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제의(因時制宜)
因 : 인할 인, 時 : 때 시, 制 : 지을 제, 宜 : 마땅 의
때에 인하여 알맞음을 만든다는 뜻으로, 그때그때의 변함에 따라 그때에 맞도록 함. 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세(時勢)에 맞게 함을 이르는 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여진족(女眞族)이 세력을 확장하여 청(淸)나라를 세워 황제 나라 명(明)나라를 위협하였다. 반면 명나라는 오랜 부정부패와 당파싸움 등으로 날로 국력이 쇠퇴해 갔다.
이런 국제정세에서 조선왕조의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은 그래도 두 세력 사이에 적절하게 외교전술을 펼쳐 침략을 당하지 않고 나라의 평화를 유지해 나갔다. 오늘날 광해군을 재평가하려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1623년 인조(仁祖)가 추대되자. 당시의 국제정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황제나라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의 예(禮)를 강조하고, 청나라는 오랑캐로 취급하여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다가 1627년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청나라와 형제의 관계로 동맹을 맺었다.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그래도 몰래계속 명나라만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초래하였다. 백성들은 청나라의 칼날 아래 완전히 내팽개친 채, 대신들과 비빈(妃嬪)들은 강화도(江華島)로 피란했다가 곧 강화도가 함락되는 바람에 일부는 자결하였으나, 왕자 등 대부분은 청나라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국왕 인조와 조정의 신하들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란하였으나, 청나라 대군에 포위된 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40여일을 버티었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구원군들은 남한산성 부근에서 기다리던 청나라 군대에 전멸을 당했다. 1637년 새해 초 인조는 왕세자와 신하들을 데리고 대성통곡하면서 성을 나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기다리던 청 태종(太宗)에게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11개 조항에 해당되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조건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는 청나라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왕세자와 왕자 척화(斥和)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가는 것 등등의 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는 돌아가면서 부녀자들을 무차별 납치해 갔다. 나중에 청나라에서는 막대한 돈을 받고서 찔끔찔끔 돌려보내 주었다. 이런 여인들이 이른바 ‘환향녀(還鄕女: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인데, 나중에 정조 잃은 여인을 가리키는 ‘화냥년’이란 말로 바뀌었다. 그렇게 고생하고 돌아온 여인들을 지체 있는 집안에서는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버렸다. 국제정세를 모르는 측근들의 잘못된 권유로 임금이 오판(誤判)하여 국가와 백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