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호를 떠나 인제를 지나니 합강교차로에서 내비게이션이 우회전을 하라고 멘트를 한다. 강변에 정자 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고, 합강정(合江亭)이란 현판이 보인다. 이곳은 내린천과 인북천 두 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합강교다. 다리를 지나니 소양강을 끼고 2차선 내린천로가 좁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소양강은 기린면사무소가 있는 기린솔섬에서 두 갈레로 갈라진다. 하나는 오대산 쪽으로, 또 하나는 곰배령 방향으로 이어진다. 내린천은 깊고 오묘한 산간내륙에서 흘러내리는 최고의 청정지역이다.
▲ 홍천군 내면 내린천 발원지 | |
내린천은 홍천군 내면(內面) 동쪽 소계방산(1490m)에서 발원한 계방천과 인제군 기린면(麒麟面) 단목령 부근에서 발원한 방대천이 합하여 흐르다가 소양강으로 합류하여 흘러간다. 내린천이란 이름은 내면의 '내'자와 기린면의 '린'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내린천을 끼고 있는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은둔의 땅이다. 점봉산(1424m)과 오대산(1563m), 그리고 방태산(1444m)을 중심으로 1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이 지역은 천혜의 오지로 사람이 살 만한 은둔의 땅이다.
기자는 2005년도 80일간의 티베트 오지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나라 오지를 찾던 중 내린천 지역을 답사하고, 삼봉휴양림에서 1년 동안 숲 해설 봉사를 한 바 있다. 삼봉휴양림은 백두대간의 허리인 구룡룡 밑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오지다. 남쪽으로는 오대산이, 북쪽으로는 가칠봉, 응복산, 사삼봉 등 3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고, 세 봉우리의 대각선 가운데 삼봉약수터가 자리 잡고 있다. 숲 해설가인 기자는 이 지역이 마음에 들어 삼봉휴양림에서 숲 해설 자원봉사를 하면서 은둔의 땅을 샅샅이 탐방했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사람이 숨어서 살 만한 은둔의 유토피아다.
▲ 내린천의 지류인 삼봉휴양림 냇가에서 물푸레나무로 물감을 풀어내며 숲 체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 | |
은둔의 유토피아, 삼둔 사가리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는 '삼둔 사가리'란 지명이 나오는데, 내린천을 끼고 있는 일곱 곳의 피난지소를 말한다. '삼둔'은 방태산 남쪽 홍천군 내면에 위치한 살둔, 월둔, 달둔을 말한다. 여기서 '둔(屯')이란 펑퍼짐한 산기슭으로 사람이 기대어 살 만한 둔덕을 뜻한다. 삼둔 중에서도 아직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살둔이다.
티베트의 어느 계곡을 방불케 하는 살둔마을에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명물이 하나 있다. 살둔산장이다. 30여 년 전에 지어진 이 산장은 옛 전통 귀틀집 모양을 띠고 있는데, 마치 티베트 건축양식과 유사하다.
산장 바닥에는 숯, 소금, 모래, 자갈을 깔고, 통나무 사이에는 황초(荒草)와 짚을 섞어 미장을 하고, 마루와 방 사이에는 굴피를 대서 방음효과를 냈다고 한다. 내린천이 휘돌아 가는 살둔마을에 위치한 살둔산장은 오랜 세월 풍류객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왔다.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살 만한 은둔처인 월둔과 달둔도 있다. 살둔산장에서 내린천을 따라 11km 올라가면 열목어가 솟구쳐 오르는 칡소폭포가 있다. 깊은 숲에서 흘러내린 물은 맑고 청정하다.
▲ 열목어가 솓구치는 내면 광원리 내린천에 위치한 칡소폭포 | |
'사가리'는 방태산 북쪽 인제군 기린면에 위치한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곁가리라고도 함), 명지가리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가리'란 사람이 살 만한 계곡가를 뜻한다. 즉, 전쟁(난)이나 전염병, 흉년 등에도 끄떡없이 숨어서 견딜 수 있는 길지라는 것. 사가리는 기린면 진동리와 방동리에 속해 있다. 방동리는 방동약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역이다.
적가리 골에는 현재 방태산 휴양림이 들어서 있다. 방태산휴양림 계곡에서는 물놀이를 할 수 있다. 휴양림 안에 있는 이단폭포(일명 이폭포 저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는 보기만 해도 더위를 잊게 해준다. 높이가 10m에 달하는 폭포의 세찬 물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흰 포말을 일으키면서 사계절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 방태산휴양림 내에 있는 이폭포 저폭포 | |
사가리 가운데 최고의 두메는 아침가리다. 아침가리는 아침나절만 밭을 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해가 저물기 때문이다. 방동리에서도 산을 하나 넘어 10km 남짓 가야 아침가리에 닿는다.
곰배령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침가리도 요즈음은 더 이상 두메산골이 아니다. 몇 해 전 아침가리계곡이 KBS TV <1박 2일>에 방영되면서부터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 더위를 피한다고 아침가리계곡 트레킹이란 희한한 트레킹이 급부상하면서 밀리는 차량과 계곡 트레킹족들로 시끌벅적해졌다. 기자가 이 지역을 통과할 때에도 입구에 대형버스와 차량들이 줄줄이 이어져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유명세를 타면 그만큼 오염도 심각해진다.
▲ 내린천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 내린천 계곡 트레킹으로 한 여름에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
허지만 내린천변은 아직 온통 초록 세상이다. 기린면사무소에서 방대계곡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니 점점 고도가 높아지며 울울창창한 원시림이 앞을 가린다. 진동계곡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서늘해진다. 자동차의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여니 그야말로 천연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와아, 이 시원한 바람! 정말 에어컨이 필요 없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천국이 따로 없네! 이제 다 왔어요. 내릴 준비들 하세요."
우리가 묵기로 예약한 민박집은 조침령 고개 밑 '설피마을' 초입에 있었다. 이곳 곰배령 인근의 지명조차 참으로 특이하다. '기린면', '조침령', '설피마을'등. '조침령(鳥寢嶺)'이란 말은 지형이 하도 높고 험하여 새가 하루에 넘지 못하고 잠을 자고 넘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하늘아래 첫 동네, 설피마을
'설피마을'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설피'라는 눈신발을 신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설피'는 다래덤불이나 노간주나무 껍질로 만든 타원형의 덧신으로 화전민들이 겨울철에 신발바닥에 덧대어 미끄러지지 않게 신고 다녔던 신발이다.
설피마을은 양양 양수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비포장도로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해발 957m에 양수발전소 상부댐이 들어서면서 포장이 되고, 조침령 터널을 뚫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오지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 양양 양수발전소 건설로 포장도로가 뚫린 곰배령 설피마을 | |
양양 양수발전소는 건설 당시부터 원시림 훼손, 환경오염, 연어의 회귀로 차단 등을 우려한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건설을 강행하여 착공 후 10년 만인 200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인근 주민들은 양수발전소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양양 남대천에 연어가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은어, 재첩 등 다양한 토종어류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주민들은 그 원인이 양수발전소가 들어선 후 남대천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휴, 정말 시원하네요!"
"이런 곳에 살면 비싼 에어컨도 살 필요 없고 전기료 폭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해발 600~700m의 진동계곡을 끼고 있는 설피마을은 '하늘아래 동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곰배령, 북암령, 단목령, 조침령 등 백두대간 4개령을 접한 설피마을은 진동계곡 앞여울과 옆개울을 끼고 있다. 또한 설피마을은 국내 유일의 원시림이 2049ha여에 걸쳐 각종 식생이 자생하고 있어 한여름에도 선풍기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한 곳이다. 설피마을은 원래 화전민들이 살던 지역인데, 지금은 화전민은 자취를 감추고 계곡을 따라 곰배령 입구까지 40여 개의 펜션과 민박집이 얼기설기 들어서 있다.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다. 숙소를 예약할 때 에어컨이 필요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편백나무로 둘러진 방안에 선풍기가 한 대 있었지만 작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민박집 주인의 말처럼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진동계곡은 전체가 천연 에어컨 그대로였다. 우리네 식구는 천연 에어컨 속에서 선풍기도 켜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 천혜의 원시림 속에 진동계곡을 끼고 들어선 설피마을은 해발 700여미터로 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있는 청정지역이다(설피마을 진동계곡에 들어선 펜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