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병사의 노래
릴리 마를렌(Lili Marleen)
북아프리카 사막에 어둠이 깔리자
우리 대대의 전차들이 모여들어 둥글게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나의 전우들은 라디오를 가운데 놓고
둘러 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라디오에서 집합나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의
여자가 독일어로 부르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가장 잊을 수 없는 멜로디였다.
병영의 정문 앞에 서 있는 가로등...
그녀는 아직 그 앞에 서 있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고자 하네...
가로등 옆에 서 있고자 하네...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언젠가 릴리 마를렌이 그랬듯이...
나는 그 노랫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우리들 대부분이 그 뜻을 몰랐다.
우리는 독일군이 아니라
영국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웬일인지
우리의 생각과 기억 속에
깊이 스며드는 그 신비스런 목소리에
매혹되고 말았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들도
똑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때는 1942년 봄이었고
양측 병사들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노래 속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여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여인의 이름은 Lili Marleen이다...
'마를렌 디트리히'는
1901년생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라인하르트 연극학교
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영화계에 들어갔고
193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획득한다.
당시 히틀러는 그녀에게
군대홍보영화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싫었던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2차 대전 때
미군 해외 병사들을 위문하여
노래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릴리 마를렌'은 전설의 노래가 되었다.
릴리의 이야기는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초
4월의 밤에 젊은 사관후보생이며
풋내기 시인인
한스 라이프(Hans Leip)가
막사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라이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청과물가게 주인의
아리따운 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릴리라는 애칭을 가진 ...
그가 꿈꾸듯이 릴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안개 속의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마를렌의 모습이 나타났다.
라이프가 어느 화랑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를렌은
청록색의 눈을 가진
사랑스런 미인이었다.
마를렌은 그때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해주기 위해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를렌이 손을 흔들면서
인사말을 건넸을 때
마침 위병하사가 정문에 나타났다.
그래서 라이프는
인사에 답례를 보낼 수 없었다.
그는 마를렌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밤 막사로 돌아온 라이프는
침대에 누워서 릴리와
마를렌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다가, 문득 영감이 떠올라서
두 아가씨의 이름을 한데 묶은
여인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그는 그 시에다
'젊은 초병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러시아 전선으로 배속된 라이프는
릴리도 마를렌도 다시 보지 못했다.
20여 년이 흐른 후
자신의 시집을 펴내면서
라이프는 '젊은 초병의 노래'를
그 속에 넣었다.
베를린에 살던 작곡가
노르베르트 슐체가
그 시를 읽고 곡을 붙여서
'릴리 마를렌' 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
테너가수인 얀 바에른에게 주었다.
그러나 얀은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Schultze는 '릴리 마를렌'을
Lale Andersen이라는 이름의
한 나이트클럽 가수에게 주었는데
그 때는 이미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릴리 마를렌'은 700장밖에는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년후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뒤
독일군은 발칸반도와 북아프리카
주둔군을 위한 방송인,
'라디오 베오그라드'를 개국했다.
이 방송국의 국장은
방송에 쓸 레코드를찾다가,
우연히 '릴리 마를렌'을 틀게 되었고
1941년 8월 18일 저녁에
처음으로 방송전파를 타게 되었다.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사령관인
에르빈 롬멜장군은
이 노래를 자기 부하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는 매일 밤 '릴리'를
방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릴리 마를렌은
독일병사들의 노래가 되어갔는데
1943년 소련군에게
독일이 참패하면서
괴벨스는 이 느른한 노래가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생각해
원본 파기를 시도했으나
복사본이 남아 있다가
방송중지 3흘만에
다시 전파를 탔다고 한다.
가수 랄레 안데르센은
체포되었다가 탈출했다고 한다.
영국군이 처음 이 노래를 따라 부르자
전쟁 중 영국군이 독일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나의 릴리
(Tommie Connor)'란
영어 노래말이 나오게 되었다
에디트 파이프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었고,
마를렌 디트리히는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미국의 제 5군 장병들은
'릴리'를 노래하면서 피렌체로 입성했다.
독일에서는 '마를렌 디트리히'를
조국을 배신한 창녀라고 하면서
비난했다고 한다
허나 그녀의 노래는
결국 미국 전역을 거쳐
전 세계로 사랑 받게 되었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en)
병영 앞에 커다란 정문 앞에
가로등이 하나 밝혀져 있고
그녀는 여전히 그 앞에 서 있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만나고자 하네
가로등 옆에서 우리는 서 있고자 하네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우리 둘의 그림자 우린 마치
한 사람처럼 보였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걸
모두가 금방 알아 차렸네
그리고 우리가 가로등 옆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그걸 봐야 하네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보초병이 소리쳤네
소등 나팔이 울려
안들어 오면 3일 영창일지도 몰라
전우여 곧 돌아오게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네
내가 얼마나 그대와 떠나길 원했던가
언젠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가로등은 그대의 발걸음을 아네
그대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르
매일 저녁 가로등은 불타지만
그녀는 오래전에 나를 잊었네
그리고 나는 고통을 느껴야 했네
누가 가로등 옆에 서 있을 것인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사랑에 빠진 너의 입은 꿈을 꾸듯
조용한 공간에서 땅바닥에서 솟아오르네
늦은 안개가 되어 돌아 갈 때
누가 가로등 옆에 서 있을 것인가
언젠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에디뜨 삐아프의 '릴리 마를렌'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의 '릴리 마를렌'이
있으려니와
사람들은 '마를렌 디트리히'의
가라앉은 저음의 굵직한 허스키
보이스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애상의 정서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어쩌면 독일에서 처음 나온 노래
독일 출신의 마를렌에게는
가장 잘 어울린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나
마를렌 디트리히의 퇴폐적이고 허무적인
신비한 이미지와
이 노래가 또 더욱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이 노래는 48개국의 언어로 번안되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전에서도
월남전에서도
병사들의 애창곡이었다고 하니
한 시대를 풍미한 병사들의
전설이 된 노래라고 함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