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 중계를 보면서 그들의 수준 높은 선진축구와 빈자리가 없이 가득 모인 관중들에 시샘이 생긴다. 특히 독일의 분데스리가 경기서는 7,8만 명이 꽉 들어찬 운동장 곳곳에서 커다란 깃발을 흔들어대며 큰 소리로 응원을 해서 덩달아 나까지 흥분되게 한다.
수준 높은 경기를 하니 많은 관중이 모여드는 걸까, 아니면 서포터스의 열띤 응원이 있어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는 걸까.
어느 날, 분데스리가의 경기를 보다가 문득 저 사람들은 이렇게 건전한 주말을 보 내고 있는데 저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젊은 날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은 운동장이로되 관중석이 아닌 광장에 제복을 입고 서서, 일사분란하게 사열과 분열을 하며 오른손을 치켜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유럽 대륙은 물론 뜨거운 아프리카 전선과 하늘과 바다로 내몰려 죽음의 전쟁을 치러냈겠지. 상관의 명령에 의해 반인륜적인 행위를 할 때, 양심적인 지성인은 얼마나 갈등했을까. 아니면 함께 미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나 했을까.
그 당시의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이런 모든 일들은 단 한 사람의 잘못된 욕심이 빚어낸 슬픈 역사였다. 놀부의 욕심은 자기와 자기 가족에 한했지만, 히틀러의 미친 야욕은 독일 민족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것이다.
그래서 문득 무소유를 생각해 보았다. 법정 스님으로 인해 무소유라는 개념이 더 널리 알려졌지만, 법정 스님 이전에 이미 성철 스님은 앉은뱅이책상과 몽당연필, 그리고 누더기 장삼만을 남기고 입적하셔서 무소유의 참모습을 보여 주셨다.
깡마른 체구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하나님(하느님)의 길을 설교하시던 한경직 목사님도 노년에 남한산성의 작은 방 하나에서 침대 하나 책상 하나로 남자 집사님의 시중을 받으며 사시다가 소천 받으시지 않았던가.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통해 모든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하셨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든지,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소유의 깊은 뜻인가 본데, 너무 어려운 말씀이어서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세속적 욕망을 버렸다 하더라도 욕심 없는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니, 선한 욕심은 오히려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활력소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에디슨의 끝없는 욕심은 수많은 발명품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고, 예술가들의 끝없는 창작욕은 수많은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뿐인가. 승부욕 없는 스포츠는 또 얼마나 싱거울까. 체력이 소진되어 게임이 끝나고 그라운드에 누워 헐떡이는 선수를 보면서 감동받기도 한다.
여자 마라토너가 결승라인을 앞두고 체력이 다해 엉금엉금 기어서 골인하려고 애쓰는 장면을 보며 코끝이 시큰했다.
꼬마 연아는 넘어지지 않을 욕심으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탔겠지. 그러다가 넘어지지 않게 되자 이번에는 더 큰 욕심이 생겨 수 천, 수 만 번을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가 된 것이 아니던가.
누가 이런 운동선수들의 승부욕을 나무라며 무소유의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까.
나의 대학 학과 동기생들은 교수와 교사로 양분된 삶을 살아왔다. 이제 팔순이 되어 살펴보니 건강 상태가 확연히 구분된다. 상당수의 교수들이 교사들의 건강에 미치지 못했다. 교수들의 무한 학구열이 건강을 좀먹은 게 아닐까 싶다.
서울대학교의 언어학 전공 L교수님의 말씀을 30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한국어 일어 영어 만주어 몽골어 등을 좀 합니다. 그런데 여진어 거란어 퉁구스어 등등을 더 공부해야 할 텐데 이것들을 습득하려면 백예순 살쯤까지는 살 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그 때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L교수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동기 동창 교수들도 정년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연구할 것이 아직도 남아있다면서 지금 하고 있는 연구를 마저 끝내고 죽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알량한 우정을 앞세워 그 끝없는 공부욕심을 건강을 생각해서 좀 쉬라고 권고할 수가 없다.
인격이 바로 된 사람의 선한 욕심은 어쩌면 무소유보다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소유의 개념과 실천하는 삶은 존경받아 마땅한 덕목임은 분명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욕심쟁이 때문에 선한 욕심까지 매도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이 들며 욕심이 많이 줄었구나라고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식탐과 좋은 작품 한 편 정도는 남기고 싶다는 욕심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다.
욕심 대신에 소망은 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조금씩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빈손이라 줄 것이 없기는 하지만, 부드러운 말과 따듯한 미소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소망의 기도를 하라면 이렇게 하고 싶다.
“혹시 내게 내려주실 복이 아직도 좀 남아 있다면, 나는 이대로 좋으니 그 복을 내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것이 부족하고 무능했던 아비의 마지막 유산이 된다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