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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첫 가을비 오던 날
대학 4년 간간히 악몽에 시달렸다. 시험을 치르는 꿈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다가 깨어났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빈도는 늘어났고 땀의 량도 늘었다. 깨어나서는 영화 빠삐용에서 빠삐용이 꾼 꿈을 떠올렸다. 컴컴한 감옥이 아니라 개방되고 눈부신 사막이 나타나면서 재판장과 대화한다. 빠삐용은 살인에 대해 무죄라고 주장하지만 재판장은 ‘넌 살인의 죄가 아니라 인생을 허비한 죄가 있다’.’말한다. 빠삐용은 “맞아, 유죄야.” 인정하고는 쓸쓸히 뒤돌아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는다는 점에서 모두 사형의 판결을 받은 시한부 인생이다. 무한한 것 같았던 대학생활도 끝을 향해 접근해가자 빠삐용의 유죄라는 고백이 영화 속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 마지막 여름방학을 대전 대흥동 천주교 지하상가 다방 가배에서 보냈다. 그저 누군가 기다리는 모양새였을 뿐 약속은 없었다. 빠삐용의 밀폐된 독방만큼 어두운 구석 한 켠에.죽치고 앉아 있지 않았나 싶다. 껌 파는 아이가 점심부터 밤늦게까지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이 아저씨 아직도 있네’ 하며 내민 껌을 거둔 적도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면 한동안 대전에 내려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졸업에 필요한 필수과목이 다른 친구보다 많았고 더욱이 서울이 아닌 대전에 있으면 악몽을 자주 꾸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노는 게 편한 게 아니었다. 낮의 게으름은 밤에 대가를 치른 셈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8월 말, 가배에 친구들과 들어온 H를 우연히 만났다. 80년, 박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죽은 다음 해이니 ‘서울의 봄’이라는 정치적 혼란은 대학가로 번져나가 데모가 일상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휴교령에 의해 대전으로 내려와 단체로 미팅을 하면 소일했다. H는 애초 내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파트너였던 친구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지 아니하여서 다 같이 모여 몇 번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동행친구들과 헤어진 후 어두운 홀 안쪽에 혼자 앉아 있는 내게 와서는 자기의 꿈 이야기를 했다. 비오는 날 밤, 괴한들에게 쫓겨 막다른 골목에서 꼼짝달싹 못했는데 내가 나타나 구해주었다며 비록 꿈이지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왜 하필 그 상황에서 파트너도 아닌 나였을까? 나 같은 샌님이 정의의 사나이가 되어 불한당을 물리치다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구해줬다고 했지 물리쳤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 대신 된통 얻어맞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 인사를 정중히 받아야 하나, 아니면 ‘놀리지 마세요’, 하고 정색을 해야 하나 망설임 속에서 “비록 꿈이지만 커피라도 사야겠어요.” 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그녀는 커피 이상도 살 용의가 있다면서, “그때 정말 위험했어요,”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곧 서울로 올라가는데 11월 들어 첫 가을비가 오면 저녁 7시 이곳 가배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 제안하였다. 장난이나 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가을은 비와 함께 왔다가 비와 더불어 가버린다는 것을 관찰하는 눈으로, 지켜보아왔다. 천주교 거리에 플라타너스 잎이 9월 거센 비바람을 몰고 온 태풍으로 우수수 떨어지면서 시작하고 11월에 수북이 쌓이면 끝났다. 언제 가을이 시작하고 끝났느냐 두부모를 자르듯이 날짜로 정할 수는 없지만 단지 비로인해 그리고 천주교 주변에서 정해진다고 믿고 있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해에 늦가을 그것도 밤비가 온다면 그 쓸쓸함을 예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날만은 서울에서든 대전에서든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녀였을까? 그녀가 일전에 “대학생 때 아니면 언제 그렇게 놀겠어요?“라는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리라. 한 캠퍼스 커플이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여관을 출입하며 난잡하게 교제한다고 다들 비난하는 와중에 그녀만이 그 커플을 비호했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녀가 인생의 때를 의식하며 살고 있다고 느꼈다. 젊음의 특권이라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는 쉽게 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녀도 나처럼 대학시절을 놀아야 할 때로 본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도 악몽을 꾸지 않는가? 그녀라면 내가 꾸는 악몽을 이해할 듯 싶었다.
그녀는 3학년,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려도 훨씬 성숙한 말을 곧잘 했다. 러브호텔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첫날 소개하는 자리에서 집에 일이 있어서 못나올 뻔 했다는 이야기를 주선했던 여자가 말 한 적이 있었다. 집안 일, 누가 아픈가? 그게 아니라 집에서 하는 일을 도와주어야 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녀가 러브호텔 카운터를 보지 않나 짐작했다. 왜 그런 추측을 했는지, 어디까지 진실이고 상상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새침때기 여대생들과는 달리 남녀 간 성적인 표현에 거리낌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를 소개하면서 근육질에 수염을 기른 강한 남자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밝혀 우리 남자들은 두 눈을 키우고 놀란 일도 있었다. 그녀가 여관 출입하는 커플을 변호한 일이 더해져 누군가 “러브호텔 집 딸인 것 같애” 상상이 가미된 말을 했고 다들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에게 러브호텔 카운터를 보는 주인 딸이었다. 러브호탤 카운터는 젊고 예쁜 여자가 본다고 주장하는 친구, 아니다 젊은 남자라고 우기는 친구도 있었다. 정작 러브호텔을 가본 친구는 우리 중에 없었다.
그녀는 남녀 간 물정을 안다는 듯한 표현 빼놓고는 상당히 지적이었다. 철학적 냄새를 물씬 풍기는 말로 중구난방인 화제를 간결하게 정리하는 지혜를 보이곤 했다. 학과가 인문계이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나는 집안일 즉, ‘러브호텔 카운터를 보면서 교양서적을 많이 읽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자리를 일어서는 그녀에게, “11월 첫 가을비, 7시. 가배 이 자리입니다.” 라고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친오빠라도 되는 양 “앞으론 밤늦게 다니지 마세요. 나쁜 꿈을 꿀 때마다 매번 도와줄 수는 없어요” 농담까지 했었다.
가배는 80년 이른 봄에 문을 열었다. 가배라는 말이 커피, 즉 카페의 한자 음역인 것을 그때 알았다. 마담도 없고, 또 공간이 널찍해서 혼자 장시간 커피를 마셔도 눈총 받는 일이 없었다. 레지가 차를 나르는 기존 다방에 비해 젊은 남자들이 유니폼을 입고 서빙하는 것이 독특했다. 또한 조명은 다른 다방보다 어두웠다. 지하계단을 걸어 내려와 문을 열면 멈칫할 정도였다. 4인용 6인용 소파 외에도 혼자 온 사람을 위해 바와 둥근 스툴의자를 바를 따라 배치했는데 그곳 조명이 좀 밝았다. 그 바 안에는 남자 바텐더가 서서 알코올로 사이폰 커피를 추출했는데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파란 알코올 불에 부글부글 끓으면서 내품는 커피 향이 좋았다. 여름에는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나곤 했지만, 가을에는 커피향내가 퍼지면서 어두운 조명과 함께 별천지 세계로 이끌었다.
그해 가을 내내 하숙집에서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11월이 되고도 열흘 정도 지났을까. 아침신문은 전국이 정오부터 1-4미리 가을비가 오고 새벽에 그치며 다음날 기온이 대폭 떨어져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고 예보하였다. 아침을 어둡게 하는 낮게 깔린 구름, 간간히 부는 바람, 대전에 갈 생각으로 설레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기말시험에 대비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를 도서관에서 만나 강의 노트를 복사했다. 이어 전공과목 조교 선배를 교수실로 찾아가 혹 출석상의 문제가 없는지, 시험을 오픈으로 치를지, 지난해 나온 문제 즉 족보를 물어보았다. 4학년 가을학기 수업에는 교수들도 출석은 잘 부르지 않았다. 군에 갔다 온 선배들 중에 취업을 끝낸 사람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일부는 취업원서를, 군대미필 친구들은 대학원 원서를 들고 교수 추천서를 받으러 다니는 등 어수선했다. 마트에서 ‘고객여러분 곧 마감 예정이오니 서둘러 구매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멘트를 듣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물건도 장바구니에 담지 않은 채 눈으로 구경하며 어슬렁거려온 고객만이 느끼는 초조감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학생회관으로 향할 때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비라도 우산 없이 맨몸으로 걷다보니 목덜미가 시렸다.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고 클라식 감상실로 올라갔다. 불안감을 떨쳐버리기엔 음악 감상이 최고이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환상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혼 협주곡, 4개의 곡 중 하나를 신청했는데 1번인지 4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봄에는 하늘을 찢는 고음의 트럼펫, 가을에는 비온 뒤 물안개처럼, 때로는 텅 빈 들판의 모닥불 연기처럼 낮게 땅으로 깔리는 저음의 묵직한 혼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멜로디를 따라 대흥동 천주교 앞으로 날아가서는 플라타너스 갈색 이파리로 변신하여 빙그레 땅에 착지하였다. 그리고는 거리를 부산히 몰려다니다가 가배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그렇게 가을과 작별인사를 하는구나.
서울은 내리는 등 마는 둥 하여 대전은 비가 어떤지 궁금했다. 대전 집에 공중전화를 걸까? 김장고추를 사러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걱정이 들려왔다. 대전에는 여기보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가보다.
4시 대전행 새마을 기차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이번 오후 수업이 내가 듣는 마지막 전공수업이 될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인 자동차 이야기로 강의 대부분 시간을 때우는 나이 든 교수였다. 그는 행정학과 학생이라면 필히 들어야하는 행정학개론도 맡았는데 행정의 환경변화를 열거할 때마다 나를 사례로 들었다. 교통의 발달은 행정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요즘 새마을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이 생겼다는 언급이 그것이었다. 그는 매학기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기술발전을 일상생활로 과감히 받아들여 혜택을 보는 학생으로 나를 만들었다. 그것은 시험에 출제될만한 내용도 아닌데 선배나 후배는 만날 때마다 ‘교수가 말한 게 사실이냐’ 확인하곤 했었다.
중간휴식 시간에 강의실을 빠져나와 서울역으로 향했다. 은행나무 길의 맨 끝, 교문에 이르러 캠퍼스 전체를 뒤돌아보았다.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며, 캠퍼스 잔디 위에, 또다시 황금물결—’귀속으로 가수 김정호의 목소리가 귀속으로 빗물이 흐르는 듯 허스키하게 들려왔다. 노랫말처럼 황금물결이었다. 기타를 치며 그 노래를 불러댔던 잔디밭은 텅 빈 채 누렇게 바랬다. 은행나무가지는 반쯤 헤진 노란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팔 벌리고 떨어진 잎은 아스팔트길에 달라붙어 노랗게 채색하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면 열흘 후 기말 시험기간에나 올라 올 텐데 그땐 잎 하나 붙어있지 않을 앙상한 나목이 될 것이다.
은행나무가 움트는 봄날,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대학의 교시 2가지, 즉 자유와 진리에서 자유만이 진리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대학이 인생의 좋은 시기라는 것을 직감했었다. 직감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자유는 오직 대학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었다. 이제 그 특권을 놓아야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군대를 가든, 대학원을 가든, 직장을 잡든 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하든 자유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 가을이 가면 앞으로 겨울, 겨울, 겨울만이 계속될 것이다. ‘루루루루 가을이 가네’ 이를 끝으로 노랫말이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자 추위가 엄습하면서 따뜻한 가배가 더욱 그리워졌다. 서울역행 버스 정류장으로 서둘러 걸었다.
새마을기차는 노루꼬리같이 짧은 늦가을의 낮을 지나 캄캄한 터널의 끝, 대전역으로 들어섰다. 세이코 전자 손목시계은 6시 25분을 아라비아 숫자로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역에 들어설 때마다 광대한 서울바닥 어디에 서있는지 좌표를 알 수 없었지만 대전역은 아득하고 편안했다. 가을비는 역 창에서 쏘는 조명을 받아서인지 이리저리 날리며 서울보다 거칠게 오고 있었다. 가판에서 비닐우산을 사서 펼치고는 도청 쪽 상가 건물의 네온사인 ‘박카스’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그녀를 만난다는 흥분이 바람에 스쳐 지나갔다. 빗물에 색색이 번들거리며 움직이는 검은 공간 너머 아스팔트길로 발을 내디뎠다.
가배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 입구에서 비닐우산을 접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가자 잔기침이 나왔다. 지하 계단을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커피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음악도 그만큼 크게 들렸다. 그녀가 나와 있을까? 설령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서울역을 출발하면서 다짐했었다. 바텐더가 있으니까 그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안경을 닦으며 어둠에 적응한 후에는 맨 끝 쪽 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에서 한 손을 흔들며 웃었다. 잇몸이 들어나도록 환한 웃음의 그녀. 그런 여자는 솔직하다는 데 맞는 말인가 보다. 꿈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나를 보고는 하지 않고는 못 배긴 것이다.
11월, 가을비가 오면 들뜨고, 곧 가을이 가기에 아쉽기도 한 모양이다. 가배 그 큰 공간이 꽉 찼고 다른 때보다 말이 많은 듯 했다. 그리고 음악소리와 뒤섞여 시끌벅적 했다
우린 꿈을 이야기했다. 장래의 꿈이 아니라 악몽에 대해서이다. 이 저녁 만나게 된 계기가 꿈이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모양새였다.“아직도 괴한들에게 쫓기는 꿈을 꾸느냐?” 그때 꺼내지 못한 질문, “하필 내가 H씨의 꿈에 등장했을까요?”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도 간혹 쫓기는 꿈을 꾼다며 젊음은 불안이고 불안은 쫓기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예의 그 반문하는 투로 “시간이 가는 게 안타깝지 않다면 젊음이라고 하겠어요?”
나는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것을 넘어 감동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그녀를 봄으로써 동의와 경의를 동시에 표했다. 그녀를 눈은 무척 커서 마치 어항 속 금붕어처럼 튀어나와 빤히 쳐다보면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자기는 지금 외모도 좋고 집안도 좋은 사람과 사귄다고 하면서 여기 나온 것이 사귀기 위한 것이 아님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 사람에게서 고민을 찾을 수 없어 자기의 이상향에 2% 모자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구하는 형태로 꿈에 나타난 것은 그 남자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내가 가졌기 때문이라며 내가 혹 실망할까 격려조로 말하였다. 내가 불안해하고 무언가 불안해하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고 남의 말 하듯이 차분히 전했다. 꿈에서는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현실에서는 주연을 빛내는 조연으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녀를 꼬드겨 사귀겠다는 어떤 의도도 없었기에 편했다. 그녀는 거친 남성다운 남자를, 나는 맑고 청순한 여자를 바랜다는 것을 서로 알기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리라. 남녀 사이에서 솔직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 만큼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 내놓기는 참 어렵다. 설레거나 긴장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날 우린 그랬다. 솔직은 상대적이라 전염성이 있는 모양이다. 불안을 젊음의 상징이라는 그녀의 말에 기대어 왜 이렇게 대학생활을 허망하게 끝내게 되었는지, 그 불안이 매번 꿈으로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고기를 잡으러 강가에 갔는데 마치 그물이 없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느낌이라고 탄식도 했다. 그녀가 아주 묘한 말을 했다. 우리의 삶을 그물과 물고기 비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대학생활도 한 분야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종합예술 아니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 말씀과 비슷했다. 내가 대학 입학원서를 내밀며 철학과에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자, 인생은 학원에서 시험 문제 풀듯이 그렇게 답을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철학과 아닌 다른 과에 가야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꼭 찍어준 것이 행정학과였다. 인생은 목표와 수단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그런 말 같이 들리고도 했고 목표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대학입시에 온힘을 쏟던 고교시절과 방향만 다를 뿐 동일한 방식으로 대학시절을 접근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시절엔 단지 공부하느라 불안해할 시간적 여력이 없었지만 마음껏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대학에서는 불안할 여유가 생겼고 이것이 꿈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자유를 만끽하며 대학생활을 하겠다는 그 의도 내지 목표 자체가 불안을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아울러 스쳐 지나갔다. 대학생활을 마감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악몽에서 시달린 문제가 ‘유한한 젊음의 때와 불안의 관계를 논하라’ 아마 그런 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배를 나오기 직전, 매사 말과 생각만 하면 현실감을 잃을 수 있으니 행동하는 남자가 되어보라고 충고하였다. 그해 5월 그녀의 대학 축제에서 파트너와 내내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며 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춤을 추거나 캠퍼스 어둠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여자는 말 잘하는 남자를 좋아할 수 있지만 끝까지 손을 잡지 않거나, 키스하지 않는다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로 간주한다고 눈웃음치며 말하였다. 비오는 날이라 그런가, 키스라는 말이 자극적이라기보다 분위기에 어울린다는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촉촉하고 속 깊은 눈매는 아니었지만 흘겨보는 눈은 살짝살짝 빛을 발산하며 매력적이었다. 가을비 오는 날 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볍게 띄울 정도였다. 너무 예쁘거나 요염해도 대화에 몰입할 수가 없는 데 그녀는 그렇지 아니했다. 적절히 지적이며 적당히 아름다웠다. 와이샤스에 검은 조끼를 입고, 웃으면 황금색 금니가 하나 보이는 젊은 바텐더는 우리의 대화를 곁 들으며 간간히 미소를 지었다.
가을비가 오면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군가를 찾아 열심히 대화하는가보다. 디제이만이 홀로 외로운지 NEED가 들어가는 노래를 마구 틀어댔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When I need you. You needed me.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필요와 사랑이라는 구별된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수들을 그렇지 않다고 그것은 하나라고 영어로 마구 우기며 노래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배를 나왔을 때 비는 세차게 내렸다. 커피 값은 애초 약속대로 H가 내고 저녁식사는 내가 산다고 하며 나왔을 것이다. 대전극장 통 입구의 2층 경양식집으로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다. 날이 차가워 몇 번 멈춰서 기침을 했고 다음날 급습할 추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가벼울 경자가 붙어 오므라이스 햄버거 등 약식의 양식을 파는 집이었다. 다방에서 먹지 못하는 맥주를 4인, 또는 6인의 테이블에 간이 칸막이로 밀폐된 공간에서 먹고 마실 수 있었다. 그녀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그러니까 손을 잡거나 키스라도 하기 위해 가는 것일까? 그런 기억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밋밋하게 헤어졌을 것이다.
그 후로는 몇 번 그녀를 거리에서 만났지만 인사만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유를 즐기는 대학생이었지만 나는 직업이 없는 룸펜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학점이 나쁜 이유가 한국의 정치적 혼란이었다는 핑계거리에 골똘했었다. .
고향 대전으로 은퇴한 요즘도 11월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마치 누군가 가배에서 기다리는 듯 마음이 심란하다. 끝내 몸을 일으켜 중앙로 알라딘 헌책방을 둘러보고는 성심당 이층으로 올라가 비오는 길거리를 내려다보곤 한다. 주위 빌딩이 위로 치솟으면서 천주교 종탑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천주교 본당 지하의 상가 가배로 내려가는 계단은 견고한 철문으로 닫혀져 열쇠로 잠겨있다.
대학시절이 끝나면 인생의 즐거움도 끝날 거라고 두려워했던 것은 기우였다. 그후로도 여전히 놀고 사랑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달랐다. 꿈을 빙자로 커피를 얻어먹거나, 비 오면 만나자는 약속 같은 것이나 꿈과 젊음과 불안을 주제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다. 한 개인의 인생 마디마디를 훗날 유별나게 기억되는 것으로 요약한다면, 대학시절은 출세나 공부, 연애, 학점 그 무엇으로 부터도 자유를 마음껏 누린 시기였다. 그 누린 자유만큼 불안했다. 그 후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불안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 자유란 것이 인생의 문제, 시간의 문제를 푸는 오픈형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인이나 친구와 상의하든, 시험지를 집에 가져가든, 백과사전을 보든, 무슨 수를 쓰든 문제를 풀라는 자유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 다시 시험을 치르는 악몽을 꾼다. 이번에는 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오픈 시험 방식이 아니다. 나는 강의실에 붙잡혀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볼펜만을 굴린다. 질문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런 문제다. 옆 친구들은 맞는지 틀리는지는 몰라도 열심히 쓰고 있다. 감독으로 나온 조교는 “이제 10분 남았으니 마무리 하세요”, 하는데 창밖을 보니 구름이 잔뜩 깔려 비가 내릴 것 같다. 비가 오면 조교는 시험지를 걷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꿈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아 나는 여전히 강의실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디서엔가 딴짓을 하며 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인생은 유한한데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