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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
하게 됐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 안전
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하게 되고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
되었다.
미군을 주로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19
50.9.15), 서울을 탈환하고(9.28), 38
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10.13),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진격(10.
26)하였으나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이 개입(10.25)함에 따라 전세
가 역전, 휴전 교섭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
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7월27일 유엔
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
에 들어가게 되었다.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해를 가져왔다. 해방후 5년만
에 일어난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
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미녀 삼총사’ 파라 포셋 사망
미국 인기 드라마 ‘미녀 삼총사’로 유명한 1970년대 섹스 심볼 파라 포셋이 암 투병 끝에 2009년 6월 25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포셋의 대변인 폴 블로크는 그가 이날 오전 9시30분 직전 샌타모니카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고 발표했다. 플로크 대변인은 포셋의 오랜 동반자로 그가 항문암에 걸린 뒤 재결합한 라이언 오닐과 가까운 친구인 앨라나 스튜어트이 임종했다고 전했다.
그는 1976년 ‘미녀 삼총사’에 출연하면서 빛나는 금발과 환한 미소로 바로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포셋이 몸에 착 붙는 수영복을 입고 찍은 포스터는 수백만장이 팔려 나갔으며 그의 헤어스타일은 미국 전역의 소녀와 여성 사이에 크게 유행되기도 했다. 포셋은 ‘미녀 삼총사’에 한 시즌만 출연한 뒤 떠났으나 이후 80~90년대에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그는 2006년 항문암 진단 후 오닐의 헌신적인 간병 속에 치료를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24살 된 아들 레이먼드가 있다. 이달 들어 오닐은 포셋에게 정식으로 청혼해 응낙을 받았다고 공개,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2009년 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2009년 6월 25일(이하 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마이클 잭슨
CNN과 LA타임스, 티엠지닷컴(TMZ.com) 등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이날 낮 12시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현지소방서에 긴급구조를 요청했으나 사망했다.
이날 낮 12시 21분쯤 911전화를 받고 출동한 긴급의료진이 마이클 잭슨 자택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마이클 잭슨은 반응을 보이지 않아 UCLA 메디컬센터로 옮겨졌다. 미 소방당국은 마이클 잭슨이 이날 오후 2시 26분쯤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에서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준비중이었다.
같은 해 8월 25일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마취제 성분으로 밝혀졌으며, 잭슨의 불면증 치료를 약 6주간 해왔으며 매일 밤 강력한 마취제인 프로포폴(propofol) 50㎎을 정맥에 주사한것으로 알려진 잭슨의 주치의인 콘래드 머리(Murray)가 과실치사 혐의를 받게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 인생은 5세 때 부터 시작됐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를 결성, 음악적 재능을 뽐내며 리드 보컬로 팝계에 입문했다. 그는 1976년 '잭슨스'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에서 1984년까지 활동했다.
마이클 잭슨은 1971년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라는 음반을 시작으로 홀로서기 시작했으며 그의 솔로 전성 시대는 1982년 발매한 '스릴러'(Thriller) 음반에서 만개했다. 앨범 수록곡 9곡 중 7곡이 빌보드 차트 톱 10에 들었다. 특히 '빌리 진'의 뮤직비디오가 MTV로 공개되자 그의 '문워크 춤'은 전세계 음악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스릴러’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약 6000만장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이같은 명성을 바탕을로 지난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2005년 이란 대선에서 강경보수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당선
▶2004년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
한국인으로서 첫 미국 NBA 진출
국내 최장신 농구선수 하승진(연세대·2m23·사진)이 한국선수로서는 처음으로 NBA(미 프로농구)에 진출했다.
하승진은 25일(한국시각)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실시된 04~05시즌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7번, 전체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의해 지명됐다. 하승진은 2년 계약기간 최저연봉 34만9458달러(약 4억247만원)를 보장받는다.
한국 선수로선 처음으로 NBA에 이름을 올린 하승진은 자신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됐다는 소식을 드래프트가 실시된 뉴욕이 아닌 LA에서 들었다. NBA측이 1라운드 상위 지명이 예상되는 선수들만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일급 대우가 보장된 1라운드 지명에서 제외되고, 2라운드 17번째 만에 이름이 불려졌으나 그의 목소리에선 실망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에 와보니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았어요. 몇 라운드, 몇 순위에 지명되는가보다는 일단 NBA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습니다. 오히려 2라운드에 지명되고 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앞서요.”
2m23의 큰 키로 국내 고교(삼일상고)·대학(연세대) 무대를 간단히 평정했던 하승진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2002년 한국,
월드컵 준결승전서 독일에 0대1 패
잘 싸웠다. 휴전선에서 마라도까지, 백령도에서 독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 마음이 된 4800만 ‘붉은 악마’와 함께 잘 싸웠다. 우승후보로 꼽히던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을 잇달아 꺾으며 세계축구사를 새로 써온 한국의 월드컵 ‘이변 행진’이 준결승에서 멈췄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1승은 물론 16강·8강을 거쳐 4강까지 진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분패했다.
한국 선수들은 조별리그 3경기에 이어 이탈리아와의 16강전(18일) 117분, 스페인과의 8강전(22일) 120분을 뛰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나선 철인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잠재력이 결합된 한국만의 ‘파워 축구’는 남미와 유럽의 어느 팀도 흉내낼 수 없었다.
독일도 그 힘을 의식했는지 이날 전반부터 조심스럽게 나왔고, 후반전 득점한 뒤에는 철저히 지키기 작전을 펼쳤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전에서 발목을 다친 김남일을 빼고, 이천수와 차두리를 선발로 내세웠지만 신체조건이 앞선 독일의 단단한 수비를 뚫기에는 선수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독일의 결승골은 한국 선수의 피로 기색이 역력했던 후반 30분 터졌다. 노이빌레가 한국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뒤 낮게 크로스를 했다. 발라크는 문전으로 달려들며 오른발 슛을 했고, 이운재가 전진하며 쳐낸 공을 다시 왼발로 슛해 골 그물을 흔들었다. 이날 서울(250만명), 부산(43만), 대구(29만명), 인천(20만명) 등 전국 458곳에서 700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
2002월드컵 한국-독일 4강전을 광화문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이 경기가 끝난 후 태극기를 펴들고 경건하게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2000년 6.25전쟁 50주년을 기념
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전
전쟁기념관서 개막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전쟁기념관과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는 특별기획전 `아! 6.25-그때는 자유를,이제는 통일을`이 2000년 6월 25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개막됐다. 이날 오전 11시 개막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전시회 현황 브리핑을 들은 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있어선 안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막행사에는 김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 피델 라모스 필리핀 전대통령 내외, 조성태 국방부장관,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아! 6.25`전은 `잊혀진 전쟁`이나 `동족상잔`만이 아니라 `자유세계를 지켜낸 전쟁`이자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긴 계기를 만든 전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6.25전쟁의 의미와 실상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기획됐다. 2년간 미국-일본-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사진, 문서, 영상 및 실물자료 5천여점이 12월 31일까지 전쟁기념관내 2천평의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됐다.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98` 영문판 판매
▶1996년 불교계 대표적 스님 서경보 스님 입적
1996년 6월 25일 입적한 일붕선교종 종정 서경보 스님은 불교계에서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한명이었다. 서경보 스님은 세계 각국을 무대로 활동을 펼쳐왔으며 1백 26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1천42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그는 또 헤아릴 수 없는 서예작품을 남겼고 이같은 정력적인 활동으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저명인사가 됐다.
제주도 서귀포 출신인 서경보 스님은 18세에 출가한 후 구례 화엄사, 서울 개운사 등에서 공부했으며 일본 임제불교 전문대학 유학을 거쳐 1950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 중 한사람으로 1969년 미국 템플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던 그는 동국대 불교대 학장, 불국사 주지, 원로의원 등 조계종단의 중요직책을 역임했다. 서경보 스님은 그러나 1988년 조계종을 탈종해 ‘일붕선교종’이란 별도의 종단을 만듦으로써 한국 불교의 주류에서 벗어났으며 1992년에는 세계불교법왕청을 세워 초대 법왕이 됐다.
1993년 저서 7백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건립 7백51개, 선필 50만장 등 4개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던 서경보 스님은 이같은 파격적인 행동으로 불교계에서 ‘돈키호테’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부근 미군공군기지 폭탄테러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항구도시 다란 부근 미 공군기지 앞 도로에서 1996년 6월 25일 밤10시30분쯤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폭발사건으로 도로와 접한 기지 내 8층 건물이 부서지면서 19명이 숨지고 중상자 73명 등 2백70여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19명은 전원 미군인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폭발사건 직후 이번 사고를 테러공격으로 규정하고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할 것이며 끝까지 범인을 추적 반드시 응징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파괴된 건물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방부 소유로 미군 가족 아파트와 미 공군 4404비행단 사령부로 사용돼 왔다. 폭발 현장은 깊이 11m 폭 28m의 구덩이가 파여졌으며 사건 현장에서 5km 떨어진 주택가 유리창들도 모두 박살나 폭발물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날 폭탄 테러는 1983년 2백41명의 사망자를 낸 레바논 미 해병대 건물 폭탄테러사건 이래 최악의 것이라고 미 국방부 측이 밝혔다.
▶1995년 미국 대법원장
워렌 버거 별세
▶1995년 대북 지원용 우리쌀을 실은
‘씨 아펙스호’ 동해항 출발
대북쌀 지원을 위한 우리쌀 1차분이 1995년 6월 25일 오후 5시 강원도 동해항 중앙부두를 출발했다. 이날 출발은 북측의 연기요청에 의해 하루 늦어졌다가 이날 북경에서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북한 삼천리총회사간에 실무계약서가 서명됨에 이루어졌다. 1천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출항식에는 이홍구 국무총리의 기념사와 송영대 통일원차관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기념식후 우선 지원분 2천톤을 실은 ‘씨 아펙스호’(선장 김례민)는 출항 기적을 세번 울린 뒤 출발해 26일 오후 청진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씨 아펙스호’는 북한의 위협으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만을 게양한 채 청진항에 진입, 쌀을 하역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부는 북한에 공식항의하며 북측이 사과할 때까지 2차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자 북측은 30일 공식 사과했다. 이에 수송선 3척에 나눠실은 2차분 8천톤도 7월 4일 목포항과 부산항에서 각각 출항했다.
▶1991년 유고연방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
▶1987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
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내에서 발효
▶1986년 브라질,
22년 만에 쿠바와 외교관계 재개
▶1984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사망
프랑스 전후 사상가 중 가장 뛰어난 한사람으로 알려진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1984년 6월 25일 파리 병원에서 사망했다.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이 이 위대한 철학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향년 57세였다.
그는 역사와 철학의 근본에 관한 날카롭고 새로운 의문제기로 대서양 양대륙에 많은 지식인 지지자들을 끌어모았으며 현실에 사상의 뿌리를 두어 동성연애자와 수감자들의 권리 및 사형폐지를 위해 싸워왔다.
푸코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61년에 출간한 ‘광기와 착란,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였다. 이 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면서 프랑스 바깥에서는 ‘반정신의학’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사상운동을 일으켰고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 문학이론가 롤랑 바르트에 의해서, 역사과학에 구조주의를 적용한 첫번째 시도로 평가됐다.
▶1982년 김상협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아세안5국 방문 등정
▶1980년 엘살바도르, 국외탈출 꾀한
시민군의 무차별발포로 600여명 사망
▶1979년 중국, 월남과 평화협상 재개
▶1977년 국내 최초의 해양자원탐사선
`탐해호` 명명식
▶1975년 모잠비크,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3년 한미경제협의회 발족
▶ 1966년 김기수(金基洙)
세계챔피언에 올라
한국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 선수가 주먹을 쳐들고
기뻐하고 있다.
15라운드가 끝나고 발표된 점수는 1대1. 마지막 주심의 채점을 발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벤베누티 68점...". 순간 장충체육관을 가득메운 8000여명의 관중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칠시입...”하는 발표가 다시 이어지자 장내는 함성의 도가니가 됐다. `74점`의 뒷 숫자 `4`는 환호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1966년 6월25일 밤 10시20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다. 함흥에서 월남한 가난한 소년 김기수(金基洙) 선수가 숙적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대1 판정승으로 이기고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6년전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전에서 김기수를 무릎꿇려 아마전적 88전 중 유일하게 1패를 안겨준 벤베누티에 대한 멋진 설욕이었다.
승리를 확인한 김기수는 귀빈석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달려갔고 대통령은 손수 챔피언 밸트를 채워주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 5만5000달러나 되는 개런티를 주면서까지 일궈낸 김기수의 승리는 국민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심어준 `일대사건`이었다.
▶1963년 거제도 장승포 압사
1963년 6월 25일 아침 8시쯤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장승포리 3구 거제 중학교 앞 왼편에 있던 높이 70미터쯤되는 산이 무너져 언덕 뒤편의 학교운동장과 앞쪽의 가옥 6체를 완전히 뒤덮어 경찰관 9명과 주민 60명 등 모두 69명이 묻혀 숨졌다. 숨진 경찰관은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하기 위해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가 주민들과 함께 변을 당했다.
이날 사고가 난 산은 며칠전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 셀리호의 영향으로 금이 간데다 24일 밤부터 내린 비로 붕괴될 염려가 있어서, 경찰이 이 마을 9가구 주민들에게 대피를 독려했으나 이를 외면해 일어났다.
이번 사태로 너비 약50m, 길이 20m쯤 되는 흙더미가 쏟아져 1천여평이 매몰됐다. 사고 목격자에 따르면 사고난 때가 아침식사 시간이라 대부분 가족이 아침을 먹던 중 우레같은 소리와 함께 높이 2m 폭1m가량의 바위가 집 앞마당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산이 무너졌다고 한다.
▶1962년 한국-시에라리온 국교 수립
▶1962년 한국-도미니카 공화국,
국교 수립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부산정치파동으로 정국이 혼란에 처해있던 1952년 6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행동대 의열단의 한 단원이었던 유시태가 6·25전쟁 기념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탄환이 불발함에 따라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태는 현장에서 잡히고 배후인물인 김시현도 잇따라 붙잡혔다. 김시현은 6개월 전인 1951년 12월에도 인천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대통령 저격을 제의한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국가를 살리는 길은 이대통령을 제거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론, 거사에 합의했다고 진술했다.
한때 수사당국은 배후인물 김시현이 민주국민당 소속이었음을 이유로 민국당 고위층인 백남훈, 조병옥 등에게도 수사의 손길을 뻗쳐 정가를 더욱 긴장시켰다.
두 사람은 1953년 12월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1954년 1월 무기형으로 특사 감형되었고 1960년 4·19혁명으로 풀려났다.
1961년 1월 19일 서울고등법원형사 제3부는 민주당전복음모사건의 홍진기, 신언한, 김시현, 유시태, 이태희(왼쪽부터)등 5명에 대한 `무고교사 무고 사기`등 공소사건 첫 공판을 개정했다.
▶1951년 미 CBS방송,
최초의 상업 컬러TV 방송 개시
미국의 콜롬비아방송(CBS)이 세계 최초로 상업컬러 방송을 1951년 6월 25일 오후 4시 35분부터 시작했다. 제1회 출연자는 FCC(연방통신위원회) 이사와 연예인들이었다. 방송은 CBS가 개발한 회전원반방식(回轉圓盤方式)으로 진행됐다.
세계최초의 상업 컬러TV 방송
촬영 현장.
컬러TV방송은 이 CBS방식과 RCA의 3전자총방식(3電子銃方式)이 경쟁하고 있었다. CBS방식은 화질이 뛰어나지만 전용 수상기를 필요로 하고, RCA 방식은 흑백의 화상으로 되어있는 종래의 수상기에서도 수신이 가능하지만 색번짐이 심했다.
그래서 FCC는 CBS를 허가, 이날 정기방송을 개시할 수 있었다. RCA는 소송을 제기하며 반격했다. 그러나 10월 19일 국방동원국은 6·25전쟁의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컬러TV 수상기 생산중지를 CBS에 요청, 컬러방송은 연말에 중지됐다. 나중에는 호환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RCA사의 全전자식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 미국의 표준규격으로 채택되어 1954년 1월부터 방송되기 시작했다.
▶1949년.북한서 남북의 민전(民戰)을
통합한 한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서울-평양에서 각 단체와 합동회의
▶1944년 미술사학자 고유섭 사망
▶1920년 한국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 창간
한국 최초의 종합 월간지 `개벽`이 1920년 6월 25일 창간됐다.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 인쇄인 민영순으로 창간된 이 잡지는 국판 160면 내외의 국한문 혼용체였다.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간된 탓에 일제에 대한 항쟁을 기본노선으로 삼았고,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개조와 민족문화 창달을 표방했다.
월간지 `개벽` 표지.
이 때문에 개벽은 창간호부터 압수되는 수난의 길을 시작했다. 1926년 8월 72호를 끝으로 강제폐간될 때까지 발매금지(압수)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의 기록이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이 연일 개벽의 폐간조치에 항의하는 기사를 실었지만 결국 소생하지 못하고 1926년 8월 1일 폐간됐다.
개벽은 이런 수난의 역사를 통해 당시 민중들에게 자주의식과 자유사상,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세계적 조류인 민족자결주의를 소개했으며, 민족대동단결과 국산장려운동 등을 제창했다. 민족문화창달을 위해서 전 지면의 3분의 1을 할애하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커, 김기진 박영희 현진건 이상화 염상섭 최서해 등 사회주의적 또는 동반자 작가적 성향을 지닌 문인들이 `개벽`을 통해 자신들의 초기 작품들을 발표했다. `개벽`이 폐간된 후 1934년 11월 차상찬이 속간호를 발간했으나 4호로 끝났고, 1946년 1월 1일 김기전이 복간을 시도했으나, 해방후의 어려운 시대적 여건으로 1949년 3월 25일 통권 9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1910년 미국연방의회,
백인노예금수법 가결
▶1907년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 3명, 헤이그 도착
헤이그 밀사사건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상실되고 통감부가 설치돼 국권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났다. 1906년 6월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 회담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평리원 검사 이준, 주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인을 밀사로 파견했다.
헤이그 밀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대한제국 대표단 일행 3명은 각 국 대표를 만나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호소문을 제출하는 등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회의에 참석도 못하고 낙심의 나날을 보내던 중 7월 14일 이준이 분사했다. 이역만리 차디찬 타국 땅에 동료를 묻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허탈한 마음으로 7월 19일 헤이그를 떠났다. 이들은 일본의 압력을 받은 본국정부가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은 교수형, 이위종은 종신징역에 처함으로써 귀국도 하지 못하고 외국을 떠돌게 됐다.
이 헤이그특사 사건은 오히려 일본이 한국침략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대신들은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고 이에 못이겨 고종은 7월 19일 순종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양위조칙을 발표했다. 이어 24일에는 정부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이 조인됐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각각 공포됐다. 그리고 31일에는 군대 해산령이 떨어짐으로써 대한제국은 본격적으로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1905년 낙동강철교 준공
▶1904년 허위 등, 배일통문(排日通文)
을 전국에 발송
▶ 1891년 북로전신선(한성·원산간) 개통
▶ 1876년 미 제7기병대, 인디언에게 전멸
1800년대 중반, 미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이미 정복자들에게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남은 땅이라곤 중북부의 대평원뿐이었다. 남북전쟁으로 경황이 없던 정복자들은 두 번의 ‘라라미 조약’을 통해 그 길을 지나는 백인 개척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았다. 대신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북전쟁도 끝나고 이 지역 내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복자들의 탐욕이 되살아났다. 미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이곳을 떠나 보호구역으로 옮기라고 통보했지만 인디언들은 시한 내에 이주할 수 없었다. 미 정부가 제7기병대를 급파하자 수우족의 최대 부족인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은 시팅불과 크레이지 호스를 중심으로 몬태나주(州) 리틀 빅 혼 강가에 모여 항전 채비를 했다.
1876년 6월 25일, 남북전쟁의 영웅 커스터 중령은 다른 부대와의 합류약속을 깨고, 먼저 인디언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코만치라는 기마만이 살아남았을 뿐 200명 이상의 기병대원 전원이 몰사했기 때문이다.
▶ 1852년 건축가 가우디 출생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1926.6.10 평생 독신으로 살다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다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건축의 성자, 자신이 지은 최후의 역작에 묻히다
인용한 글은 1927년 푸란스시코 푸욜이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를 추모하면서 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다. 약 일 년전인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교수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
비록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도판으로 보아도 들어가고 싶고, 거닐고 싶고, 심지어 만지고 싶다. 건축물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의 대표작인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구엘 별장’, ‘사그라다 파밀리아’ 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바그너처럼 작품으로 남아있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고,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지만,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 당시 세워진 연립주택으로 1910년 완성된 카사밀라(Casa Mila)의 1920년 모습과 현재 모습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아버지가 주물제조업자였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가우디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간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 병약한 소년으로 자랐으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17세이며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해 하는 말이다. 학창시절,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 들어간다. 대장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완성된 조각 같은 건축물
자연미와 조형미의 조화를 이룬 구엘 공원
그는 조물주의 손으로 작업했다.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면으로부터 시작된 가우디의 정신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꿈틀거리는 건축물들은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이다.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용의 몸체는 휘어진 철봉으로 표현하고 굵은 용수철을 휘감았다. 용의 다리들은 돋을무늬로 세공한 비늘이 덮고 있고, 왼쪽 발에 움직이는 연접 장치를 하여 문을 여닫도록 만들었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의 표현이 딱 맞아떨어진다. 선대의 피가 가우디라는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니, 그의 독창적인 건축물들도 문득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통에 의해서 탄생한 바로셀로나의 작품이기도 하다.
직물업계의 거장 구엘의 후원
피렌체의 메디치 대공이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처럼, 구엘이라는 부자가 가우디의 이상적인 후원자였다. 구엘은 직물업계의 거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한다. 그의 이름이 붙은 별장, 궁전, 공원이 가우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탁월한 작품이었다. 경제적인 후원을 구엘에게서 받았다면, 건축학적으로는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그리고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 사전>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가우디는 뒤크의 가르침을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으로 수정 보안한다. 뒤크의 책을 통해 습득한 고딕양식은 '테레사 학원'의 모든 층에서 잘 나타난다. 테레사 학원은 청빈한 수도사들의 건물답게 가우디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만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다.
평론가들은 가우디의 작품을 1890년대를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 가우디의 진가는 후반부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건축물들은 후반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가우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하나의 생명력으로 재탄생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건축사에서 독특하면서 역동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가우디 역시 건축 색감을 중요시했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안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우디의 ‘카사바트로’ 기와의 색감을 보면 단순히 화려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자연의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부자들의 전원주택으로 설계된 구엘 공원에서는 자연미와 조형미의 절묘한 조화를 색감을 통해 보여준다. 소나무, 떡갈나무, 종려나무, 백리향 등의 나무와 재스민,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 건축자재로 사용된 타라고나 지방의 마른 돌멩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각각의 고유한 색과 불규칙한 배열이 자연의 풍경에 녹아 들어 있다. 구엘 공원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미완의 대작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위한 삶
가우디는 평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를 건축할 때 예술가로서 날개를 달았다. 그 자신도 이 건축물에 감탄하면서 전통적인 고딕 양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가우디가 이 대단한 건물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1883년 가을이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 작업 만에만 몰두했다. 이 건축물은 서적상이자 발행인인 호세 마리아 보카베리야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성가족이 봉헌된 사원을 바르셀로나에 짓기로 결심하고 기금을 모아 당시 교구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데 파올라덴 빌랴르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빌랴르가 건축의 기술 고문인 마르토렐과의 불화로 사임을 하자 가우디가 일을 맡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955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건축물은 가우디 사후에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는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가우디를 상상한다. 그의 영혼이 깃든 건축물들을 통해 영원불멸의 신성을 잠시 엿본다.
▶ 1676년 스웨덴 장군 칼 구스타프 브랑겔 사망
https://youtu.be/Pm-EwsSRMG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