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보목동 505번지(보목포로65번길36-7)
보목리에서는 1947년 3·1 발포사건에 반발해 총파업에 참여했던 중문지서 한태화(男, 23) 경찰이 제주지방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을 선고받은 뒤 주민들에게는 한 동안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9년 2월 20일 한세정(이명 한윤하 男, 26)이 서귀포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제주읍 도두리 궤동산에서 총살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한형용(男, 32. 서귀국민학교 교사)이 예비검속된 후 행방불명되었다.(2020년 제주4·3유적Ⅱ) 보목리는 가장 남쪽의 바닷가 마을이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한 축성이 이루어졌다.
“성을 쌓고 밤에는 또 우리가 어른들과 ᄀᆞ치 해서 보초를 샀주. 우리 마을엔 성문이 한 슷(여섯) 군데가 잇는디 거기다가 밤이 뒈면 보초 사는디(서는데). 우리가 학생 때도 어른들하고 치 가근엥(같이 가서는) 도록 보초사고. 또 폭도들이 와서 뭐 그 창으로 찌를까 봐서, 이제로 말민 뚜꺼운 방어복(방탄복)식으로 저 뚜꺼운 솜 놔서 창 안 들어가게시리. 그거 어른들이 만들어 주민 그걸 다 입어서 보초를 사고. 그 때사 첨 뭐 학생들은 공부할 생각은 나질 안 했던 거주. 그 당시는. 참 죽느냐 사느냐 이거여.”(1917년 제주어구술자료집7. 서귀포시 보목동 편 강진우 구술)
“우리 마을에서도 자위를 위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전주민을 동원해서 마을 주위 밭 돌담을 운반하여 마을 주위에 12척 높이로 성을 쌓았어. 이 축성은 오름 선반에서 시작하여 혜관정사, 독그물, 조노기 입구를 거쳐 큰동산, 현재 학교 남문 울타리로 구두미까지 2㎞ 성을 쌓았다. 제1초소는 학교 동쪽 정문 부근, 제2초소는 큰동산 앞에 있었으며 밤마다 보초(步哨)를 서도록 했다. 마을에서는 17세부터 50세까지의 남자들은 민보단과 한청(韓靑)을 조직해서 야간에는 성내의 경비를 담당하고 조를 편성하여 매시간 초소(哨所)의 구간을 돌면서 경비를 철저히 했다.”(1955년생 한두현 제보) 보목리의 희생자는 4명(제주4·3유적Ⅱ-서귀포시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름은 3명뿐이며, 주정공장수용소 4·3유적관에는 5명으로 나와 있다.
4·3 당시 보목리에서는 높이 3.5m 규모로 2㎞나 되는 성을 샇았다. 그 성담의 일부가 1967년 항공사진에서도 보이는데 동동네의 성담 일부가 남아 바다까지 이어졌었다. 지금은 제지기오름 서편에 주택과 밭의 경계담으로 남아 있다. 이곳은 오름 자락이라 경사가 심해 오른쪽에서 보면 높이가 1.5m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성담 서편 집쪽에서는 상당히 높다. 복목동 505번지 주택의 동편 경계에는 40m 정도, 507번지 일대에는 50m 정도 남아 있다. 한두현(1955년생, 男)에 의하면 507번지 성담은 도로개설로 곧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작성 202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