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고조선에 대한 개념은 안개에 가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환단고기 규원사화등 전근대 위조물이나 또는 막연하게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를
이용해서 입증해보려하기도 하고 동북아시아 민속학등을 연역적으로 사용하여
고조선을 입증해 보려 하기도 하며 중국문헌이나 갑골문 부호문자 등을
이용하여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민족기원이나 문화적 유래를 찾아보겠다는
시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뿌리라는 영화에서는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후손도
자기선조를 찾으려고 숭고하게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과학이 뒷받침되야 하고 유물발굴에 대한 올바른 연대측정은
물론 올바른 해석이 뒤따라야 입증될수 있습니다
이점을 부정하면 아무리 취지는 숭고하고 조상신이 보기에 정성이 갸륵하다고
칭송받을 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허황된 믿음이나 신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범인의 모든 과학과 증거를 확보하여 판결을 내리듯
역사적 사실은 이런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물론 쉽지않을것입니다. 단순유추로 신앙처럼 믿고 흐뭇해하기는 쉽지만
과학적 분석은 과정이 어렵고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며
속편한 만족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과학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소수의 믿음으로 전락할뿐 보편성을 획득할수 없으며 역사적 사실은 다른 나라의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모두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게 될뿐입니다
최근들어 중국의 탐원공정의 간교한 조작의 일환으로 발굴한 홍산문화권을
주목할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홍산문화권이 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문화연대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요령성 적봉일대 주변의 문화권은 bc 7000년의 소하서 문화에서 시작하여
bc 1500년 그리고 그이후의 하가점 하층문화까지 연속된 계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국의 대문구 문화 앙소문화 등 가장연대가 빠른
문화권으로 알려진 지역보다도 홍산문화가 훨씬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므로
- bc 4500년~ bc 3000) 모든 고조선 문화의 초점은 당연히 요령성 홍산문화군에서
찾아야 합니다 기존의 갑골문 중국신화 중국경내 문자부호를 통해서
밝히는 방식이 그보다 훨씬 연대가 올라가는 문화권이 발견된이상
시작점은 바로 홍산문화권에서 찾아야 함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왜냐면 그이후에서 찾는것은 연대가 뒤떨어진 자료만을 가지고 추정하는것인데
가장 최초의 선진문화권이 나타난 이상 그럴이유가 있을수 없습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적봉 우하량 유적에서 곰의 소소물이 자주 발굴되자
실존이 불분명한 황제헌원이 有熊氏 라는 사마천사기의 짧은 기록을 근거로
황제가 홍산문화권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지요 한편 우하량 유적에 웅녀상까지 세워
놓았더군요 웅녀란 오직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유일하게 나오는 존재인데도
삼국유사를 중국인이 참조하였다는 것은 그 속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일입니다 -도대체 중국어느 기원 신화에 웅녀가 등장합니까 -
한때는 중국 1987년 앙소문화유적인 하남성 복양시 에서 기원전4000년경 용의
발굴되자 흐뭇해 하면서 세계최초의 용의 작품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는데
자칭 천하제일룡이라고 하였는데 1994년 요령성 의무려산부근에서
이보다 년대가 1000년이나 올라가는 용이 발견되어 천하제일룡의 자리에서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요령성 부신의 석소룡은 기원전 5600년경
까지 연대가 올라갑니다 즉 요령성 문화권의 유물이 중국황하유역일대
보다 더욱 년대가 올라가고 고도로 발달된 분명임이 확연하게 입증되고
있는것입니다 게다가 이일대에서 흔하게 발굴되는 홍산문화권의 곰 소조상
빗살무늬 토기 -- 강원도 평창에서도 이와 똑같은 모습의 기원전 6000년경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스며 게다가 적석총유적과 석축성곽
그리고 성곽의 치가 발굴되기도 하였던 한마디로 후대의 고구려등에서
계승된 선사문화가 고스란히 황하문명권보다 앞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점이 드러나자 중국은 동북공정을 넘어 탐원공정을
요령성 문화권을 이용하여 추진하고 있는중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조선연구를 옳바로 해야한다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초점은 바로 요령성 요서의
일대의 문화적 계보 계승관계를 올바로 밝히는 것만이 풀수 있는것이 확실합니다
요령성 문화권일대보다 년대가 현저히 뒤처지는
대문구 문화권이나 앙소문화권에서 고조선 기원을 찾겟다는 바보는 없을줄압니다
중국문화는 모두 이들 이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소수발견되는 또는 중국신화에 종종 등장하는 태양신 봉조 용신앙등은 모두 가장 선진적인
요령성 문화권에서 소수가 건너간 것일뿐 발상지가 아니며 그같은 문화를 직접계승한 주체세력은
이들 이주민 집단이 아니라 고조선 고구려등이며 중국삼황오제는 요령성 문화권에서 중국으로 이주했을
- 삼황오제는 실존인물이 아니나 토템을 족휘로 사용한 부족으로 볼때- 가능성이 있을뿐이며
이주민 후손일수는 없는것은 자명합니다 이주민이 주체세력으로 직접적 계승자나 기원이 될수
는 없으며 이주민의 문화 풍습이 기원이 될수도 없는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즉 종종 주체세력이나 발상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고 있습니다
고조선 고구려는야 말로 요령성 문화권의 주체세력이
요령성 문화권을 직접계승하였으며 중국에 진출한 동이족은 고조선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 갈라져 나간 분파 세력일뿐이며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다 라는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앙소 대문구등 문화권의
유물 부호는 물론 모든 관습은 분파세력의 독자적인 것으로 주체세력의것은
아니며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도 아닌데 요령성문화의 계승자는
직접 요동 요서 산동 한반도를 지배한 고조선왕국에 계승되었기 때문이며
이점을 밝히는것만이 고조선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논 댓글은 이같은 방식으로 밝혀가 된다는것을 주장하기 위한것으로 상기내용이 모두 사실이자
옳다고 확정하는 내용은 아님
첫댓글 문명과 역사가 분리되지 않은, 개념의 혼돈이 있는 글입니다. 당연히 고조선 이전에도 사람은 살았을 터이고, 그 흔적들은 남아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사람의 기록이 일정한 규칙이나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들이 역사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논리대로라면 '호모 이랙투스'의 현장도 역사로 넣어야겠군요. 고조선보다 더 이른시기의 사람들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용의 개념도 한세대, 한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서 용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이른 시기의 용일수록 단순한 형태인 이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에는 '제사와 군대'가 나라를 유지하는 기본틀입니다. '조상숭배'는 자기를 인정받는 전제조건입니다. 따라서 선조를 기리는 각종 형태가 문화로 계승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즉 문화는 조상숭배와 직결되는 것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고대기록은 자신의 출자를 기록함에 있어서 고대의 토템을 적고 있는 것인데, 토템따로, 시조 이름따로 기록하여 상호연결시키지 못한 것이죠.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시조의 토템입니다. 유사한 비교를 한다면 자기가 속한 성씨처럼 광의의 개념이라 할 것입니다. 문화를 통해 선조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리랑'처럼 영문모르고 부르는 노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의 규모즉 왕궁터 묘제 신전터를 바탕으로 기원전3000년경 국가규모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토템과 조상숭배를 보다 완결된 형태로 만들고 군대 정치조직을 만든 대규모 정치집단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올시다 즉 그같은 문화를 종합한 국가집단이 바로 요령성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요령성 문화의 중국황화문화권 보다 한층 고도로 정비된 국가형태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위치를 황화문명유역에서 찾는것이 틀린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혹 금문 부호문자만연구하다 보니 요령성문화권에 황하문명권보다 앞서는 정치조직과 국가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모른게 아닌가 의심스럽스니다 그려
^^ 기원전 3,000년 전이 아니라, 3만년 전에도 있었는지도 모르죠.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누구였는지 설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흔적을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역사라면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터이고, 설명이 가능해야 할 것입니다. 은나라 역시 문헌에 나온다해도 갑골이 발견되고, 해독과정을 거쳐서 설명하기 전까지는 그저 신화.전설로 치부했었죠. kamando님은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던가요?
모든 원시문명의 완결점은 바로 국가형태라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즉 조상숭배이든토템이든 그걸 완결시켜 제도화하고 통치조직을 만들고 정비하는 집단이 바로 가장 선진지역으로 기타 그보다 못한 문화권은 모두 선진문화권으로 부터 흡수모방하게 된다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즉 국가조직이 최초로 탄생한곳이 요령성이니까 당연히 그이후의 문화는 모두 여기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말하는것입니다 황하문명은 모두 요령성 국가문화의 아류나 이주민이므로 황하문명권에서 본질을 찾아봐야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류가 있으면 거기에 걸맞는 질문 을 던져야지 지금 동문서답하자는 겁니까
그건 원칙론에 불과합니다. 역사로 현실화시키려면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합니다. 설명이 가능합니까? 현재로는 '송아지 둠벙 쳐자보는 격'이겠지요. ^^ 지금도 사막이나 남미 산속에는 고대인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역사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호문자로 말할것 같으면기원전 5000년경 용이 새겨진 도안이 적봉시 조구부 문화유적에서 발굴되었으며 소하연 문화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도부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요하 곳곳에서 갑골문의 전신이라 할만한 글자들이 종종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호문자에서 의미를 찾더라도 가장선진 문화권인 요령성 문화권에서 찾아야 한다는건 두말할 나위도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금문의 대가이신것같아 금문하나 해석을 좀 요청하니 좋은 답변부탁드릴까요
이 질문이 얼마나 허왕된 것인지 모르시는가 봅니다. 이미 역사 시기 이전에 자기의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단순한 문자들은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이걸 역사라고 하지 않지요. 최소한 나라나 기록자를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이나 맥락이 성립되어야 하는겝니다. 님의 주장은 해석이 불가하지만 역시 역사라고 인정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미 고양씨 이전의 시기로 보이는 청동화폐에 이름이 들어있는 것도 인정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자타가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또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된다느니 하는 거 너무 절대화하지 마세요. 어떤 방식으로 추정하는가에 따라 오차가 너무 심하게 나타나니까요. 이말은 불과 100-200년의 차이를 갖는 시기의 기록물인 경우 실제의 선후가 뒤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5000년경 용이 새겨진 도안이 발견되었다고 하시니 그 사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용이란 것이 시대에 따라서 점자 변화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니까요. 이것도 다수의 토템의 결합에 따른 결과라고 추론됩니다만...기원전 5000년경 용이 어떤 모습인지 기대가 되는군요.
홍산문화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현재 알려진 것으로 한국고대문화와 직접적 연관성을 언급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이런상황에서....하나의 붐이랄까 세인의 관심이 집중될때......중국측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지들끼리 결과만들어 내어 다른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미 홍산문화관련 신문연재도 있었고요.....저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충분한 연구자료를 얻어낼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공감합니다. 무슨 껀수가 생겼다하면 자기 이름내기 바쁜 얼치기 연구자가 많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자연히 연구결과는 부실한 것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죠.
공감합니다. 다만 이의가 없을 만한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후의 고고학적 출토물들을 집중 검토하여 보자는 제의를 합니다. 홍산과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세형동검 등은 황하와 오르도스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소위 문명권이 다릅니다. 특히 역사시대의 출토품인 명도전의 분포지는 홍산지역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릅니다.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충분하고 공감하는 연구결과 없이 BC 4000~7000의 문명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또 기원전 3세기~ 기원후 3세기 사이의 한국,중국 지리지 기록들을 집중 재검토하고, 또 강단과 재야가 서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결과가 없다면 역시 홍산은 거론할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