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집 마당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은행나무는 겨우내 빈가지로 죽은 듯이 자리를 지키다가, 이른 봄부터 분주하게 뜨개질을 하듯 신록을 짜기 시작했다. 여름이 오자, 은행나무는 감청색의 작은 숲처럼 우거져서 청량하고 부드러운 양감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 여름 여전히 내가 본 세상에는 나무라곤 은행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가을이 되었을 때 잎 속에 감춰 키워오던 은행 알이 은행잎과 함께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마,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지. 돌연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면서 형용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운 곳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긴 했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부실했던 것에 대한 당혹감은 결코 아니었다. 일 년 가깝게 같은 자리를 수없이 맴돌았건만, 겨우 서너 집 건너의 은행나무를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내 삶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진저리가 쳐졌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들은 마주보며 한 쌍의 나무였음을 수시로 내게 알려 왔을 것이다. 허나 그것을 알아채기란 나의 정서는 사막같이 불온하고 척박했다. 이웃집의 또 한 그루 은행나무로 자연의 질서와 균형을 통감했지만, 머지않아 그 나무와의 만남은 거리에서 스치는 의미 없는 타인과 일별하듯 심상하게 잊혀져갔다. 그만큼 먼 곳을 바라보는 일 자체가 내겐 모호했고 가깝게 보이는 것만 절박했다. 마당가의 은행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린 열매가 익어가는 풍요로운 가을을, 바람을 타고 우수수 흩뿌려저 남루하게 소외된 풍경을 채색하던 황금빛 나비 떼를, 몇 집 건너의 부실한 또 하나의 은행나무를, 나는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쉼 없이 달리고 있는 자동차 소리가 댐에 물 넘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도시의 풍경 속으로 몇 집 건너의 은행나무까지 뭉뚱그려 밀쳐놓곤 했던 것이다.
그 무렵 오직 은행나무 한 그루로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느꼈다. 어찌어찌 흘러와 먼 산 능선조차 보이지 않는 번화가의 건물 이층에 머물게 되면서부터 내게 그것은 유일한 자연이 되었다. 빌딩에 가려서 하늘 귀퉁이도 보이지 않는 집안은 그나마 창문을 열면 이웃집 내실이 확연히 보이기에 창이란 창은 모두 무겁게 커튼으로 둘러쳐 있었다.
유일하게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뒤란에 쪼그리고 앉아 무료하게 햇살을 쪼일라치면, 형형색색으로 치장한 건물들과는 달리 이질적인 배경은 화려한 빛깔의 옷을 벗은 늙은 여인의 쇠락한 육체처럼 비애스러웠다. 쓰다 남은 건축 자재 자투리나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의 낡은 뒤쪽은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롭게 보였다. 그 살풍경 속에서 오랜 날을 튼실하게 자라 올라온 은행나무가 성큼 내게 눈을 맞춘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은행나무 한 그루는 내게 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새들에게도 소중한 자연이었다.
고만고만한 몸집의 새들은 포르르 날아와서 은행나무 잎사귀 속으로 새소리만 남기고 숨어 들어갔다. 어떤 새들이 날아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없이 변화 있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동네에 나무가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새들에게 이곳은 마치 도시를 통과한는 중요한 동선인 듯했다. 어쩌면 나그네새나 길 잃은 새까지 은행나무에서 쉬어 갈 지도 모를 일이다. 날마다 새들은 줄기차게 은행나무에 날아들었다.
새소리에 묻혀 살다보니 녀석들의 희노애락을 조금은 감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새떼들이 가슴이 아리도록 구슬픈 울음을 남기고 검푸른 박명 속으로 물감처럼 풀려 사라져갔고, 간혹 오수에 젖어있는 혼곤한 시간에 짧은 음절이 아닌 긴 소절의 다채로운 노래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봄날 마른 나뭇가지에 물오를 때 환희의 숨결같기도 했고, 부푼 치맛자락이 미풍에 휘말려 올라갈 때 반짝 드러난 숫처녀의 뽀얀 허벅지처럼 숨막힐 듯 간드러진 유혹의 노래 같기도 했다. 유년시절, 오월이면 굴뚝새는 소리부터 달라졌다. 찌찌 쪼쪼쪼...... 겨우 쫏, 쫏, 찌찌쪼로, 쪼로로로로...... 하며 집 뒤 호두나무를 오가면서 온종일 애타게 격정적인 지저귐으로 소일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봐서 은행나무에서 들려오던 새소리는 짝짓기의 절정이라는 것은 나는 짐작했다.
금욕주의자로 알려졌던 톨스토이도 심심찮게 외도를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변명으로 '나는 새가 아니므로 날마다 똑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새들은 날마다 지루하게도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단정 지으며 바람기의 방편으로 변명했을까. 새들에게도 감정의 기복과 언어가 있고 울음과 노랫가락이 엄연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을. 단지 주둥이와 혀가 뾰족한 탓에 포유류처럼 여러 가지 음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은행나무에는 철따라 참으로 많은 새들이 다녀갔다. 삐잇, 삐잇 우는 것으로 봐서 직박구리와 비슷했고, 치이치이 시치삐, 시치삐, 소리는 박새 같기도 했다. 쀼이 큐큐큐 우는 녀석은 쇠찌르레기 같기도 했고, 쓰쓰삐이 쓰삐이 하는 새소리는 곤줄박이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새라고 확신하기에는 거대한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만들어놓은 숲은 그윽하고 몽밀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새소리를 듣자니 문득 깨달은 것이 있는데 새소리는 대체적으로 뾰족하다는 사실이다. 새들에게 부리는 표피세포가 케라틴을 합성하여 각질화된 것이라서 날카롭지 않을 수 없다. 낟알이나 씨앗, 과육을 쪼아야 하고, 물고기나 곤충의 사지를 찢는 힘이 있어야 먹고 살아갈 수 있다. 입에 걸맞게 재단된 새의 혀도 뾰족하다. 딱딱하고 뾰족한 혀가 내는 소리는 한정되어 있는 듯하다.
도시에서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 옛날 바람 부는 날이면 흉조로 푸대접을 받는 까마귀는 까악- 까악- 숨넘어갈 듯 울어대며 흐린 하늘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병아리만 하더라도 삐약삐약 울다가 어른 닭으로 성장하면 꼬꼬댁이나 꼬끼오~ 하고 꼬집은 듯이 높은 음계를 찾아낸다. 까치는 탁한 목소리로 깍깍대면서 전선을 아슬아슬 옮겨 다니며 곡예를 한다.
새라는 단어의 어감마저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처럼 뾰족하다. 새~ 하고 말하는 순간, 둥지 같은 따뜻하고 둥근 입과 혀 사이를 뚫고 바람을 일으키켜 새 한 마리가 빠져 나가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갈 것 같다. 늘 그랬듯이 새는 아름답게 노래한다, 슬프게 운다, 그 정도로 나는 단순하게 기억했어야 했다. 정말 그랬어야 했다.
'새는 새장에 갇히자마자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는 최종천의 시처럼 유배지 같았던 이층집 시절, 나는 새소리가 대체적으로 뾰족하다는 평이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어둡고 눅진했던 이층집의 기억은 이젠 잊었다. 허나 그 무렵 내겐 세상의 유일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은행나무를 점령했던 무수한 새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바늘처럼, 대못처럼, 송곳처럼, 가시처럼 날카로웠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울산문학], 2008, 가을호.
첫댓글 어제 산에 갔다 오면서 새들이 모여 지저귀는 소리에 그 숲 근처에서 새들을 찾아 보았는데^^.. 이 글에서.. 새라는 단어의 어감조차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처럼 뾰족하다.. 그러네요~~ 잘 읽었습니다~~~
새소리 의성어가 참 이뿌지요? 이렇게 듣는 작가의 귀는...... 함지박 귀?
이글은 정말 마음으로 쓴거네요. 울림을 감지하면서...낮에 읽을 때와 밤에 읽을 때가 틀립니다.
문장으로 보면 다소 흠이 있지만, 문장을 자신의 마음에 알맞게 짜내는 솜씨가 이만하면 웬만한 작가 못 따르겠죠. 예전에 울산에서 글 쓰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사는 분입니다.
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그릇안에서 부풀리지도 않고 멋부리지도 않고 최대한의 것을 뽑아 낸듯한...
이 작가(수필가)는 도미문을 적절하게 잘 씁니다. 쉼표와 쉼표와 쉼표로 이어가면서 그 모인 쉼표들의 힘이 문장 끝에서 빛을 발하는. 그리고 자신만의 귀로 사물을 듣고 보고 표현하네요. 작품이 마음에 들어 전화했더니만,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안 하시고 황망해하며 곧 말을 다른 데로 돌리며 끊었습니다. 작품이란 그런 것, 쓰고는 말이 없는 것.(잘 쓴 글은 글자만으로도 스스로 살아움직임을 느낍니다.) 저도 하나씩 배웁니다.
화창한 날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는듯 생생한 글입니다. 저희집 뒷정원에도 새들이 많이 찾습니다. 올여름 방문했던 아버님이 한국으로 가시 전에 저만 이곳에 덩그러니 두고가기 섭섭하시다면서 새들이라도 많이 와서 놀라고 새모이를 잔뜩사다가 군데 군데 놓아두어 예쁜새들이 많이 다녀갔답니다. 허밍버드도 딱 한 번 봤는데 참 이쁘더군요. 즐감입니다.
멋진 아버님이시군요. 저도 나중 딸아이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왜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새장 살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과장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아주 적절한 느낌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이 정도 수필이면 수작이라 하겠습니다. 올려주신 허밍버드도 즐감했습니다.
음, BOD의 귀에는 [방울 소리] 또는 [은쟁반에 구슬 구르는 소리] 또는 [휘파람 소리] 등으로 들리는데, 뾰족한 새소리도 있었구낭, 기억해야쥐....@@....아고,
제목 좋죠?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허만하 시인에는 못미치겠지만, 나름 새로운 발견이라 맘에 듭니다.
좋은 수필이네요.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마음과 감각을 작가가 느낀 그대로 표현하려고 애쓴 작품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