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작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보았어요. 1960년대에 상영된 영화인데 배우, 시나리오,
스케일이 아직도 훌륭합니다. 러닝 타임 4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한 클레오파트라 역은 지금까지 최고로 완벽하게 연기한 배우로 사람들
입에 오르고 있다는 것 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은 결혼하였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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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지만, 이 영화 ‘클레오파트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수메르문명이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고 본다면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중국 순으로 역사의 변천사를 보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애급-
바벨론-메대, 바사(마케도니아)-알렉산더 사망 후 3국 분할-로마시대까지의 기록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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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3국 분할 상태의 그리스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헬레니즘이 유대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헬라문화는 이후 유럽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문화로 꽃피워
졌고 크리스트교는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에 접목되어 당시의 로마에 급속도로 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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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주전 5세기 중엽부터 도시 국가 간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어
오다가 서로 패하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북방의 야만족으로 알려진 마케도니아가
헬라 세계에 위협을 가하게 됩니다. 그때의 마케도니아의 지도자는 필립 2세 (주전382-
336)이었는데 그는 정력적인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군제를 개혁하고 트라키아 해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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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지구를 공략하여 재력을 얻었습니다(357). 그는 세계 정복을 꿈꾸어 왔으나 고도
아이기아에서 암살당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둔 알렉산더 대왕이었어요. 주전 336년에 약관의 나이 20세에 필립 2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된 알렉산더는 헬라의 통일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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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334년경 막강한 장비와 무기를 갖춘 정예 3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소아시아, 두로, 가사등 주요 지역을 단숨에 공략했습니다. 그가 정복한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나일 강 멜-타 지역에 세운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외 그의 정복 사업은 이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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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부터 인도의 푼잡 까지 그리고 코카사스 산맥으로부터 리비아 사막과 애급 국경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의 동서 융합 정책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래서 이 지역이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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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여년이란 짧은 시일에 전무한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도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323년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보통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구분합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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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인 그의 융합 정책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첫째로 결혼 정책으로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융합 정책을 폈으며 둘째로 동서의 인종이
함께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고, 또한 많은 교통로를 개척하고 통상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흠정화폐를 발행하여 그의 지배 영역에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알렉산더 자신도
동방의 제도를 답습하여 페르시아 식 의관을 사용 하였고 신하들에게 엎드려 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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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 학문, 예술의 분야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스어는(코이네 헬라어)는 그의 전 영역의 공통어로서 동방 세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고 이 언어는 지중해(동부)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거의 6세기나 지속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그가 이룩했던 대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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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크게 3분할 되었는데. 안티고 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니아를,
셀류커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이집트를 통치하였습니다. 이들 국가 중 가장 강력했고 직접적으로 유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국이었습니다. 이집트를 나와바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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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프톨레미 소테르(주전367-282))는 알렉산더 사후에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통치자들보다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을 입수하여 알렉산드리아 시에 안치 하였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전305년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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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미 2세 3세 4세에 걸쳐 확장정책을 계속 추구하였습니다.
영화‘클레오파트라’는 3국 분할 후 300여년의 시기 중 어느 한 부분일 것입니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파라오)이 클레오파트라여왕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인
이었으니 토속 이집트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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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물려받았고 이 때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었지만 국가의 힘이 미약 한 것으로 보아 300년의 끝물 같습니다. 로마의 세력권
아래 있던 이집트에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이 함께 통치하고 있었어요. 한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를 지배해가던 로마의 실권자 시저(카이사르)는 이집트의 내전을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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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 이집트로 입성하고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납니다. 그녀의 도도하고도
아름다운 매력에 이끌린 시저는 내전을 해결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그칠 줄 모르고 시저의 힘을 얻어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꿈꿉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빠진 시저는 로마에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오랫동안 이집트에 머물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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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는 다시 전쟁을 치르고 드디어 로마에 입성합니다. 국민들의 시저에 대한 신뢰는 뜨겁지
만, 원로원의 몇몇 무리는 시저의 집권을 탐탁찮게 여깁니다. 시저는 결국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살해되면서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지요.그러나 그녀는 시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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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을 받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안토니우스의 초청으로 로마에 온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행렬이 물론 세트겠지만 스케일이 입이 쩍 벌어지더이다. 레드 카펫이
멋들어져요, 수많은 로마시민의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시저의 아들 카사리온을 데리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입성을 했고 그녀는 동방의 통치자로 아들 카사리온을 올리려는
야심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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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의 암살 이 후 로마의 최고 권력은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는데 아직 힘이 미약한 시저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문물이 풍부한 동방을 양보합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은 세익스피어에게 소재로 되어 쓰여 질 정도로 세기적으로 유명합니다.
악티움해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안토니우수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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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죽음은 거의 같이 했으니 여한은 없을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우선 그녀의 미모에 대한 것만 살펴봅시다. 그녀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헬레나와 같은 인물인데 헬레나처럼 그녀의 미모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그녀의 미모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정세를 좌지우지했다고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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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모의 헬레나를 놓고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일대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얘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미모를 놓고 미인파와 추녀파가
논쟁을 할 정도이었는데 최근 들어 대중들이 다시 그녀의 미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계기는
2001년 영국 대영박물관의 클레오파트라 특별전 때문입니다. 이 특별전은 전 세계에 흩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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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클레오파트라와 관련된 모든 유물(새로 발굴된 유물과 비공개 유물도 포함)이었는데
많은 유물과 작품들이 그녀를 고혹적이고 아름답게 그렸으나, 모두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답니다. 엄숙하고 평범한 얼굴에 불과 150㎝ 남짓한 작은 키, 뚱뚱한 몸매와 엉망인
치아로 그녀를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고 합니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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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를 맡았던 고고학 전문가 수전 워커 박사는 클레오파트라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남자를 뇌 살 시키는 고혹적인 여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히브리어·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지성적 인물풍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실력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과 관계를 맺고, 정치적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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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지성과 정치적 수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집트가 발칵 뒤집혔어요. 이집트의 고대 유적 연구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담은 유물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늘씬한 미인의 모습”이라고 반박하고 나섰어요. 다른 전문
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를 현대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견해도 보입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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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미모란 시대와 문화의 소산으로서 각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른데,
현대 서구적 가치기준으로 클레오파트라의 미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풍만
하고 둥글둥글한 원형미를 갖춰야 미인으로 평가받은데 비해, 현대에서는 날씬한 몸매와
날카롭고 각진 인상의 여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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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신화를 벗겨낼 또 다른 열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근친혼 관습입니다.
외래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근친혼으로
일관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자신이 남매 사이의 결혼으로 태어났고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여동생과 결혼해 클레오파트라를 낳았습니다. 그녀를 묘사한 당시의 유물에서 묘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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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커다란 매부리코와 살이 두툼한 목덜미 등은 아마 이런 근친혼의 결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신화의 출발은 무엇일까? 시저가 이집트에 있을 때, 카펫으로 몸을
말은 뒤 궁전으로 숨어들어가, 카펫이 펼쳐지자 나신의 몸을 카이사르에게 보여 그를 매혹
시킨 데에서 시작 되었을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한 카이사르가 그녀를 다시 권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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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시겼고 연인으로 지내다 아들 케사리온까지 낳게 되지요. 당시 그녀의 나이는 21살,
카이사르는 51살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남녀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두 사람이 정치적 동맹, 혹은 정치적 상하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급속히
확장중인 로마 제국의 여력과 내부의 정치투쟁으로 미뤄 보건데, 직접 통치보다는 현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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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 대리통치가 불가피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케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로 간 클레오파트라는 케사리온을 후계자로 지명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어요.
카이사르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해버렸어요. 이는 로마의 기존 권력층이
두텁기도 했으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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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입니다. 또 이 사건은 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로 등극하는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
를 자신의 정적으로 간주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는 근본 배경이 됩니다. 카이사르의 암살
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2차 3두 정치를 실시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부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고요. 적의 적은 바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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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녀와 함께 보냅니다.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를 근거지로 삼고
그곳의 실력자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맺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로마에 근거
지를 둔 정적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거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섹시한 여자, 지적인 여자가 대세나 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죽었을까요?
2019.11.12.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