 인솔하여 김용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다.9월 제우정승상 고아나 팔이 진양솔대군으로부터 하양을 구원받자 주무제는 급병에 걸려 퇴병할 수밖에 없었다. [14]
이듬해인 576년 10월, 북주(北州)에 다시 출병했다.이번 벌제로 주무제는 14만 5천 명의 병력을 집중시켜 전번 진로를 바꿔 직접 진주를 진주로 진격했다.그는 군신들에게 "앞에서 강 밖으로 나가 부등(拊 背)을 치며 목을 조르지 않았다.진주 본고환(晋州本高欢)이 지은 곳은 진섭(鎭 摄)이 중하였던 곳으로, 오늘 공격하면 피필(援必)이 구원하고, 오엄군(吳嚴軍)이 기다리고,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된다.그리고 파죽지세를 타고 둥지를 틀고 문궤에 오르게 된다"[11].주군은 월왕성, 기공으로 왕위를 뛰어넘었다.수공양견 우삼초왕검, 대장군 보태, 광화공구는 좌3군, 제왕헌, 진왕순은 전군이었다.10월 하순, 주군이 평양성 아래로 진격하자 북제 진주자사 최경고 등이 투항했다.평양은 진양의 문호로서 군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주무제는 지난번 벌제 실패의 교훈을 받아들여 개부의동대장군이 양사언(梁士彦)을 진주 자사로 안정시키고, 유정병은 만진(萬鎭)으로 평양성을 지켰다. [14]
북제후주(北齊後主) 고위(高衛)가 주군(周軍)의 평양 진격 때 비빈 풍숙비를 데리고 천지(天池, 지금의 산시(寧武)현 서남쪽 관우(官涔山)에서 사냥 중이었는데 진주(晋州)가 급한 문서를 아침부터 정오까지 비마(飛馬)로 세 번이나 전송했는데, 우승상 고아나 팔이 고위(高衛)에게 보고하지 않았다.저녁때가 되자 메신저가 "평양은 이미 함몰했다"고 말했다.고아나 팔뚝은 고위위 전투 상황까지 올라갔지만, 풍숙비는 "더 죽여달라"고 요구했다.포위"라는 글을 올렸다. 고위층이 이렇게까지 했다니.긴급한 전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다풍숙비와도 마음껏 사냥을 했다.당시 이상은의 《북제2수》는 시운(詩雲) : "만기(萬機)에 견줄 만한 웃음을 지으면 성 안의 군복을 가장 많이 입게 된다.진양은 함휴하고 돌아보았으니 왕에게 한 번 더 사냥을 부탁한다"고 말했다.바로 아이러니다. [13] [14-15]
북주북제교계
북주북제교계
11월 초에는 북제 후, 제군 주력 십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평양을 포위하고 주야로 쉬지 않고 공격하기 시작했다.성중의 상황은 위급하여, 성첩은 모두 없어지고 성벽은 겨우 몇 길밖에 성벽이 남아 있지 않다.제주에는 짧은 병사들이 서로 맞닥뜨리거나 교대로 드나든다.주외원조로 성지 수호 장병들이 당황하자 양사언은 장병들에게 나는 오늘에 죽고 내가 먼저라고 말했다.그러자 주군(周軍)이 용감하게 앞을 다투다.제군이 조금 물러나자, 양사언은 즉시 성중 군민은 물론 부녀자들까지도, 낮에 명령하였다.밤에 성을 쌓으면 사흘 만에 성벽을 쌓는다.다 지었습니다. 제군들이 땅을 팠다도공성(道攻城)이 무너지고 한 곳이 함락되자 장병들이 허를 타고 들어왔으나, 이 긴박한 상황에서 고위직은 갑자기 장병들에게 공성을 잠시 멈추라고 명령하였다.진주 성서석에 성인 유적이 있는데, 고위에서는 풍숙비와 함께 가보고, 풍숙비는 화장을 하고, 한참 늦게 들어온다고 전해지고, 그 사이 주군은 시간을 다투어 나무 판자로 갭을 막았다.고위도 공성에서 쏜 화살에 맞아 풍숙비가 다쳤고, 공성의 재목을 빼내 원교를 축조했다.이렇게 난리 통에 제군은 성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시기를 놓쳤다. [14] [16-17]
12월에 주무제가 장안으로부터 평양으로 향하였는데, 주군의 다른 모든 길에도 평양이 모여 약 8만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주군이 성안에 임해 진을 쳤고, 동서가 20여 리에 이르렀다.처음에 제군은 주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성남에 참호를 뚫고 교산에서 분수에 이르기까지, 제왕고위가 주군이 오는 것을 보고, 제병에게 참북에 포진하도록 명령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주무제는 제왕헌에게 허실을 보러 오라고 명했고, 제왕헌은 자신 있게 주무제에게 "파지후식하라"고 말했다.주무제는 듣고서 매우 기뻐했다."네 말마따나 나는 걱정이 없소!” [11] 주무제는 말을 타고 주군을 돌아보며 소리를 지르며 위로했고 장병들은 그 사실이 알려지며 정신이 더욱 진작됐다. [14]
북제 전 북주의 판도
북제 전 북주의 판도
양군이 교전을 벌이며 실력이 엇비슷했으나 제군이 조금씩 후퇴하자 펑슈빈은 "제군이 졌다.제록상서성 양왕 무티파는 고위에게 "빨리 가, 빨리 가!"라고 급히 말했다.고위직은 풍숙비를 데리고 급히 고량교로 도망갔다.제나라 군주가 도망치자, 갑자기 군심이 대란하여 연전연패하고 만 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군자 갑전, 수백 리에 걸쳐 산적을 버리다." [13] [14] [18]
평양전에서도 북제의 주력은 사실상 무너졌다.고위위는 북삭주(금산 서삭현)로 도망가 투신했다.그가 진양성을 나서자 백발백중으로 도망쳤고, 무티파도 대세가 기울자 돌아서서 주무제로 향했다. [14]
제후주(齊後主) 고위(高衛)가 업성으로 도망가 군용(軍容)을 재정비하려 하자 휘율효경(斛律孝慶)이 장병들을 접견해 달라고 부탁하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라"며 미리 준비한 강고문을 만들어 놓았다.고위직은 장병들에게 다가가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폭소를 터뜨렸다.고위험의 웃음에 좌우가 따라다니며 웃었다.장병들은 임금님이 안 급할 텐데 왜 우왕좌왕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그리하여 모두 전투심이 없었다. [14]
고위도 업(uper)에서 여덟 살짜리 아들 고항에게 황제 자리를 내주고 태상황(太上皇) 노릇까지 했다.서기 577년 정월에 주무제가 군대를 이끌고 업성을 함락시키자, 고위직은 먼저 하루 전에 제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제주에서 청주로 피신하여 진조에 투항하여 북주의 추격병에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가 이듬해에 피살되었다. [19]
주무제가 멸제하고 북방을 통일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동서위 분단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분단의 할거국면을 끝내고, 인민을 전쟁으로부터 재건하고, 생산을 재개하며, 북방 전체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와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수(隋)의 통일중국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북주북제의 통일이 없었다면 훗날 남북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3] [19]
평란과 망국
코끼리 2년(580년) 5월 11일 북주 선제 우문윤이 병사했다.주정제 우문은 나이가 어리고 좌정승상은 양강하고 독실하다.양견은 북주종실의 생변을 예방하고 그 통치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천금의 공주가 돌궐에 시집갈 것을 사사로 하여 조조, 진, 월, 대, 등 5왕이 입조하였고, 대위가 늦어짐에 따라 소중이 될 것을 기대하여 이의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선제를 장사지한다는 구실로 하여 그 자위를 늦게 왕위에 불러들였다.6월에 대위는 더뎌진 양견의 공포에 떨었다.전권은 북주에 불리하고,공개적으로 출병하여 양견에게 반대하다.지난 7월, 청주총괄위(청주총괄위)는 근태( 迟勤)를 겪으며 극성을 부렸다.또한, 위(衛)·여( 。)·소( 沼) 등을 통칭하였고, 강남 진(陳)나라에 아들을 양성하여 지원하도록 하였으며, 병주(合州, 치진양, 지금의 태원 서남)에 사람을 파견하여 주(柱)에 내려오게 하고, 이목(李木) 총통에게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20]
북주 정권을 탈취한 수문제
북주 정권을 탈취한 수문제[21]
때에 양은 어린 제자를 협박하여 중국과 외국에 호령하였다.이목 병합, 천금공주와 돌궐을 맺어 북방의 재난을 없애고 낙양수어를 강화하여 진토위의 더딘 전략기지로 삼았으며, 계부의 양상희 중령이 먼저 정병 3,000명을 보내 동관을 지키게 하였다.같은 달 10일 양견조 발관 중병을 시켜 위효관을 행군 원수로 임명하고, 농서공 이문을 원수 장사로 문안하였으며, 성공 양사언, 낙안 기원협, 화정공 우문신, 복양공우 문술, 무향공 최홍도, 청하살리실린 등을 총관하여, 군대를 통솔하다.토벌위들은 느리고 판이하다.위 상병은 관동 방방곡곡에 있던 부위의 뒤늦은 세력을 진격해 위장의 뒤늦은 난을 말끔히 다스렸다.전쟁 중에 운주(치안육, 현재 속호북)의 총통인 사마소난, 익주(치촉군, 현재 청두시)의 총통인 왕겸은 연이어 군사를 일으켜 위위의 늦더위에 호응하며 양견에게 반대했다.양견적(楊根适)은 당시 주왕(柱王)의 의(義)와 양예(梁 行军)를 각각 행군원수로 명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또 북주종실 제왕들이 여러 차례 양견(楊坚)을 제거하려 하자, 양견균(楊根균)이 그 권모술수를 부숴버리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20]
양견은 북주 제왕(北周)을 장악하고 중앙통치를 강화하면서 친북방(親北方)과 돌궐하여 리무(李 。)를 쟁취하고, 그 좌익으로 굳히면서 적의 측면을 위협하고, 반군 초기의 상호 협력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 틈을 타 일부 병력으로 양조성김 각지를 동격하여 우익의 위협을 해소하고, 주력행동을 엄호하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태세를 갖추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주력 진격 시에는 도중에 적의 견고한 거점을 놔두고, 적의 주력을 급히 찾아 결전하였다가, 물에서 이겨낸 후, 또업성으로 곧장 달려가 반란을 소멸하다마음을 마침내 신속히 안정시켰다.반란이 군사적으로 수나라를 대신할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22]
서기 581년에 양견은 북주, 개국의 호는 수, 북주향국은 24년에 멸망하였다.
정치
우문태는 신하의 이견을 귀담아듣고, 5년(539년) 경성의 양무문 밖에 대통 5년 만에 붓을 대어 놓음으로써 실수한 것을 구하도록 명령하였다.승상부기실 유규(柳谠)가 충직한 말을 받아 들일 것을 건의하자 우문태(宇文泰)가 흔쾌히 받아들여 사관기사를 요구하였으므로 득실무실하다.이런 우문태의 행보는 서위리치의 청명에 도움이 된다. [23-25]
덕치를 추앙하다
정치에서 우문태는 덕치교화 위주, 법치를 보필하는 통치원칙을 신봉한다.각급 관리들이 유가의 학설을 체득하고 인의효제충신예양염평검약 등을 행하여 이러한 유가의 도덕규범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아울러 효제(孝顺)인순(仁順)예의(禮義)를 인민에게 주입하고, 이러한 유가(儒家)윤리강 상념으로 사람들의 사상을 속박하고, 마음과 지정(志靜)을 사념으로 하여 불성실하고, 통치질서를 안정시킨다. [8] [24-25]
고용 방침
용인에 유현한 자를 봉행하고 자음을 제한하지 않으며, 덕재를 겸비하면 출신이 비천할까 봐 경외의 상이 될 수도 있다.우문태의 이 같은 선관 사상은 문벌의 전통을 깨뜨리는 새로운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서위 이치의 청명함을 보장하고, 한족 사인들이 대거 서위 정권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8] [24-25]
우문태는 이필원(李 陈原)이 후모천열(胡母陳 。)의 장본인 대도독(大都 督)이었으며, 인척(人親)이 되다시피 한 선인들의 사상에 따라 경계심 없이 중용되어 부병을 통솔하는 팔주국 대장군(八柱國大將軍)의 한 사람이 되었다.유민원은 동위 하동군 승, 우문 태극 하동 후 얻은 바로 승상부의 참군(참군)으로 예배되었으며, 이후 우문태의 국책사업을 도운 핵심 인물이다.무공대성이 소소하듯이 우문태는 그를 대적하였다.마음을 위임하여 여담은 없다.외출하여 늘 공무를 미리 배치한다.종이는 넉넉하게 주되, 처분이 필요하면 소산은 그대로 시행하고, 사후에 계고하면 된다.우문태의 유현(有賢)이 거사하고 용인(用人用)이 확실하기 때문에 위(西)위 정부는 상하 협력과 내부 단합으로 각종 정책조치의 원활한 이행을 보장했다. [8] [24-25]
부패를 척결하다.
이치를 다스리기 위해 우문태는 장물 횡령자를 만 삼십필까지 완화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양율의 10필 처형이나 북위 북제의 장만일필자 죽음보다 훨씬 느슨하지만 법 집행을 더 잘하기 위해서다. [26]
그는 느닷없이 일리백 명을 죽여 왕위를 깨끗하게 하였으니 중형이 마땅하오라고 공포하였다.사서는 북주에 '용법이 매우 엄하다'고 기록하여, 일단 뇌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긴 관리가 발견되면 바로 처벌한다. [26]
북주는 과거 탐관에 대해서는 정비법(情备法)으로 전범사면을 면제하되, 단서가 있으면 끝까지 추적해 기록에 기록하도록 하고, 장물소득은 반드시 환수하도록 했다. [26]
법률
법적으로 우문태는 '법불아귀(法不亞貴)'라고 주장했고, 관리(官理)는 우문태(宇文泰)의 처남인 왕세초(王世超)와 같이 진주(秦州)의 자사(自史) 시절 교만하고 주(州)현(縣)을 횡행하다 사형을 받았다.대장군에 이른 정웨이는 법도를 지키지 않아 결국 면직되었다.다른 한편으로 단서자에게는 신중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초독 하에 자통자살하여 억울한 누명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하였다.대통 13년(552년)에 우문태(宇文泰)는 또 2,000여 년간 전해져 온 궁형(宮刑)의 폐지를 명령하였다. [8] [24-25]
관제를 개혁하다
우문태 개혁관제도 부병제도처럼 복고적 색채가 강하지만 전자는 한족 고대사회에서 근거를 찾았고 후자는 선비족의 부족시대에서 힌트를 얻었다.우문태는 이런 탁고개조를 통해 자신의 통치에 정통적 외투를 입히면서 우문씨정권이 민족간의 심리적 장벽을 참작( 。作)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부병제에서는 선비(善非)화를 통해 선비(善非)민족의 감정을 배려하고 부병(府兵) 속의 민족적 경계를 허물었다.우문태는 이를 통해 공고히 다졌다.통치기반을 이루다.25]
경제
우문태는 경제적으로는 유교인 선부후교의 통념에 따라 농산을 적극 권장하고 경작을 장려하는 등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왔다.우선 파괴된 균전제를 되살려 토지 수용, 전란, 천재지변으로 땅을 잃고 타향을 떠돌던 농민과 토지를 재결합해 농민의 생산활동을 가능하게 했다.서위균전제의 수전조(修田 差异調)와 북위(北威)는 차이는 있지만 변화가 적은 반면, 군역제(軍役制)에 많은 변동을 보이며 복무연령, 기간, 인원수를 재규정했다.복무연령은 북위 때의 15세에서 18세로, 복무기간은 수확에 따라 풍년이 1월을 넘지 않고 중년이 20년을 넘지 않으며 다음해에는 열흘을 넘지 않아 복무기간이 크게 단축되며, 인원수는 농가당 1명으로 제한되어 과도한 민력동원을 피하고 농업생산에 지장을 줄인다.우문태는 이와 함께 이듬해 부역 개수를 정하는 호적제도와 회계제도 등을 시행해 부역 징발이 합리적이도록 견의 길이를 40척으로 통일했다. [8] [24-25]
우문태는 이 같은 경제정책을 펴는 것 외에 지방관리의 생산적 역할도 분명히 했다.세도가가 되면 주현 장관들은 반드시 백성들을 독촉하여, 비록 작든 길든 농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농사짓고, 농사짓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빈둥거리는 사람은 태만하고, 쉬우나 일을 싫어하며, 생산자에게는 처벌을 주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우문태(宇文泰)의 목수(木守)의 치적 기준 중 하나가 농산(農産) 과업을 권고한 것이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은 대부분 농산(農産) 생산을 중시하고 경제가 발전하여 우문태(宇文泰)가 죽기 전까지는 이미 창고가 가득 찬 소강(小康)한 상태였다. [24-25]
문화
사상 문화
북주불교석각조상
북주불교석각조상 [27]
사상문화에 있어서 우문태아호유술(宇文泰亞好遺術), 유가(儒家)학설을 사상무기로 삼아 선비(善非)족의 퇴행적 관습과 당시 사상 분야에서 일세를 풍미하던 공담현리(空論玄理), 숭불(崇佛)논도(論道)와 같은 낡은 풍습(風習)을 없앤 것이다.경사장 안에서는 국자학을 설립하고, 배유학 대가인 루는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내며, 학교 교육을 통해 유교 사상을 가진 인사들을 대거 배출해 정권의 버팀목으로 삼았다.또 선진(先秦)의 전적(典籍)인 《상서(尙書)》의 《대고(大诰)》라는 문양에 근거하여 《대고(大 。)》라는 글을 작성하여, 이 문장으로서 11년(545년)에 군신(軍臣)들에게 이를 따르도록 하여 부화(浮華)의 문풍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8] [24-25]
6조 조서가 반포된 후 우문태는 각급 관리들에게 암기를 배우게 하고, 6조 및 계산을 하지 않는 자는 모두 벼슬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조치를 보장함으로써 서위 일대의 정치를 일신하였다. [8] [24-25]
억제불도
572년 주무제가 우문호를 주살하고 대권을 빼앗은 뒤 이듬해 12월 도사 승려 백관을 불러 다시 불도 유삼교 문제를 논의한다.이번에는 제(帝)가 올라앉아 삼교(三敎)의 선후(先後)를 가리고, 유(遺)를 앞세우고, 도교(道敎)를 다음(後)으로 삼는다.불교를 최하로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이미 멸불의 전주곡이다.당시에 어떤 불교도들은 주무제의 속셈을 모른 채 끊임없이 논쟁하였는데, 이는 불교가 도교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설명하여 마음이 매우 불편했음을 나타낸다.또 다른 명안인들은 주무제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만약 타방이 이국적이고 원근에 알려져 있다면 이는 출병하여 중과 중 사이에서 군사를 구하고 탑의 절 아래 있는 곳을 차지했다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하였다.그들은 주무제가 이렇게 한 것은 결코 소망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완승은 군사를 맡아서 군사를 증원하지 못하였고, 사지에서 백성에게 나라를 부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28-29].29] [12]
승려의 비아냥거림도, 반항도 소용이 없었으며 오히려 멸불에 대한 주무제의 결의가 더해졌다.건덕 3년(574년) 5월 15일 주무제는 '단불도이교(斷佛道二敎)' 조서를 내려 경상을 전멸시키고 사문도사(沙門道士)를 파멸시키고 백성에게 복권을 명령했다.또 제음사를 금하고 예전에 타지 아니한 자는 다 없애 버렸더라어느 날 북주 내 융불분경, 구승파탑. 보찰가람은 속택이고 사문석종은 모두 백의(白衣)다[30]. [12]
역대 제왕도(국부) 주무제, 진후주상
역대 제왕도(국지)주무제,진후주상[31]
건덕 6년(577년) 정월에 주무제가 군대를 이끌고 제업성에 입성하였다.당시 제지의 불풍이 가장 강했고, 주무제는 유가를 존경하고 부처를 멸망시키는 정책을 제자리에 펴기로 결심하였다.제(齊)나라에 곰 안생(安生)이라는 국자(國子) 박사가 있었는데, 박통오경(博通五經)이 있었는데, 주무제(周武帝)가 업성(業城)에 들어왔다고 해서 얼른 가족들에게 문단속을 하고 주무제(周武帝)를 맞이하러 올 준비를 시켰다는 말을 듣고 그의 가족들은 "주제(周帝)는 유교를 중시하므로 반드시 나를 만날 것"이라고 했다.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무제가 직접 와서 그를 알현하였다.주무제는 이 유생에게 "배경을 받지 않고, 친히 그 손을 잡고, 동좌를 안내하며, 상을 후하게 베풀어 안차 사두마차를 주고, 따라라" [32]라는 격식을 갖추었다.유교를 존중하는 한편, 주무제는 북제 스님을 소집하여 폐불의 이유를 강의하였다.지옥으로 주무제를 위협한 혜원 스님도 "폐하께서는 지금 왕력을 믿고 계시다가 삼보를 깨뜨리신 사견입이다.아비지옥이 귀천이 아니니 어찌 두렵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33-34] 주무제는 사후에 지옥으로 간다는 경고에 두려움 없이 제경불교를 금지시켰다. [12]
주무제가 멸불한 일은 불교도들에게 불교의 재앙으로 여겨져 온 힘을 다해 공격하였다.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보면 주무제의 멸불이 사회 발전에 기여한 효과는 폐단보다 훨씬 컸다.그는 속세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574년부터 578년까지 "전대 관산(關山)인 동(東)이 수백 년 동안 쌓은 관(官)과 사(私)의 모든 불탑을 파괴하고 모조리 없애라.성용에 녹아 경전을 불태우다.팔주의 절에서 사십 천 위안이 나가서 왕공을 모셔다가 제택으로 삼았다.삼방석자, 삼백만을 멸망시키면 모두 군민으로 돌아가고, 또 편집인에게 귀속된다"고 밝혔다. [12] [30]
주무제가 부처를 멸망시키고 시간이 비교적 길며, 범위가 넓고 접촉이 깊으며, 성과가 매우 볼 만하다는 점은 충분히 긍정할 만하다.그래서 "제독운원약지(帝獨運遠 略不 。之), 강대국 부민상책(富民上策)"이라는 찬사가 나왔다[35].멸불은 사실 민역은 희망하지만, 조세는 해마다 늘고 병사는 날로 번성한다.동평제국, 서정요융, 국안민악'의 역할이다.북주의 성공적 멸불운동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멸제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12]
군사
새로운 제도를 반포하다.
서위가 나라를 세운 후, 형세가 매우 준엄하였는데, 그때 천하가 3분 만에 동쪽으로 고환대군이 쳐들어왔고, 남으로는 샤오량이 수시로 싸움을 벌였다.특히 고환(高 魏)은 서위를 강적(强敵)으로 보고 포대기 속에서 죽이려 애썼으나, 동서위 역량 대비 역량이 매우 현격해 동위의 광국부(廣國富), 인구 2천만 명 이상, 군병강마장(軍强馬壯), 고환(高興)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20만 명에 못 미쳤으며, 서위의 협국빈( 狭國貧), 인구 천만, 우문태(宇文泰)가 직접 장악한 군대는 3만여 명에 불과했다.아울러 서위가 나라를 세우자 관중(關中)이 큰 굶주림을 당하고 인심이 흔들렸다.우문태는 이를 보고 대원년(535년) 3월 관아에 명하여 고금의 치국경험을 참작하고 현실자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여 24조 신제를 제정하였다.또 무공대성을 대행대 좌승으로 발탁하고, 기밀에 관여하며, 국강(國綱)을 세우고 정치를 혁신했다. [7] [24-25]
부병 제도
우문태는 군제를 개혁하고 부병제를 만드는 일을 먼저 했다. [24-25] [36]
대통 3년(537년)에 우문태는 군 복무를 시작했다.먼저 동위가 연거푸 침입하였고, 영희 3년(534년) 8월, 고환수의 스승이 동관을 공격하여 화음(華陰, 지금의 산시화음서남)으로 진격하였고, 대통원년(535년) 춘정월, 동위대행대 상서사 마쯔루(馬子如)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관을 다시 공격하여, 우문태의 준비를 갖추고 화주(和州, 치화산, 지금의 산시)를 공격하였다.얼마 후 영주를 기습하여 5천 가구를 옮기고, 대통 3년(537년) 정월에 고환(高 高)이 군사를 이끌고 둔포한( 。 。, 지금의 산시성 영제현 포주진)에 부교(浮橋)를 놓으며 강하공동관(江河攻關)을 건넌다.군대의 힘을 믿고 해마다 서위를 공격해 왔지만 이대로 가면 실력이 밀리는 서위가 버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문태는 알고 있다. [24-25] [36]
대통 3년 7월, 우문태는 제군들을 함양에 집결시켰으며, 8월에는 동관 정군을 거느리고 군법 군규를 선포하여, 재물을 탐내어 적을 얕잡아 보지 말고, 백성들에게 위세를 부리지 말고, 적들과 싸워서 목숨을 걸면 상을 주고 도망가면 모두 살육하였다.이번 정비로 서위군은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머지않아 고환율 20만 대군이 쳐들어오고, 서위가 소승으로 다수를 이기고, 사원(沙園, 현 산시화음현 경내)에서 고환을 대파하고, 8만여 명의 적을 생포하였다. [24-25] [36]
군사력을 증강하다.
군대의 질적 향상에 따라 우문태는 더욱 군대를 확장해 군사력을 키웠다.초기 우문태(宇文泰)가 허발악(賀拔岳)의 무천병호(武川兵戶)를 주축으로 하는 군단을 받았을 때, 이 군단의 수가 수천 명에 불과하여 후모첸웨(後母陳 ,)를 물리친 후, 그의 대장 이필(李 ,)이 만 명을 끌어 모았고, 이후 효무제(孝帝) 원수(元修)에 따라 들어온 선비족들로 구성된 북위수위위위금여단도 약 12만 명을 합하여 우문태(宇文泰)가 각각 3만 명을 장악하였다.사원의 전투 이후 항복군을 편성하는 등 보강을 거듭하여, 점차 증가하여, 8년(542년) 3월에 정식으로 6군을 창설하였는데, 이때 이미 약 10만명의 군인이 있었다. [24-25] [36]
대통 9년(543년) 2월, 고환장병 10만 명, 황허를 건너 망산(邙山, 현재 낙양 서북)이 진을 치고, 우문태(宇文泰)가 군사를 거느리고 망산에서 대패하여 병사 6만여 명을 잃었으며, 수 년에 걸쳐 경영이 성립된 군대는 피해가 태반이다.그러나 당시 관롱지방의 선비족 수가 한정되어 있어 군대의 대량보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망산지전 이후 우문태는 한족으로부터 병사를 흡수하기 시작하였고, 3월에는 관롱지방의 호강지주를 모집하였다고 발표하였다.북위 말년의 관롱봉기에서는, 호강지주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향병을 조직하고, 동서위가 분립한 후에도, 이들 지주는 무장해산하지 않고, 여전히 호강의 손에 잡혀 있었다.우문태는 광모호강을 통해 이들 분산된 향병을 중앙군대로 전환하고 정부가 관롱지방의 명망 있는 인물을 선택해 통솔함으로써 중앙의 군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북위의 말년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면서 무천군인집단과 관롱지주의 연합을 촉진시켰다.그 후, 대통 16년(550년)에 이르러서는, 징병 대상자를 모든 균전호(平田戶)로 확대하였다.중한족 병사들의 비중은 더 높아졌다. [24-25] [36]
다치바 주니
이와 함께 군 통할 시스템을 개혁해 과거와는 달리 8부제를 채택하는 등 형식적으로 팔주국을 만들었다.우문태(宇文泰) 자신이 대통3년(537년)에 서위문제(西偉文帝)에서 주나라 대장군(主國大將軍), 도독중외(都 督中外诸中) 군사로 서위군(西偉軍)의 실질적인 통솔자이며, 또한 대통14년(548년)에 서위종실 광릉왕 원흔(元欣)을 주국대장군에 임명하였으나 허명만 걸어놓고 실권은 없으며 조귀(趙貴), 이호, 이호, 이필, 우고후, 위문, 위문, 위문, 독신, 위문, 위문, 위문, 위문각 주나라 대장군 아래에 대장군이 2명, 총 12대 장군군이 있고, 대장군 아래에 2개, 24개 부서가 있으며, 각 개부하에는 2개의 의동(儀同)이 448개 의동(儀同)이 있고, 의동령병 1명은 약 천 명, 개부령병 1명은 이천 명, 대장군 1명은 사천 명, 주국 대장군 1명은 팔천 명, 육주국 합계는 4만 팔천 명 정도이다. [24-25] [36]
우문태는 씨족 부족의 혈연계를 빌려 조직부병을 데려와 장병들 사이에 종족의 친밀감을 심어줌으로써 장성과 병사의 결합을 꾀하고 부병의 전투력을 향상시켰다.사실 부병 구성은 결코 씨족관계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병제는 과거 부족병제의 성격을 다소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한때 병호로 전락했던 육진선비의 경우 신분이 높아지고 지위가 개선됨으로써 부병의 전투력도 강화되었다. [24-25] [36]
십이조 신제
대통 7년(541년) 9월, 소산이 초안한 6개 조서를 반포, "선치심, 돈교화, 토지이득, 현량 승진, 옥송, 징역"하였다.11월에는 다시 12개조의 새로운 제도가 반포되었는데, 이는 535년 3월에 발표된 24개조의 새로운 제도와 합쳐서 모두 36개조의 새로운 제도가 되었다.6조 조서와 이들 신제는 정치경제사상문화적 측면을 망라한 광범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24-25] [36]
인구
북위신구연간(518년~520년)에는 전국적으로 500만 가구에 약 3천여만 명[37]이 있었는데, 북위가 말년에 정치부패로 6진봉기, 모굴대제기, 두로주봉기 등을 잇달아 일으키면서 3375368가구[38]로 격감했다.주제정립년 호구가 회복된 후 577년까지 3만32528가구, 2,0006886명[39], 대상 2년(580년) 북주원경 호구 359만가구, 9009604명[40]이 수대업 5년(609년) 북주구경 298만가구와 모순을 이뤘으며, 가구당 2.5인 가구도 실제와 부합하지 않았다. [42]
皇帝世系
北周皇帝世系表庙号谥号姓名生卒年年号年号使用时间陵墓
- | 德皇帝 | 宇文肱 | ?-526年 | - | - | - |
太祖 | 文皇帝 | 宇文泰 | 507年-556年 | - | - | 成陵 |
- | 孝闵皇帝 | 宇文觉 | 542年-557年 | - | 557年 | 静陵 |
世宗 | 明皇帝 | 宇文毓 | 534年-560年 | - | 557年-559年 | 昭陵 |
武成 | 559年-560年 | |||||
高祖 | 武皇帝 | 宇文邕 | 543年-578年 | 保定 | 561年-565年 | 孝陵 |
天和 | 566年-572年 | |||||
建德 | 572年-578年二月 | |||||
宣政 | 578年三月-十二月 | |||||
高宗 | 宣皇帝 | 宇文赟 | 559年-580年 | 大成 | 579年正月 | 定陵 |
- | 静皇帝 | 宇文阐 | 573年-581年 | 大象 | 579年二月-580年 | 恭陵 |
大定 | 581年正月-二月 |
北周
北周(557年—581年)是中国历史上南北朝的北朝之一,又称后周(五代以后鲜用,避免与郭威建立的周朝混淆)、宇文周。由西魏权臣宇文泰奠定国基,由宇文觉在宇文护的拥立下正式建立。历五帝,共二十四年。
西魏恭帝三年(556年),实际掌握西魏政权的宇文泰死后,第三子宇文觉正式即位称天王、周公。次年初,宇文氏废西魏恭帝建国,国号周,建都于长安(今西安汉长安城遗址),史称北周。
北周孝闵帝宇文觉年幼,大权掌握在堂兄宇文护手中。九月,宇文护杀孝闵帝,立宇文毓为帝。武成二年(560年),宇文护又毒死宇文毓,立宇文邕为帝,史称北周武帝。
建德元年(572年),周武帝宇文邕智诛权臣宇文护,亲掌朝政,进行了多方面的改革。
577年,北周武帝灭北齐,统一北方。581年,杨坚受禅代周称帝,改国号为隋,北周亡。
中文名周 外文名kingdom Of Zhou 别 名北周、宇文周、后周 时间范围557年 至 581年 都 城长安 主要城市秦州、凉州、雍州等 语 种汉语、鲜卑语 货 币五铢钱、泉、五行大布、永通万国 人口数量约1250万,3250万(灭齐后) 主要民族汉族、鲜卑族、羌族、氐族等 国土面积180万km²,271万km²(灭齐后) [1] 开创者宇文觉
目录
1 国号
2 历史
▪ 北魏分裂
▪ 攻占西川
▪ 建立北周
▪ 一统中原
▪ 平乱与亡国
3 政治
▪ 推崇德治
▪ 用人方针
▪ 治理腐败
▪ 法律
▪ 改革官制
4 经济
5 文化
▪ 思想文化
▪ 抑制佛道
6 军事
▪ 颁行新制
▪ 府兵制度
▪ 壮大军事力量
▪ 立八柱国
▪ 十二条新制
7 人口
8 皇帝世系
国号
北周的国号为“周”,是以宇文觉的爵号命名的。宇文觉称帝后,便以“周”作为国号,“周”字前加方位“北”字。称呼“北周”,是因为地处北方之故,“北周”称呼具有专指性,以区别其他建号为“周”的政权。 [2] 同时北周还有“后周” [3] 和“宇文周” [4] 的称呼。
历史
北魏分裂
武士俑
武士俑
贺拔岳是北魏王朝的名将。在叛乱四起的北魏末年,贺拔岳以两千疲惫之卒,横扫了三秦之地的叛乱劲敌。 [5] 在尔朱家族覆灭后,贺拔岳拥兵关陇,与高欢并为两大军事集团首领,二人互相忌惮。最终,贺拔岳被暗中投靠高欢的侯莫陈悦杀害。贺拔岳之死朝野震动。孝武帝赠他侍中、太傅、录尚书事、都督关中20州诸军事、大将军、雍州刺史。谥曰武壮。贺拔岳的部下收其尸葬于雍州北石安原,随后拥立宇文泰为统帅,击败侯莫陈悦,成为了关陇的主人。
北魏孝武帝讨伐高欢失败后逃奔关中。宇文泰收容了他。不久孝武帝被宇文泰所杀,宇文泰拥立西魏文帝,建立西魏(535年)。而东方的高欢在孝武帝逃入关中后拥立东魏孝静帝,把朝廷迁到河北邺城,建立东魏(534年)。 [6]
西魏之初,宇文泰成为大丞相,而且局势尚不稳定,而宇文泰却果断的下手毒死了魏孝武帝元修,遂立南阳王宝炬为帝,这样,新皇帝受制于他,独掌朝政。 [7] 宇文泰在三次战役中大败东魏大军,奠定宇文氏在关中的基础。宇文泰的知人善任,用人不拘一格,使得这些名将人尽其才,作用得到了最大发挥。使西魏进一步强盛。他大力提拔王罴,杨忠,而隋朝杨氏也由此发迹。 [7]
攻占西川
在侯景覆灭的同年,萧绎在江陵称帝,同时,其弟萧纪也在成都称帝。次年萧纪发兵攻江陵,兵败被杀。西魏乘机攻陷成都,占有益州。 [8]
梁太清三年(549),侯景攻陷梁都建康,长江下游江北诸郡,多为东魏占领。驻守长江中上游地区的梁宗室诸王割据自立,并借助西魏力量互相攻击,争夺帝位。据襄阳的梁雍州刺史、岳阳王萧詧进攻荆州刺史、湘东王萧绎,兵败投靠西魏,被立为梁王。
西川
西川
大宝三年(552),萧绎于江陵称帝(是为梁元帝)。请西魏出兵攻占梁、益二州,剪除已在成都称帝的梁益州刺史、武陵王萧纪。承圣三年,梁元帝遣使向西魏索还所占之地,言辞颇为傲慢。九月,西魏大丞相宇文泰派柱国于谨总领中山公宇文护、大将军杨忠等将率兵5万进攻梁都江陵。十月,西魏军自长安(今西安西北)进至樊(今湖北襄樊)、邓(今邓州)一带,萧詧率军助战。梁元帝闻讯,下令戒严,调兵抵御西魏军。十一月,西魏军渡汉水,宇文护、杨忠奉命率精骑先据江津(今荆沙东南),切断江路,使梁守军东退无路,下游援军也无从得渡。梁元帝遣将分扼江陵要点,树木栅于外城。于谨军至,下令筑长围,隔绝内外。梁信州刺史徐世谱、晋安王司马任约等率军于江陵南岸马头筑垒,遥为声援。
时梁各处所征兵马未至,西魏军多路攻城,初受挫,后猛攻,并在内应相助下入西门,克外城。梁元帝退保内城,当晚命属官焚图书14万卷,次日出降,后被杀。十二月,于谨回师,将被俘的梁王公、百姓数万人驱往长安。西魏立萧詧为梁主。此后,长江中上游的荆、雍、梁、益诸州,全为西魏所有。 [9]
建立北周
西魏恭帝三年(556年)宇文泰死,由嫡长子宇文觉承袭为安定郡公、太师、大冢宰。诸子幼小,宇文护掌管国家大政。宇文护是内蒙古武川人,宇文泰之侄。宇文护是西魏、北周历史上一位重要人物,是宇文氏政权由西魏过渡到北周至关重要的一环。宇文护在旧日与宇文泰并肩的大将于谨的支持下统理军国大事,为大司马,封晋国公。557年,他以宇文泰嗣子宇文觉幼弱,想乘宇文泰的权势和影响尚存时早日夺取政权,因迫使西魏恭帝(名元廓)禅位于周。不久,就杀了元廓。 [9]
同年,宇文觉称周天王,建立北周。护为大司马,封晋国公。宇文觉也是少年坚毅刚决,不满宇文护的专权。赵贵、独孤信对宇文护也是相当的不服。他们一起鼓励宇文觉除掉宇文护。于是宇文觉招了一批武士,经常在皇宫后园演习如何擒拿宇文护;他又与大臣商量,决定于某一天开宫廷宴会时,抓住宇文护杀掉。谁知他们的阴谋还来不及实施,就有人向宇文护告密了,反被其先发制人,杀赵贵(满门抄斩),罢了独孤信的官,后来孤独信也被赐死。559年,宇文觉被废黜(后被毒死)。 [9]
572年的北周区划
572年的北周区划
事后,宇文护迁大冢宰(当时的宰相),并拥立宇文泰另一个儿子宇文毓,是为周明帝。宇文护看来,宇文毓温文儒雅,就立他为帝。而宇文毓却并不如宇文护所想象的那般懦弱无能,他在处理事务中逐渐显露出自己的聪明才智和才干。他周围逐渐集聚起一批老臣元勋。他致力于发展经济,在百姓中也威望日高。为了试探一下,宇文护假惺惺地搞了一次“归政于帝”的举动,把除了军权以外的所有权力都交还给皇帝。谁知宇文毓毫不客气地照单全收,并把自己的名号正式改为皇帝(在此以前,北周的最高统治者不称皇帝而叫天王)。所有这些,都引起宇文护的疑惧和不安。于是,公元560年指使一个御厨在明帝的食物里下了毒药,毒死了明帝。 [9]
尔后,又立宇文泰四子宇文邕为帝,是为周武帝,实际大权仍由他掌握。宇文护虽性宽和而不识大体,委任非人而久专权柄,又素无戎略,两次伐齐都大败而归。诸子贪残,僚属恣纵,蠢政害民。宇文邕与弟卫王宇文直策划,于建德元年(572年)诛杀宇文护,重夺政权。 [10]
一统中原
北齐后主高纬是历史上有名的昏君,他对理政全无兴致,日常生活却十分奢侈 [11] 。高纬整日里和一些宠臣、美姬鬼混,自弹琵琶,唱无愁之曲,近侍和之者以百数。齐朝的老百姓给他送了个雅号,称为无愁天子。高纬还随意封官,连他宠爱的狗、马、鹰、鸡都被封为仪同、郡官、开府。北齐的政治一团漆黑。 [12]
周武帝宇文邕
周武帝宇文邕
北周武帝看清了北齐混乱的局势,决定出兵伐齐。575年七月,周武帝命宇文纯、司马消难,达奚震为前三军总管,宇文盛、侯莫陈琼、宇文招为后三军总管。杨坚、薛迥、李穆等率军分道并进。周武帝自率大军六万,直指河阴(参见河阴之战)。周军进入北齐境内,纪律严明,“禁伐树践稼,犯者皆斩”。 [11] [13] 颇得民心。不久,周武帝所部顺利攻下了河阴城(今孟津县东)。齐王宪部拔武济,进围洛口,攻下了东、西二城。周军包围中城(今孟县西南)达二十天,久攻不下。周武帝自率所部攻金墉城不克。九月,齐右丞相高阿那肱从晋阳率大军援救河阳,周武帝得了急病,只得退兵。 [14]
第二年(576)十月,北周再次出兵伐齐。此次伐齐,周武帝集中了十四万五千兵力,改变了前次进军路线,亲自率部直攻晋州。他对群臣解释此举意图时说:“前出河外,直为拊背,未扼其喉。晋州本高欢所起之地,镇摄要重,今往攻之,彼必来援;吾严军以待,击之必克。然后乘破竹之势,鼓行而东,足以穷其巢穴,混同文轨” [11] 。周军以越王盛、杞公亮、随公杨坚为右三军,谯王俭、大将军宝泰、广化公丘崇为左三军,齐王宪、陈王纯为前军。十月下旬,周军主力进抵平阳城下,北齐晋州刺史崔景暠等投降。平阳为晋阳门户,在军事上具有重大意义。周武帝接受了上次伐齐失败的教训,派上开府仪同大将军安定梁士彦为晋州刺史,留精兵一万镇守平阳城。 [14]
北齐后主高纬在周军进攻平阳的时候,正带领妃子冯淑妃在天池(今山西宁武县西南管涔山上)打猎,晋州告急的文书,从早晨到中午飞马传送了三次,右丞相高阿那肱居然不去报告高纬,理由是:“大家正为乐,边鄙小小交兵,乃是常事,何急奏闻!”一直到晚上,信使来说:“平阳已陷。”高阿那肱才上奏高纬战事情况,冯淑妃却要求高纬“更杀一围”。高纬竟然置如此紧急的战局而不顾,又和冯淑妃尽兴打起猎来。唐诗人李商隐《北齐二首》诗云:“巧笑知堪敌万机,倾城最在著戎衣。晋阳已陷休回顾,更请君王猎一回。”就是讽刺此事的。 [13] [14-15]
北周北齐交界
北周北齐交界
十一月初,北齐后主率齐军主力十万到达平阳,开始将平阳城包围,昼夜不停地攻打。城中情况危急,城堞皆尽,城墙完好处不过数仞而已。齐周双方短兵相接,或交马出入。周外援不至,守城将士有些惊慌,梁士彦慷慨自若,对将士们说:“死在今朝,吾为尔先。”于是周军奋勇争先,无不一以当百。齐军稍退,梁士彦立即命令城中军民乃至妇女,昼夜修城,三日就把城墙修好了。齐军挖地道攻城,城坍陷了一处,将士乘虚而入,可就在这紧急关头,高纬突然命令将士暂停攻城。原来传说晋州城西石上,有圣人遗迹,高纬要和冯淑妃同去观看,冯淑妃涂脂抹粉,耽误了很长时间才姗姗而来,这期间,周军早已抢时间用木板把缺口挡住了。高纬又恐城中射出的弩矢伤了冯淑妃,特抽出攻城的木料,筑造远桥。这样一折腾,齐军失去了攻城的有利时机。 [14] [16-17]
十二月,周武帝从长安赶赴平阳,周军其他各路也聚集平阳,约有八万兵力,周军临城而阵,东西长达二十余里。起先,齐军怕周军猝然而至,曾想出一个办法,在城南穿堑,从乔山至于汾水,齐王高纬见周军到来,便下令齐兵在堑北布阵。周武帝命齐王宪前去探看虚实,齐王宪回来很有信心地对周武帝说:“请破之而后食。”周武帝听了十分高兴说:“如汝言,吾无忧矣!” [11] 周武帝乘着马,巡视周军,一边走,一边高声读出各军主帅姓名以示慰勉,将士喜于被知,精神更加振奋。 [14]
灭北齐前的北周版图
灭北齐前的北周版图
两军交战,实力不相上下,后来齐军略略后退,冯淑妃就惊慌失措地大声喊道:“齐军败啦!齐军败啦!”齐录尚书城阳王穆提婆急忙对高纬说:“赶快走,赶快走呀!”高纬带着冯淑妃慌忙向高梁桥逃去。齐师君主一逃,顿时军心大乱,连战皆溃,死者万余人。“军资甲仗,数百里间,委弃山积。” [13] [14] [18]
平阳之战,北齐主力实际已被打垮。高纬逃回晋阳,想逃往北朔州(今山西朔县),进而投奔突厥。他一出晋阳城,群百纷纷逃离,连穆提婆见大势已去,也转而投奔周武帝去了。 [14]
齐后主高纬逃到邺城,企图重整军容,斛律孝卿请他接见将士,并为他事先准备好讲稿,告诉他要“忼慨流涕,以感激人心。”高纬走到将士面前,突然记不起该要讲的话,于是大笑起来。见高纬笑,左右随从也禁不住跟着大笑。将士们见此情景,都非常气愤,纷纷说:“你皇帝都不着急,我们还急什么!”于是皆无战心。 [14]
高纬在邺,还搞了一个禅位的把戏,将皇帝位子让给了八岁的儿子高恒,自己当起太上皇来。公元577年正月,周武帝率军攻破邺城,高纬于先一日逃往济州,又从济州逃往青州,准备投奔陈朝,为北周追兵所俘,送往长安,第二年被杀。 [19]
周武帝灭齐,统一北方,在历史上具有十分重大的意义。它结束了自东西魏分裂以来近半个世纪的分裂割据局面,使人民免受战争苦难,得以重建家园,恢复生产,从而促进了整个北方政治、经济、文化方面的广泛交流和发展,为隋统一中国奠定了坚实的基础,没有北周北齐的统一,就没有后来南北朝的统一。 [13] [19]
平乱与亡国
大象二年(580年)五月十一日,北周宣帝宇文赟病死。周静帝宇文衍年幼,左丞相杨坚专政。杨坚为预防北周宗室生变,稳固其统治权力,以千金公主将嫁于突厥为辞,诏赵、陈、越、代、滕五王入朝;因尉迟迥(北周文帝宇文泰外甥)位望素重,恐有异图,遂以会葬宣帝为名,诏使其子尉迟惇召尉迟迥入朝;并以韦孝宽为相州总管赴邺取代尉迟迥。六月,尉迟迥恐杨坚专权对北周不利,公开起兵反对杨坚。七月,青州总管尉迟勤(迥弟之子)从迥反杨。迥所统相、卫、黎、沼等地;同时质其子于江南陈朝,以请援;并派人出使并州(治晋阳,今太原西南),欲招降上柱国、总管李穆,遭到拒绝。 [20]
夺取北周政权的隋文帝
夺取北周政权的隋文帝 [21]
时杨坚挟幼帝以号令中外。结好并州李穆,送千金公主与突厥和亲,以消除北方之患;加强洛阳守御,作为进讨尉迟迥的战略基地;并令计部中大夫杨尚希先发精兵3000人镇守潼关,防其偷袭。同月十日,杨坚调发关中兵,令韦孝宽为行军元帅,陇西公李询为元帅长史,郕公梁士彦、乐安公元谐、化政公宇文忻、濮阳公宇文述、武乡公崔弘度、清河公杨素等为总管,率军讨伐尉迟迥。随后,韦孝宽分兵进击关东各地降附尉迟迥的势力,彻底平定了尉迟迥之乱。战中,郧州(治安陆,今属湖北)总管司马消难、益州(治蜀郡,今成都市)总管王谦先后举兵响应尉迟迥,反对杨坚。杨坚适时命柱国王谊、梁睿各为行军元帅,分别率军攻讨,均获胜利。同时,北周宗室诸王数次伺机欲除杨坚,杨坚均予果断处置,粉碎其夺权图谋。 [20]
此战,杨坚在控制北周诸王、加强中央统治的同时,和亲北方突厥,争取并州李穆,以巩固其左翼,并威胁敌军侧背,又乘叛军初起,相互配合尚不密切之机,以一部兵力东击梁、曹、城、金各地,解除右翼威胁,并掩护主力行动,造成战略上有利态势,掌握了战争主动权。主力进攻时,置途中敌之坚固据点于不顾,急寻敌军主力决战;沁水战胜后,又直趋邺城,消灭叛乱中心,终于迅速平定叛乱,在军事上为其代周建隋奠定了基础。 [22]
公元581年,杨坚代北周,改国号隋,北周享国二十四年而亡。
政治
宇文泰注意听取臣下的不同意见,早在大统五年(539),他就下令置纸笔于京城阳武门外,以访求得失。当丞相府记室柳虬提出纳忠谠之言的建议时,宇文泰欣然采纳,并要求史官记事,须得失无隐。宇文泰的这种做法,有助于西魏吏治的清明。 [23-25]
推崇德治
在政治上宇文泰奉行以德治教化为主,法治为辅的统治原则。要求各级官吏用儒家学说修身,躬行仁义、孝悌、忠信、礼让、廉平、俭约等,恪守这些儒家道德规范。同时又向人民灌输孝悌、仁顺、礼义,用这些儒家伦理纲常观念束缚人们思想,以心和志静,邪僻之念不生,稳定统治秩序。 [8] [24-25]
用人方针
在用人上奉行唯贤是举,不限资荫,只要德才兼备,那怕出身微贱,亦可身居卿相。宇文泰的这一选官思想体现了打破门阀传统的新精神,保证了西魏吏治较为清明,也为大批汉族士人进入西魏政权开辟了道路。 [8] [24-25]
在这一选人思想的指导下,宇文泰将来自不同方面的人聚拢在自己周围,如李弼原是侯莫陈悦帐下大都督,且互为姻亲,后倒戈归附,宇文泰毫无戒备之心,予以重用,成为统率府兵的八柱国大将军之一。柳敏原是东魏河东郡丞,宇文泰克河东后得之,当即拜为丞相府参军事,后来成为帮助宇文泰制定国策的核心人物。再如武功大姓苏绰,宇文泰对之推心委任而无闲言,如有外出,常常预署空纸授绰,若须有处分,苏绰可以随事施行,事后启告一下即可。正因为宇文泰能唯贤是举,用人不疑,因此西魏政府上下协力,内部团结,保证了各项政策措施的顺利执行。 [8] [24-25]
治理腐败
为了整治吏治,宇文泰将贪赃者,放宽到满三十匹才处大辟死罪。这比《梁律》的满十匹处死和北魏北齐的“赃满一匹者死”都要宽松,但是这是为了更好地执行法律。 [26]
他赫然公告:“杀一利百,以清王化,重刑可也。”史书记载北周“用法颇严”,一旦发现贪赃枉法的官吏,即给予惩治。 [26]
对于以前的贪官,北周还制定了“征备之法”,就是以前犯的事赦免,但只要有线索可以追查到的,一定要追查到底,记录在案,贪赃所得一定要追索回来。 [26]
法律
在法律上,宇文泰主张不苛不暴,既要“法不阿贵”,官吏犯法一视同仁,如宇文泰的内兄王世超,任秦州刺史时,骄横州县,结果被赐死。位至大将军的郑伟不遵法度,结果被免职。另一方面又要求断案者慎罚,力戒楚毒之下,自痛自诬,尽量减少冤假错案。大统十三年(552年),宇文泰又下令废止流传了二千余年的宫刑。 [8] [24-25]
改革官制
宇文泰改革官制也和建立府兵制度一样,具有浓郁的复古色彩,只不过前者是从汉族古代社会寻找依据,后者是从鲜卑族的部落时代得到启发。宇文泰通过这种托古改制,给自己的统治披上一件正统的外衣,以向人们显示,宇文氏政权并非僭伪,取消民族间的心理隔阂。而在府兵制中,则通过鲜卑化,照顾鲜卑民族的感情,泯灭府兵中的民族界限。宇文泰通过这些改革,巩固了统治基础。 [25]
经济
宇文泰在经济上根据儒家先富后教的传统观念,积极劝课农桑,奖励耕植,并相应地制定采取了一些措施。首先就是将被破坏了的均田制恢复起来,使那些由于土地兼并、战乱、天灾而丧失土地,流落他乡的农民和土地重新结合在一起,从而为农民的生产活动提供了条件。西魏均田制的授田、租调和北魏虽有差异,但变化不大,在役制上却变动较多,对服役年龄、时间、人数都作了重新规定。服役年龄从北魏时的十五岁改为十八岁;服役时间则根据年成丰歉而定,丰年不超过一月,中年不超过二旬,下年不超过十天,使役期大为缩短;人数上则规定每户农家服役者限于一人,避免过多地动用民力,妨碍农业生产。同时,宇文泰还颁行了户籍制度和计帐制度,即预定次年徭役概数的计帐之法,以求赋役的征发较为合理,还对绢的长度作了统一规定,以四十尺为一匹。 [8] [24-25]
宇文泰除了制定颁行上述经济政策外,还明确规定了地方官吏在发展生产方面的职责。每到岁首,州县长官必须督促百姓,无论少长,但能操持农器者,皆令就田,务必不失农时。对于那些游手怠惰,好逸恶劳,不事生产者给以处罚。由于宇文泰衡量牧守政绩的标准之一就是劝课农桑,因此地方官吏大都重视农桑生产,经济逐渐发展,到宇文泰死之前,已经出现了一个仓廪充实的小康局面。 [24-25]
文化
思想文化
北周佛教石刻造像
北周佛教石刻造像 [27]
在思想文化上宇文泰雅好儒术,以儒家学说作为思想武器,去除鲜卑族的一些落后习俗和摒弃当时思想领域中风靡一时的空谈玄理、崇佛论道一类的腐朽风习。在京师长安设立国子学,拜儒学大师卢诞为国子祭酒,通过学校教育,培养大批具有儒家思想观念的人士,作为政权的支柱。还根据先秦典籍《尚书》中的《大诰》一文的格式,制定《大诰》一篇,作为文章的样式,于大统十一年(545年)宣示群臣,明令自今后文章须皆依此体,力图以此矫正浮华文风。 [8] [24-25]
六条诏书颁行后,宇文泰令各级官吏学习背诵,规定凡不通六条及计帐之法者,都不能为官,保证了这些措施的实施,刷新了西魏一代政治。 [8] [24-25]
抑制佛道
572年,周武帝诛杀宇文护,把大权收归己有之后,于次年十二月,又召集道士、僧侣、百官再次讨论佛、道、儒三教的问题。这一次,“帝升高坐,辨释三教先后,以儒为先,道教为次,佛教为后”。把佛教抑为最末,事实上已是灭佛的前奏。当时有些佛教徒不知周武帝用意所在,还一个劲地争辩不休,说明佛教当在道教之上,心里很不服气。而另一些明眼人却看透了周武帝的心事,指出:“若他方异国,远近闻知,疑谓求兵于僧众之间,取地于塔庙之下,深诚可怪。”他们认为周武帝这样做并不能达到预期目的,因为“但顽僧任役,未足加兵;寺地给民,岂能富国” [28-29] 。 [12]
僧侣的讥讽、反抗都无济于事,反而更增添了周武帝对灭佛的决心。建德三年(574年)五月十五日,周武帝下诏“断佛、道二教,经像悉毁,罢沙门、道士,并令还民。并禁诸淫祀,礼典所不载者,尽除之。”一时间,北周境内“融佛焚经,驱僧破塔……宝刹伽兰皆为俗宅,沙门释种悉作白衣” [30] 。 [12]
历代帝王图(局部)周武帝、陈后主像
历代帝王图(局部)周武帝、陈后主像 [31]
建德六年(577年)正月,周武帝率军攻入齐邺城。当时齐地佛风最盛,周武帝决心将尊儒灭佛的政策在齐地推行。齐国有一个叫熊安生的国子博士,博通五经,听说周武帝入邺城,连忙叫家人扫门准备迎接周武帝前来拜访,他的家人都感到奇怪,熊安生说:“周帝重道尊儒,必将见我。”果然不久,周武帝就亲自来拜见他了。周武帝给了这个儒生很高规格的礼遇,“不听拜,亲执其手,引与同坐,赏赐甚厚,给安车驷马以自随” [32] 。在尊儒的同时,周武帝又召集北齐僧人,讲叙废佛的理由。僧人慧远以地狱来威胁周武帝,他警告周武帝说:“陛下今恃王力自在,破灭三宝,是邪见入。阿鼻地狱不简贵贱,陛下何得不怖。” [33-34] 周武帝没有惧怕所谓死后下地狱的警告,下令禁断齐境佛教。 [12]
周武帝灭佛一事,被佛教徒视为佛教浩劫,竭力攻击。但从当时历史来看,周武帝的灭佛对社会发展所起的作用是利大于弊的。周武帝不顾世俗偏见,从574年到578年,他下令“毁破前代关山西东数百年来官私所造一切佛塔,扫地悉尽。融刮圣容,焚烧经典。八州寺庙,出四十千,尽赐王公,充为第宅。三方释子,灭三百万,皆复军民,还归编户。” [12] [30]
周武帝灭佛,时间较长,涉及面广,触动深,成绩很可观,这一点是值得充分肯定的。因此当时有人称赞说:“帝独运远略罢之(指灭佛),强国富民之上策” [35] 。灭佛事实上也起到了“民役稍希,租调年增,兵师日盛。东平齐国,西定妖戎,国安民乐”的作用。正因为北周成功的灭佛运动,才使它国力大大增强,为灭齐奠定了坚实的基础。 [12]
军事
颁行新制
西魏立国后,形势极为险峻,其时,天下三分,东有高欢大军压境,南有萧梁不时构衅。尤其是高欢,视西魏为劲敌,急欲将其扼杀于襁褓之中,而东西魏力量对比又十分悬殊,东魏地广国富,人口逾二千万,兵强马壮,高欢能调动的军队不下二十万;西魏地狭国贫,人口不满千万,宇文泰直接掌握的军队不过三万余人。同时,西魏立国之初,关中即遭大饥,人心浮动。宇文泰也看到了这种形势,大统元年(535年)三月,他命各衙署斟酌古今以来的治国经验,且可以用于现实者,制订颁行了二十四条新制。并提拔了武功大姓苏绰为大行台左丞,参与机密,拟订治国大纲,革新政治。 [7] [24-25]
府兵制度
宇文泰首先进行的是改革军制,建立府兵制度。 [24-25] [36]
大统三年(537年),宇文泰开始整军。先是,东魏连年入侵,永熙三年(534年)八月,高欢帅师攻克潼关,进逼华阴(今陕西华阴西南);大统元年(535年)春正月,东魏大行台尚书司马子如率军再攻潼关,见宇文泰已有准备,遂挥师攻华州(治华山,今陕西华县),赖着刺史王罴的拚力死战,才打退了东魏进攻;大统二年(536年)三月,高欢又亲率万骑袭取夏州,徙五千户而归。不久,又袭取灵州,徙五千户而归;大统三年(537年)正月,高欢又领军屯蒲阪(今山西永济县蒲州镇),于黄河上架设浮桥,准备渡河攻潼关。高欢恃戎马之强,年年进攻西魏,虽然未曾得手,但宇文泰知道,长此下去,实力处于劣势的西魏必然难以支持,当务之急,是要提高士气,增强战斗力,开拓兵源,扩充军队。 [24-25] [36]
大统三年七月,宇文泰集诸军于咸阳,八月,率之于潼关整军,宣布军法军规,不得贪财轻敌,不得作威于百姓,与敌作战,用命则赏之,逃脱皆戮之。通过这次整顿,西魏军队的战斗力大大提高,不久,高欢率二十万大军入侵,西魏以少胜多,在沙苑(今陕西华阴县境内)大败高欢,俘敌八万余人。 [24-25] [36]
壮大军事力量
随著军队素质的提高,宇文泰又进一步扩充军队,壮大军事力量。初,宇文泰在接受贺拔岳的以武川兵户为骨干的军团时,这一军团人数不过数千人,击败侯莫陈悦后,其大将李弼拥众万人来归,以后,跟随孝武帝元修入关的由鲜卑族人组成的北魏宿卫禁旅也有近万人,合起来,宇文泰掌握的军队约有近三万人,分别由十二个将军率领。沙苑之役后,又通过收编降军等不断补充,人数渐渐增多,到大统八年(542年)三月,正式建立六军,时已有兵约十万人。 [24-25] [36]
大统九年(543年)二月,高欢将兵十万,渡过黄河,据邙山(今洛阳西北)列阵,宇文泰领军击之,战于邙山,大败,士卒损失六万余人,经过数年经营建立起来的一支军队损失大半。而当时关陇地区的鲜卑族人数有限,不可能再大量补充军队,因此,邙山之战后,宇文泰开始从汉族中间吸收兵员,三月,宣布征募关陇地区的豪强地主武装。在北魏末年的关陇起义中,豪强地主为了维护自己的利益,组织乡兵,东西魏分立后,这些地主武装并没有解散,仍然控制在豪强手中。宇文泰通过广募豪强以充军旅这一措施,把这些分散的乡兵武装变成中央军队的一部分,由政府选择关陇地区有名望的人物来统领,从而,既加强了中央对军队的控制,削弱了北魏末年以来的地方势力,又促进了武川军人集团与关陇地主的联合。此后,到大统十六年(550年),又进一步把征兵对象扩大为所有的均田户,这样,西魏军队中汉族士兵的比重进一步增加。 [24-25] [36]
立八柱国
同时,宇文泰又对军队统辖系统进行改革,形式上采取鲜卑旧日的八部之制,立八柱国。除宇文泰自己在大统三年(537年)由西魏文帝任命为柱国大将军、都督中外诸军事,为西魏军队的实际统帅外,又在大统十四年(548年)任命西魏宗室广陵王元欣为柱国大将军,但仅挂虚名,并无实权,另任命赵贵、李虎、李弼、于谨、独孤信、侯莫陈崇六人为柱国大将军,实际统率六军。每个柱国大将军下有两个大将军,共十二大将军;每个大将军下有两个开府,共二十四开府;每个开府下有两个仪同,共四十八仪同;一个仪同领兵约千人,一个开府领兵两千,一个大将军领兵四千,一个柱国大将军领兵八千,六柱国合计有兵四万八千人左右,这支军队,就是历史上所说的府兵。 [24-25] [36]
宇文泰借用氏族部落的血缘纽带来组织府兵,使官兵之间蒙上了一层宗族的亲密色彩,以搞好将领和士兵间的结合,提高府兵的战斗力。事实上,府兵的组成,并没有也不可能真正倒退到氏族关系中去,但由于这种兵制多少带有一些过去部落兵制的色彩,因此从那些曾经沦落为兵户的六镇鲜卑来看,身份提高了,地位改善了,从而使府兵的战斗力也增强了。 [24-25] [36]
十二条新制
大统七年(541年)九月,宇文泰颁行了由苏绰起草的六条诏书,“先治心,敦教化,尽地利,擢贤良,恤狱讼,均赋役”。十一月,又颁布了十二条新制,和大统元年(535年)三月颁布的二十四条新制合在一起,共三十六条。六条诏书和这些新制的内容十分广泛,包括政治、经济、思想、文化各个方面,并据此而采取了一系列措施。 [24-25] [36]
人口
北魏神龟年间(518年—520年)全国有500万户约有三千余万人 [37] ,北魏末年因政治腐败先后爆发六镇起义、莫折大提起义、杜洛周起义等,境内户口锐减至3375368户 [38] 。自周齐鼎立年间户口得到恢复,至577年北齐境内有3302528户、20006886人 [39] ,大象二年(580年)北周原境户口统计有359万户、9009604人 [40] ,因该户数与隋大业五年(609年)北周旧境的298万户相互矛盾,每户2.5口的户均口数也不符合实际情况,故学者王育民认为该户数是传抄笔误,即“一百五十九万”误植为“三百五十九万”,并认为北周平齐后户数达600万户 [41] ,学者路遇则认为北周原境算上军户及少数民族人口应有1250多万人,平齐后则有3250万人。 [42]
皇帝世系编
北周皇帝世系表庙号谥号姓名生卒年年号年号使用时间陵墓
- | 德皇帝 | 宇文肱 | ?-526年 | - | - | - |
太祖 | 文皇帝 | 宇文泰 | 507年-556年 | - | - | 成陵 |
- | 孝闵皇帝 | 宇文觉 | 542年-557年 | - | 557年 | 静陵 |
世宗 | 明皇帝 | 宇文毓 | 534年-560年 | - | 557年-559年 | 昭陵 |
武成 | 559年-560年 | |||||
高祖 | 武皇帝 | 宇文邕 | 543年-578年 | 保定 | 561年-565年 | 孝陵 |
天和 | 566年-572年 | |||||
建德 | 572年-578年二月 | |||||
宣政 | 578年三月-十二月 | |||||
高宗 | 宣皇帝 | 宇文赟 | 559年-580年 | 大成 | 579年正月 | 定陵 |
- | 静皇帝 | 宇文阐 | 573年-581年 | 大象 | 579年二月-580年 | 恭陵 |
大定 | 581年正月-二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