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다.
아니지, 이른 새벽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나이 들면 누구나 그렇다지만, 새벽에 깨면 온갖 잡념만 떠오른다.
새벽 4시면 마땅히 할 게 없으니 큰 병이랄 수밖에.. 오늘도 잡념을 떨구려고 컴에 앉았다.
누구나 젊은 시절 잘나가지 않은 이가 있을까마는,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종로 5가, 백제약국 뒤를 가면 조선시대에 온 듯한 술집들이 있다.
소위 '기생집'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손님이 원하면 '장고'도 들을 수 있고, '노랫가락'도 들을 수 있고, '춤'도 볼 수 있으니...!
친구 녀석 때문에 알았던 그곳 분위기는 조선시대에 온 듯한 분위기랄까?
일단, 들어가면 미닫이 문이 열리고 절부터 하고 술상이 들어온다.
술상을 마주한 미닫이 열린 방에서 한복을 입은 여인의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다.
영화 '서편제'를 본 사람들은 이해가 빠르리라!
그날도 엊그제처럼 가을비가 주철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친구 녀석과 헤어지고나서, 딱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왜 그곳이 떠올랐을까!
술만 마시면 간덩이가 커지는 버릇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비싼 술값도 아랑곳없었다.
자주 다닌 것은 아니라도 다른 날보다 훨씬 예쁜 여인 ㅡ
노래 한자락 끝나고 내 부름을 받고 옆에 앉는다.
내가 필요한 건 여자이지, 노랫가락이 아니었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가 이어지자 내게 기대온 여인이 말했다.
"시 한 수 지어주시겠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기생 머리를 얹어줄 때 치맛폭에 붓글로 무엇을 쓰던 영화 생각이 났다.
"오늘, 네 머리를 얹어주랴?"
어쭈! 제법 운치있는 조선시대 선비의 억양이 튀어나왔다.
"호호호! 머리를 얹어주신다면야 소첩 기꺼이 응하오리다!"
이것!, 너무 쉽게 나가는 듯했다.
"지필묵을 대령하렷다!"
나는 장난소리로 하였는데, 벌떡 일어서더니 정말 지필묵을 가지고 왔다.
하얀 종이가 깔렸지만, 무얼 쓸 줄 알아야 쓰지!
나는 다시 장난끼로 말했다.
"오늘 네 머리를 얹는다 했거늘, 웬 종이를 가지고 왔느냐?"
"어머! 그러면 어디에 쓰시려구요?"
"치마를 걷어올리거라! 머리 얹는 날은 속치마에 써서 너는 그것을 평생 간직해야 하는 법이니라!"
정말, 그녀는 써보란 듯이 겉치마를 걷고 내 옆에 앉아 글씨를 쓸 수 있도록 속치마를 폈다.
난감했다.
붓글씨도 서툴지만 한자를 아는 게 있어야지!
그렇다고 한글로 쓰면 운치가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 선비라면야 긴 시조를 쓰든 의미있는 글을 쓰겠지만, 도대체 무엇을 써서 이 위기를 극복한단 말인가!
그때, 찰나적으로 떠오른 글이 생각났다.
"淸風明月"
획수도 많지 않아 쓰기도 쉬운 '청풍명월'이 분위기에도 맞을 것 같았다.
그녀가 뜻풀이를 해 달라고 했지만, 문자 그대로 '맑은 바람이 부는 밝은 달'이라 말했다.
밝은 달밤에 부는 바람이니 얼마나 좋겠냐고 한 술 더 떴다.
그녀는 겉치마를 벗어 벽에 박힌 못에 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청풍명월의 글씨가 마르도록 전면에 보이게끔 속치마도 벗어 걸었다.
그녀에게 남은 옷은 무릎을 약간 덮는 반바지 차림의 속바지가 있었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여인이 아니었다.
속바지 차림인 그녀는 야수로 돌변해 나를 쓰러뜨렸다.
조선시대에도 머리를 올려주는 첫남자에게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녀는 다소곳하던 조금 전의 여인이 아니었다.
머리에 곱게 꼽았던 비녀가 떨어졌다.
그러고보니 머리를 땋은 머리를 올려야 비녀를 꼽는다는 것이 인지됐다.
그녀는 이미 머리를 올린 여인이 아닌가!
그 생각도 오래할 수 없었다.
산발한 머리처럼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덮는다.
뱀의 혀 같은 뾰족한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다.
"잠깐만, 왜, 왜이래, 이불이니 펴고 시작해! 헉! 헉!"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새 내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그녀는 내 말이 떨어지자 일어나 벽장인 듯한 곳에서 솜이불을 꺼낸다.
처음 보는 두툼한 이불이었다.
자정도 멀었는데 왜 그녀는 급히 서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중 안 일이지만, 시간이 오래일수록 비싸진다고 했다.
그녀의 반바지 속엔 작은 천조각 같은 팬티가 있다는 것을 잠시 후에 알게 됐다.
그 작은 천조각마저 일어난 그녀의 몸을 떠나는 모습이 옅은 조명 아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온 여인이 뜨거운 입김을 쏟아낸다.
내 입술을 뜨거운 타액으로 적신 그녀가 입술을 떼며 말했다.
"후~~ 청풍명월 좋은 밤이잖아요!"
그때, 나는 속으로 말했다.
"청풍명월은 무슨, 밖에는 빗소리가 들리고 뜨겁기만 한데!"
우린 그날이 인연이 되어 한동안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세 살 위라는 것도 한참 후에 알게 됐다.
아이가 있고, 남편 있는 여인에게 머리를 얹혀준 오래 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추석이 다가오는 새벽에, 밝은 달이 떴을까 하는 바람으로 본 하늘은 흐리기만 하다.
내가 처음으로 여인에게 머리를 얹혀준 사연 ㅡ
창신동 아주머니는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그날, 나는 반 달 치 월급이 날아갔다.
그 여인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월급을 다 날렸다고 말했다.
창신동 연상의 여인이 ㅡ
첫댓글 고관들은 삼청각. 선운각(지금의 고향산천)의 고급 요정을 드나 들던 그 시절,
님은 멋진 풍류를 즐기셨습니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은 방석집을 찾았죠.
그때의 낭만이 한 두번은 있었을 겁니다.
종삼의 뒷골목은 피아노 치는 집도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어데서 다들 무얼하고 지내는지?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인데, 지금도 백제약국 뒤에 그 집이 남아있는지 가 보지 못했습니다.)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언제 한 번 갈 꿈만 꿉니다.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창(唱)을 들으며 술을 마시면 또 다른 한국의 멋(
약 20여 곳 있다고 기억하는데,,,
명절 잘 지내셨죠
이런 글에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