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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古朝鮮은 어떤 문화권을 계승하였나.
kamando 추천 0 조회 346 09.07.01 13:04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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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01 14:11

    첫댓글 문명과 역사가 분리되지 않은, 개념의 혼돈이 있는 글입니다. 당연히 고조선 이전에도 사람은 살았을 터이고, 그 흔적들은 남아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사람의 기록이 일정한 규칙이나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들이 역사로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논리대로라면 '호모 이랙투스'의 현장도 역사로 넣어야겠군요. 고조선보다 더 이른시기의 사람들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용의 개념도 한세대, 한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서 용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이른 시기의 용일수록 단순한 형태인 이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09.07.01 14:25

    고대에는 '제사와 군대'가 나라를 유지하는 기본틀입니다. '조상숭배'는 자기를 인정받는 전제조건입니다. 따라서 선조를 기리는 각종 형태가 문화로 계승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즉 문화는 조상숭배와 직결되는 것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고대기록은 자신의 출자를 기록함에 있어서 고대의 토템을 적고 있는 것인데, 토템따로, 시조 이름따로 기록하여 상호연결시키지 못한 것이죠.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시조의 토템입니다. 유사한 비교를 한다면 자기가 속한 성씨처럼 광의의 개념이라 할 것입니다. 문화를 통해 선조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리랑'처럼 영문모르고 부르는 노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작성자 09.07.01 15:03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의 규모즉 왕궁터 묘제 신전터를 바탕으로 기원전3000년경 국가규모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토템과 조상숭배를 보다 완결된 형태로 만들고 군대 정치조직을 만든 대규모 정치집단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올시다 즉 그같은 문화를 종합한 국가집단이 바로 요령성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요령성 문화의 중국황화문화권 보다 한층 고도로 정비된 국가형태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위치를 황화문명유역에서 찾는것이 틀린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혹 금문 부호문자만연구하다 보니 요령성문화권에 황하문명권보다 앞서는 정치조직과 국가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모른게 아닌가 의심스럽스니다 그려

  • 09.07.01 18:42

    ^^ 기원전 3,000년 전이 아니라, 3만년 전에도 있었는지도 모르죠.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누구였는지 설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흔적을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역사라면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터이고, 설명이 가능해야 할 것입니다. 은나라 역시 문헌에 나온다해도 갑골이 발견되고, 해독과정을 거쳐서 설명하기 전까지는 그저 신화.전설로 치부했었죠. kamando님은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던가요?

  • 작성자 09.07.01 14:49

    모든 원시문명의 완결점은 바로 국가형태라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즉 조상숭배이든토템이든 그걸 완결시켜 제도화하고 통치조직을 만들고 정비하는 집단이 바로 가장 선진지역으로 기타 그보다 못한 문화권은 모두 선진문화권으로 부터 흡수모방하게 된다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즉 국가조직이 최초로 탄생한곳이 요령성이니까 당연히 그이후의 문화는 모두 여기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말하는것입니다 황하문명은 모두 요령성 국가문화의 아류나 이주민이므로 황하문명권에서 본질을 찾아봐야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류가 있으면 거기에 걸맞는 질문 을 던져야지 지금 동문서답하자는 겁니까

  • 09.07.01 19:08

    그건 원칙론에 불과합니다. 역사로 현실화시키려면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합니다. 설명이 가능합니까? 현재로는 '송아지 둠벙 쳐자보는 격'이겠지요. ^^ 지금도 사막이나 남미 산속에는 고대인들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역사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 09.07.01 15:21

    게다가 부호문자로 말할것 같으면기원전 5000년경 용이 새겨진 도안이 적봉시 조구부 문화유적에서 발굴되었으며 소하연 문화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도부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요하 곳곳에서 갑골문의 전신이라 할만한 글자들이 종종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호문자에서 의미를 찾더라도 가장선진 문화권인 요령성 문화권에서 찾아야 한다는건 두말할 나위도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금문의 대가이신것같아 금문하나 해석을 좀 요청하니 좋은 답변부탁드릴까요

  • 09.07.01 18:50

    이 질문이 얼마나 허왕된 것인지 모르시는가 봅니다. 이미 역사 시기 이전에 자기의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단순한 문자들은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이걸 역사라고 하지 않지요. 최소한 나라나 기록자를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이나 맥락이 성립되어야 하는겝니다. 님의 주장은 해석이 불가하지만 역시 역사라고 인정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미 고양씨 이전의 시기로 보이는 청동화폐에 이름이 들어있는 것도 인정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자타가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 09.07.01 19:02

    또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된다느니 하는 거 너무 절대화하지 마세요. 어떤 방식으로 추정하는가에 따라 오차가 너무 심하게 나타나니까요. 이말은 불과 100-200년의 차이를 갖는 시기의 기록물인 경우 실제의 선후가 뒤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5000년경 용이 새겨진 도안이 발견되었다고 하시니 그 사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용이란 것이 시대에 따라서 점자 변화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니까요. 이것도 다수의 토템의 결합에 따른 결과라고 추론됩니다만...기원전 5000년경 용이 어떤 모습인지 기대가 되는군요.

  • 09.07.01 15:23

    홍산문화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현재 알려진 것으로 한국고대문화와 직접적 연관성을 언급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이런상황에서....하나의 붐이랄까 세인의 관심이 집중될때......중국측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지들끼리 결과만들어 내어 다른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미 홍산문화관련 신문연재도 있었고요.....저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충분한 연구자료를 얻어낼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09.07.01 19:21

    공감합니다. 무슨 껀수가 생겼다하면 자기 이름내기 바쁜 얼치기 연구자가 많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자연히 연구결과는 부실한 것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죠.

  • 09.07.02 14:40

    공감합니다. 다만 이의가 없을 만한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후의 고고학적 출토물들을 집중 검토하여 보자는 제의를 합니다. 홍산과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세형동검 등은 황하와 오르도스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소위 문명권이 다릅니다. 특히 역사시대의 출토품인 명도전의 분포지는 홍산지역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릅니다.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충분하고 공감하는 연구결과 없이 BC 4000~7000의 문명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또 기원전 3세기~ 기원후 3세기 사이의 한국,중국 지리지 기록들을 집중 재검토하고, 또 강단과 재야가 서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결과가 없다면 역시 홍산은 거론할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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